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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특명 "중국과 미국의 친교를 막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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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특명 "중국과 미국의 친교를 막아라!" [박홍서의 중미 관계 돋보기] 한 배를 탄 공동 운명체, 중국과 미국
9월 25일 개최된 미-중 정상 회담은 양국 간 협조 관계를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미-중 양국은 경제적 상호 의존의 심화, 지역 안정 그리고 기후 변화 문제 등에 긴밀히 협조하고 양국의 공통 이익을 증대해 가자는데 깊은 공감대를 표명했다. 이번 정상 회담은 남중국해와 사이버 해킹 문제 등을 둘러싼 최근의 갈등이 협조를 위한 기 싸움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미-중 갈등은 협조를 위한 기 싸움일 뿐

미-중 양국의 협조 관계는 합리적 선택의 산물이다. 충돌보다는 협력이 양국 모두에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말하는 '신형대국관계'나 미국이 말하는 '이익상관자관계' 모두 미-중 양국이 한배에 탄 운명이라는 현실을 포장한 개념에 불과하다.

나폴레옹 전쟁(1796~1815년) 이후 유럽 협조 체제나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년) 이후의 미소 얄타 체제 역시 강대국 간 협조 체제였지만, 21세기 미-중 관계는 이들 사례보다도 훨씬 긴밀하다. 최첨단 무기 체계의 발달과 경제적 상호 의존의 심화는 '무력 충돌=공멸'이라는 등식을 공리로 만들었다.

역사적으로도 미-중 양국은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가져왔다. 'United States of America'를 '아름다운 나라(美國)'로 음역한 19세기 중국인들의 모습이 이를 반증한다. 美國이란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명대 아메리카 대륙을 亞墨利加로 칭하다가 1844년 미-중 간 망하 조약(望廈 條約 : 1844년 아편 전쟁을 마무리 지은 남경 조약의 후속 조약)에서 미국의 요청에 따라 '亞美理駕洲大合衆國'으로 공식화함으로써 이후 美國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원래 중국도 일본처럼 미국을 米利堅으로 부르다가 미국이 다른 열강들과 다르게 중국에 우호적이었다는 이유에서 米자를 美자로 바꿨다는 얘기도 있다. 일본이 米國이라고 '쌀 미(米)' 자로 쓰는 이유는 미국을 쌀처럼 먹어치우겠다는 호전적 사고의 발로라는 장제스의 발언은 이를 뒷받침하는 듯하다.

역사적으로 미국을 짝사랑했던 중국

사실 미국에 대한 중국의 호감은 미국의 현실주의 정책에 대한 감상적 이해의 결과이기도 하다. 미국은 1899년 대중국 문호 개방 정책을 천명하면서 기타 열강들에게 중국을 식민화하지 말 것과 중국에 있어서의 기회 균등을 요구하였다. 문호 개방 정책은 중국의 이권을 이미 다른 강대국들이 선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후발 주자인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유용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청일 전쟁 이후 망국의 위험에 직면해 있던 중국인들에게 미국의 태도는 탐욕스러운 여타 제국주의의 그것과는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5.4 운동기 '민족 자결주의'를 천명하던 미국과 9.18 사변 이후 일본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모습 역시 신선하였을 것이다. 사실,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는 유럽제국의 식민지 기반 헤게모니를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적 접근이었고, 미국이 일본과 벌인 전쟁도 중국에서의 이권을 독점하려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현실주의적 행태였다. 그 본의가 어쨌든 '아름다운 나라' 미국에 대한 중국인들의 호감은 증폭되었을 것이다.

한국 전쟁, 미-중 관계 파국을 꾀하는 소련의 이간계(離間計)

미-중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간 한국 전쟁은 소련의 '간계'에 말려들어간 측면이 있다. 신생의 마오(毛) 정권과 미국의 관계 정상화는 세력 균형적 측면에서 소련의 이익을 심각히 위협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한국 전쟁을 이용해 미-중 관계를 파투 내려는 전략적 행태를 보인 것이다. '이간계'였다.

한국 전쟁이라는 커다란 장애에도 불구하고 미-중 양국은 50년대 말부터 대사급 접촉을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17도선 이북으로 지상군을 보내지 않고 중국 역시 한국 전쟁 때처럼 대규모 전투병을 보내지 않은 데에는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이 크다.

결국 미-중 관계는 1972년 상해 공동 성명, 그리고 1979년 수교로 이어지면서 완전히 복원되었다. 베트남전 패착에 따른 아시에서의 세력 공백을 중국을 통해 메우려는 미국의 의도와 중소 분쟁이 극대화되는 상황에서 미국에 의탁하려는 중국의 의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더욱이 마오쩌둥의 고립주의 발전 전략의 처절한 실패를 경험한 중국에게 미국 자본을 통한 경제 발전 전략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1989년 톈안먼(천안문) 사건도 찻잔 속 태풍에 불과했다. 톈안먼 사건 당시 부시 행정부의 대중국 제재가 실질적으로는 온건했으며, 중국 인권 문제를 제기하며 집권한 클린턴 행정부 역시 1994년 5월 중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 갱신 문제와 인권 문제의 연계를 포기했다. "중국과의 관계 증진은 미국의 보다 근원적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는 클린턴의 논리는 안정적인 미-중 관계를 희망하는 미국의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중국인의 원교근공(遠交近攻) 사고, 미-중 관계에서도!

2015년 미-중 관계는 근 200여 년 이어져온 역사적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태평양은 미-중 양국을 포용할 만큼 넓다"는 시진핑의 발언은 미-중 관계 발전을 희망하는 중국의 입장을 재치 있게 보여준다.

중국의 고서 <전국책>에는 먼 나라와 친교하고 주변국을 공략하라는 '원교근공' 전략이 나온다. 인접한 국가가 보다 더 위협이 된다는 지정학적 사고가 깔려있다. 결국 중국에게는 일본과 러시아가 미국보다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인들과의 대화에서도 필자는 종종 그런 속내를 읽어낼 수 있다.

21세기에도 여전한 패권국 미국과 무서운 속도로 종합 국력을 키워나가고 있는 중국의 관계는 국제 질서를 좌우할 핵심적 동인이다. 특히나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미-중 관계의 한복판에 놓여있다.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라는 '설국열차'를 견인하고 있다고 까지 말하면 과장일까. 우리가 미-중 관계에 주목해야할 이유이기도 하다.
"'차이나 인사이트'를 보는 독자들은 중국을 더 깊이 알게 될 것입니다."

중국! 누구나 한 마디씩은 말을 거들 수 있는 화두입니다. ​그만큼 지리적으로 가깝고, 교류의 역사가 장구합니다. ​1992년 양국 간 수교 이후 경제적-인적 교류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관련 기사와 담론 또한 '정보 과잉'을 방불할 만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종잡을 수 없고 혼란스럽습니다. 우호와 경계, 낙관과 비관이 교차합니다.

<프레시안>은 오랜 시간 중국을 연구해 온 중국 전문가들의 네트워크형 싱크탱크 '지식집단 CK'와 손을 잡고 더욱 깊이 있고 ​균형 잡힌 중국 컨텐츠 서비스에 나서고자 합니다. 기존 언론과 공론장에서는 좀체 접하기 힘든 맥락과 이면까지 전달하는 심층 서비스 '차이나 인사이트'가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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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서
한국외국어대에서 중국의 대한반도 군사개입에 관한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덕여대 연구교수 및 상하이 사회과학원 방문학자를 역임하고, 현재 강원대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국제관계 이론, 중국의 대외관계 및 한반도 문제이다. 연구 논문으로 <푸코가 중국적 세계를 바라볼 때: 중국적 세계질서의 통치성>, <북핵 위기시 중국의 대북 동맹 딜레마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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