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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비판하자 심야에 교수 연구실 난입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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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비판하자 심야에 교수 연구실 난입해서… [상지대 민주화 일기 ⑲] 무차별적인 고소고발 남발
사람들이 경찰서나 검찰청에서 조사받고 법원에서 재판받는 것이 마음편한 일은 아닐 것이다. 법정보다 분위기가 더 싸늘한 징계위원회에 출석하는 것은 더욱 불편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유형무형의 폭력과 폭언에 노출된다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행위가 사람을 괴롭히고 심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인권 문제도 된다. 경찰, 검찰, 법원과는 담쌓고 지내는 것이 좋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비리재단은 바로 이 점을 노린다. 불편을 극대화하여 비리재단에 반대하는 교수에게 재갈을 물리고 잠재적인 동조자를 차단할 목적으로 국가공권력을 적극 활용한다. 직업의 특성상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경찰서나 검찰청이나 법정에 가본 일도 없고 갈 일도 없는 점잖은 교수를 의도적으로 이곳으로 불러내는 것은 매우 비인간적이지만 일견 효과적인 방법이다. 고소‧고발을 당하면 마지막 결론과 무관하게 오랫동안 불려 다니며 조사받고 재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설명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가급적 피하고 싶은 일을 반복적으로 강요함으로써 비리재단에 대한 반대의사나 반대행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인권적인 괴롭힘은 반대의사를 가진 당사자에게 직접 적용된다. 그러나 직접 매 맞는 것 못지않게 매 맞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무서운 것처럼 괴롭힘의 효과는 구성원 전체에 폭넓게 미친다. 반기를 들면 철저하게 응징 당한다는 본보기로 보여준다.

내가 상지대 교수로 재직한 지난 20년을 되돌아보니 △재단사무국장으로 근무하던 시기(1997~2001), △상지대 정상화 직후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시기(2011~2012), △김문기 총장 선임 직후 김문기 복귀에 반대하여 활동하던 시기(2014~2015) 등 세 시기에 걸쳐 무차별적인 고소‧고발에 노출되었다. 내가 겪은 일이 표준적인 사례가 될 수는 없겠지만 비리재단이 자신에게 반대하는 교수를 어떻게 다루는 지를 판단하는 하나의 잣대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 지난 9월 15일 열린 상지대학교 학생 총회. ⓒ상지대학교비상대책위원회

상지학원 사무국장 시기의 고소고발

상지대 교수로 부임하여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상지학원에서 재단사무국장의 보직을 맡아 일했다. 감옥에서 출소한 김문기가 재단 복귀를 위해서 매우 맹렬하게 복귀 공작을 전개하던 시기여서 교수협의회가 여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 업무 역시 이 일에 맞추어졌다. 이 시기에 왜곡된 상지학원의 역사를 복원하고 설립자를 바로잡는 일, 김문기 구재단이 저질렀던 사학비리를 정리하는 일, 구재단 치하에서 구성원들이 겪었던 탄압 사례를 정리하는 일을 진행하면서 김문기의 학원 복귀가 정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

김문기가 설립자가 아니고, 무수히 많은 사학비리를 저질렀고, 구성원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김문기는 교육자로서 자격이 없으므로 복귀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활동을 하다 보니 김문기와 그 일파에 의해 명예훼손 등 대략 12건 정도 고소‧고발을 당했다. 특히 1998년과 1999년에 고소고발이 집중되었는데 원주경찰서와 춘천검찰청 원주지청을 제집 드나들듯 하니 경찰서나 검찰에서 상지대 때문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고 푸념을 했다. 김문기와 대질심문도 했다. 결국 모두 무죄 혹은 무혐의로 종결되어 법정에까지 가지는 않았다.

15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경찰서와 검찰청에서 조사받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수사기관을 통해서 사건 내역을 확인해보려고 했지만 오래된 일이어서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당시 상황을 정리하는 것은 포기했다. 참고로 다음에 나오는 조사기록은 법무부 ‘형사사법포탈’을 이용하고 재판기록은 대법원 ‘나의사건 검색’을 이용하여 정리한 것이다.

상지대 정상화로 구재단이 복귀한 직후의 고소고발

그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학교 일과 교수협의회 일을 했지만 이미 정이사 체제가 수립된 상황이어서 더는 김문기와 직접 맞부딪힐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상지대 정이사 체제가 무너지고 김문기 구재단이 복귀한 다음부터는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이제는 직접 몸으로 부딪혀야 하기 때문이다.

상지대 정상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2010년은 상지대 역사에서 커다란 격동의 시기였지만 사분위가 주된 관심사였기 때문인지 고소‧고발이 그다지 빈번하지는 않았다. 상지대 정상화 다음 해인 2011년은 개인적으로 연구년이었는데, 구재단이 복귀한 상황에서 교수협의회 공동대표로 선출되었고 상지대학교 비상대책위원장도 함께 맡아 보게 되어 자의반 타의반 연구년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구재단과 크게 부딪힐 일은 없었지만 구재단이 탐색기도 없이 본색을 드러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정상화로 이사회가 구성되어 가동되자마자 구재단이 상지학원 정관 개정을 무리하게 밀어붙였고 이에 구성원들이 반발하면서 예상보다 빨리 분규가 찾아왔다. 구재단이 구성원들의 의견을 무시하면서 힘으로 정관 개정을 강행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우리 역시 구재단 퇴진을 주장하며 강하게 맞섰고 결국 구재단 측의 고소고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1년 동안 구재단은 내게 경찰 고소고발 7건, 검찰 직고소 9건 등 16건에 달하는 고소‧고발을 남발했다. 그 중 상당수는 무죄 혹은 무혐의 처리되었지만 우리의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서 서너 차례 이사회에 참석한 일이 업무방해로, 구재단을 비판한 일이 명예훼손으로, 김문기가 장학금 지급을 명분으로 학교에 들어오는 것을 저지한 일이 업무방해와 교통방해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시기의 고소고발은 업무방해가 중심이었다. 구재단이 정관 개정을 강행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이사회에 가거나 이사장실에 가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검찰에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될 때 업무방해가 주된 혐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검사의 공소장을 받고 보니 혐의가 폭처법(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이었다. 무척 놀랐다. 나를 비롯해서 교수협의회 공동대표 3명, 총학생회장과 부총학생회장, 직원노조 지부장, 학생지원처 부장 등 7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7명의 혐의는 조금씩 달랐으며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던 내 혐의가 가장 무거웠다.

우리 7명은 2011년과 2012년 초반까지 열심히 원주경찰서를 드나들며 조사를 받았고 그 다음에는 검찰로 송치되어 검찰의 조사를 받았으며 2012년 여름 재판에 회부된 이후 2013년 11월까지 1년 5개월 동안 춘천지방법원 원주지원에서 길게 재판을 받았다. 약 3년간 경찰, 검찰, 법원에 개근하듯 출입한 셈이다. 마지막 결심하던 날 검사는 내게 징역 8개월을 구형했다. 매우 놀랐다. 학내 문제에서 비롯된 사건에 교수 지위를 박탈하는 징역을 구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다행히 재판부가 벌금 300만 원을 선고하여 교수직은 유지할 수 있었다. 재판부가 공정한 판결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1심 재판부의 공정한 재판 진행과 선처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우리의 활동을 학교 정상화를 위한 공익적인 활동으로 간주하여 무죄를 항변했기 때문이다. 다시 1년간 항소심 재판에 매달렸고 2015년 1월 14일,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선고유예의 판결을 받았다. 무죄를 주장했지만 나쁘지 않은 판결이었다. 특히 그 사이에 학생들은 졸업하여 사회인이 되었는데 사회에 진출한 초년생들의 앞길에 장애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2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의 유죄 취지를 유지하면서도 우리의 활동이 사학비리 전과자가 학교에 들어오는 상황에서 학교의 정상화를 위한 공익적 차원의 활동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형의 선고를 유예한다고 판결했다. 아직은 사법부가 살아 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직접 재판부에 의사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2심의 선고유예 판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다. 사학비리에 대항해서 학교를 지키려고 한 활동에 대해서 무죄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이것을 대법원에서 확인받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김문기가 큰아들 김성남과 함께 정치자금비리와 저축은행비리를 저지른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김문기가 김성남과 함께 여야 의원 16명에게 불법정치자금을 살포한 것에 대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검찰에 고발했다. 강원저축은행에서 김문기는 은행장, 김성남은 부행장이었는데 저축은행을 운영하면서 저지른 배임횡령에 대해서는 금융감독원이 고발 조치를 하지 않아 상지대 구성원과 원주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이 두 사건은 예상과 달리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는데, 정치자금비리는 김문기와 김성남의 행위가 아니라 김성남의 처, 즉 김문기의 며느리가 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저축은행비리는 벌금형으로 처리된 모양인데 김문기가 정식재판을 청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처리 결과를 모르고 있다가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증인 출석을 요구하여 증언하러 가면서 상황을 알게 되었다. 법정 증인으로 출석한 것은 구재단이 상지학원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인 2014년 봄이었는데, 김문기와 김성남이 나란히 앉아 있는 법정에 김문기를 반대하는 증인으로 출석하면서 이만한 악연도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상지대 캠퍼스에 붙은 현수막. ⓒ상지대학교비상대책위원회

김문기 총장 선임 직후의 고소‧고발

김문기가 상지대 총장에 선임된 이후에는 상황이 매우 극적으로 진행되었다. 지금까지는 김문기가 학교 바깥에서 복귀를 노리며 고소‧고발한 것이지만 이제는 학교에 복귀해서, 그것도 대학 운영책임자인 총장이 되어서 고소고발을 진두지휘했기 때문이다.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경찰 고소고발 17건, 검찰 직고소 9건 등 26건의 고소고발이 이어졌다. 고소고발 뿐만 아니라 징계에 회부되어 직위해제 된 후 파면되었으며 파면을 빌미로 업무방해금지 가처분 소송, 연구실 명도소송 등이 이어졌다. 파면 사건은 교원소청심사위원회로 이어졌고, 소청에서 파면이 취소되자 행정소송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도 고소고발은 주로 업무방해였다. 경찰조사와 검찰수사가 아직도 진행 중인 상황이어서 결과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경찰에서 검찰로 송치한 사건들은 대체로 무죄, 무혐의, 각하, 기소유예 등으로 종결 처리되었다. 실제로 김문기가 총장에 선임된 후 30명 가까운 교수, 학생, 직원들이 징계에 회부되어 파면, 해임, 무기정학 등 무거운 처벌을 받았지만 교원소청심사위원회, 행정재판, 민사재판, 노동위원회 등에서 모두 취소되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수십 건의 고소고발이 이어졌지만 이것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김문기가 자기를 반대하는 구성원을 괴롭히고 반대활동을 차단하기 위해 무리하게 고소고발을 남발한다는 것이 입증된 셈인데, 결국 사욕을 채우기 위해 경찰과 검찰 등 국가공권력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번에는 단순히 고소고발에 그치지 않았다. 김문기 총장 선임 직후에 구재단은 재학생을 매수하여 우리를 불법도청했다. 사건이 일파만파 확대되었고 여러 단체가 김문기 총장과 조재용 부총장, 실무자 조용길을 고발했다. 징계 파면 후에는 내 연구실을 강제적으로 폐쇄하려고 하다가 여의치 않게 되자 심야의 난입을 시도했다. 김문기 측근들이 심야에 연구실 문을 강제로 부수고 난입한 사건이 발생하여 남윤경과 보안대 소속의 안광수를 포함한 3명 등 4명이 현행범으로 입건되었다. 연구실 난입을 주도했던 남윤경은 그 과정에서 내게 폭행당했다고 상해죄로 나를 고소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인면수심은 이럴 때 사용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김문기가 총장에 선임되던 201년 8월 14일에 중징계로 징계위에 회부되었고, 설립자가 아닌 김문기가 정관을 변경하여 자기를 설립자로 변경하던 2014년 11월 4일에 직위해제 되었으며, 교육부 특별종합감사가 끝난 직후인 2014년 12월 15일에 파면되었다. 김문기는 내 직위해제에는 성공했지만 설립자가 되는 것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교육부가 설립자 변경이 부당하니 원상회복하라고 행정지도했기 때문이다.

김문기는 나를 파면시킨 직후 반대활동을 차단할 목적으로 춘천지방법원 원주지원에 업무방해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학교 안에서는 김문기와 관련해서 시위, 집회, 연설은 물론 언론 인터뷰까지도 금지하는 인신구속성 가처분이었다.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개인의 행동을 제약하는 반인권적인 가처분 신청이었는데 재판부는 내가 파면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2015년 3월 11일 교원소청심사위원회가 파면을 취소한 후 진행된 가처분 이의 신청에서 종전의 결정을 취소하고 가처분 신청을 기각하는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가 기회주의적인 판결을 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심야에 연구실에 난입하여 강제로 연구실을 폐쇄하려다 실패하고 오히려 침입자들이 입건되었을 뿐만 아니라 업무방해금지 가처분이 실패하자 연구실 명도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명도소송이 제기되었을 때는 교원소청 심사가 진행 중이었고 심리가 열렸을 때는 이미 파면이 취소된 상태였기 때문에 명도소송의 실익이 없는 상태였지만 학교는 그대로 강행했다. 다른 재판과 달리 변호사를 선임하지도 않고 담당 직원만 내보내 재판을 진행했고 선고일에는 직원마저도 나오지 않는 등 무성의하게 진행했다. 물론 명도소송은 당연히 기각되었다. 연구실 명도소송이 목적이 아니라 나를 재판에 묶어두고 귀찮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교원소청심사위원회에서 파면을 취소하자 학교는 즉각 서울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교원소청심사위원회에서는 파면을 취소하고 정직 1개월로 결정했는데 정직 1개월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2015년 10월 15일 선고에서 서울행정법원은 학교의 소를 기각했다.

내가 제기한 소송

지난 20년간 50여 회에 걸친 고소고발은 예외없이 김문기와 구재단이 나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구재단이 나를 징계에 회부하고 직위해제하고 파면하자 나 역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작년 11월에 직위해제 통보를 받은 직후 직위해제 효력정지 가처분 소송(2014카합172)을 제기했다. 중간시험이 끝나고 기말시험이 임박한 상황에서 직위해제가 되었기 때문에 수업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라도 가처분이 시급했다. 그러나 가처분 소송을 제기한 이유가 학생들의 수업 때문이고 종강이 임박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주지원의 민사재판부는 변론기일을 잡아주지 않았다. 결국 시간을 끌다가 12월 15일 파면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재판부에서 취하를 요구했다. 재판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쳤다.

2015년 3월 11일에 교원소청심사위원회에서 파면을 취소했지만 정직 1개월로 경감해서 결정한 것에 불복하여 행정소송을 진행하기로 했다. 학교 상황을 지켜보다가 학교가 행정소송을 제기한 직후인 6월 9일 서울행정법원에 소송(2015구합65377)을 제기했다. 결국 10월 15일 승소했다. 재판부는 교원소청심사위원회의 정직 1개월 결정을 취소한다고 판결했다. 파면도 안 되지만 정직 1개월도 안된다고 결정한 것이다. 서울행정법원의 결정은 의외로 크게 주목을 받았고 많은 언론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행정소송에 앞서 민사소송을 제기하면서 가처분 신청도 함께 추진했다. 2015년 4월 8일 춘천지방법원 원주지원에 교수지위보전 가처분(2015카합5013)을 신청했다. 그러나 지난번 직위해제 가처분 신청 때와 마찬가지로 즉시 기일이 잡히지 않았다. 석 달이 지나 겨우 기일이 잡혔지만 이 재판부에서 더 이상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되어 8월 17일에 가처분 신청을 취하했다. 직위해제, 업무방해금지에 이어 이번 세 번째 가처분 사건까지 모두 동일한 재판부였는데 국민의 공복은 고사하고 사법부 공직자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자세조차 발견하기 어려웠다.

원주지원에서 진행하던 가처분 소송을 취하하고 8월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파면무효 확인소송(2015가단5294225)을 제기하고 이어서 지위보전 가처분(2015카합80984)을 신청했다. 가처분을 신청하자 채 20일도 안되어 9월 11일에 변론 기일이 잡히고 이 날 결심을 했다. 재판부가 가처분 취지에 맞게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해준 것이다. 양식있는 재판부라면 이 정도는 해주어야 할 것이다. 민사 본안인 파면무효 확인소송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재배당 절차를 거쳐 단독재판부에서 합의부(2015가단555458)로 옮겨졌고 11월 17일에 변론기일이 잡혔다.

예전부터 전해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패가망신 한다는 이야기와 민주화 운동을 하면 몸도 망가지고 인생도 망가진다는 이야기다. 과거에 그런 경향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2000년 국회의원총선거 당시 총선시민연대를 결성하여 부패정치권을 상대로 낙천낙선운동을 하고 나니 기다리는 것은 조사와 재판과 벌금이었다. 물론 정치개혁이라는 커다란 성과가 있었기에 별 문제되지 않았다. 상지대 민주화를 위한 활동 20년에 경찰조사 36건, 검찰조사 18건, 재판 8건 등 60여 차례 고소고발 당하여 조사받고 재판에 불려 다니고 파면 당한 것은 지나친 것일까 적당한 것일까?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대학 민주화가 이루어진다면 이것 역시 별 것 아닌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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