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유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명도 아닌, 그러면서 고난의 길을 걷기도 하고, 역사에 의미도 없지 않은 인물들이 있다.
때로는 좌절의 인생이기도 하고, 때로는 회색 지대의 인물이기도 하다.
내가 직접 만났고 사귀었던, 그런 흔히 간과되기 쉬운 인물 10명쯤에 조명을 비추어 본다. 전기가 아니고 스케치다. 필자
"그가 청량리 밖 전농동의 이른바 후생주택에 살 때의 일이다. 5.16 군사정부가 마감되고 민정 이양으로 넘어가기 위한 총선이 있을 때 일인 것으로 기억된다.
어렵게 상가를 찾아가는데 길이 얼마나 좁은지 지프 한 대 지나갈 수 없는 골목 안 막바지에 20평도 안 되는 후생주택이 있었다.
문상객 앉을 자리도 없는 좁디좁은 집에서 조대감은 '어머님은 사실 만큼 사셨다’면서 슬픔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신문사에서 모두 조덕송 씨를 '조대감’이라고 불렀다-필자 주)
그때 한자리에 앉았던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곡(哭) 대신 남도 창을 불러 고인의 넋을 달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여러 사람이 이에 찬동해서 조대감에게 '남도 창을 한 자락 뽑으라’고 권유 아닌 강요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도 여러 사람이 청하다 보니 조대감 또한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하는 반응을 보였다.
오랫동안 망설이던 조대감은 마침내 창을 한 가닥 뽑기 시작했다. 나지막한 음성이었다. 애절하고 뼈에 스며드는 듯한 비장한 창이었다. 그의 두 볼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모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그 가락은 잊었지만 그때 그 장면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창을 끝낸 조대감은 눈물을 거두고 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사람들 참, 상주에게 창을 뽑게 하는 법도 있나?' 하며 모두에게 술잔을 돌리는 것이었다.
조덕송! 조대감을 생각할 때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창 가락과 눈물에 담긴 그의 뜻을 생각하게 된다."
언론계에서는 논리적인 글을 경파(硬派)라 하고, 감각적인 글을 연파(軟派)라 하는데,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지낸 장병칠 씨는 그 연파로 알려져 있다. 그 장병칠 씨가 조대감, 조덕송 씨를 회고하는 글이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꾸밈이 없는, 있는 대로의 이야기인데 울컥 가슴에 와 닿는 데가 있다. 얼마간 지나면 눈물겹기까지 하게 된다. 역시 장병철 씨의 연파 실력은 알아줄 만하다.
이청준의 소설을 영화화한 '서편제'가 떠오른다. 슬픔과 아픔을 창으로 승화한 그 절절한 가락. 아주 오래 전에 본 그 영화의 장면이 머릿속을 채운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조덕송 씨를 알기 전이라 그 모친상 조문에는 못 갔었다. 더구나 조덕송 씨의 장례에도 못 간 게 아닌가. 기록에 보니 2000년에 작고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나 나나 모두 사회활동을 접고 있을 때라 연락이 안 되었던 것 같다.
다만 함께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으로 있을 때 그가 병환으로 장기간 결근하자 그의 집으로 문병을 간 일은 있다. 앞의 인용문에 있는 대로 전농동에 있는 아주 작은 후생주택 말이다. 그때 가 보니 나도 별로 여유 없이 신문기자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의 형편이 매우 곤궁한 듯하여 딱하게 여겨졌다. 좁은 방에 초라한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조대감, 어찌 이렇게…"하고 탄식했다.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된 일이지만 조대감은 가족을 부양하는 것 말고 외톨이가 된 조카를 떠안아 대학공부까지 시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정말 상황이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집안의 어른으로는 참 훌륭한 일이다.
집 근처에 남성의원인가 하는 의원이 있어 통원치료를 하고 있었는데 원장인 박문희 박사는 국립정신병원장도 지낸 훌륭한 분으로, 내가 취재관계로 잘 알게 된 5대 민의원 의원 박권희 씨의 형이자 유명한 영문학자 여석기 교수가 매부가 된다. 세상 참 좁다고 느꼈다.
조대감은 그의 그늘 진 과거에 관하여 여간해서 일을 열지 않는다. 나도 어지간히 그를 좋아했고 오랫동안 어울려 다녔지만, 나에게도 한 번도 그의 어두웠던 과거사에 관해 말한 일이 없다. 따라서 나보다 훨씬 조대감과 오랫동안 함께 일한 장병칠 씨의 글을 인용하는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의 글이 정확할 것으로 생각한다. 장병칠 씨는 조선일보의 수습기자 1기로 그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
"1928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서 일본 교토 입명관대학(立命館大學) 법과를 중퇴한 그는 1947년 조선통신사에 입사했다. (연령 계산상 일본에서의 유학은 무리한데, 유학했다 해도 극히 짧았을 것이다.-필자 주)
이때부터 그의 험난하고 고달픈 언론계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인데 국제신문, 자유신문 등을 거쳐 조선일보에 입사할 때까지 그의 언론계 행보는 자리가 따뜻해지기 어려울 만큼 잦은 이동이었다. 조선일보에 문화부장으로 입사해서 기획부장, 사회부장, 기획위원, 논설위원을 거치는 동안에도 그의 조심스럽고 신중한 생활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때는 모두가 가난한 때라 막걸리 한 사발을 앞에 놓고 논쟁을 벌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아무도 그런 처지를 을씨년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덕송 대감도 가난하긴 마찬가지였지만 미혼인 젊은 기자들과는 달리 그의 처지는 매우 어려웠던 것 같다. 가솔이 딸린 데다 고향에 계신 노모의 뒷바라지도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고달픈 삶의 모습을 비치는 일이 없었다. 낙천적인 척하는 그의 속앓이를 대강 짐작하는 우리는 그의 사생활 얘기는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조덕송, 조대감은 아주 털털한 막걸리 스타일이지만 매사에 조심스럽고 신중한 인물이었다.
사실 막걸리를 즐겨했지만 술을 마셔도 큰 소리 한 번 제대로 치는 법이 없었다.
그가 해방 직후의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겪었던 고초 때문에 그런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야만 했을지는 몰라도, 어떤 때는 지나치다 할 수 있을 만큼 돌다리도 두들기다시피 살았다.
조덕송은 '내가 처음으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47년 7월 미 군정 당시 조선통신사(朝鮮流量社) 편집국 수습기자로 입사하면서부터였다'고 술회하는 글을 어딘가에 쓰면서 '다음 해인 1948년 제주도에서 4.3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제주도 현지 취재를 갔었고 이것이 단초가 되어 필화 사건을 빚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조덕송은 4.3 사건 관련자들에게 대한 총살형 집행현장 취재를 하고 그 목격기를 썼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사장, 편집국장, 사회부장, 조덕송에게 체포령이 내려지고 조선통신사는 폐쇄되는 필화사건으로 확대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그러나 체포령이 내려지고 조선통신사는 폐쇄됐지만 적극적으로 체포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조덕송의 고난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한 젊은 기자가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휩싸여 압박을 받을 때 어떤 몸가짐을 하게 되는가는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내면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제삼자로서는 헤아리기 매우 어렵고, 또 쉽게 헤아려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 후 6.25가 터지고 또 한바탕 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서 조덕송은 또 한 차례의 고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6.25 때 한강을 건너지 못한 그는 서울에 처져 있다가 7월 초순께 선배 김모의 주선으로 <해방일보>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조덕송은 평양에서 온 사람들과 섞여 일했지만 갈등은 심화되었다.
9.28 수복이 되고 국군이 서울에 입성하면서 그는 또 한 번 난처한 처지에 몰리게 됐다. 사회적인 중압은 있었지만 조덕송은 법적인 절차를 밟아 언론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사실 조덕송의 오랜 고난과 인종(忍從)의 세월의 한 매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윗덩이 같이 억누르는 압력에 이기려면 그것에 맞서는 것보다 유연하게 그러나 비굴하지 않게 적응해 나가는 자제력이 있어야 한다'고 조덕송은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술자리에서였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그가 그렇게 말할 때는 어쩐지 가슴이 짜릿한 통증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법적으로 끝난 일이지만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문기자란 현실 문제를 정면에서 다뤄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가지 장애물이 없을 수 없다.
조덕송의 처지는 그러한 모든 것을 깊이 헤아려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잘 아는 선배, 동료, 후배들은 조덕송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연파 기자로 이름이 있던 장병칠 씨 글의 인용이 길었다. 내가 몰랐던 시기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후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그와 밀접히 사귀게 되었다.
장병칠 씨 글 인용 말고 그의 과거에 관하여 알게 된 것은 그가 한때 고향인 순천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뿌리 깊은 나무'라는 아주 특색 있는 월간지를 발행하여 유명해진 한창기 씨가 그의 제자이다. 한창기 씨는 서울법대 출신으로 '인사이클로피디아 브리태니커'를 새로운 판매 방식으로 팔아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리고 순수한 한국적인 스타일의 잡지 '뿌리 깊은 나무', 그것이 신군부에 의해 폐간되자 '샘이 깊은 물'을 발행하고 그 밖에 한국문화를 탐구하는 여러 간행물을 냈다. 아주 특출한 문화 출판 사업가인데 불행히 요절했다.
낙안읍성에 갔을 때 보니 그곳에 한창기 박물관이 사설(私設)로 있었다. 고향이 벌교라 이웃에 추모 박물관을 설치한 것이다.
그 한창기 씨가 조대감을 은사라고 모셔서 한 번은 그가 선사한 브리태니커의 200여 년 전 원본 2권의 복제판을 내가 전해 받기도 했다. 거기에 보니 그때는 한국을 'Corea'라고 표기하고 반도 또는 섬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민관식 씨가 문교부 장관일 때 조대감과 함께 그 학교를 방문하여 기념식수까지 시켰다는데 아차, 그 학교명을 잊었다.
나하고 함께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도 우울한 세월을 보내던 조대감은 일본 오사카에 엑스포가 열렸을 때 일본을 여행하고 와서는 아연 사람이 달라졌다. 그렇게 명랑해질 수가 없다. 모든 일이 즐겁기만 하다. 처음으로 여권을 받고 외국여행을 한 것이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킬 줄 몰랐다. 사상관계로 여권이 안 나오던 사람에게 여권이 나와 외국여행을 했으니 새 세상을 맞은 듯했을 것이다. 논설위원실에서는 그것을 '포스트 엑스포(Post-Expo) 현상'이라고 명명하였다. '엑스포 이후 현상'이란 이야기다.
더 명랑하고 쾌활하며, 더욱 다변이 되고, 더욱 용기 있게 되었다. 조대감은 사내에서도, 사회 활동에서도 신바람이 났다. 그렇게 되니 또한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잘 되어 나간다. 서울시의 교육위원이 되어 활발한 참여 활동을 하였다. 조대감의 논설위원으로서의 담당 분야가 사회 일반이니까 그 가운데 교육이 중요한 부분이다. 교육계 인사들과의 교류도 빈번해졌다.
거기에다가 남북 적십자회담이 있게 되자 조대감은 남측 적십자 전문위원으로 위촉되고 평양에도 왕래하게 된다. 그리고 그 관계 TV 좌담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나는 조대감의 체구가 그레이하운드 같다고 말한 바 있는데 야구 선수처럼 훤칠한 키다. 목소리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묵직하니 남성적인 울림이 있는 그런 훌륭한 목소리다. 더구나 오랜 언론생활에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대단히 유식하고 또한 달변이다. 그러니 단박 TV 좌담의 스타가 될 수밖에 없다.
남북 적십자회담 관계로는 최고의 인기스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꽃이 되었다. 무궁화 꽃이 되었다. 조대감 일생일대의 최고 절정이다.
여기서 당시의 비화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 한 가지를 기록해 두자. 그렇게 남북 적십자회담 관계로 인기스타가 되자 아마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러 술자리를 함께한 모양이다.
박정희-조덕송의 만남이니 오죽 화제가 풍부하고 죽이 맞았을까. 나는 둘 모두의 술 마시는 행태와 대화 분위기를 알기에 그 광경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포인트는 술자리 말미에 서울 시내의 대폿집 이야기가 나와 조대감이 돈암동의 밀주 집으로 유명한 '석굴암'을 이야기한 모양이다. 왜정 때 산허리에 방공호를 큼직하게 파놓은 곳을 밀주 집으로 전환한 것인데 그 집의 술맛은 대포꾼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 있다. 나도 몇 번인가 가보았는데 널찍한 방공호안에 술맛도 아주 시원하다.
조대감은 대폿집 파다. 신문사 간부이다 보니 가끔 일류 요정에서 대접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는 요정을 나와서는 꼭 대폿집에 들려 막걸리나 소주를 마시고는 "아이고, 이제 술 마시는 기분이 나네" 한다. 서울서 최고급이라는 '청운각'에서 나와서도 대폿집에 간 것을 내가 알고 있다.
그런 대폿집 파가 조대감인데 박 대통령도 비슷한 데가 있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 하면 한 자리에서 끝나지 않고 여러 자리로 옮겨가며 마신다. 그렇게 마시는 것을 일본말로 '하시고 노미'라고 하는데 사닥다리 올라가듯 여러 곳에서 마신다는 뜻이다.
박 대통령은 예를 들어 보은 속리산의 관광호텔에서 그곳 출신 국회의원들과 회식할 때에도 달리 갈 데가 마땅치 않으니 마음에 맞는 의원들과 함께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며 마셨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죽이 맞는 박 대통령과 조대감, 대폿집의 명소 '석굴암'으로 2차를 갔다는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가 떠돌았는데 내가 조대감에 확인하려 들자 그는 "뭘…" "뭘…"하며 끝내 확인하기를 피했다. 미확인으로 남겨두고 싶다.
조대감과 어지간히 술집 순례를 한 셈이다. 당시 논설위원들은 외부 원고료, 라디오 TV 출연료 등등 부수입이 꽤나 있어 월급을 건드리지 않고 대포를 마실 수 있었다. 조대감의 술에 얽힌 일화가 많은데 그가 숨기고 싶은 이야기 두 가지만 굳이 소개하려 한다. 그런 이야기들이 그의 인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이다.
한 대학의 미모라 할 수 있는 여교수가 조대감에 공을 들였다. 자주 만나 식사와 술을 하였으며, 때로는 유원지에 놀러 가기도 하였다. 그 당시 광나루에서의 뱃놀이가 인기였는데, 뱃놀이를 하며 장어구이에 술을 마시기도 하였단다.
나를 끌고 대폿집에 가서는 그 여교수와의 데이트를 계속하여 자세하게 보고한다. 그 데이트를 나에게 보고하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는 모양이다. 연애에 열중하면 그렇게 남에게 보고하고 싶어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3~4개월이 지났을까. 조대감, 하루는 맥줏집으로 나를 끌고 가는데 영 시무룩하다. 그리고 그 사연을 털어놓는다. 그 여교수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였는데, 실은 자기를 다리로 하여 주필이나 사주에 접근하여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이 되고자 한 것이라나….
그 여교수는 조대감을 그런 중간 매개의 적격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그때도 없었지만 지금까지 조선일보에는 여성 논설위원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조대감은 마치 실연한 '베르테르'처럼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있던 주간 인삼 찻집, 야간 양주대폿집과 관련된 것이다. 조대감은 '신발견'이라고 나를 데리고 관철동에 갔다. 중년의 여주인은 수준 있는 단정한 용모였다. 조대감이 의견을 묻기에 나는 "일로매진하라"고 격려했다.
그런데 신문기자로 '백전노장'인 조대감이 '천려의 일실'을 하였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끌고 부지런히 관철동에 가던 끝에 아차차! 소설가 이병주 씨를 끌고 간 것이다.
이병주 씨는 언론계에서 '이나시스'로 통한다.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하여 화제가 되었던 오나시스에서 이름을 빌려 '이병주+오나시스=이나시스'가 된 것이다. 알아주는 돈후안이란 이야기다. 아마 언론인 임재경 씨의 작명일 것이다.
며칠 후 조대감, 대폿집에 가자고 하더니 "이병주, 그럴 수가 있어"하고 서운해 한다. 사연인즉, 조대감이 이병주 씨를 관철동에 끌고 간 다음날 이나시스는 혼자서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그 인삼 찻집을 찾아 양주를 병째로 시켜놓고 마신 모양이다. 아마, 그의 습관대로 코냑이었을 것이다.
콧수염을 기른 그럴듯한 용모의 소설가 이병주, 붉은 장미 한 송이, 코냑, 그리고 그의 뛰어난 화술. 끝이다. 천하의 조대감도 그 유명한 이나시스에게 완패한 것이다.
나는 조대감한테서 영.호남에 관한 말하자면 사회학적 분석을 듣고 오늘날까지도 그 분석을 수긍하고 활용하고 있다. 그는 이미 설명한 대로 전남 순천 출신이기에 호남론을 거리낌 없이 전개할 수가 있다. 타도 출신으로서는 좀 조심스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의 초보적이랄까 나이브하다고 할까 한 분석은 이렇다. 호남엔 대지주가 많았다. 그 이야기는 소작인들이 엄청 많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반면에 영남에는 대지주가 많지 않았다. 자영농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소작인들은 지주에 대해 저항의식을 가졌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호남의 야당 기질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자영농들은 그렇지 않고 비교적 독립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을 가진다.
요지는 그런 이야기다. 토지 소유제에 관한 통계적인 연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더라도 호남에는 지주제가 발달했고 영남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으로도 알고 있는 일이다.
언론계 사람에서 전남의 지갑종 씨네는 5만 석을 한 것으로 알려졌고, 전북의 정인양 씨네는 2만 석을 했다 한다. 물론 토지개혁 전 이야기다. 반면에 영남에서 이름난 경주의 최 부잣집은 1만 석을 대대로 유지한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물론 거기에다가 결과적으로 영남 편중이 된 경제개발도 합쳐진다.
신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얼마 후에 사회 각계의 지도층 인사들이 정신문화연구원에서 닷새간쯤 합숙 '연찬'을 할 때의 일이다. 일종의 합숙 강습인데 연구원에서 '연찬'이라는 그럴듯한 새 용어를 생각해낸 듯하다.
조대감은 언론계 케이스, 나는 국회 케이스로 포함되었는데 그때 각 군의 참모차장들도 왔다. 육군의 정호용 참모차장은 신군부 쿠데타의 실세로 주목을 받았었다.
'연찬'이 끝나는 마지막 밤에 으레 있기 마련인 송별 파티가 열렸다. 전원이 함께한 게 아니고 반별로 열렸는데 십여 명씩이었던 것 같다.
술을 곁들인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나는 넌지시 조대감에게 그가 그렇게 잘 부르는, 그리고 일반은 그때까지만 해도 잘 모르던 '부용산'을 불러달라고 부탁을 했다. 굵직한 목소리로 그가 부르면 장내를 압도할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부용산' 노래를 1960년대 말인가 조대감한테서 배웠다. 일반은 거의 모르던 때이다. '부용산'의 노랫말과 곡은 목포의 학교 선생님들이 만들었고 그 노래는 주로 전남의 해안가 지대에 유포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다 보니 여순반란 사건 때의 빨치산들이 산에서 부르기도 하고, 민주화운동 때 투옥된 학생들이 형무소에서 부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노랫말이나 곡이 딱 그런 분위기에 맞는다. 우울한 애상(哀傷)이 있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1980년대인가 한국일보의 김성우 주필이 '부용산'을 주제로 칼럼을 두 번이나 써서 세상에 '부용산'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부용산은 벌교 근처에 있단다. 그래서 벌교 출신의 호남대 총장이던 이대순 씨가 친구인 김성우 씨에게 자세한 정보를 주어 칼럼 참고로 삼게 했다는 이야기다. 목포 출신의 연극인 김성옥 씨가 목포에서 '부용산'을 알리는 행사도 하고.
'부용산'이 다시 유명해지자 호주에 이민 가 있던 원작사자가 그 2절의 노랫말을 지어 보내왔다. (작곡을 한 선생은 월북했다는 이야기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없고
돌아오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러나 2절은 1절에 비해 떨어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1절만 좋아할 뿐, 2절은 거의 부르지를 않게 되고 말았다. 대중이 선택을 한 것이다.
6.3 학생 데모의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도현 씨가 '부용산' 부르기 모임을 주최하여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일이 있다. 장소는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을 이끌었던 김용태 씨가 운영하는 한식 대중음식점 '낭만'에서다. 십여 명이 각각 독자적인 부용산 부르기에 나섰는데 모두가 독특하다. 말하자면 정본(定本)이 확립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때 누군가가 김지하 시인 식의 부용산 부르기라고 노래를 부른 것이 시선을 끌었던 것 같다. 나는 조대감류의 부용산을 불렀다. 평이 좋았다. 얼마 지나 다산 정약용 연구가로 이름이 난 박석무 씨가 '부용산' 부르기 모임을 '낭만'에서 다시 주최했다. 그만큼 '부용산'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부용산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그만큼 사연이 있고, 뜻이 있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조대감은 입을 떼지 않는다. 그 작별의 파티가 끝날 때까지 그는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소견머리가 없었다. 그때는 공개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광주 민주화운동'이라고 공식 지칭되는 '광주 학살'의 책임이 있는 신군부의 주체가 있는 자리가 아닌가. 그 앞에서 무엇이 즐겁다고 노래를 부르다니…. 더구나 조대감은 전남 순천 출신이다.
그때 나는 광주의 참사를 깜빡했다. 듣기는 들었는데 어렴풋이 듣고 그 생생한 실상을 느끼지 못한 것이 탈이었다.
조대감의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침묵 앞에 나는 사려 깊지 못한 언동에 깊은 자책을 느꼈다. 역시 인생의 깊이가 다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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