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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기수론'이 젖비린내? 박정희도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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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40대 기수론'이 젖비린내? 박정희도 두려워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31> 유신 쿠데타, 스물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프레시안 : 유신 쿠데타의 주요 계기 중 하나로 많은 사람이 1971년 대선을 거론한다. 1971년 대선이 그처럼 주목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1970∼1980년대를 살았던 언론인이라든가 정치학자를 비롯한 지식인들 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유신 쿠데타가 일어난 직접적인 이유는 1971년 대선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가 얼마나 몰렸고, 어떻게 당선됐는지 그 과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박정희가 1969년 3선 개헌 직후부터 장기 집권을 위한 차비를 하고 그러면서 총통제를 구상하고 모모 인사들을 대만이나 스페인에 파견해 그걸 연구하게 했지만 1971년 대선 맛을 보고서 '이제는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건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1971년 대선이, 그해 총선도 부분적으로는 박정희한테 상당한 영향을 끼쳤지만, 박정희가 유신 체제로 가는 데 중요한 길목이었다.

1971년 대선은 1956년 정부통령 선거, 2002년 대통령 선거와 함께 참 대단한 선거, 열띤 선거였다고 볼 수 있다. 2002년 대선에서 야당이 국민 경선이라는 초유의 후보 결정 방식을 선보이며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에서 바람이 시작됐듯이, 1971년 대선은 40대 기수론이라는 걸 야당의 40대들이 들고나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에서 시작됐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40대 후보론과 김대중의 역전승, 야당에 새바람을 불어넣다

프레시안 : 40대 기수론이 등장할 무렵 야당은 어떤 상태였나.

서중석 : 3선 개헌 때 야당은 그야말로 참 힘든 상황이었다. 3선 개헌이 있기 몇 달 전인 1969년 5월에 열린 신민당 전당 대회에서 유진오가 다시 총재가 됐다. 그렇지만 조금 있으면 유진오는 와병 상태에 들어간다. 유진오가 병을 앓지 않았다 하더라도 야당은 계속 혼미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유진오의 이 병도 무엇 때문에 났겠나. 어쨌건 이런 상태의 야당에 기대할 게 뭐가 있었겠나. 더더군다나 실권을 쥐고 있던 건 수석 부총재인 유진산이었다. 유진산 체제의 야당에 뭘 기대할 수 있었겠나. 1965년부터 1967년 대선에 이르기까지 야당은 국민한테 거듭 실망을 줄 수밖에 없는 상태였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이때도 야당은 국민에게 실망을 주는 혼미 상태에 계속 빠져 있었다.

그런데 1969년 11월 8일, 42세이던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들고나왔다. 27세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 사람이 이제는 40대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자고 한 것이다. 40대 기수론은 3선 개헌으로 좌절감에 빠져 있던 국민한테 아주 참신한 인상을 줬고 좌절, 허탈 상태에 빠진 신민당에 커다란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정권 교체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패배 의식이 가득했던 야당에 '우리도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신선한 바람을 김영삼이 불러일으킨 것이다. 40대 기수론으로 당에 청신한 기풍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분위기를 돋운 것이다.

40대 기수론이 나오자 바로 이어서 김대중이 '나도 40대 기수론의 한몫을 담당하겠다'고 하면서 나섰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한국 정치사에서 장기간 호적수라고 할까, 영원한 라이벌이었다. 성격을 포함한 여러 면에서 두 사람은 여러 차례 격돌했다. 1960년대에는 김영삼이 일방적인 승리를 많이 했다. 예컨대 통합 야당에서 원내총무를 뽑을 때 대개 김영삼이 됐고 김대중은 한 번도 되지 못했다. 어쨌건 김대중이 가세하면서 분위기가 더 떴다. '김대중과 김영삼, 이 두 사람에겐 뭔가 있다', 이런 생각을 많은 사람이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이철승까지 가세했다. 5.16쿠데타 후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있다가 1968년 8.15 이후 그 제약이 풀린 이철승이 '나도 40대다'라고 하면서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했다.

그런 속에서 1970년 1월 26일 신민당 임시 전당 대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유진산이 정식으로 당수로 선출됐다. 그러자 이 대회에서 고문이 된 윤보선이 바로 탈당을 해버렸다. 그런데 유진산은 사쿠라 이미지가 너무나 강했다. 유진산이 당수가 됐을 때도 '중앙정보부 간부가 심야에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유진산은 40대 기수론에 대해 "구상유취(口尙乳臭)", 즉 입에서 젖비린내 나는 자들이고 "정치적 미성년자"라고 질타했다. 그러나 40대 기수론을 들고나온 사람들의 '만년 들러리 야당을 추구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 훨씬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고 유진산은 인기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런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김형욱을 대신해 중앙정보부장이 된 김계원한테 일을 맡겼다. 40대 기수론을 꺾고 어떻게 해서든지 유진산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올려놓는 것이 중앙정보부의 중대한 임무가 됐다. 유진산이 당권을 장악하고 대통령 후보로 부각되도록 대통령과 중앙정보부는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프레시안 : 어떤 식으로 지원했나.

서중석 : 물적 지원은 주로 김계원 중앙정보부장이나 김성곤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더해,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가 열리기 한 달 전이던 1970년 8월 유진산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해 중앙정보부는 유진산이 해외 순방을 하도록 했다. 뉴스도 타게 하고 그랬다. 유진산이 응웬 반 티에우 월남 대통령의 환영을 크게 받도록 그쪽에 미리 작업을 하는 식이었다. 그에 더해 유진산은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일본의 사토 에이사쿠 수상으로부터도 극진한 예우를 받으면서 사진도 찍고, 도쿄에서 기자 회견도 했다. 이런 식으로 유진산 이미지 띄우기 작전을 벌였다. 물론 이 나라들이 다 잘 호응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진산은 도쿄에서 주변 4강의 안전 보장론 같은 걸 제의하면서 대통령 후보 분위기를 풍겼다. 귀국 후에는 '후보 경쟁 의사가 있다'는 걸 명백히 밝혔다. (이는 해외 순방 전 유진산 본인이 공언한 사항을 뒤집은 것이었다. 유진산은 이해 3월 10일 기자 회견에서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고 그 후에도 불출마 의사를 여러 차례 표명했다. 그러나 해외 순방 후 유진산은 "후보에 나서지 않겠다고 공언했다고 해서 후보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정치는 유동적"이라는 괴이한 논리를 펴며 태도를 바꿨다. <편집자>) 그뿐만 아니라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가 열리기 꼭 한 달 전인 8월 29일에는 박정희-유진산 여야 영수 회담이 열렸다. 유진산을 키우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영수 회담만한 빅뉴스는 없다고 생각해 그렇게 한 것이었다.

이렇게 박정희 대통령 쪽에서 공을 참 많이 들이고 야당을 많이 구워삶았다. 김계원 중앙정보부장이 밤중에 직접 유진산 집에 서너 차례 찾아가서 상의했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로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러나 40대 기수론의 바람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유진산이 볼 때도 '하차하는 길밖에 없다'고 하는 상황이 됐고, 그런 속에서 9월 29일 드디어 후보 지명전이 열리게 된다.

프레시안 : 이날 후보 지명전에서는 세간의 예상을 뒤엎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서중석 : 1970년 9월 29일 신민당은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를 열었는데, 이건 한국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59년 민주당에서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를 표결로 정하는 행사를 연 적이 있지만, 1970년 대회와는 이름도 다르고 1959년 그때는 지독하게 욕을 얻어먹고 빈축을 사는 이전투구를 벌였다.

이날 대회 직전 유진산 당수는 김영삼을 추천했다. 김영삼을 지지한다고 한 것이다. 1차 투표에서는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로 어느 누구도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2차 투표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로 김대중이 역전승을 했다. 그렇게 된 건 김대중 쪽이 열심히 뛰어다녔기 때문이라고 이희호 여사가 근래 <한겨레>에 이야기했던데, 제일 큰 요인은 이철승 표가 대부분 김대중 쪽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때 이철승 표가 꽤 있었는데, 이 사람은 전주에서 자랐다. 그래서 김대중이 그쪽 표를 끌어들이기가 훨씬 쉬웠고, 이철승한테도 '우리 잘해보자'며 손을 내밀었다. 그게 효과를 봐서 이철승 표가 대부분 김대중 쪽으로 간 것이다. 거기다가 유진산계 표까지도 부분적으로 넘어온 것 아니냐, 그래서 이겼다고 보고 있다.

이런 대역전극은 1979년 5월 30일에도 일어난다. 그때는 이철승이 야당 대표였는데, 총재제로 바뀌면서 총재를 뽑는 날이었다. 1차 투표에서는 이철승이 이겼지만 결국 2차 투표에서 김영삼이 이기택 표 등을 흡수해서 이겼다. 1970년대 야당에는 2차 투표에서 결과가 뒤집히는 경향이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사례들이다.

하여튼 김대중이 역전승을 거두면서 유진산 당수의 권위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런 속에서 김대중은 야당 후보로서 면모를 일신해 보여주게 된다. 정치적으로 김대중은 1950년대에는 참 불우했다. 부정 선거 때문에 당선되지 못했겠지만, 강원도에서 출마했는데 당선이 안 됐다. 1960년 4월혁명 후 치러진 7.29총선에서도 떨어졌다. 그러다가 1961년 보궐 선거를 치를 때 강원도 인제에서 당선됐는데, 국회의원 선서를 하러 서울로 가는 도중에 5.16쿠데타를 만나 국회의원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에 앞서 김대중은 이미 장면 정부 때 민주당 대변인을 했는데, 5.16쿠데타 후 민정 이양 과정에서도 민주당 대변인이라든가 통합 야당 대변인 같은 걸 했다. 경제통으로 아주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중 경제라는 용어를 쓰고 그랬다.

▲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70년 9월 29일 자 1면. ⓒ<동아일보>


한국 사회에 신선한 충격 안긴 김대중의 정책들

프레시안 : 대통령 후보가 된 후 김대중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1970년 10월 16일 김대중은 야당 대통령 후보로서 처음으로 기자 회견을 했다. 여기서 3선 조항을 폐지하고 관권 경제의 만능상과 빈부의 양극화, 도시와 농촌의 이중 구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균형 등을 고쳐서 대중 시대를 열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남북 간에는 서신 교환, 기자 교류, 체육 경기 등 비정치적 접촉을 고려해야 하고 4대국(미국, 소련, 중국, 일본)이 한반도 전쟁 억제를 공동으로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또 향토 예비군 폐지를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를 내가 왜 하느냐 하면 김대중 후보의 정책은 10년 동안 별다른 변화가 없던 한국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킨 면, 그리고 정책 대결의 대선을 유도했다는 점에서 1963년, 1967년 대선과는 분명히 달랐기 때문이다.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 추진위원회가 보여줬던 정책 대결, 그리고 2002년 노무현 후보가 공약을 통해 보여준 참신성을 김대중이 1971년 선거를 앞두고 보여줬다고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4대국의 전쟁 억제 공동 보장이나 향토 예비군 폐지 같은 걸 너무나 빨리 들고나온 것 아니냐. 이건 선거 막판에 가서 제시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런 얘기를 결과적으로 듣게 된다. 왜냐하면 정부가 방송 등 중요한 홍보, 선전 수단을 갖고 있지 않았나. 월등 유리한 고지에 있었기 때문에 김대중 후보의 그런 정책들에 대해 집중포화를 퍼부을 수 있었다. 색깔론으로 중상모략을 할 수 있었다. '향토 예비군 폐지는 아주 잘못된 주장이다', '소련과 중국은 우리 원수 아니냐', 이런 식으로 수많은 매체 또는 홍보 기구를 통해 작업을 할 때 김대중 후보가 결코 유리하지만은 않을 수 있는 면이 있었다. 실제로 정부도 그랬고 공화당도 바로 그런 활동을 집중적으로 펼쳤다.

김대중 후보는 10월 25일 부산에서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자 협의회를 구성하고 유고슬라비아와 영사 관계, 그리고 동유럽의 다른 몇 나라와 통상 관계를 점진적으로 신중히 추진하겠다는, 상당히 획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정책을 밝혔다. 그런 속에서 1971년 선거의 해를 맞이하게 된다.

프레시안 : 이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총통제 의혹도 제기하지 않나.

서중석 : 김대중 후보는 1971년 1월 23일 연두 기자 회견에서 "올해 선거가 마지막 선거가 될지도 모른다는 항간의 우려가 있다", "이번에 정권 교체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현 정권은 다음 임기 동안에 앞으로는 선거조차 없는 영구 집권의 총통적 체제를 저지르고야 말 것"이라며 그에 관한 정보와 자료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4대국 전쟁 억제 보장론을 다시 이야기하고 향토 예비군 폐지를 말하고 종업원 지주제를 들고나온다. 종업원 지주제로 대중 경제를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유세를 신설하고 전태일 정신을 구현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런데 선거가 시작되기 전에 이상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1월 27일 김대중 후보의 집 앞마당에서 사제 폭발물이 터졌다. 김대중 후보는 그 며칠 전에 미국으로 떠났을 때인데, 수사본부에서는 열다섯 살이던 김 후보의 조카가 범인이라고 하면서 구속했다. 2월 5일 자정에는 신민당 선거대책본부장 정일형의 집 별채에 불이 나서 선거 관련 서류가 타버렸다. 그런데 당국은 고양이가 화인(火因)이라고 발표했다. 그에 이어,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월간 <다리> 사건으로 임중빈 등 3명을 구속하는 일도 일어났다.

선거에 돌입하기 전에 공화당은 정책 공약으로 국민 소득 배가, 수출 목표 달성, 고속도로망 확충, 고미가 정책 같은 경제 문제를 많이 제시했다. 정부는 대통령 선거 일자를 4월 27일로 공고했다.

선거 운동은 3월 27일부터 전개된다. 공화당 부총재 김종필은 이날 제천에서 유세에 돌입해, 영도자가 되려면 "군을 효과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며 안보론을 들고나왔다. 김대중 후보는 이날 경북 의성에서 "공화당과 정부가 갖은 방법으로 지역감정을 선동하는 망국적인 선거 작전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것에 이어 안동 유세에서는 "공화당 정권 아래에서는 부정부패만 중단 없이 전진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부정부패 이야기는 항상 잘 먹혀드는 주제다. 부정부패의 실상을 표면적으로 볼 수 있지 않았나.

중반전에 접어들 때 김대중 후보는 TV, 라디오를 통한 합동 정견 발표회 및 합동 강연회 개최를 제의했다. 이걸 공화당이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김대중은 말을 잘하기로 유명했고, 이때는 40대여서 얼굴도 더 잘생기게 보일 때였다. 상대방 후보하고 언변, 인상 등 여러 면에서 차이가 컸으니 공화당 쪽에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 후 김대중 후보는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와 대결할 때도 TV 토론회를 열자고 제안하는데, 그때도 김영삼 쪽에서 들어줄 리가 만무했다. 대통령 후보 TV 토론회는 1997년 대선에서 첫선을 보이고,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가 나왔던 2002년에 꽃을 피우는 걸 볼 수 있다.

▲ 박정희 후보의 대전 유세, 김대중 후보의 부산 유세 상황을 전한 <경향신문> 1971년 4월 10일 자 1면. ⓒ<경향신문>


"경상도 대통령 뽑지 않으면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낯 뜨거운 지역주의 선동

프레시안 : 박정희 후보는 유세에서 어떤 이야기를 했나.

서중석 : 4월 10일 박정희 후보가 대전에서, 김대중 후보가 부산에서 대규모 유세를 벌이면서 선거 분위기가 고조됐다. 박 후보는 대전에서 "나의 대결 상대는 오직 국제 공산주의자들과 그 동조자들이다. 나는 그들과 대결, 조국 통일의 영광을 떠받들 민족 중흥의 제단에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이승만이 1956년 선거 때 한 이야기와 비슷하다. 어떻게 김대중 후보를 자신의 경쟁자로 이야기하지 않고 "오직 국제 공산주의자들과 그 동조자들"이 대결 상대라는 이야기를 후보가 할 수 있는 것인지 참 알 수가 없지만, 하여튼 그랬다.

김대중 후보는 이날 부산에서 엄청난 인파를 끌어들였다. 드디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16만 명이 모인 것으로 돼 있는데 아마 이때까지 부산에서 이 정도 인파가 모인 건 처음이 아닐까 싶다. 16만 명이 모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1956년 대선 때 신익희 후보의 한강 백사장 유세에서 엄청난 바람이 불었던 것과 비슷한데, 구호도 그때를 생각나게 하는 구호를 내세웠다.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살겠다 갈아보자", "논도 갈고 밭도 갈고 대통령도 갈아보자", 이런 구호였다. 1956년 그때 부정부패에 염증이 난 유권자의 마음을 신익희 후보가 마구 흔들어댔는데, 1971년 이날에도 야당 후보가 유권자의 마음을 마구 흔든 것으로 돼 있다.

이러니까 야당 승리가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야당 당원들이 '이번 선거도 가망이 전혀 없다'고들 생각했는데, 부산 유세를 보고 나서 당 간부들 중 상당수가 전면적으로 나서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당 간부 전체라기보다는 부분적이었을 것이다. 유진산 쪽 등에서 얼마나 나섰겠나. 하여튼 당원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부산이라는 곳이 참 재미난 데다.

그런 것에 대해 국회의장 이효상은 1967년 대선 때와 똑같이 지역감정으로 대응했다. "영도자란 모름지기 군부 지지를 받아야 한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가 된다", 이렇게 해가면서 지방색을 자극했다. 그런데 이 선거 전체의 작전을 짜고 총지휘를 하고 있던 중앙정보부는 부산 유세를 보고 '이거 야단났다'면서 놀라게 된다.

4월 12일에는 지하철 1호선 기공식이 서울 복판에서 박 대통령을 비롯해 무려 3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선거 분위기는 4월 17일, 18일이 되면서 더 고조되기 시작했다. 박 후보는 17일 대구에서 "지난 10년 동안 우리나라는 세계 120개 국가 중에서 경제 성장률이 두 번째였으며 수출 성장률은 1위다"라고 하면서 경제 발전을 내세웠다. 그런데 이렇게 선거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인상을 준 것은 김대중 후보의 유명한 장충단 유세가 18일 벌어졌기 때문이다.

▲ 1971년 4월 18일 장충단 유세에서 열변을 토하는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 ⓒ연합뉴스


사상 최대 인파 모인 김대중의 장충단 유세

프레시안 : 장충단 유세장에 청중이 어느 정도 모였나. 유세장 분위기가 어땠는지도 궁금하다.

서중석 : 장충단 유세장에는 사상 최대 인파가 몰렸다고 돼 있다. 이 숫자에 대해서는 차이가 너무 크다. <동아일보>에는 30만 명으로 나와 있는데, 김충식 기자의 취재에 의하면 중앙정보부 간부들이 '60만 명은 넘을 것이다', 이렇게 증언했다고 돼 있다. 김충식 기자는 80만 명으로 봤다. 최근 이희호 여사는 <한겨레> 연재에 100만 명으로 이야기했더라. 하여튼 장충단 유세 이전에 청중이 제일 많았던 유세는 1956년 5월 3일 신익희 후보의 한강 백사장 유세장에 20만에서 30만 명이 모인 것이었다. 그걸 최대 인파로 불렀다. 물론 1949년 김구 장례식 때는 더 많은 인파가 몰렸지만, 그걸 빼고 선거만 놓고 보면 그랬다. 그런데 김구 장례식에 모인 50만 명보다 더 많은 인파가 18일 장충단공원에 모인 것이다.

장충단 유세에서 김 후보는 "(박정희 쪽에서) 지금 어느 나라에 가서 총통제를 연구 중이다. 이번에 정권 교체를 못하면 영구 집권의 총통제가 실시돼 선거도 없을 것이라는 확고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전에 언급했던 총통제 문제를 다시 꺼낸 것이다. 그러면서 "전국의 공무원들은 4월 20일부터 부정 선거를 즉시 중단하라"고 날짜를 딱 정해줬다. 또한 "박 대통령에게 부정부패의 직접 책임이 있다"면서 "박 대통령이 현 정권 아래에서 2억 내지 350억 원까지 부정 축재를 한 자 300명의 명단을 조사·확보하고 있으나, 그들을 처단하면 공화당이 머리부터 꼬리까지 다 없어지기 때문에 손도 못 대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 후보의 말이 끝날 때마다 열띤 박수가 나왔다. "부정부패를 일소해 세금을 내리겠다"고 말했을 때 가장 열띤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고 신문에 나온다. 김 후보는 "나는 기필코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나와 함께 승리할 것이다. 오는 7월 1일 새로운 대통령 취임식 때 청와대에서 만납시다", 이 말로 유세를 끝맺었다. 유세 후 수많은 인파가 장충단에서 동대문, 종로, 광화문으로 행진하며 "정! 권! 교! 체! 김대중! 이겼다!"를 연호했다.

그런데 바로 이날 보안사는 서승, 서준식 등 재일 교포 유학생 간첩단으로 몰린 사람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박정희 후보 쪽에서는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 유세에 대해 정말 큰 위협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속에서 4월 24일 박정희 후보는 부산 유세를 하게 된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 연설문집 중 부산 유세에 관한 부분에 이상한 이야기가 나온다.

프레시안 : 어떤 이야기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이것이다. "1963년 선거 때 투표 며칠 전 야당에서 '박정희라는 사람은 빨갱이다'라는 삐라를 수백만 장 만들어 비행기로 서울, 경기도 일대에 뿌렸습니다. 최근에 와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되면 총통제를 만들어가지고 영구 집권을 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총통제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 총통이 대통령과 무엇이 다른지 나는 잘 모르지만 '박정희가 당선되면 또 나오고 또 나와서 죽을 때까지 해먹는다', 이런 말 같습니다."

여기서 총통제를 직접 부인하지는 않고 간접적으로만 부인하는데, 그것도 좀 특이하다. 하여튼 1963년 선거에서 야당이 '박정희라는 사람은 빨갱이다'라는 삐라를 수백만 장 만들어 비행기로 서울, 경기도 일대에 뿌릴 수가 없었다. 야당이라는 게 그랬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행기라는 건 서울 상공에 함부로 못 띄우지 않나. 그런데 왜 이런 흑색선전을 한 건지…. 혹시나 내가 잘못 알고 있나 싶어서, 1963년 선거를 연구해 논문을 쓴 사람한테 이번 인터뷰를 앞두고 전화까지 해서 다시 확인해봤다.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 장충단 유세를 통해 야당의 기세가 워낙 오르니까 박정희가 이런 식으로라도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한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다. 이날 말고 다른 날에는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부산 유세 다음 날인 4월 25일 박정희 후보가 장충단에서 유세를 하게 된다. 김대중 후보가 유세를 했던 바로 그 장소, 똑같은 장소에서 박 후보가 유세를 했다. 당시 신문을 보면 박 후보의 장충단 유세장에는 무슨 무슨 지구당, 어디 어디 동이라고 쓰여 있는 팻말이 많았다고 돼 있다. 시내버스도 '장충단공원행'이라고 써 붙였다. 청주 등 지방에서도 사람들이 올라왔다. 사활을 건 동원이었는데 그 분위기는 뜨겁지 않았다고 신문에 나온다. 청중 숫자는 김 후보 유세 때와 비슷했다고 쓰여 있다. 하여튼 여당 쪽에서는 밤새도록 가마니를 깔아 놨다. 유세장에 모인 사람들이 앉아서 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한 것이다.

이 유세에서 박정희 후보가 전에 없던 놀라운 소리를 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부정부패를 기어이 뿌리 뽑고 물러나겠다"고 한 것이다. 부정부패 비판이 얼마나 호응을 얻었으면 이런 이야기를 했겠나 싶지만, 어쨌건 박 후보가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부정부패를 기어이 뿌리 뽑고 물러나겠다"고 얘기한 건 특별한 일이었다. 더더군다나 "나에게 마지막이 될 이번 선거에서 다시 한 번 신임해준다면 유능한 후계 인물을 육성하겠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놀라운 발언이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이번이 마지막 출마', 박정희의 승부수는 어떻게 탄생했나

프레시안 : 앞으로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박정희 발언,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

서중석 : 그 말을 하게 된 과정이 김충식 기자의 책에 자세히 나온다. 중요한 내용이니 한 번 보자. 4월 10일 부산 유세부터 김대중 후보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고 특히 18일 장충단 유세를 거치면서 정말 숨 막히는 선거 분위기가 나타나지 않나. 선거를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있던 중앙정보부에서는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그중에서도 국내 정치를 담당하던 중앙정보부 3국장 전재구는 4월에 들어오면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부 지방의 여론이 불리하다고 느꼈다. 전재구 국장은 박 대통령이 '이번이 마지막 출마다', 이런 선언을 하기 전까지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보고에 주목했다. 일선 공화당원에서 경찰관에 이르기까지 '그 길밖에 없다'는 주장이 많이 퍼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4월 7일쯤 전재구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한테 마지막 출마 선언에 관한 얘기를 했다고 한다. 김대중 후보의 부산 유세 전에 이미 서울과 중부 지방의 여론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것이다. 그래서 그 얘기를 했더니만 이후락이 벌컥 화를 냈다고 그런다. "각하, 이번만 하시고 그만두십시오", 어떻게 이렇게 건의하느냐, 이거였다. 그렇지만 이후락은 굉장히 신중하고 정보 판단은 정확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이후락 역시 이게 심상치 않다고 생각해서 박 후보한테 보고를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다가 4월 18일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 유세를 보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간담이 서늘하게 되고 '이것 큰일 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됐다. 나흘 후인 22일 박 후보가 광주에서 유세를 하는데 분위기가 아주 썰렁했다. 18일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 유세에 이어 22일에는 이런 모습이 나타나니까 전재구 3국장은 광주운동장에 있던 동원된 청중 사이를 빠져나와서 바로 서울의 이후락한테 상황을 보고했다. 이후락은 '군용기라도 빌려 타고 바로 전주로 와라', 이렇게 지시했다. 전주에서 이후락은 박 후보의 연설 초고를 전재구에게 제시했다. "나에게 마지막 기회가 될 이번 선거에서 다시 뽑아준다면 4년 임기 중에 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완수해 조국 근대화를 매듭짓겠다. 여당 내의 유능한 후계 인물을 육성할 것이며, 야당은 정권 인수 태세를 갖추도록 지원할 것이다." 이걸 박정희가 받아들이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박 후보 일행이 전주관광호텔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락과 전재구는 그리 가서 길재호 공화당 사무총장, 박경원 내무부 장관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응했다. 그러나 이후락은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박정희한테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라고 본 사람을 이미 비행기에 타게 한 상태였다.

프레시안 : 박정희에게 마지막 출마 선언 이야기를 할 인물로 이후락은 누구를 점찍었나.

서중석 : 호남정유 사장이자 박정희와 대구사범학교 동기이던 서정귀였다. 이후락은 이 문제를 박정희한테 직접 얘기할 수 있는 건 박정희와 가까운 이 사람밖에 없다고 보고, L19 경비행기를 서정귀한테 보냈다. 과연 이후락다운 선택이었다. 5.16쿠데타 초기에는 김종필 같은 귀신같은 참모가 있었고, 1960년대와 1971년 선거 때는 이후락 같은 또 다른 귀신같은 참모가 있었다는 것이 박정희한테 얼마나 큰 도움이 된 건가. 이런 점에서도 박정희는 너무나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쨌건 이후락은 서정귀야말로 박정희한테 마지막 출마를 선언하도록 권해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 서정귀가 전주에 왔다. 서정귀가 이후락과 함께 박정희를 만나러 간 후 전재구는 속이 바싹 탔다고 한다. 세 시간 후 마침내 이후락하고 서정귀가 돌아왔다. "겨우 각하께서 승낙하셨다."

그러면 이제 이걸 언제, 어떤 식으로 공표할 건가 하는 문제가 남지 않나. 그다음 날(4월 23일)로 예정된 전주 유세에서 이걸 터트릴 거냐고 전재구가 물어보자, 이후락은 24일 부산에서 슬쩍 비치고 그다음에 서울에서 화끈하게, 극적으로 선언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박 후보가 24일 부산에서 총통제를 간접적으로만 부인하는, 다소 특이한 발언을 하지 않나. 아울러 25일 장충단 유세에 100만 군중을 동원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대작전을 전개한다. 그러면서 지방에서도 사람들이 올라오게 하고 유세장에 밤새도록 가마니를 깔아 놓는 등의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투표 직전 지역감정 자극한 흑색선전

ⓒ오월의봄
프레시안 : 유신 체제에서 김대중은 야당 정치인 중에서도 핍박을 많이 당한 인물이다. 김대중에게 박정희가 취한 여러 조치를 보면 미움과 두려움이 섞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미움과 정적의 능력에 대한 두려움. 그만큼 경계하고 부담을 느꼈다는 뜻일 텐데, 그렇게 느끼게 된 핵심 계기는 역시 1971년 대선이 아닐까 싶다. 이 대선에서 김대중은 박정희가 두려워할 만한 역량을 갖췄음을 입증했다. 그에 더해, 박정희의 행적을 살펴보면 후계자 육성과 야당의 정권 인수 준비 지원은 박정희의 소신과 지극히 거리가 먼 일이라는 점도 김대중에 대한 감정에 적잖은 영향을 줬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항을 공약할 수밖에 없게 만든 김대중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은 박정희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선거 결과와 맞물리면서 더 깊어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다시 돌아오면, 박정희의 마지막 출마 선언은 이 선거에서 어떻게 작용했나.

서중석 : 문제는 박정희의 마지막 출마 선언이 너무 막바지에 나왔다는 점이다. 이것도 박정희한테 참 좋은 운으로 작용했는데, 선거를 이틀 앞둔 그때 그 이야기를 해버렸기 때문에 김대중 쪽에서 박정희라는 사람이 얼마나 말을 잘 바꾸는지에 대해 유권자를 설득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야당으로서는 박정희가 5.16쿠데타 후 자신들이 내건 '혁명 공약'도 어기고 1963년 2월 27일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국민 앞에서 한 선서도 저버린 것 등을 선전해야 할 터인데, 그렇게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거기다가 선거 전날 박 후보는 MBC에서 마지막 연설을 할 때 다시 간곡히, 자신한테는 이번 선거가 마지막이며 후계자를 육성하고 야당도 정권 인수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호소했다. 마지막 출마를 선언한 4월 25일 장충단 유세도 영향을 줬다고 돼 있고, 이 마지막 MBC 연설도 영향을 줬다고 돼 있다. 사실 김대중 후보는 KBS 연설을 할 때 그 앞뒤에 6.25 장면도 보여주고 건설 장면도 보여주는 일을 겪었다. 6.25 장면과 건설 장면 모두 박정희 후보 홍보인 셈인데, 김 후보의 KBS 연설에서 박 후보 홍보까지 곁들이게 된 셈이었다.

그에 더해 4월 27일 투표 시작 직전 대구 지방에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백제권 대동단결" 같은 구호가 적힌 호남향우회 명의의 유인물이 뿌려졌다. 부산에도 "호남 후보에게 몰표를 주자"는 등의 구호가 전봇대 같은 곳에 나붙었다. 고약한 흑색선전, 그것도 호남 사람들 이름으로 해야 경상도 사람들이 더 분개할 것이라는 점을 노린 것 아니겠나. 김대중 후보의 귀신같은 선거 참모, 선거판의 여우로 불리던 엄창록이라는 사람이 선거 막판에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대편으로 넘어가 이런 일을 기획한 것 아니겠느냐고 김 후보 측근들은 보고 있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서른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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