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국가 개조 프로젝트'였던 4대강 사업, 그리고 7년. 그동안 아픈 눈으로 강과 강 주변의 변화를 지켜보았고, 그 힘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으며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지율 스님과 예술가들이 '4대강 기록관'을 지으려 합니다. 기록관은 모래강 내성천의 개발을 막기 위해 내성천의 친구들이 한평사기로 마련한 내성천 하류, 낙동강과 인접한 회룡포 강변 대지 위에 세워지게 됩니다.
이 연재는 기록관 짓기에 함께할 여러분을 초대하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
마을은 초토가 되었다. 다리가 끊기고 집들은 허물어지고, 풀 무성한 논밭은 경계가 없었다. 담수가 시작되면 마을엔 물이 차오르고 마을을 휘감던 강물도 집터도 그것에 잠길 것이다. 주민들의 가슴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엔 이미 아련한 기억 몇 개와 아픈 기억 몇 개가 들어 찼고, 서러운 기억들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주민의 일부는 새 마을로 옮겨갔다. 다른 일부는 도회지로 떠났고, 또 몇은 어디로 갔는지 알기 어렵다. 한 그루 소나무가 사람들을 따라 새 마을로 옮겨졌다. 빈 집에 남은 한 그루의 호두나무는 업자에게 팔려 톱날을 기다리고, 집터 곁의 감나무와 측백나무는 아직 그 자리에 우두커니 박혀 있다. 그렇게 저마다의 사정대로 서로가 엇갈린 채 마을은 비었다.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제 고향을 송두리째 수몰시킬 그것에 대해 말이다. 불과 수 년 전 권력을 쥔 이가 치적을 쌓기 강 위에 보를 만들었고, 거기서 썩은 물을 씻어내리려고 댐 건설을 결정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주민은 없었다. 그들은 그것을 '보 청소물'이라고 불렀다. 댐을 지어 보를 청소한다는 발상은 보를 만들지 않으면 댐을 짓지 않아도 된다는 데까지 미치지 못했을까? 주민들은 분명히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 알아도 방법은 없었다.
그러니까 마을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하나가 아니라 십수 개의 마을에서 육백 개의 집이 쓰러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참을 수 없도록 가볍고 부당하게 일어난 일이더라도 막을 방법은 없었다는 말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어느 것을 더 기가 막히다 해야 할까? 아니면, 이 둘 중 어느 것을 가리키며 이 땅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조소할 수 있을까? 부디 둘 다라고 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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