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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만 되면 '구원자' 행세하는 그들? 사실은... [4.13 총선 인권올리고 가이드] 인권으로 정치를 이야기하자!
사랑하는 친구 Y에게.

우리는 자주 통화하고, 만나고,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는데 이렇게 편지 같은 걸 쓰려니 어색하고, 오글거리는 느낌이야. 그래도 뭔가, 긴 글로 쓰는 건 조금 다른 느낌이랄까?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을 때부터 최근까지 우리 대화의 주요 화두 중 하나는 '잘사는 법'이었던 것 같아. 이제 와 생각하니 '꿈'에 대해선 많은 얘길 하지 못했어. 항상 현실의 벽에 부딪혔지. 그리고 은연중에 나도 모르게, 꿈은 꿈일 뿐 절대 이뤄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너와 난 그저 어떻게 하면, 이 더러운 사회에서 잘 살아남아 버틸 수 있을까, 세상은 변하지 않을 거야, 냉소하면서 소주병을 없애며 숱한 밤을 보냈어. 10년이 지났는데도 이 절망은 여전히 유효해. 우리가 술 마실 때마다 하는 절망 레퍼토리는 그대로인데, 난 인권 활동가가 되었고 넌 여러 직업을 거쳐 로펌에 사무직으로 취직했지.

넌 집에서 대학 등록금을 내줄 기대를 할 수 없는 자식 셋 중 둘째. 언니는 첫 번째 자식이라서, 동생은 남자라서, 가운데 자식인 너는 어느새 보살핌 받는 게 너무 어색한 사람이 되었지. 대학은 우기고 우겨서 겨우 입학했고, 입학한 뒤로는 내내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바빴어. 학교를 졸업하고 분명 알바로 취직한 학원에서는 전임 강사처럼 일은 일대로 부려먹고,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겠다 뭐다 하면서 어떤 달은 기본급 100만 원을 겨우 받기도 했잖아. 그 월급 받던 날. 우린 또 열심히 소주를 마셨지.

나는 또 나대로, 부모님은 하루에 10시간 이상 정말 열심히 일하시는데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우리 집 형편이 날 더욱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어.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가난보다 우리 부모님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어. 일은 죽어라 시키고, 월급을 줄 때는 오히려 일한 사람이 애걸복걸해야 했지. 또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 라고 하면 군말 없이 그렇게 해야 했어. 왜 그렇게 바보같이 가만히만 있냐고 답답해하는 나에게 부모님은 "다른 사람 돈 받아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 한때 정말이지 내 소원이 어떻게든 돈 많은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우리 집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것이었다는 걸 너도 잘 알 거야. 그래…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바보 같은지.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내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 그 날은 휴일이었고, 난 나가 놀다가 밤에 들어왔어. 자려는데 엄마가 그러는 거야. 오늘 아빠랑 한강에 놀러 갔는데, 자전거를 빌렸다. 1시간당 5000원인가 했는데, 아빠는 그게 하루종일인 줄 아셨다. 그래서 자전거 대여점 사장한테 그렇게 우기니까 사장이 대뜸 아빠에게 "그렇게 귀도 안 들리고 돈도 없으면 집에나 있지. 왜 나와서 사람 짜증나게 하냐"고 했다며 속상하다고 말씀하셨어.

우리 아빤 한쪽 귀가 안 들리고, 지금은 나머지 한쪽도 거의 안 들리잖아. 그 날 한숨도 못 잤어. 너무너무 억울해서, 화가 나서, 엄마 아빠가 불쌍해서, 창피해하는 내가 싫어서.

▲ 지난달 18일 오후 노원구 서울북부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열린 발달 장애 유권자 대상 모의 체험 투표에서 참가자들이 투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너랑 내가 만나 하는 얘기가 술을 부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가끔 생각해. 난 왜 인권 활동가가 되었을까? 한 번, 딱 한 번, 그런 생각을 한 적 있었어. 엄마, 아빠를 맘대로 자르기도 하고 못살게도 구는, 제대로 사업장 신고도 하지 않고 기계를 돌리는 영세 옷 공장들. 천주교인권위원회 명함이 나왔을 때 그걸 들고 찾아가 이런 식으로 맘대로 자르면 안 되고, 밀린 월급도 다 주라며 안 그러면 이 공장 문 닫게 해버리겠다고 해버릴까 하고. 그게 '위협'이 되면 참 좋겠다, 하고. 생각도 방법도 옳지 않지만, 그냥 '인권'은 그런 힘이 있다고 믿고 싶었어.

세상은 여전히 너나 나 같은 사람, 우리 엄마, 아빠 같은 사람이 살기에 불공평하고 억울한 일 투성이야. 이번 총선에도 우리의 삶을 더 힘들게 할 사람들이 마치 삶을 구원해줄 것처럼 떠들고 다니겠지.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기도 하는 선거는 때로 정치의 장을 확 좁혀버리기도 하는 것 같아. 누군가는 나이 때문에, 장애인이거나 이주민이기 때문에, 홈리스(Homeless)라 주소가 없어서 선거에 참여할 수 없지. 또, 국민들의 안전을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매개로 오히려 국민들을 감시하려고 해.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공약은 말만 번지르르하고 잘사는 사람만 계속 잘 살게 하지. 또 누군가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말들은 화살이 되어 날아다녀.

인권 운동은 차별을, 배제되고 쫓겨나는 사람들을, 언제나 이야기하지만 총선을 앞둔 지금은 또 다른 방식으로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것 같아. 선거에는 나오지 않는 진짜 이야기 말이야. 노동이 그저 '남의 돈 얻는' 일이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는 그런 거. 꿈을 꿀 수 있게 하는 그런 정치.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4.13 총선 인권 올리고 가이드'를 만들었어. 내가 가진 표 하나가 어떻게 이 모든 걸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이건 어떤 시작이야. 표 하나로 누군가에게 맡겨버린 정치가 내 삶을 뒤흔들지 않도록 하는. 가이드는 답을 알려주지 않지만 답을 함께 찾아가자고 말하고 있어. 선거가 끝난 후 느껴왔던 허망함 대신 인권을 가지고 정치를 이야기하자고 말이야. 이 가이드가 너희 동네 후보자와 각 정당을 판단하는 소중한 기준이 되기를 바라. 그리고 너의 경험이 여기에 덧붙여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거야.

물론 이번에도 총선이 지나고 나면 너와 진탕 술을 마시게 될 것 같지만, 그래도 하나 다른 게 있다면 내가 5년인가 6년쯤 전에 인권이 '힘'이 있다고 믿고 싶었던 그 때, 그 마음을 떠올리고 싶어.

어떻게 끝을 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 못한 더 많은 이야기들은 곧 만나서 하자!

여름이 시작되는 6월쯤 눈치 안 보고, 연차 써서 놀러가려는 우리 계획이 꼭 성공하기를 바라며.

너의 친구 E가.

4.13 총선 인권 올리고 가이드 발표 기자회견이 3월 22일(화) 오전 11시, 광화문에서 있을 예정이다. 인권올리고 가이드는 1부 그들이 말하지 않는 투표 이야기와 5개의 영역에서 제안하는 2부 차별 내리고 인권 올리고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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