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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죽고 또 죽고…왜 아직도 외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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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죽고, 죽고 또 죽고…왜 아직도 외로운가? [저항의 미학 ④] 페터 형님의 질문
청춘의 피로 얼룩진 1960년 4.19 혁명부터 2014년 4.16 세월호 참사로 이어지는 4월은 잔인한 달입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피의 학살을 염두에 두면, 5월은 잔혹한 달입니다. 그래서 벚꽃이 흩날리는 봄 햇살이 눈부신 지금 <프레시안>이 여러분에게 잔인한 책을 권합니다.

이번에 권하는 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탁선미, 남덕현, 홍승용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은 출간 자체가 '사건'인 책입니다. 1975년에서 1981년까지 세 권이 잇따라 나온 이 소설은 터키,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미국에서도 1권만 소개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어판 <저항의 미학>은 터키를 제외하면, 비유럽권에 최초로 완역된 소설입니다.

도대체 지금 이 시점에 세 명의 독문학자가 마치 투쟁하듯 대한민국에서 이 소설을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소설은 파시즘이 유럽을 휩쓸던 1937년부터 1945년까지를 평범한 스무 살 노동자의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이 노동자와 그의 동료는 고민하고, 선택하고, 행동하고, 좌절하고 결국 패배합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은 배신하고, 은둔하고, 차라리 비겁해지기로 합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과 참으로 닮지 않았습니까?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정이 좌절되어가는 슬픈 여정을 페터 바이스는 대담하고 과감하게 그렸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느냐고 또 무엇을 할 것이냐고?

<프레시안>은 문학과지성사와 함께 <저항의 미학>을 먼저 읽은 분의 독후감을 공개합니다. 네 번째 독후감은 소설가 최인석 작가가 썼습니다.

최인석 작가는 소설가이자 희곡 작가입니다. <연극평론>에 희곡 <내가 잃어버린 당나귀>로 등단하여, 대한민국 문학상, 백상예술상, 영희연극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1986년 <소설문학> 장편소설 공모에 <구경꾼>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소설집 <내 영혼의 우물>로 대산문학상, 박영준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소설집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구렁이들의 집>, <목숨의 기억> 등과, 장편 소설 <내 마음에는 악어가 산다>, <이상한 나라의 스파이>, <강철 무지개>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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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의 미학>(전3권, 탁선미·남덕현·홍승용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로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말기까지 20여 년 동안 파시즘과 자본, 야만에 저항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에 관한 기록이다.

작가가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은 상당히 낯설다. 읽기 편한 연대기적인 방식도, 인물이나 사건 중심의 전개도 아니다. 유럽 사회주의자 ․ 공산주의자들의 결사적 저항의 이야기에 카프카의 <성>,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리고 바그너의 오페라 등에 이르는 예술 작품들에 대한 깊은 응시가 포개어지고, 거기에 현재와 과거의 저항의 역사가 교차하는 것으로 15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장대한 작품은 전개된다.

이 가운데 작가가 특별히 정성을 기울이는 몇 가지 사안이 있다. 독일의 스파르타쿠스단 봉기, 그리고 스페인 내전이 그것이다. 또한 이 두 사건은 작품의 서막(세 권 가운데 첫째)을 이루면서 멀고 또한 날카로운 예감처럼 서사 전체를 조명한다. 일견 복잡한 듯 보이지만 작가가 실패를 서술하고 있다는 것, 그보다 실패의 방식을 서술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설픈 스파르타쿠스단 봉기의 경위, 그 와중에 벌어지는 사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갈등, 스탈린의 끈질긴 간섭,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관계, 비열한 사민당과 노동조합 간부들의 횡포, 우물쭈물하는 공산당, 그 사이 '전통적' 노동 계급이 겪는 갈등과 절망감, 전격적인 적들의 공세 아래 처참하게 암살되고 버려지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포함한 운동의 지도자들, 뒤를 이어 붕괴되는 조직, 붕괴되는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에 대한 고통스러운 추적은 작가의 냉정한 서사로 생생히 전달된다.

이는 스페인 내전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다. 목숨을 내걸고 자발적으로 스페인 내전에 뛰어든 이상주의자들이 마주친 것은 프랑코와 팔랑헤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또한 전선 내부의 분열과 스탈린의 간섭에 맞서야 했다. 스탈린의 지원과 간섭은 풀 길 없는 숙제였다. 자본주의 국가들에 포위된 일국 사회주의를 보호하기 위한 전 세계 노동 계급의 의무였다고는 하지만, 그 간섭은 때로는 그릇되고 때로는 가혹했으며, 대개 잘못된 정책을, 크나큰 희생을 강요했다. 그 결과는 고통스러운 패배, 그리고 끝없는 처형의 대열이었다.

그러니까 작가가 곧이어 스탈린 치하에서 벌어진 부하린 등 혁명 제1세대에 대한 잔인한 숙청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연대기적인 순서만을 고려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소비에트 사회의 이상 징후를 알리는 최초의 신호탄이었다. 재판의 형식을 빌린 이 숙청 과정은 이에 대한 많은 쓰디쓴 야유와 더불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아직 당대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추문이자 숙제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공식적으로 그것은 재판이었고, 부하린은 반동이었다.

어쩌면 이런 부분에서 우리는 작가가 차마 하지 않은, 혹은 할 필요가 없었던 말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스탈린의 숙청 과정 또한 작가는 자주 취하는 어조, 그러니까 예술 작품을 비평하는 듯한 어조로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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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압권은 1권이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작가 또는 화자가 이끄는 대로 페르가몬 박물관의 조각 작품 속의 헤라클레스를, 스파르타쿠스단 봉기와 그 패배를, 이어 스페인 내전과 그 복잡한 와중을, 그 고통스러운 실패를 따라가다 보면 차츰 독자는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그 이야기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될 것이요 부하린 숙청에 이르게 될 것이며, 이쯤 되면 누구나 작가의 생각의 실마리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2권과 3권을 읽는 것은 훨씬 쉬워지고 재미도 더 깊어질 것이다.

실상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1권에 이미 다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처럼 1권은 스파르타쿠스단 봉기에 대한, 스페인 내전에 대한, 그 실패에 대한 정성 들인 분석이다. 얼마 전 국내에 출판되어 많은 화제가 되었던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에 이어 스페인 내전이 어찌하여 그런 참혹한 패배에 이르렀는지를 작가와 더불어, 그 참전자들과 더불어 짐작이라도 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작가가 은근히 암시하는 대로 그것은 또한 유럽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나중에 맞아야만 했던 운명의 전조이기도 했다.

<저항의 미학>은 박물관에서 시작되어 처형장에서 끝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끝은 실제로 감옥, 처형장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갖가지 방식으로 처형당한다. 전 유럽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지 몇 년, 독일 파시스트는 패전이 임박하자 투옥했던 정치범들을 끌어내어 처형하기 시작한다.

소설의 끝부분에 이르면 독자는 죽었다, 죽었다, 죽었다는 문장과 무수히 마주쳐야 한다. 수많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이상주의자, 정치범 들이 처형당한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고 교수대에서 목뼈가 부러지고, 총살 분대 앞에서 총알을 맞고 쓰러진다. 그것이 수십 페이지에 걸쳐 이어진다. 작가는 "각자 온전한 전기 한 권씩이 어울릴 만한 사람들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3권, 347쪽) 하고 쓰지만, 어찌 하랴. 우리는 그들 대부분이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다.

페터 바이스가 이 처형장의 풍경을 소설의 끝에 이르러 이다지 길게 서술하고 있는 것은 의식적인 강조가 분명하다. 그가 죽었다, 하고 쓸 때마다 그의 질문이, 준열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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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작가는 이 소설을 거꾸로 써야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처형장에서 시작하여 박물관에서 끝맺는 것이다. 아니, 작가가 이렇게 썼다 할지라도 독자는 거꾸로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박물관에서 시작하여 처형장으로, 박물관의 그 모든 아름다운 보고를 만들어낸 인간들이 결국 처형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처형장에서 시작하여 박물관으로, 결국 처형당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 할지라도 끝은 그 지혜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박물관에서 맺는 것이 어쩌면 낫지 않겠는가. 그것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것이다. 작가는 위안 따위는 집어치우라고 소리치겠으나, 위안 따위는 그의 목적이 아니었을 것이나, 어쩌랴, 독자에게는 독자의 고유한 몫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잠시 여기, 이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작가의 준열한 질문에 이어, 거기 기대어, 작은 질문을 하나만 보태는 것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전태일은 작은 노동조합 하나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몸뚱이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오늘날, 이 나라에는 민주노총이라는 거대한 조직이 있다. 게다가 진보 정당도 있다. 좋은 일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것도 몇 개씩이나 있다. 그것은 무수한 학생, 노동자들이 흘린 피땀의 결실이었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김진숙은, 이창근은, 저 여의도와 시청 앞, 굴뚝이나 철탑, 혹은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진 수많은 농성자들은, 저 무수한 전태일들은 아직 이다지 외로운가? 아니다. 이것은 내 질문이 아니다. 페터 바이스의 질문이 분명하다.
페터 바이스(Peter Weiss)는?

▲ 페터 바이스(1916~1982년). ⓒwikipedia.org
1916년 독일 베를린 근교에서 헝가리 출신 유대인 아버지와 스위스 바젤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34년까지 독일에서 살았으나 나치스 정권을 피해 영국, 보헤미아(오늘날의 체코공화국), 스위스를 거쳐 스웨덴으로 이주했고, 1946년 스웨덴 국적을 취득했다.

연속적인 이주의 과정에서도 미술 창작과 문학 습작을 병행했으며, 스웨덴에 정착한 이후에는 몇 편의 실험 영화와 상업 영화도 만들었다. 문학, 미술,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내용, 형식적 실험을 시도했으며, 1960년 누보로망 스타일의 '마이크로 소설' 〈마부의 몸의 그림자〉로 독일 문단에도 데뷔했다.

1964년 혁명가 마라와 개인주의자 사드의 허구적 만남을 소재로 한 희곡 <마라/사드>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진행된 아우슈비츠 재판을 방청한 뒤, 본격적으로 정치적 참여 작가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아우슈비츠 문제를 다룬 기록극 <수사>, 포르투갈 독재 정권을 겨냥한 <루지타니아 도깨비의 노래>, 베트남 해방 투쟁을 다룬 <베트남 논쟁>,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역사관을 겨냥한 <망명 중의 트로츠키>, 횔덜린을 좌절한 자코뱅파로 등장시킨 <횔덜린>을 발표했다.

1972년 마지막 역작인 장편 소설 <저항의 미학> 집필을 시작하여 총 3권으로 (1권 1975년, 2권 1978년, 3권 1981년) 출간했다. 이 소설은 '좌파 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문학사에 자리 잡았다. 1982년 65세에 마지막 희곡 <새로운 소송>의 초연을 마치고 영면했다. 레싱 문학상(1965년), 하인리히 만 문학상(1966년), 게오르크 뷔히너 문학상(1982년)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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