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연인이 간첩? 애인부터 의심하라는 정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연인이 간첩? 애인부터 의심하라는 정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3> 유신 체제, 열아홉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간첩 이야기가 범람한 1970년대에는 간첩을 어떻게든 찾아내 신고하라는 압박도 강하지 않았나.

서중석 : 1970년대에는, 1980년대까지 연장은 되는 것이지만, 간첩을 잡자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그러면서 간첩 식별법이라는 게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파출소 근처는 말할 것도 없고 전봇대, 담벼락, 술집, 찻집, 식당, 상점 같은 데 붙어 있고 그랬다.

그중 하나를 살펴보자. "알리는 말씀"이라고 해놓고 이렇게 돼 있었다. "이러한 사람이 있으면 경찰 관서나 출장 중인 경찰관에게 연락, 신고합시다. 1. 야간과 아침 일찍 낯모른 사람이 부락을 통행하거나 음식점에서 취식하는 자 2. 6·25 때 행방불명되었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 3. 촌가에서 좌우를 살피며 행로에 익숙하지 않다고 인정되는 자 4. 좋은 날씨에 옷이나 신발에 '뻘'이 묻어 있는 사람 5. 물건을 살 때 물가에 밝지 못한 자와 적은 물건을 사고 큰돈을 내는 자 6. 밤 12시 이후 남몰래 라디오 듣는 사람", 심야 방송 듣는 사람도 여기에 해당될 수 있을 텐데, "7. 이웃 사람 중 사업, 취직 또는 친척 방문을 구실로 오랫동안 미행하는 자 8. 일본이나 북한, 만주, 중국 등지에 갔던 사람이 나타났을 때."

내 제자 이임하가 쓴 책에 이 내용이 들어 있는데, 지난번에도 얘기한 것처럼 반상회 같은 데에서 이런 것을 가지고 대조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이 나타나면 반드시 신고하라는 식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관심을 끄는 건 그 당시 간첩 신고 포스터를 주로 공안 계통, 경찰 계통에서만 만들어서 살포하고 부착했던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임하는 당시 백제관광여행사라는 데에서 간첩 신고 포스터를 붙여놓은 것을 책에 실었다. 공주에 있는 조그마한 여행사일 텐데, 이런 여행사조차 신고 포스터를 만들어서 붙여야 할 정도로 여러 업체에서 이런 걸 자진해서 만들어 붙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 간첩 식별법

▲ 1970년대에는 간첩 식별법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이미지는 간첩을 소재로 한 영화 <간첩 리철진>. ⓒ씨네월드
프레시안 :
간첩 식별법이라는 것을 온갖 장소에 붙여놓은 것 자체가 논란이 될 수 있는 사항이지만, 그 내용이 부적절하거나 애매하거나 지나치게 자의적이었던 점도 문제다. 좌우를 살피며 행로에 익숙하지 않다는 부분을 예로 들면, 이건 처음 가본 여행지에서 누구나 겪게 되는 상황이다. 또 2008년 '버스비 70원' 발언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은 정몽준 전 의원 사례에서 잘 드러난 것처럼, 물가에 밝지 못하다는 것을 문제 삼은 조항의 경우 재벌가 사람들을 비롯한 부유층, 상류층 중 과연 몇 명이나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버스비 70원' 발언이 상징하는 서민 경제에 대한 무지가 오늘날 정 전 의원 한 사람만의 것이라고 볼 근거도, 1970년대 부유층은 그렇지 않았다고 여길 근거도 전혀 없다. 그렇더라도 간첩 식별법에 따라, 물가를 잘 모른다고 해서 그러한 최고 부유층을 간첩으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아울러 간첩 식별법에 담긴 문장이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던데 예를 들면 "과거의 악질 부역자 처단자 가족과 남몰래 가까이 교제하는 자", "정부 시책을 은근히 비난하고 북괴를 지지, 찬양하는 자" 같은 조항이 있는 경우도 있다. 이 중 전자는 예컨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혼자, 몰래 도망간 다음 거짓 방송을 내보낸 탓에 피란을 못 간 많은 서울시민처럼 어쩔 수 없이 '부역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또는 억울하게 '부역자'로 몰린 시민들을 다시 한 번 나락에 떨어뜨린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 "북괴를 지지, 찬양하는 자"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숱한 공안 조작 사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현실에서는 "정부 시책을 은근히 비난"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 무고한 사람을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는 조항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에서는 정부 시책 비판 자체를 문제 삼아 간첩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도 이런 식의 규정은 위험하다. 예컨대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야당이던 한나라당 인사들이 "은근히" 정도가 아니라 시쳇말로 잡아먹을 듯이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비난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간첩으로 몰아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투성이인 간첩 식별법이 독재 정권 때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점도 눈에 들어온다. <한겨레>(2014년 3월 21일, 인터넷판)에 따르면, 1996년 강릉 앞바다에 북한 잠수함이 침투했을 때 경찰청이 하달한 '직파 간첩 식별 요령'에는 '집이나 직장 전화번호를 물었을 때 답변을 회피하거나 말을 더듬는 경우', '여관이나 여인숙 등에 오랫동안 투숙하면서 매춘부를 찾지 않은 경우' 같은 내용이 있었고 2000년대 초반 국정원 홈페이지에 올라온 식별 요령에는 '20~30대 청년으로 직업과 용모에 어울리지 않게 휴대폰, 자판기, 버스 카드 사용이 서툰 사람'이라는 항목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자의적인 또는 어이없는 규정은 2013년에 불거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간 양산된 각종 공안 조작 사건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다시 돌아오면, 박정희 집권기에는 간첩 식별법뿐만 아니라 간첩 잡기 노래도 있지 않았나.

서중석 : 간첩 잡기 노래라는 것도 있었는데, 뭐냐 하면 영화 <새드 무비> 주제곡의 노랫말을 간첩 신고에 관한 것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었다. "아침에 산에서 양복 입고 내려오는 자, 광화문 앞에서 중앙청을 찾는 자, 술집에서 취한 김에 동무 동무 하는 자, 이런 사람 보~면 지체 없이 113으로, 오오오", 바로 다음이 원곡에서 sad movie 대목인데, "간첩 신~고는 국번 없이 113으로", 이런 노래가 유행했다고 그런다.

지난번에 반공 운동 얘기를 했지만 이 당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그중에서도 특히 해안가 마을 초등학교에 가보면 복도나 교실 뒷벽에 섬뜩한, 정말 어떻게 저렇게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게 붙어 있을까 싶은 것들이 있었다. 북한의 만행을 강조하고 김일성을 흡혈귀처럼 묘사해놓은 것들 같은 게 그랬는데, 그런 느낌이 들 수밖에 없도록 표현돼 있었다.

덧붙여 이야기하면 얼마 전 서울 시내 중심가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의 기념 전시관에 갔다가, 그 학교는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에 원래 있던 자리에 전시관이 들어섰는데, '1975년 반공 운동'이라고 해서 과거 학교 활동 상황을 사진, 그림, 이런저런 소식으로 꾸며놓은 것을 봤다. 그런데 전시물 중에 "때려죽이자 공산당"이라고 하면서 사람을 아주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표현한 것들도 있었다. 1975년 그 시절에 학교에서 만들어놓은 포스터일 텐데 그런 섬뜩하고 몸서리나는 것들을, 당시 그걸 잘했다고 지금도 생각하면서 붙여놨는지 아니면 반성하려고 붙여놨는지는 모르겠지만 붙여놨더라. 이런 식으로 반공 운동을 벌였다는 게 새삼 다시 여러 가지를 떠오르게 했다.

애인도, 친척도, 이웃도 간첩인지 우선 의심하라는 무서운 세상

프레시안 : 간첩 신고 표어 중에도 인상적인 게 많지 않았나.

서중석 : 간첩 신고 표어를 보면 별의별 게 다 있었다. "의심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자수하여 행복 찾고 신고하여 애국하자", "간첩 신고 너나없고 간첩 자수 밤낮 없다", "간첩 잡는 오빠 되고 신고하는 엄마 되자", 이런 것은 그렇다고 쳐도 좀 심한 것도 있다. 예컨대 "간첩은 휴식 없다 내가 먼저 말조심", 이런 것도 있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이때는 어디서건 말을 마음 놓고 할 수가 없었다. 1970년대에는 그랬다. 어떤 일에 기분이 상해 한마디 했다가, 잘못하면 신고당할 수 있었다. 그런 시대였다. 하여튼 어디서나 말조심하라고 아예 포스터를 붙여놓았다. 이건 뭐겠나.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말, 기분 나쁘다고 하는 말, 이런 말을 하면 넌 어떻게 되는지 알아?', 이런 의미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 산에 갔다 오던 사람들이 간첩으로 많이 몰릴 수 있었다. 표어에도 그런 게 있었다. "저기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 보자". 1970년대에는 산에 가는 게 두려웠다. 나도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다. 치악산에 가다가 조그마한 길, 소로로 내려왔는데 어느 동네에서 동네 사람하고 언쟁이 붙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간첩이라고 바로 신고해버렸다. 경찰은 신고가 들어왔다면서 나를 버스에서 내리게 했다. 그래서 내가 강하게 항의하고 "잘못 신고한 사람을 내가 고발하겠다.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 순경은 미안하다고만 하면서, 신고한 사람은 절대 알려줄 수 없게 돼 있다고 하더라. 그래야 다들 마음 놓고 신고할 것 아니냐, 이러더라. 세상에, 무고한 사람을 얼마든지 신고할 수 있게 해놓은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을 신고해버릴 수 있었고, 그러면 신고당한 사람은 간첩이 아니라는 게 판명될 때까지 당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사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에 반상회 얘기도 했지만, 심지어 이웃 살펴주기 선정 마을이라는 포스터도 붙어 있었다.

프레시안 : 이웃이 얼마나 어렵게 사는지 서로 살펴보고 돕자는 건 아닐 듯한데, 그건 대체 뭔가.

서중석 : "우리 마을은 이웃 살펴주기 마을입니다.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경찰 관서에 즉시 신고됩니다", 이렇게 해놓았다. 그러니까 이웃 마을에 사는 사람도 신고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이웃 살펴주기 운동까지 벌이는, 그렇게 해서 간첩으로 신고하자는 운동까지 벌이는 세상이 됐는데 그러면서 "만난 친척 간첩인가 다시 보자"는 표어도 나왔다. 아, 친척을 자주 만날 수도 있지만 친척이 오랜만에 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 친척이 간첩이 아닌지 다시 보자는 것이었다. 더 무섭다고 할까, 심지어 이런 것도 있더라. "사랑하는 애인도 알고 보니 간첩", 이거 참. 이러니 연애도 맘대로 못하는 것 아닌가. 간첩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니까.

이렇게 '전 국민을 간첩으로 일단 봐야 한다', 그러면서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을 다 주시하라', 이게 1970년대였다. 모든 국민이 감시받는 이게 바로 전체주의적 병영 체제가 아니고 뭐냐, 이 말이다. 이처럼 마음 놓고 걸어 다니지도 못하고, 마음 놓고 산에 가지도 못하고, 마음 놓고 얘기할 수도 없고, 다방 가서도 얘기를 제대로 못하게 돼 있었다.

청년 문화 이야기를 나중에 할 건데 "기타 칠 줄 모르면 간첩이다"를 포함해서 '뭘 못하면 간첩이다', '뭘 모르면 간첩이다', 이런 말들이 유행처럼 번졌다. 하도 모든 걸 간첩으로 몰아세우니까 이런 것들이 유행어가 되고 그랬다. 농담으로도 많이 주고받았는데, 얼마나 싸늘한 모습인가.

프레시안 : "기타 칠 줄 모르면 간첩이다"는 세태 풍자 의미를 많이 담고 있던 표현인가.

서중석 : 풍자도 아니었다. 농담이었다. 누구나 기타를 치려고 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농담으로 그런 얘기들을 한 건데, 그렇게까지 되는 사회가 도대체 어떤 사회인가. 모든 사람을 일단은 간첩으로 봐야 한다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런 식의 농담까지 생긴 것이다.

온 국민이 감시 대상이라는 걸 얘기하는 데 한 사례가 될 수 있을 터인데, 김창남 교수 인터뷰를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김 교수가 초등학생 때라고 하는데, 간첩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신고를 하려고 그 뒤를 밟았다고 한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에 밀짚모자를 쓰고 갈색 가죽 가방을 든 간첩 이미지가 소년 김창남의 머릿속에 잡혀 있었다고 하는데, 고우영 만화를 보고서 '간첩은 이렇게 생겼다'고 생각하게 된 모양이다. 이렇게 초등학생 소년들은 간첩 잡기에 나서고 그랬다. 세상에나, 이런 세상이 있었다.

진보당 사건, 2차 인혁당 사건을 지하당 사건으로 날조해 가르친 유신 정권

ⓒ오월의봄
프레시안 :
1960년생인 김창남 교수가 초등학생일 때보다 10여 년 후인 전두환 정권 시기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제 또래에게도 간첩 신고는 먼 얘기가 아니었다. 우선 이런저런 간첩 신고 표어를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신고 포상금 액수(간첩 최고 3000만 원, 간첩선 최고 5000만 원)를 정확히 아는 아이들도 주변에 많았다. 제 또래 중에는 요즘 간첩 신고 포상금 액수는 몰라도 '간첩 최고 3000만 원, 간첩선 최고 5000만 원'은 기억하는 사람이 꽤 될 것이다. 아무튼 그 시절에 "여기는 내륙이라 5000만 원짜리는 우리랑 상관없겠네?"라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독침을 지니고 다닌다는 간첩이 한편으로는 무서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고 한 번만 잘하면 큰돈 벌 수 있다'는 생각, 다시 말해 '간첩 신고 성공=복권 당첨'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북한에서 날려 보낸 전단('삐라')을 신고하면 공책 같은 학용품을 상으로 받을 수 있었다. 김 교수처럼 간첩 같아 보이는 사람의 뒤를 밟은 경우는 제 주변에서 보지 못했지만, '삐라'를 찾겠다며(어쩌면 그 이상까지도 은근히 기대하면서) 인근 산을 다니는 경우는 몇 번 봤다. 물론 '삐라'나 간첩을 발견하지는 못하고 대개 사슴벌레 같은 것만 몇 마리 잡아 오는 것으로 그날의 작전을 마무리하곤 했다. 다시 돌아오면, 유신 정권이 남발한 긴급 조치와 이러한 간첩 신고 독려는 이어지는 면이 있어 보인다. 어떠했나.

서중석 : 긴급 조치 위반으로 신고된 사람들 중 많은 부분은, 내 생각에는 맨 처음에 신고될 때는 간첩으로 신고된 것 같다. 그런 것들을 살펴보자. 신문에 여러 번 이름이 오르내린 오종상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농사꾼이었다고 하는데, 1974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징역 3년형을 받았다. 버스에서 동석한 여고생한테 "유신 헌법 체제 아래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으니 이런 사회는 차라리 일본에 팔아넘기든가 이북과 합쳐서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했다가 신고를 당해 끌려간 것이다. 나는 이 여고생이 맨 처음에는 간첩인 줄 알고 자기 선생님한테 '내가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이 사건으로 번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오종상은 그렇게 끌려간 지 36년 만인 2010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다.

긴급 조치 위반으로 걸려든 사건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어떤 강사가 학원 강의 중 군부를 비판하고 국어책이 정부 선전의 매개체라고 얘기했다가 긴급 조치 위반으로 징역 8년형을 받았다. 이것도 공부하던 중 그 이야기를 들은 학생이 간첩으로 신고한 것일 터인데, 간첩으로 처리하지 않고 그쪽으로 몰아세운 것 아니겠나. 이런 분위기였으니 학교에서건 학원에서건 선생님이 교육 시간에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었겠느냐, 이 말이다.

목사도 당했다. 1977년에 설교 중 "박정희 정권이 인권 탄압을 지속하고 있으며 농민, 근로자들을 억압하고 있다", 이렇게 얘기했다가 징역 6년형을 받았다. 또 교사가 수업 중에 단독 입후보하는 대통령, 이게 바로 체육관 대통령인데 그것에 대해 비판하고 차라리 북한의 김일성이 똑똑하다고 발언했다가 걸려들어 징역 3년형을 받은 사례도 있는데, 이것도 학생은 간첩으로 신고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이 참 많이 있었다.

간첩 중에서 제일 센 간첩이 지하공작을 한 간첩일 텐데, 반공 시간 같은 때에 가르치면서 그런 지하공작을 한 간첩 사례로 어떤 것을 제시했는지 살펴보자. 지난번에 이야기한 문교부의 <사상 교육, 반공 교육 지도 자료집>, 1975년에 초·중·고 교사용으로 만든 이 자료집에 담긴 사례를 보면 기가 막힌다.

프레시안 : 어떤 것들이 그런 사례로 제시됐나.

서중석 : '북괴의 전략·전술'이라고 해서 '북괴의 지하당 공작'이라는 란을 보면 거기서 예를 든 것이 "진보당 사건, 남로당의 국회 프락치 사건,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 동백림 공작단 사건" 등이다. 임자도 간첩단 사건, 통혁당 사건 등도 들어 있는데 제일 크게 내세운 게 진보당 사건이었다. 그와 함께 "남로당의 국회 프락치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동백림 공작단 사건" 등이 들어 있는데 이 중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자세히 다뤘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어떻게 진보당 사건이 간첩 사건이고 지하당 사건이란 말인가. "남로당의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고 돼 있는 것도 지금 학계에서는 조작이라고 보는 견해가 훨씬 강하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어떤 사건이라는 건 지난번에도 얘기를 했고, 동백림 사건이 어떤 사건이라는 것도 내가 얘기했다.

이렇게 '북괴의 지하당 공작'이라고 하면서 내놓은 사례의 대부분이, 여러 개 중에서 한두 개가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이 전혀 지하당이라고 볼 수 없는, 그 점이 아주 명백한 것들이었다. 그런 것을 지하당이라고 하면서 1970년대에는 가르쳤다. 정말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이런 나라에 살고 싶은가 하는 마음이 안 들 수 없게끔 돼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예순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