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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삼성의 저주는 끝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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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e삼성의 저주는 끝났을까? [이재용 체제 삼성 2년 ①] '이건희의 반도체'와 '이재용의 스마트폰'

삼성 3세 경영은 이미 현실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실질적인 총수다. 2014년 5월 10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부터다. 이 회장이 살아있으므로, 재산 상속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경영권 승계는 돼 있다.

진보 개혁 진영은 봉건적인 재벌 총수 세습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해 왔다. 하지만 새로운 기업 지배 구조에 대한 합의는 없는 상태다. '이 씨 일가 세습 체제가 아닌 삼성'에 대한 막연한 청사진조차 없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진보 개혁 진영의 이론적, 정책적 무능과 맞물려 있다. 정치적 상상력이 모자랐던 탓일 수도 있다. 어찌 됐건, 그 역시 삼성 3세 경영을 현실로 만든 중요한 요소다.

오는 10일이면, 이 회장이 쓰러진 지 만 2년이 된다. 그간 말만 무성하던 '이재용의 경영 능력'이 모습을 드러낸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 경제의 진로와 관계있는 몇 가지 대목을 점검했다.

반도체의 성공, 초보 총수의 자신감

잠시 21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지금은 와병 중인 이건희 회장의 전성기, 바로 1995년이다. 그보다 2년 전엔 신경영 선언이 있었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자"라며, 이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섰다. 그 전에는 사실상 은둔 상태였다.

이건희 회장의 본격적인 총수 행보는, 정확히 반도체 사업의 성공과 맞물려 있다. 반도체 사업은,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자가 시작했다. 이병철 창업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내 적자였다. 창업자가 사망하고 이 회장이 총수가 된 1987년 이후,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1993년부터 성공 궤도에 올랐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운영 체제 보급과 함께, PC(개인용 컴퓨터) 메모리 업그레이드 수요가 폭발했다. 삼성 반도체 수출 실적 역시 수직 상승했다.

이 회장의 자신감도 함께 치솟았다. 1995년 베이징 발언은 그 정점이었다. "기업은 이류, 행정은 삼류, 정치는 사류"라고 했다. 당시 현직이었던 고(故) 김영삼 대통령이 진노했다. 삼성에 대한 세무 조사가 거론됐다. 윈도95 운영 체제 덕분에, 삼성이 메모리 반도체 판매로 돈을 쓸어 모으던 때였다. 세금을 세게 물릴 수 있는 명분이 뚜렷했다. 삼성은 납작 엎드렸다. 이 회장의 공개 발언 역시 뚝 끊어졌다.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알려진 이 회장이 회사 밖으로 정치, 사회적 메시지를 쏟아낸 시기는 1993년부터 1995년까지다.

삼성이 고개를 숙였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자동차 사업 진출이다. 정부의 협조가 절실했다.

삼성 반도체 착시 효과와 김영삼 정부

청와대 역시 마냥 화를 낼 수는 없었다. 1995년은 한국이 OECD 가입 신청을 했던 해다. 5.18 특별법이 통과됐고, '역사 바로 세우기'가 진행됐던 해였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됐다. 김영삼 정부 역시 이때가 절정이었다. 그걸 뒷받침할 만한 경제 지표가 필요했다. 1995년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8.9%였다. 대통령 입장에선 자랑스러운 성적표였다. 1990년대 초 6% 안팎이던 경제 성장률을 끌어올린 주역이 삼성 반도체였다. 대통령이 아무리 불쾌해도, 삼성과의 공생 관계는 끊을 수 없었다.

이후 역사는 다들 아는 대로다. 이듬해인 1996년, 삼성이 수출 주력 품목이던 16MD램 반도체 가격이 폭락했다. 공급에 비해 수요가 줄어든 탓이다. PC에 윈도95 운영 제체를 설치한 사람들이 당분간은 메모리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을 터였다. 반도체 호황에 가려져 있던, 한국 경제의 불안한 민낯이 드러났다. 1995년의 경제 성장률은 '반도체 착시 효과' 때문이었다. 1996년 경제 성장률은 7.2%로 떨어졌고, 다음해인 1997년 가을에는 외환 위기가 닥쳤다.

삼성은 정부의 협조 속에서 자동차 사업에 진출했지만, 실패했다. 외환 위기 속에서 천문학적 부실을 털어내는 과정은, 새로운 비리가 잉태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분식 회계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재무 부서의 힘이 막강해졌다. 그전까지는 여러 참모 중 한 명이었던 이학수 전 부회장이 명실상부한 2인자가 됐다. 이 전 부회장은,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 고백 이후 타격을 입는다. 2011년 삼성물산 고문을 끝으로, 삼성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스마트폰만 남았다

1995년 반도체 호황 이야기를 길게 했다. 이제 2016년 스마트폰 사업을 살필 차례다. '이건희의 반도체'와 '이재용의 스마트폰'은 닮은 점이 있다. 둘 다 아버지가 씨앗을 뿌린 사업이다. 반도체는 이건희의 아버지인 이병철이 시작했다. 스마트폰은 이재용의 아버지인 이건희가 궤도에 올렸다. 또 경영권 승계 초기 수익원이라는 점도 닮았다. 앞서 설명했듯, 삼성 반도체는 이건희 회장이 총수가 된 직후부터 수익을 내기 시작했고, '신경영' 선언으로 경영 전면에 나선 직후 호황을 맞았다. 스마트폰 역시 지금 삼성을 먹여 살리는 품목이다.

경제 지표를 앞장서서 끌어올린다는 점도 비슷하다. 지난 1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4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13대 주력 수출 품목 가운데 11개 품목의 수출이 지난해 같은 달보다 감소했다. 섬유류(-10.3%), 석유 제품(-10.8%), 반도체(-11.5%), 컴퓨터(-13.7%), 석유 화학(-14.5%), 자동차 부품(-15.4%), 일반 기계(-15.6%), 철강(-17.4%), 자동차(-18.3%), 가전(-25.7%), 평판 디스플레이(-26.3%) 등이다. 선박(25.2%)과 무선 통신 기기(3.2%)만 증가했다. 선박 수출은 과거에 수주한 물량에 대한 대가를 받은 것이며, 올해 수주 규모는 평년의 20분의 1 수준이다. 따라서 무선 통신 기기, 즉 삼성 스마트폰만 선전하고 있는 셈이다. 1995년에는 반도체 착시 효과가 있었다. 지금은 삼성 스마트폰이 수출 효자 품목이다.

최근 발표된 삼성의 올해 1분기 실적을 보자. 대부분의 삼성 계열사가 적자 또는 제자리 수준 실적을 냈다. 오로지 삼성전자만 성장했다. 삼성전자는 1분기 매출 49조7822억 원, 영업 이익 6조6758억 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1분기와 비교하면 매출은 5.65%포인트, 영업 이익은 11.65%포인트 증가했다.

스마트폰을 다루는 무선 사업(IM) 부문의 실적 덕분이다. 무선 사업 부문은 매출 27조6000억 원, 영업 이익 3조8900억 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1분기 대비 매출은 6.6%포인트 증가했고, 영업 이익은 42%포인트 늘었다. 무선 사업 부문 영업 이익은 2014년 2분기 4조4200억 원을 기록한 이후 가장 많았다. 갤럭시S7가 전작보다 1개월 정도 빨리 출시된 영향이 반영된 실적이다. 그걸 고려해도, 확실히 좋은 성적표다.

삼성, '예상된 문제'는 잘 푼다

삼성 스마트폰에 대한 그간의 불안한 전망을 깨는 것이라서 더 눈에 띄는 성과다. 스마트폰 시장, 특히 고가폰 시장은 이제 포화 상태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또 관련 기술이 평준화됐다. 중국의 후발 업체가 애플 및 삼성의 고급 제품을 엇비슷하게 흉내 낸다. 시장을 선도했던 애플이 최근 고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애플과 시장이 겹치는 삼성 역시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었다. 하지만 최근 발표된 1분기 실적은 이런 전망을 깬다.

삼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이자 관찰자인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삼성은 결과가 예상되는 일에 대해서는 강하다."

스마트폰 사업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시장 포화, 기술 평준화 등의 한계는 IT(정보기술) 업계에서 자주 거론돼 왔다. 그러니까 '예상된 문제들'이었다. 답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중저가 제품을 강화해야 한다. 인도 등 신흥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 관건은 실행력인데, 이 대목에선 삼성이 애플보다 한수 위다.

삼성의 스마트폰 사업은 2014년 2분기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하지만 이는 '예상된 문제'였으므로, 삼성은 정해진 답을 찾아서 과감하게 실행했다. 결국 반등에 성공했다.

'객관식'에만 강한 삼성, 이제 '서술형' 풀어야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해운 및 조선 산업이 구조 조정 도마 위에 올랐다. 부실 기업 목록이 길게 더 남아 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중견 재벌 상당수가 재무 건전성이 나쁘다. 최상위 재벌 일부만 안전한데, 실은 그조차도 미덥지가 않다. 1위 재벌인 삼성은 스마트폰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구조다. 스마트폰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나? 중저가 스마트폰 시장, 신흥 시장도 곧 포화할 텐데, 그럼 어떻게 할 건가? 이건 정해진 답이 없는 질문이다.

김상조 교수는 이런 말도 했다.

"삼성은 '미지의 충격'에 대해서는 약하다."

'예상된 문제'가 아니면, 제대로 대응 못한다는 말이다. 객관식 혹은 단답식 문제만 잘 푸는 수험생에 빗댈 수 있다. 갑자기 서술형 문제가 출제되면, 당황한다.

이건희 회장이 총수 자리를 물려받았던 1987년, 혹은 경영 전면에 나섰던 1993년이라면, 주로 객관식 문제만 나왔었다. 당시 한국 재벌은 추격자였다. 선진국 기업이 이미 지나간 길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잘 따라가면 됐다. 얼마나 부지런히, 과감하게 따라가느냐가 승부처였다. 실행력이 유난히 발달한 기업 문화는 그 결과물이다.

하지만 지금 이재용 부회장 앞에 놓인 질문은 서술형이다. 몇 가지 답안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다. "스마트폰 이후엔 무엇으로 먹고 살 건가?"라는 질문의 답을, 백지 위에 적어야 한다.

객관식 시대를 살았던 이건희 회장이 오히려 더 나았을 수도 있다. 이 회장은 '반도체 이후엔 자동차'라는 답을 적어 냈었다. 틀린 답이었다. 자동차 사업은 실패했다. 하지만 아예 백지를 내는 것보다는 낫다.

첨단 기술 산업은 성숙기가 짧다. 스마트폰 사업의 성숙기를 연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쇠퇴기가 곧 닥친다. 스마트폰으로 돈을 벌고 있을 때,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야 한다. 유일하게 수출이 늘어난 품목, 스마트폰마저 쇠퇴기에 접어들면, 투자처에 대한 답을 찾아봤자 소용없다. 투자할 돈이 없다.

반도체 성공 경험에 갇히다

이재용 부회장이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다. 바이오시밀러 부문에 투자했다. 차량 전장(자동차 전자 장비) 사업과 가상 현실(VR) 분야도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엉거주춤하는 모양새다. 바이오시밀러란, 바이오 의약품의 복제약이다. 바이오 의약품은 생물체에서 유래한 세포 등을 원료로 만든 의약품인데, 이걸 복제하는 건, 화학 합성 의약품 복제보다 까다롭다. 바이오시밀러를 신사업 품목으로 고른 배경은, 반도체 사업의 성공 노하우를 적용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자본 집약적인 성격 등 메모리 반도체 사업과 닮은 점이 많다고 한다.

지난 2010년에 출간된 <한국 경제, 기회는 어디에 있는가?>(이지효 지음, 북포스 펴냄)에도 같은 설명이 있다. 경영학과 교수 중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많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꽤 오래 전부터 삼성이 바이오시밀러 사업을 검토한 건 사실인 듯하다.

삼성의 바이오시밀러 사업은, 현재 상장을 추진 중인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가 담당한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반도체로 치면 파운드리(foundry)에 해당한다. 반도체 회사 가운데 퀄컴처럼 설계만 하는 곳은 팹리스(Fabless)라고 한다. 팹리스가 설계하면, 파운드리에 제조를 맡긴다. 위탁 제조 업체인 셈이다. 대만(타이완)의 TSMC가 유명하다. 삼성바이오에피스가 팹리스 격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독자 설계 능력도 있고, 파운드리 사업도 한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삼성의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로 팹리스와 파운드리 가운데 하나로 자기 역할을 고정시키지 않은 점을 꼽는다. 그러나 팹리스 역할이 약한 점은 한계로 꼽힌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고질적인 문제, 비메모리 부문이 미성숙했다는 점은 그래서 생긴 문제다.


삼성이 추진하는 바이오시밀러 사업 역시 같은 한계가 지적된다. 바이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삼성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역할, 반도체로 치면 파운드리 유형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하청 생산'이라는 안전한 길이다. 반도체 사업을 시작할 당시에 비해 삼성의 지금 위상이 훨씬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보수성은 더 두드러진다.


또 다른 신규 투자처로 꼽히는 차량 전장 및 가상 현실(VR) 분야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가상 현실은, 말 그대로 간을 보는 수준이다. 차량 전장은 지난해 말에야 사업 팀이 꾸려졌다. 박종환 삼성전자 부사장이 전장사업팀장을 맡았다. 박 팀장은 삼성에서 자동차를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임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제 막 팀을 꾸린 상태라서, 본격적인 투자까지는 갈 길이 멀다. 게다가 차량 전장은 과거 반도체 투자처럼 선발 업체에 도전하는 과감한 투자라기보다 등 떠밀린 투자에 가깝다. 구글 등 글로벌 IT 업체들이 너도나도 자동차 사업에 진출한다. LG전자 역시 차량 전장 사업에 오래 전에 진출해서 성과를 내고 있다.

'e삼성' 실패 트라우마

신규 투자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반면, 계열사 매각과 직원 감원은 적극적이었던 게 지난 2년이었다. 한마디로 축소 경영이다. 세계 경제 상황이 불안한 탓도 있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유난히 축소 지향이라는 점은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다. 예컨대 무리한 투자를 경계하는, 재무 중심 관점을 지닌 경영 전문가들도 비슷한 생각이다.

이 부회장은 왜 그럴까. 흔히 나오는 해석이 2000년대 초 'e삼성' 실패에 따른 트라우마(정신적 상처)다. 김상조 교수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실패를 두려워해서 위험에 노출되지 않으려는 성향이 그 때문에 생긴 듯 하다는 말이다. 철저한 보호 속에서 자란 이 부회장에게 젊은 시절의 실패 경험, 그에 따른 사회적 비난은 대단한 상처였을 게다. 하지만 과감한 결정을 계속 미루기만 한다면, 새로운 비난을 살 수 있다.

최근 <조선일보>가 흥미로운 기사를 냈다. 이 부회장이 주도한 삼성 사옥 재배치 작업을 비판한 기사다. 지난 2008년에는 삼성 계열사들을 서울 서초동 사옥에 모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계열사들을 경기도 성남시 판교, 서울 서초구 우면동, 중구 태평로 등으로 보내고 있다. 이사 비용만 해도 수백억 원대라는 설명이다. 새로운 사옥에 적응해야 하는 직원들의 부담 역시 보이지 않는 비용이다. 반면, 서초동 사옥은 빈 사무실이 많아졌다. 그 역시 낭비다. 아울러 삼성 서초동 사옥을 보고 가게에 투자했던 인근 상인들의 원성도 높아진 상태다. 돈 쓰고 인심 잃은 셈인데, 그래서 얻은 게 무엇인지는 알기 힘들다. 현장 경영을 강화한다는 명분이지만, 직원들은 갸우뚱한다.

우왕좌왕하는 사옥 재배치 작업은 이재용 체제 삼성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결정의 근거를 조직 구성원에게 설명하지 못한다. 왜 이런 혼란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없다는 점과 맞물려 있으므로, 문제가 된다. 경영진이 바뀌면 흔히 겪는 일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이건희 회장 역시 1993년 신경영 선언과 함께 경영 전면에 나섰을 때 다양한 시행 착오로 직원들을 헷갈리게 했다. 7.4제(오전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 실시를 둘러싼 혼란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당시와 지금은 중요한 차이가 있다. 1990년대 초는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였다. 반도체가 유독 큰 성공을 했지만, 삼성의 다른 계열사 역시 성장세였다. 1997년 외환 위기 전까지는 직원 수 역시 계속 늘어났다. 직원들이, 그리고 다른 이해관계자가 혼란을 감내할 여유가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스마트폰 사업을 제외하면, 삼성의 거의 모든 사업이 뒷걸음질하고 있다. 제자리걸음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진다. 지속적인 감원이 진행 중이다. 그런데 스마트폰과 반도체 이후에 대한 청사진마저 없다면, 직원들의 일상과 관련된 중요 결정을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조직의 안정성이 무너질 수 있다. 미래 가치와 연동하는 주식 가격 역시 불안해진다. 이는 다시 국민 연금 등 연기금의 부실 등 다양한 위험으로 이어진다.

박소정, 박상인 서울대학교 교수가 각각 삼성전자 주식 가격 급락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시뮬레이션(모의실험) 방식으로 연구한 적이 있다. 반도체 부문 수익이 낮은 상태에서 스마트폰 사업이 타격을 입는 경우를 가정했다. 반도체 산업은 경기에 민감하므로, 개연성이 있는 경우다. 스마트폰 사업 부진을 메울 수 있는 새로운 수익원이 없다면, 일파만파 위험이 번진다. 일종의 시스템 리스크다.

이 부회장이 'e삼성'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대가 치고는, 너무 큰 비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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