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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은 찬양 일색이 마땅한 성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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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은 찬양 일색이 마땅한 성역인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7> 유신 체제, 스물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이번에는 새마을운동을 살펴봤으면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추앙하는 쪽에서는 새마을운동 찬가를 지속적으로 부르고 있다. 예컨대 박근혜 대통령은 4월 20일 "한국을 넘어 지구촌 개도국들의 보편적인 개발 전략"으로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며 새마을운동의 세계화를 강조했다. 오늘날 위기 극복에 필요한 도전과 혁신을 새마을운동이 주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 직후 최외출(영남대 부총장) 글로벌새마을포럼 회장은 <한국일보>에 게재된 특별 기고(4월 21일자, 인터넷판 기준)에서 "새마을운동은 개도국에게 빈곤 탈출의 길을 제시하는 살아 있는 교과서이자, 등불 같은 정책이라고 평가 받고 있다"며 새마을운동의 글로벌화를 주장했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이 재단 이사장을 지냈던 영남대는 이명박 정권 때 박정희정책새마을대학원을 설립하고 박근혜 정부 들어 새마을학 석사를 배출했다. 이에 대해 "학문으로 정립되지 않은 새마을학으로 석사 학위를 수여하는 영남대의 학사 운영은 학문 영역의 세계적 관행과는 어긋나는 일로 비아카데미적인 '촌스러운' 발상에서 비롯된 것"(윤지관 덕성여대 교수, 한국대학학회 회장)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어쨌건 이처럼 박정희 추종 세력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찬가가 나오고 있다. 아울러 박근혜 정권 출범 후 새마을운동 지원 예산은 급증했다. 2014년 4억6200만 원이었던 것이 2016년에 143억2300만 원으로 무려 30배나 늘어났다. 그 예산의 대부분은 새마을운동 테마 공원 조성 등 박정희 정권 치켜세우기와 직결되는 사업에 배정됐다. 오죽하면, 근래에 정권 비판 보도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KBS에서조차 새마을운동 지원 예산 급증을 비판하는 보도(2016년 1월 11일, '또 새마을운동 기념관…나랏돈은 눈먼 돈?')를 내보냈을 정도다. 그렇지만 이러한 찬가와 일방적인 미화는 새마을운동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서중석 : 1970년대 하면 유신 체제 다음으로 많이 떠오르는 게 사실은 새마을이다. 그다음으로 중화학 또는 남침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을 터인데, 그만큼 새마을은 한국 사람들 뇌리에 많이 남아 있다. 전에 조동걸 교수한테 들었는데, 이 양반이 경북의 한 대학에서 강연하면서 새마을운동에 문제가 많다는 얘기를 했더니만 다른 사람들이 듣고 나서 그랬다더라. 새마을운동에 문제가 많다고 하는 사람은 못 봤는데 왜 당신만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사실 일부 연구자들, 학생 운동권 같은 데를 제외하면 새마을운동을 대개 다 좋게 얘기하고 있다. 특히 관변 쪽에서는 자신들이 독재 권력에 협력한 것에 대해 떨떠름한 게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도 새마을운동을 특히 자랑스럽게, 그러니까 '그건 참 잘한 것 아니냐. 다른 건 문제 삼더라도 그것만은 잘한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얘기들을 많이 한다. 박정희 정권, 유신 체제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취하는 걸 볼 수 있다. 또 농촌에서 새마을운동을 했던 사람들 중 대다수는 농촌을 떠났는데, 그렇게 떠나가지고 도시에 와서 '새마을운동은 잘한 일'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 그렇게 잘한 것이면 농촌에서 계속 살 일이지, 무엇 때문에 농촌을 버리고 도시에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 이런 얘기를 들을 수도 있긴 하다. 이러한 새마을운동과 관련해 먼저, 사전적으로 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새마을운동과 농업 정책 혼동은 금물

프레시안 : 어떤 것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새마을운동과 농업 정책, 식량 증산 정책을 혼동해서 보는 사람들이 꽤 있다. 특히 1973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새마을운동이 소득 증가 사업에 중점을 두는 형태로 전개되면서 양자가 잘 구별되지 않는 면 때문에도 이런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예컨대 특용 작물을 재배하는데 이게 새마을운동이냐 농업 정책이냐, 이런 문제다. 축산 정책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 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데, 나는 원칙적으로 그런 것들을 농업 정책으로 본다. 왜냐하면 단일 곡식만 재배해서는, 즉 쌀농사만 지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다른 작물들을 농촌에서 가꿔서 수입을 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됐는데, 그걸 새마을운동으로 부르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것의 일부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된 건 또 사실이다.

농업 정책과 새마을운동을 갈라서 봐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는 건 주곡 자립에 대한 인식 문제에서도 느낄 수 있다. 1970년대에 와서 우리가 주곡 자립을 하게 됐다는 걸 굉장히 강조하지 않나. 농민들도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1970년대 중반에 와서 주곡 자립을 하게 됐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우리는 잘살게 된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많이 갖고 있다. 또 중간에 농촌 사정이 한때 나아진 적이 있었던 것도 이런 생각을 갖게 하는 데 일정하게 작용했다. 그런데 주곡 자립, 이건 새마을운동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난 본다. 새마을운동 덕분이 아니라 정부의 농업 정책, 식량 증산 정책으로 이뤄진 결과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그리고 주곡 자립을 위해 1970년대에 박정희 정부가 열성적으로 일을 추진한 건 사실이지만 그 일을 이미 1960년대에 일정하게 했어야 했는데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아니냐, 또 1970년대에도 너무 단일 주곡 생산 중심으로 나갔던 것 아니냐, 이런 비판도 있게 된다.

어쨌든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문 같은 걸 읽어봐도 이 두 가지가 구별되는 걸 많이 볼 수 있다. 예컨대 1973년 연설을 보면 "식량 증산 사업과 새마을운동을 주축으로 하는", 이런 말을 썼다. 식량 증산 사업하고 새마을운동이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대통령이 명확하게 얘기한 것이다. 그다음에 새마을운동과 관련 없이 1974년에 시정연설을 한 걸 보면 "농어민 소득 증대를 위해서는 적정 미가 정책과 이중 맥가제를", 여기서 맥은 보리를 가리키는데, "계속 유지하는 한편 축산, 잠업, 경제 작물 등을 주축으로 한 농어민 소득 증대 사업과 농가 부업 등을 권장하겠다", 이렇게 얘기했다. 여기서 새마을운동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연설에서 거론한 사항들이 당연하게도 다 농업 정책으로 들어갈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한다.

▲ 1975년 새마을 지도자 대회에 참석해 우수 새마을 지도자들을 격려하는 박정희 대통령. ⓒ연합뉴스


프레시안 : 1970년대 식량 증산의 핵심 요인은 무엇인가.

서중석 : 주곡 자급 정책 같은 것이 어떻게 해서 성공하게 됐는가를 간단히 살펴보자. 식량 증산이 이뤄지게 되는 직접적인 요인은 고미가 정책, 그리고 이중 곡가제다. 사실 이중 곡가제, 일본에서 이미 하고 있던 이것을 우리도 정권을 잡으면 빨리 실현하겠다고 주장한 건 야당이었다. 1967년 선거에서 야당이 대선 때건 총선 때건 그런 주장을 하자 박정희 후보 쪽에서 이걸 아주 강렬하게 비난, 비판했다. 국가의 재정 부담은 생각하지 않고 농민들한테 잘 먹혀들 것 같으니까 그런 '유혹성' 공약을 남발한다는 식으로 심하게 공격했다. 그러나 이때쯤 가서 정부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확실하다. 그래서 고미가 정책으로 바로 선회하는 걸 볼 수 있다. 1967년에 수매가를 17퍼센트 인상했고 그다음 해에는 22퍼센트 올렸다. 1970년대에 들어가면 이중 곡가제를 이제는 채택하게 된다.

그래서 쌀 생산이 고미가 정책을 이어받은 이중 곡가제에 의해 크게 늘어나게 되는 건데, 그 증산은 통일벼 재배와도 관련 있다. 이미 1960년대에 필리핀이라든가 여러 지역에서, 이건 유럽이나 미주를 제외한 얘기인데, 다수확 품종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녹색 혁명이라고 불렸는데 어디든 식량 문제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런 속에서 다수확 품종으로 필리핀에서 기적의 다수확 볍씨라는 것을 개발했는데 그것의 큰 영향을 받으면서 생겨난 것이 통일벼다. 이중 곡가제, 이건 김정렴 회고록을 보면 1973년부터 부분적으로 시행하다가 1975년부터 전면적으로 시행했다고 돼 있다.

프레시안 : 초기에 통일벼는 농민들에게 인기가 없지 않았나.

서중석 : 농민들은 통일벼를 서로 안 심으려고 했다. 통일벼 보급 과정, 이건 강제 농정의 표본이라고까지 그 당시 나는 봤는데, 뭐냐 하면 농민들이 안 심으려고 하니까 공무원이나 정부 쪽에서 나온 사람이 이미 심어놓은 모를 막 뽑아버리기까지 하고 그러더라. 정부에서 강력히 권장한 통일벼를 안 심었다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면 왜 안 심으려 했느냐. 우선 심기가 까다로웠다고 한다. 그 당시 도처에 있는 논마다 가보면 소주밀식(小株密植), 이걸 써놓았다. (소주밀식은 모를 낼 때 모 한 포기의 모 수는 적게 하고 전체 면적에 심는 포기 수를 많게 하는 방법을 가리킨다. 쉽게 말하면 촘촘하게 많이 심는 방식이다. '편집자') 통일벼는 소주밀식으로 하는 것이라는 얘기였는데, 이게 까다롭고 일손도 많이 들고 가뭄 피해도 크고 비료나 농약도 많이 들었다고 그런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많이 안 심었다기보다는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이게 맛이 되게 없는 볍씨였다. 한국 사람 입에는 잘 안 맞았다. 필리핀 사람들과는 입맛이 전혀 다르지 않나. 거기다가 한국인들은 볏짚도 다양하게 활용하지 않았나. 그것으로 초가도 잇고 가마니도 짜는 등 여러 가지로 유용하게 썼다. 불을 때는 데에도 썼다. 소중한 땔감이었다. 그런데 통일벼는 볏짚이 짧았기 때문에 그런 것에 영 맞지가 않았다. 사실은 이 통일벼 때문에도 농촌 초가가 바뀔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통일벼는 잘만 심으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엄청나게 높일 수 있었다. 다수확 벼니까. 그것 때문에 정부가 강제 농정으로 막 강요해댔던 건데, 지금까지 말한 여러 사정 때문에 처음에는 그게 잘 안됐다. 그러면 통일벼를 널리 보급하는 과정에서 제일 큰 효과를 거둔 게 뭐냐. 바로 이중 곡가제였다. 이중 곡가제를 시행하면서 정부가 수매를 할 때 통일벼를 우선 받아준 것이다. 그 당시 고추를 심은 한 농민이 농약을 팍팍 뿌리면서 그러더라. "이거 우리가 먹어? 도시 사람들이 먹지." 물론 모든 농민이 그런 식으로 농약을 많이 뿌렸다고 볼 수는 전혀 없지만, 초기에는 별로 안 심던 통일벼를 농민들이 많이 심게 된 데에도 그런 것이 마찬가지로 작용했다는 말이다. 뭐냐 하면 '우리가 먹을 건 밥맛이 좋은 아키바레로 조금만 심고, 나머지는 다 통일벼를 심어서 도시에 내다 팔면 되지 않느냐. 정부가 이렇게 통일벼를 비싸게 사주는데', 바로 이 점이 작용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서 1973년에 재래종보다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37퍼센트 많아졌고 그러면서 수확량이 1974년에 3000만 석, 1977년에는 4000만 석을 채웠다는 얘기를 하게 되는데, 사실 이 농업 통계처럼 못 믿을 게 없다. 한국의 경우는 다른 통계도 못 믿는다는 얘기를 참 많이 하고 유엔에서도 오랫동안 불신하고 그랬는데, 농업 통계의 경우 공무원들이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하면 처벌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높게 불려서 보고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수치를 그대로 믿기는 어려우나 전체적으로 상당히 많이 증가한 것만은 분명하다. 1976년에 오면 쌀 자급률이 102퍼센트라고 해서 드디어 주곡을 자급하게 된다. 그러면서 농가의 1인당 실질 소득이 1970년에는 도시 근로자 가구의 68.7퍼센트였는데 1975년에는 93.9퍼센트로 상당히 높아졌다고 나온 통계도 있다. 이게 정확히 맞는 통계인가 하는 건 별개 문제이지만, 하여튼 이렇게 되면서 한때 농촌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객관적 연구가 쉽지 않은 이유

ⓒ오월의봄
프레시안 : 새마을운동에 대해 차분히, 깊이 있게 분석한 연구는 찬양 일색 자료에 비해 훨씬 적은 것 같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새마을운동을 얘기할 때 아주 중요한 점 중 하나가 새마을운동을 객관적으로 연구하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다. 그간 정부는 매우 방대한 새마을운동 자료를 생산해냈다. 정부에서 내놓은 <새마을운동 10년사>를 비롯해 엄청나게 많다. 새마을운동 자료의 대부분은 정부에서 직접 냈거나 정부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걸 이용해서 연구한다는 것에 대해 '그건 다 안 된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다음에 새마을운동과 관련해 지금까지 나와 있는 여러 글들 또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찬양, 성공 사례 소개, 그리고 훈장이나 표창장을 받은 모범 새마을 지도자나 이장 등의 연설이나 수기 같은 것들이 있다. 라디오, 신문, TV에서 그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해 많이 다뤘던 사례들도 이런 부분들이다. 당연하지 않나. 가장 큰 국책 사업이었으니까. 그런 자료의 대부분이, 사실상 100퍼센트라고 해도 좋은데, 다 이런 사람들을 취재해서 얻은 것이다, 이 말이다. 그러니 이게 3만 개가 넘는 마을을 얼마만큼 대표하고 있느냐 하는 점에서 참 어려움이 따른다.

통계도 마찬가지다. 조금 전에도 통계를 얘기했지만 백두진 회고록, 이 사람은 경제에 밝은 사람이었다고 돼 있는데, 그걸 보면 1978년에 여당 쪽인 유신정우회의 한 의원이 국회에서 이렇게 얘기한 것으로 돼 있다. "국민은 정부의 통계를 믿지 않는다. 소비자 물가 지수를 정부가 관장한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물가의 등귀 실태와 정부 통계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 당시 물가가 워낙 오르지 않았나. 그래서 이건 소비자 물가를 가지고 비판한 것인데, 사실 그런 불일치가 제일 심했던 건 오히려 농업 통계, 특히 새마을 통계가 아니겠느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프레시안 : 새마을운동에 관계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생존해 있는 만큼 당사자들에게 직접 얘기를 듣는 방법도 있지 않나.

서중석 : 그러면 증언 구술, 채록이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여기에도 쉽지 않은 문제가 있다. 우선 오늘날 대개 노인만 남아 있는 농촌에 그런 얘기를 또렷하게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많이 있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러면 남는 건 농촌을 떠난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도 그에 관한 얘기를 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은 모범 답안을 얘기한다. 왜냐하면 텔레비전 같은 데에서 항상 한 얘기가 있다, 이 말이다. 대부분은 머릿속에 그게 콱 박혀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자료, 예컨대 일기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발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증언을 들을 때에도 그 사람이 하는 얘기를 "네", "네" 해가면서 그냥 들을 게 아니라 얘기 속의 이면을 캐내야 한다.

농민 일기 같은 데에 새마을운동과 관련해 이렇게 써놓은 걸 볼 수 있다. 유신 쿠데타를 다룰 때부터 몇 번 인용했던 평택의 그 농민, 공화당 당원이자 1970년대에 마을 이장을 한 이 사람의 일기를 다시 펴보자. 일기이기 때문에 생활 관련 글이 여러 개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중 하나만 살펴보면, "새마을 사업을 하는데 일을 시작 전에는 매일같이 의논이 분분하다. 오늘도 종소리와 동민이 모인 자리에서 또 싸움이 일었다", 이렇게 돼 있다. 하수구를 묻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걸 할 것인가를 두고 싸움이 붙었다는 얘기다. 이 사람이 이장이었는데, 이런 싸움들이 일어나고 하면서 "공격을 받는 건 이장뿐이다. 사실상 개인 사업이다"라고 토로했다. 마을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뭉쳐 사업을 추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말이다. "시작했으니 허는(하는) 수 없이 하자고 했으나 다른 집 사이 하수구도 묻어달라는 것", 그래서 저녁에 또 동회를 열어가지고 이걸 회의에 부쳤더니만 "새마을 사업의 건을 더 하느냐 중지하느냐 의견은 참으로 통일하기 어려웠다. 아주 반대하는 자도 없다. 동리 일이란 어렵다. 밤새로 1시까지 회의를 했으나 결과는 미지근." 이런 식으로 써놓았다.

사실 새마을 사업으로 도로를 내거나 이 마을처럼 하수구 같은 걸 묻고 하는 일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의견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사람마다 이해관계가 다 다르고 농민들은 특히 자기 이해가 걸린 것들이기 때문에도 서로 다른 의견을 내기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정부 관리가 와서 감독을 할 때라든가, 어떻게 됐는지를 시찰, 조사하러 올 때에는 실제와 달리 사업이 매끄럽게, 다 잘된 것으로 보일 수 있게끔 돼 있지 않았나.

그런 식으로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새마을 사업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김영미 교수는 이 농민의 일기를 발굴해 분석하면서 새마을 사업에 관해 이렇게 썼다(<> 부분). <그의 일기 어디에도 그가 새마을 사업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거나 열정을 보이는 대목은 없다. 오히려 새마을 사업에 대한 그의 관점은 냉소에 가깝다. 새마을 검열을 받은 날 일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감사관이 와서 감사한 결과 아주 잘되였(었)다고 했다. 부락의 실정은 아랑곳없이 감사는 잘 받었(았)다." 새마을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공서의 검열에 통과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말한 여러 사항 때문에 새마을 사업을 연구, 분석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고 손품이 참 많이 가는 작업이라는 점을 우리가 염두에 두면서 새마을 사업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새마을운동 통해 살기 좋은 농촌 됐나? 성패 판단의 핵심 기준은 바로 그것

프레시안 : 새마을운동의 성패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무엇이라고 보나.

서중석 : 새마을 사업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이 살기 좋은 곳이 됐느냐, 그리고 도시민들이 동경하는 마음의 고향이 됐느냐, 이게 새마을운동이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를 가리는 핵심적인 사항이 아니냐고 난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 점을 중시해야 한다고 본다.

새마을 사업이 어떻게 해서 추진됐느냐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1950~1960년대 상태로 농촌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었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이든 마을 안에 있는 길이든 길 하나만 보더라도 그대로 놔둘 수는 없게 돼 있었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도 참 많았다. 농촌의 이런 여러 가지 모습을 볼 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방치할 수 없고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건 그 당시 농촌에 가본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농촌이 방치된 제일 큰 이유는, 일제 때도 그랬지만 해방 후에도 계속 농촌을 경시하고 농촌을 표밭으로만 인식하면서 억압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저곡가 정책을 통해 노동자한테 저임금을 줄 수 있게끔 하는 방식이 기본으로 깔려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정당들이 중농 정책을 말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말로만 중농 정책을 들고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때쯤 되면 더 이상 그렇게 방치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농촌이 밑바닥으로 갈 데까지 가고 있었고 너무나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는 점이 있었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1963년 선거에서 농민들의 공화당 지지가 67퍼센트, 1967년에는 67.1퍼센트였는데 1971년 선거에서는 58.2퍼센트가 된 것에 영향을 받아 정부가 농민들한테 이제는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됐다', 이렇게도 얘기한다. 그런데 그건 그렇게 중요한 지표는 아니라고 난 본다.

프레시안 :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왜냐하면 1963년 선거 때 농민한테서 여당 쪽 표가 많이 나온 데에는 밀가루 투표 성향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해에 선거를 앞두고 밀가루를 대대적으로 뿌렸다고 전에 얘기하지 않았나. 1967년에는 그야말로 농민들의 혼을 뺏어버렸다. 선심 공약이라든가 돈을 풀어 선심 관광을 시켜준다든가 하는 것을 가지고 혼을 뺏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그것보다는 정상적인 것에 조금은 가까운 쪽으로 치른 게 1971년 선거였던 셈인데, 그다음 해에 바로 유신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나. 그 점을 고려하면, 공화당 같은 데에서 '이젠 농촌을 잘살게 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는 것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제일 큰 이유는 조금 전에 얘기한 것처럼 농촌이 너무나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게 기본으로 있었다.

그다음에 일제 때에도 우리가 심훈의 <상록수> 같은 소설에서도 볼 수 있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잘살기 위해 농촌 활동을 벌인 청년들, 특히 야학 같은 게 얼마나 많았나. 그건 1950년대, 196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4H클럽 같은 여러 단체를 만들면서 농촌 자립 활동이라고 할까, 잘살기 운동 같은 것을 꽤 규모 있게, 많이 펼쳤다. 역(力)농가, 독(篤)농가, 두 가지 다 농사를 열심히 짓는 건실한 농가라는 비슷한 뜻인데 이런 것도 여기저기서 많이 생겨나고 그런다. 그야말로 뜻있는 일꾼들이 생겨난 것이다. 가나안농군학교 같은 건 규모가 크게, 조직적으로 이런 활동을 전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에 대한 굉장히 큰 힌트를 얻은 것도 농촌에서 자발적으로 전개됐던 이런 활동이라고 돼 있지 않나.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임을 강조하는 곳이 경북 청도이고 거기를 지나가다 보면 산비탈에다가 그 표시를 크게 해놓은 게 눈에 들어오는데, 1969년 박 대통령이 청도에서 수해 복구 순시를 하다가 그곳 농민들이 자신들의 마을을 위해 대단한 활동을 하는 걸 보면서 '아, 이거 참 중요한 문제다', 이랬다고 돼 있다.

이처럼 농촌에서 스스로 우러나온 운동, 이게 새마을운동으로 가는 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중 일부는 새마을운동에 흡수됐지만 다른 일부는 새마을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시멘트 문제다. 새마을운동의 또 하나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게 시멘트라는 것을 김정렴도 시사했고 당시 건설부 장관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구술, 증언, 회고록 같은 것을 통해 얘기하고 있다. 박진도와 한도현이 쓴 논문에서도 그렇고, 조정래의 <한강>에서도 새마을운동 시기를 "시멘트 시대"라고까지 얘기할 정도로 시멘트와 많이 연관시키고 있다.

▲ 2011년 8월 27일 경북 청도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성역화 사업 준공식에 참석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이날 공개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에 손을 대며 활짝 웃는 모습. ⓒ연합뉴스

새마을운동은 유신 체제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프레시안 : 시멘트는 새마을운동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줬나.

서중석 : 시멘트가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친 그 부분을 잠깐 보자. 뭐니 뭐니 해도 당시 제일 큰 시멘트 공장을 갖고 있던 건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이었다. 이 사람은 공화당에서 3선 개헌(1969년)을 추진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그런저런 여러 이유로 박 대통령도 이 사람을 중시했다. 그런데 1967년경에는 시멘트 공급이 굉장히 달렸다. 건설 사업이 막 시작됐는데 시멘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설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속에서 1968년 10월, 김성곤의 쌍용양회가 동양 최대 규모라는 동해 공장을 준공했다. 동해 공장 기공식과 준공식에는 모두 박 대통령이 자리했다.

이 공장이 준공된 것 등을 계기로, 1967년에 244만 톤을 생산하던 우리나라 시멘트 업계가 1969년에 가면 무려 3배 가까이 되는 692만 톤을 생산하게 된다. 이렇게 막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그런데 내수 증가율은 둔화되면서 과잉 재고가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여러 자료에 나오는 것처럼, 1970년 김성곤은 박 대통령한테 '큰일 났다. 이 재고 처리를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 이렇게 얘기했다.

그렇게 시멘트 재고 문제가 있을 때인 1970년 4월 새마을운동이 출발한 것으로, 그때는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고 많이 불렀지만, 여러 책에서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1970년 11월부터 이듬해 초까지 농한기에 3만3000여 마을에 마을당 시멘트를 300여 포씩 똑같이 나눠준 것으로 돼 있다. 1972년에는 전국 마을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1만6600개 마을에 시멘트 500포하고 철근 1톤씩을 줬다. 그러니까 시멘트가 풍부했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이 가능했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 운동을 진행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시멘트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게 슬레이트다. 당시 지붕을 개량할 때 초가를 헌 다음 함석 같은 것으로도 지붕을 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슬레이트로 바꿨다. 물론 다른 부분은 그대로 놔둔 채 초가만 헐고 그렇게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다시 말해 겉모습만 초가에서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뀐 것이다. 지금 농촌에 가보면 집들이나 도로가 잘 정비돼 있는 곳이 많은데, 그것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그렇게 잘 정비된 게 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때 아니냐고 잘못 알고 있는 건데, 그렇지가 않다. 대부분은 1980~1990년대에 새로 집을 지었기 때문에 그렇게 상태가 좋은 집들이 생긴 것이다. 도로 같은 것도 그 이후 계속 확장하고 다듬어서 만들어낸 것이다. 거기다가 지금은 마을 꽃까지 참 많이 심어놓지 않았나.

하여튼 슬레이트도 상당한 역할을 했는데, 이건 벽산그룹 김인득 이 사람이 제일 많이 팔아먹었다. 1960년에 15만 매를 생산하던 것이 1965년에 400만 매가 됐고, 이런 식으로 슬레이트 수요가 급증하자 김인득은 월 100만 장을 생산하는 대규모 공장을 세워버렸다. 그렇게 되면서 1970년대에 들어서면 슬레이트도 엄청나게 증가했다. (김인득은 1972년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의 딸(김종필의 처제)을 둘째 며느리로 맞이하며 박정희 집안과 사돈 관계도 맺는다. '편집자')

철강재도 이때쯤 되면 아주 굉장한 양을 생산해내지 않나. 1972년 1만6600개 마을에 시멘트와 함께 철근을 줬다고 앞에서 얘기했는데, 이러한 상황과 관련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농업 정책과 새마을운동을 구별해서 봐야 하는 건 맞지만 어쨌건 양자가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 또한 확실한데, 비료나 농약이나 비닐하우스의 생산량이 이 시기에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에 걸쳐서 그랬는데, 그 점도 새마을운동과 농업 생산력 증가에 큰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야기한 세 가지가 기본적인 요인일 것이다. 난 그렇게 본다.

프레시안 : 북한과 벌인 체제 경쟁 문제도 일정하게 작용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 않나.

서중석 : 거기에 남북 관계도 작용했다고 그때 본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1970년대 초에 남북 관계가 열리지 않나. 그런데 북쪽에 가보니, 지금은 북한이 형편없지만, 당시 북한에서는 어쨌건 초가가 안 보이더라, 이 말이다. 북한에 우월감을 갖기 위해서도 '남쪽의 농촌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정부에서는 더 가질 수 있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은 강력한 군대식 동원 체제라고 할까, 굉장한 관권 동원에 의한 위로부터 동원 체제에 의해 이뤄지지 않았나. 그런데 1950년대 또는 일제 시기보다도 바로 이 박정희 정권 시기에 와서 그러한 것을 더 강력하게 동원할 수 있는 점이 있었다.

그런데 환경 개선 사업은 1970년대 초반에 대충 끝나지만 새마을운동 자체는 오랫동안 시간을 끌게 된다. 그렇게 된 건 뭐니 뭐니 해도 새마을운동이 유신 체제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예컨대 1974년에도 이렇게 얘기했다. 전국 새마을 지도자 대회에서 "새마을운동은 바로 10월유신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실천 도장인 것입니다", 이렇게 유시를 했다. 전에도 말한 것처럼 유시라는 건 참 기분 나쁜 표현인데, 하여튼 1973년 무렵부터는 이제 유신 체제 수호에 새마을운동이 큰 저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에 박 대통령은 굉장한 관심을 가졌던 것 아닌가, 그렇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제반 요인과 상황, 여건 같은 것들이 결합하면서 새마을운동이 아주 정력적으로 추진되는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예순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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