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6년 5월 16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확대회의는 당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기초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통지'를 시달했다. '5.16 통지'로 불리는 이 문건을 통해 이후 10년간 중국은 엄청난 정치사회적 소용돌이에 빠졌고, 문화대혁명의 풍파가 시작됐다.
문화대혁명은 왜 발생했는지에 대해 연구하는 문혁기인설(文革起因說)이라는 연구 분야가 생길 만큼 그 원인이 복잡다단하고 중국에 미친 영향이 컸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정식 명칭이 '무산계급(無産階級)' 문화대혁명인 점을 미루어 보면 적어도 마오쩌둥의 시각에서는 당시 중국의 흐름이 적어도 자신이 지향하는 사회주의 문화가 아니므로 이를 수정할 필요를 느낀 것에서 기인한다.
결국 문혁은 당시 중국에서 사회주의 무산계급 문화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이념적, 정치적 필요에 따라 시작된 정치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세력과 사상을 정리하는 권력 투쟁적 성격으로 흘렀고 정치사회적 기본제도와 전통까지 부정되는 사회혼란의 극치를 보였다.
문화대혁명, 어떻게 발생했나?
문화대혁명의 발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마오쩌둥식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은 소련의 원조를 받으며 사회주의 중국 건설에 매진한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 소련 정권을 승계한 후르시초프는 미국과의 평화공존을 주창했고, 1956년에 열린 소련공산당 20차 대회에서는 스탈린 격하 운동이 전개되었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소련을 수정주의(修正主義)로 비판했고, 소련은 중국을 교조주의(敎條主義)로 비판하면서 이념 분쟁에 돌입했고 급기야 국경분쟁까지 발생하게 된다. 이에 소련은 각종 원조와 기술지원을 중단했고 마오쩌둥은 소련 없이도 중국이 스스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자력갱생(自力更生)을 외치면서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으로 불리는 마오쩌둥식 급진 사회주의 발전모델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58-60년까지 진행된 이 실험은 약 3000만 명의 아사(餓死)자를 발생시킬 만큼 철저히 실패했다.
당내에서는 마오쩌둥을 질책하는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특히 평생의 전우였던 펑더화이(彭德懷)는 1959년 대약진운동을 결산하는 뤼산(盧山) 회의에서 마오쩌둥이 개인숭배를 획책하면서 중국 사회주의 건설 방향을 '좌' 편향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비판을 내놓았다. 여러 가지 악재 속에 마오쩌둥은 주석직을 류사오치(劉少奇)에게 이양하고 자신은 외교와 군사를 관장하는 2선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국내 정치를 장악한 류사오치는 덩샤오핑(鄧小平)과 함께 경제회생을 위한 경제조정 정책을 실시한다. 1961-65년까지 진행된 경제 조정은 기본적으로 물질자극 정책, 즉 인센티브 정책을 활용한 개혁정책이었다. 당연히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던 마오쩌둥에게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비사회주의적 방법이었다. 이에 마오쩌둥은 '중앙문화혁명소조'를 조직해 사상통제를 시도하지만 이 역시 조장이던 펑전(彭眞)의 지지를 받지 못 한다. 이때 마오쩌둥의 문예전위대인 장칭(江靑)의 사인방(四人幇)이 나타난다.
이를 계기로 문예계에서 문화대혁명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유명 역사학자로 북경시 부시장을 지냈던 우한(吳含)의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이 마오쩌둥을 겨냥한 불순한 의도를 가진 반혁명 경극(京劇)으로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명(明)대의 청백리였던 해서(海瑞)가 황제에게 정사를 제대로 살필 것을 진언했다가 파면 당한다는 내용을 줄거리로 하는 이 역사극을 사인방의 한 명이었던 야오원위안(姚文元)이 '반당·반사회주의의 독초'로 비판한 것이다.
이 역사극의 출현을 계기로 마오는 더 이상 반마오쩌둥 정서를 좌시할 수 없게 되었다. 때마침 미국이 참전하는 월남전이 발발해 국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린 마오쩌둥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이 된 것이다. 마오는 당내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류사오치와 그의 추종자들을 수정주의의 길을 걷는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로 규정하고 과거 청산과 사회주의 순수 이데올로기 재건을 목표로 철저한 청산투쟁을 전개한다. 이런 연유로 인해 문화대혁명은 문화와 혁명이라는 두 개의 주제어에도 불구하고 약해지는 권력과 불안한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마오쩌둥식 권력 투쟁의 일환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문화대혁명 10년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는 당시 중국에서 사람을 만날 때 하는 첫 인사말이 되었다. 경색된 사회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 말이다. 여기에 당내 세력이 없던 마오쩌둥은 학생들을 동원하는 우를 범했다. 붉은 이념을 지킨다는 의미의 홍위병(紅衛兵)이 조직되었고, '혁명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명목 하에 부모 및 이웃과 반목하면서 고발이 성행했고, 스승에 대한 마녀사냥도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각지에서 홍위병이 자신의 의도를 벗어나게 준동하자 마오쩌둥은 린뱌오(林彪)의 군사력으로 학생들을 진압했다. 문혁 10년간 중국의 전통 미풍양속은 모두 파괴되었고, 제2의 분서갱유로 불릴만큼 전통에 대한 심대한 파괴가 일어났다. 중앙에서 파견된 혁명위원회가 모든 행정 조직을 접수하는 제도 파괴가 일어났고, 학교는 폐쇄되었으며 중고등학생들은 지식청년으로 분류되어 '상산하향(上山下鄕)'으로 불리는 노동 생산활동에 투입되었다. 66학번부터 76학번까지의 대학생들이 증발해 버렸으니 현대 중국 건설에 얼마나 많은 부담이 되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당연히 중국식 가치를 정립해 세계적 국가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해야 하는 현재의 중국에도 큰 부담이 되고 있다.
50년 지났어도 침묵할 수 밖에 없는 배경
중국 공산당이 지금으로서는 문화대혁명을 평가할 방법이 궁색하다. 문화대혁명은 어떤 의도였든 이데올로기와 국민이 권력투쟁의 도구로 이용된 사건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을 굴기시킨 마오쩌둥에 대한 부정은 자칫하면 공산당에 대한 부정으로 연결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도 같은 고민에 봉착했다. 문혁의 폐해를 극복하고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 당위성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서 마땅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덩샤오핑은 1981년 중국공산당 11기 6중전회에서 말년의 마오쩌둥의 잘못된 좌경적 판단과 린뱌오의 반당 혁명집단과 장칭(江靑) 사인방 반혁명 집단에 의해 전개된 '10년 동란'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마오쩌둥 개인과 중국공산당의 행동지침으로서의 마오쩌둥 사상은 구별해야 하며 마오의 공이 70%, 과오가 30%라는 역사결의를 통과시킨다.
50년이 흘렀지만 시진핑(習近平)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11기 6중전회의 문혁에 대한 평가를 계승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시진핑이 안고 있는 문제는 더 복잡하다. 일부 세력, 특히 여전히 마오쩌둥식 사회주의의 효용성을 강조하는 좌파들은 작금의 사회 양극화 추세 치유를 위해선 문혁 재평가를 통한 사회주의 정신의 함양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문혁에 대한 강조는 최근 권력 장악의 정도가 마오 이상의 권력으로 개인숭배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시 주석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문혁에 대한 직접적인 부정은 공산당의 과오에 대한 인정으로 비쳐져 공산당 통치의 합법성을 잠식할 우려도 있다. 물론 문화대혁명은 다시는 중국에서 이와 같은 무절제하고 폭력적인 상황이 전개돼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일깨워 준 면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현 지도부는 특히 개인권력의 강화와 이에 따른 개인숭배가 문혁의 촉매제였기 때문에 문혁에 대한 논의 재개 자체를 시진핑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는 분위기다. 문화대혁명 발생 50년, 중국이 조용히 지나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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