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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 사변 없었다면 북한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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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 사변 없었다면 북한은 없었다? [박홍서의 미중 관계 돋보기] 서안 사변과 세력 균형
"만약 서안 사변이 없었으면 한반도도 분단되지 않았을 겁니다."

나에게 화청지 안내원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했다. 양귀비가 목욕했다 해서 유명한 화청지(華淸池)는 1936년 12월 12일 서안사변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張學良)은 홍군 토벌 독려차 화청지에 머물던 장제스를 구금하고 국공 합작을 강요한다. 그렇게 2차 국공 합작은 성사되었다.

서안 사변 후 장쉐량은 자신의 충정을 증명한다며 장제스를 따라 난징으로 간다. 그때부터 장쉐량은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니며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가 죽는 1990년까지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인다. 중국공산당이 칭송하는 "위대한 애국주의자" 장쉐량은 그렇게 평생을 살았다.

정말 장쉐량의 서안 사변은 중국 현대사를 바꾸고 또 한반도 역사를 바꿨을까? 그렇다고 보는 논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서안 사변이 없었으면, 마오쩌둥의 홍군은 장제스의 국민당군에게 진작 궤멸당했을 것이고, 그러면 한국 전쟁 때 어떻게 김일성 정권을 살릴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서안 사변 당시 중국을 둘러싼 국제적 상황을 대입해 보면 서안 사건이 없었더라도 지금의 역사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국을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던 미소 양국의 암묵적 공감대가 바로 그 국제 정치적 상황이었다.

▲ 장쉐량이 장제스를 구금했던 화청지. ⓒ박홍서

1917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성립된 사회주의 소련. 제1차 세계 대전에 개입해 영국을 구원하고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로 떠오르던 미국. 세계 체제론을 설파한 이매뉴얼 월러스틴에 따르면, 미-소 양국은 이미 이 시기부터 국제 정치를 양분하기 시작했다. 소련이 사회주의 전파를 외치고, 미국이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 것은 각각 하위 국가들에 대한 일종의 줄 세우기였다.

중국은 미소 양국 모두에게 중요한 국가일 수밖에 없었다. 볼세비키 혁명 직후 서유럽의 혁명전파가 실패하고 오히려 서유럽 국가들로부터 체제 생존을 위협 받던 소련에게는 생존의 배후기지로서 중국의 가치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1921년 중국공산당의 창당과 1924년 쑨원이 이끌던 국민당과의 연대(1차 국공 합작)는 그 산물이었다. 소련이 국민당과의 연대를 '제3세계 식민지 해방'이라는 이념으로 정당화했지만, 소련이 애초 국민당이 아니라 '봉건' 군벌 세력에 줄을 대려 했다는 사실은 현실적 국가 생존이 소련의 최상위 목표였음을 보여준다.

애초부터 대중국 '문호 개방' 정책을 주장했던 미국으로서도 안정적인 대중국 관계는 거의 사활적인 외교 목표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 역시 애초 국민당을 연대 대상으로는 보지 않았다. 미국은 1921년 개최된 워싱턴회의에서 광동 국민당 정부의 특사를 거들떠도 보지도 않았다. 국민당 세력을 중국 내 보잘것없는 일개 정치 세력으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혁명 이념 만큼이나 민족자결주의도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다.

그러던 1927년 국민당이 북벌에 성공하고 중국 내 패권 세력으로 떠오르자 미국은 발 빠르게 새로운 실력자 장제스와의 협력을 모색한다. 국민당의 불평등 조약 타파와 관세 자주권 주장에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던 영국 등 여타 열강들과는 달리 미국은 유화적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1927년 4월 장제스의 상하이 반공 쿠테타는 이러한 상황 변화의 예견된 수순이기도 하였다. 권력 강화를 위해서 자본가들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던 장제스로서는 소련보다 미국의 등에 올라타는 것이 합리적인 행태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서안 사변까지 중국 내에서는 미국이 지원하는 국민당과 소련이 지원하는 공산당 세력이 각축을 벌였다. 물론, 국공 양당의 세력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기 때문에 공산당은 국민당의 토벌 작전으로 고사 직전까지 내몰리기도 하였다.

세력 균형 위해 일본 견제 원했던 소련과 미국

일본의 대중국 침략을 알리는 만주 사변(1931년 9월 18일)은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 일어났다. 만주 사변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1921년 워싱턴 회담까지 미국이 줄기차게 강조하던(그리고 일본이 약속했던) 문호 개방 정책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일본의 중국 침공은 소련의 이익과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만주 지역에 관한 소련의 전통적 이해관계에 비추어 보면, 일본의 세력 확장을 소련은 결코 용인할 수 없었다. 1905년 러일 전쟁의 치욕적 패배도 언젠가는 되갚아 줘야했다.

따라서 미소 양국 모두에게 일본 견제를 위한 '단합된' 중국이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공산당이 대장정을 떠나는 1934년 말에 이미 국민당과의 접촉을 시작하고 공산당에게는 국민당과의 연대를 채근하기 시작한다. 애초 국공 합작에 미온적이던 마오쩌둥은 소련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어 결국 1936년 9월 '핍장항일(逼蔣抗日)'을 선언하며 국민당과의 연대를 공식화하기에 이른다.

서안 사변이 발발하자 소련이 장제스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소련은 코민테른을 통해 국민당과 접촉하고 아울러 공산당에게는 평화적 해결을 독촉하였다. 중국의 최고 실력자 장제스의 죽음은 중국의 정치 상황을 극도로 혼란시켜 일본에게 유리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미국도 소련만큼이나 서안 사변의 평화적 해결을 기대했다. 장제스 석방을 위해 서안으로 날아간 송메이링과 그녀의 오빠 송즈원이 대표적인 친미파였다는 사실은 사건 해결 과정에서 미국의 입장이 그만큼 투영됐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서안 사변과 국공 합작, 구조와 행위가 절묘하게 빚어낸 역사

1937년 중일 전쟁이 전면적으로 발발하자 미국이 그간의 '고립주의'에서 벗어나 중국에 대한 대대적 지원을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 했던 것도 이러한 전략의 연장이었을 뿐이다.

서안 사변과 국공 합작도 여느 정치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구조와 행위라는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을 통해 해석할 수 있다. 중국을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 했던 미소 양국의 세력 균형 전략을 강조하는 것이 구조적 관점이라면, 장쉐량이 내린 '구국의 결단'을 중심에 놓는 설명은 행위의 관점일 것이다.

어떠한 설명이 옳은가? 구조적 관점만 강조한다면 역사는 '어떻든 그렇게 밖에 될 수 없다'는 결정론의 함정에 빠질 것이다. 반대로 행위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역사는 우연한 사건의 파편 덩어리로밖에 보일 수 없을 것이다. 서안 사변이 일어난 지 80년, 그 무대의 배우들은 가고 관점만 남았다. 정말 서안 사변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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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서
한국외국어대에서 중국의 대한반도 군사개입에 관한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덕여대 연구교수 및 상하이 사회과학원 방문학자를 역임하고, 현재 강원대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국제관계 이론, 중국의 대외관계 및 한반도 문제이다. 연구 논문으로 <푸코가 중국적 세계를 바라볼 때: 중국적 세계질서의 통치성>, <북핵 위기시 중국의 대북 동맹 딜레마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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