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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들이 원해 10억엔 '치유금'으로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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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위안부 피해자들이 원해 10억엔 '치유금'으로 받아" 위안부재단 준비위원장 발언 논란…일본 '법적 책임' 면책?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양국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기로 합의한 이후 5개월 만에 재단 설립 준비위원회가 출범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출연하기로 한 10억 엔의 성격에 대해 김태현 준비위원장은 배상금이 아니라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31일 '일본군 위안부 재단설립 준비위원회' 제1차 회의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렸다. 회의 이후 기자들과 만난 성신여대 사회복지학과 명예교수 김태현 준비위원장은 "우리가(한국이) 치유금이라는 명목으로 10억 엔을 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일본 정부가 자금을 출연했기 때문에 '사실상 배상금'이라고 주장했던 그동안의 정부의 설명과 배치되는 내용이다. 특히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무상이 지난해 12월 28일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공동 기자회견을 가진 뒤 일본 취재진을 만나 "국가 배상이 아니다"라고 밝힌 것과 맥을 같이하는 발언이다.

이에 한국 정부가 일본 측으로부터 공식적인 배상을 포기한 것이냐는 질문이 나왔다. 김 위원장은 "배상금을 포기했느냐 아니냐보다는, 문제의 초점은 그동안 일본 정부가 책임 인정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단은 정부 차원의 책임을 인정했고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들의 명예를 존중해주겠다는 차원에서 10억 엔을 출연했다는 것"이라면서도 "이건 배상금으로 보기 어렵다"고 재차 강조했다.

일본에서 출연하는 10억 엔이 배상금인지의 여부는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했느냐와 연관되기 때문에 지난해 합의 발표 당시에도 상당한 논란이 됐던 사안이다.

'배상'은 국가가 잘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상'이나 '치유'는 국가의 잘못이 없어도 손해를 본 국민에게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위안부 피해자들과 지원 단체는 위안부 문제가 일본 '국가'의 잘못이라고 규정하고 이에 따른 '배상'을 요구해왔다.

정부 역시 지난해 위안부 합의에서 명시된 '일본 정부의 책임 통감'과 관련, 그동안 일본이 '도의적'인 책임만을 이야기했지만, 이번에는 이 문구가 빠졌다는 점을 성과로 꼽았다. 즉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명확히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도의적인 책임만 지겠다는 기존 입장에서 한발 양보한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10억 엔은 배상이 아니라고 못 박으면서 정부의 설명과는 달리 일본 정부가 지난해 위안부 합의를 통해 밝힌 책임은 법적 책임이 아닌, '도의적' 책임이라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됐다.

일본 정부가 법적·도의적 책임 중 어떤 책임을 인정했다는 것이냐는 질문에 김 위원장은 "일본이 (예전에는) 직접적으로 위안부에 관여된 적이 없다고 회피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일본 정부가 관여해서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다"고 답했다.

10억 엔의 성격에 대한 질문이 계속되자 김 위원장은 "배상금 질문이 자꾸 나오는데, (제가) 치유금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배상금이 아니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기겠다"고 언급했다.

▲ 김태현 일본군 위안부 재단설립준비위원회 위원장이 31일 오전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첫 회의를 연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는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 외교부 조준혁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10억 엔의 성격에 대한 김태현 위원장의 인식과 정부 인식이 동일하냐는 질문에 "일본 정부가 출연할 10억 엔에 대해 기시다 외무 대신은 지난해 12월 '일본정부 책임, 사죄와 반성의 입장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이행 조치'라고 한 점에 의의가 있다"며 "이를 종합적으로 감안한다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이해하실 것으로 생각한다"고 즉답을 피했다.

위안부 재단,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의 한국판?

정부는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겠다면서 이번 재단 설립을 지난해 위안부 합의의 성과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합의가 발표된 이후부터 이 재단이 지난 1995년 일본에서 발족했던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는 이 재단이 민간 모금이 아닌 순수 일본 정부 예산이 출연됐다는 점을 강조하며, 민간 주도로 이뤄진 국민기금보다 진전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국민기금에도 '지원금'이라는 명목으로 정부의 예산이 일정 부분 투입된 바 있고, 이 예산은 사무처 뿐만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직접 지원금으로 쓰이기도 했다.

또 당시 국민기금에는 지난해 위안부 합의처럼 일본 정부의 명확한 법적 책임이 없었다. 당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일본 총리는 기금을 수령한 이들에게 전해지는 사과 편지를 통해 "도의적 책임을 통감한다"고만 언급했다. 이에 위안부 피해자들 일부는 기금 수령을 거부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재단 설립이 국민기금보다 후퇴한 결과라는 주장도 나왔다. 가해자인 일본 정부가 아니라 한국 정부가 실질적인 사업 집행을 주도하는 형식이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10억 엔을 주면서 법적 책임과 사죄 등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자신들의 책임을 일거에 끝내버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해석이었다.

이번 재단 설립과 예전 국민기금이 실행 주체가 다르다는 것 외에 차이점이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김태현 위원장은 "재단이 일본이 개입해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저희들이 할머니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주체적으로 결정해서 해 나간다. 한국이 주체적으로 이 기금을 운영할 수 있다는 부분이 다르다"고 답했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돈'?

김태현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고령이며 이들이 본인이 사망하기 전에 직접적인 지원을 해달라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피해자를 성실하게 면담하고 그들의 구체적 아픔을 들어봤고 무엇을 가장 원하냐고 물어봤을 때 많은 할머니들이 죽기 전에 직접 지원해 달라는 말씀을 하셨다"며 "가능한 한 빨리 해달라고 했기 때문에 치유금이라는 명목으로 10억 엔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외교부가 지난 1월과 4월 두 차례에 걸쳐 개별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면담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월 면담이 성사된 18명 피해자 중 14명이 한일 위안부 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외교부는 이들이 개별적인 보상을 희망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지난 4월 외교부는 개별 거주하고 있는 18명의 위안부 피해자를 대상으로 면담을 실시했으며, 이번 면담에서도 피해자들은 본인들을 위해 10억 엔이 쓰여야 한다는 의견이 대체적이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면담에서 외교부가 피해자의 직접적인 의견을 청취한 것은 4월 면담을 기준으로 총 3명이다. 나머지는 보호자들과 동석했거나 보호자의 의견을 청취한 것이다. 게다가 정부의 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피해자들조차도 "만족스럽지 않다", "피해 당사자의 동의 없이 합의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등 합의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에 김 위원장이 일부 위안부 피해자들의 의견을 대다수 피해자들의 의견인 것처럼 과대 해석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쉼터와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나눔의 집 등 단체 생활을 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의견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외교부는 개별 거주하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두 번 찾아가 면담을 진행할 동안, 합의에 반대하고 있는 단체 거주 위안부 피해자들은 찾아가지 않았다. 지난해 위안부 합의가 발표된 직후 정대협 쉼터와 나눔의 집에 찾아가 설명한 것이 전부였다.

피해자들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될 수 있으면 빨리 금전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김 위원장의 인식이 한쪽으로 편향돼있다고 지적할 수 있는 대목이다.

▲ 이용수(왼쪽)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정대협 쉼터를 찾은 임성남 외교부 제1차관에게 항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더구나 정대협 쉼터와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피해자 10명은 지난해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 중심의 해결방식이라는 국제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면서 지난 1월 28일 유엔에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들은 당시 서울 연남동에 위치한 위안부 피해자 쉼터 '평화의 우리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합의가 국제 인권 기준에 비춰봤을 때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 인정 및 공식 사과로 받아들이기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처럼 지난 위안부 합의를 반대하는 피해자가 있는 상황에서 이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이냐는 질문에 김 위원장은 "단체에 계신 (피해자) 분들은 접촉이 사실 어려웠다"며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그들과 대화해 나갈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그 때 대화의 중심은 이렇게 돼야 한다고 본다"며 "(피해자들이)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데 '세월아 가거라' 하고 놔두고 다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들어보면 피해자 단체들도 아마 생각을 다시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가 생존해있는 42명의 피해자 문제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왔다.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김창록 교수는 "위안부 문제는 돌아가신 분들을 포함해서 피해자 전체가 일본에 의해 '보편적 여성 인권'이 침해당한 문제"라면서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왜 이렇게 왜소화시켜서 서둘러서 덮어 버리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피해자들이 국민기금까지 거부하면서 요구해왔던 것이 죽기 전에 돈 달라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화해와 치유' 재단? 누구와 누가 화해를 하나

한편 김태현 위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설립 준비중인 재단 이름에 대해 "아직 가칭이긴 하지만 '화해 치유 재단'"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이 '화해 치유 재단'은 일본이 개입해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주체적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위안부 피해자와 가해자인 일본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일본의 사죄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법적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재단 이름에 '화해'를 넣는 것이 누구를 위한 화해인 것이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김창록 교수는 "화해를 하려면 상대가 있어야 하고, 치유를 하려면 상처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그걸 다 덮고 화해와 치유가 되나"라면서 "이 모든 것을 덮고 가자는 것이 지난해 위안부 합의였다. 정부가 이러한 모든 것을 덮고 일방적으로 재단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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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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