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체제 삼성'이 암초를 만났다.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총수 일가의 이익을 위해 삼성 측이 의도적으로 삼성물산 주가 하락을 유도했을 수 있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당시 합병은 삼성물산 주가가 낮고 제일모직 주가가 높은 시점에 맞춰서 진행됐다. 그래서 삼성물산 주주들이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 당시 삼성물산 주가는 이 회사가 지닌 자산 가치를 고려할 때 너무 낮다는 지적이 나왔었다. 법원도 이런 지적에 동의했다.
삼성물산 주가가 떨어질 당시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주식을 꾸준히 팔았었다. 그래서 이상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법원도 같은 입장이다. 법원은 국민연금의 이 같은 주식 매도에 대해 "정당한 투자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제기했다.
요컨대 법원은 삼성물산의 실적 조작 및 국민연금의 주가 조작 가능성까지 제기했다. 물론, 아직은 가능성이다. 그러나 그간 물밑에서 돌던 의혹을 법원이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반면, 삼성물산을 정점으로 둔 지배구조를 만들어 온 '이재용 체제 삼성'은 정당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지난달 31일 서울고등법원 민사35부가 내놓은 판결문에 담긴 내용이다. 옛 삼성물산 지분 2.11%를 보유한 일성신약 등이 제기한 주식매수청구 가격 변경 소송에 대한 판결인데, 재판부는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주식매수청구란 회사의 인수 합병에 반대하는 주주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인데, 1심 법원은 "삼성물산이 제시한 주식매수청구 가격이 적정하다"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2심 재판을 진행한 서울고등법원 민사35부는 "삼성물산이 합병 당시 제시한 주식매수청구 가격이 너무 낮다"라는 일성신약 등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1심과 달리, 주식매수청구 가격을 올리라고 결정했다.
이런 결정에 대해 2심 재판부는 삼성물산이 지난해 합병 결의 이전에 의도적으로 주가를 낮추려는 동기가 있었고, 그럴만한 정황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합병 결의 직전인 지난해 5월22일 삼성물산 주가(5만5300원)는 지난해 1월2일(6만700원)보다 8.9%나 하락했다. 당시 다른 건설업체 주가는 대폭 올랐던 것과 대조적이다.
왜 삼성물산 주가만 떨어졌을까. 2심 재판부는 삼성물산 측이 주가를 높일 수 있는 호재를 일부러 숨기거나 발표를 미뤘기 때문이라고 봤다. 다른 건설사들은 지난해 상반기 주택 경기 활황에 맞춰 주택 공급을 크게 늘렸고, 그래서 이익을 봤다. 하지만 삼성물산은 주택 공급 시기를 합병 결정 뒤로 미뤘다는 게다. 또 2조 원 규모의 카타르 복합화력발전소 공사 수주 사실도 상반기 내내 숨기고 있다가 합병 뒤에야 공개했다. 지난해 상반기에 삼성물산이 진행하던 공사를 삼성엔지니어링에 넘겨주기도 했다. 실적 조작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이유로 2심 재판부는 "삼성물산 주식의 시장 가격이 실제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다"라고 봤다. 그래서 2심 재판부는 "삼성물산의 실적 부진이 이건희 회장 등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에 의해 의도됐을 수도 있다는 의심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지난해 상반기 삼성물산 주가가 떨어진 배경에는 국민연금의 꾸준한 삼성물산 주식 매도도 한몫했다. 이에 대해 2심 재판부는 "(지난해 상반기)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주식 매도가 정당한 투자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이 주가 조작에 가담했을 수 있다는 의혹이다. 실제로 국민연금은 지난해 3월26일 삼성물산 주식 11.43%(1784만8408주)를 갖고 있었지만 합병 결의일(지난해 5월26일) 직전 거래일인 지난해 5월22일까지 계속 주식을 팔았다. 보유 비율은 9.54%(1490만6446주)로 줄었다.
이번 판결이 확정돼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자체가 취소되지는 않는다. 삼성물산 합병 무효 소송은 별도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판결이 삼성물산 합병 무효 소송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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