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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코 납작하게 만든 또 하나의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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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 코 납작하게 만든 또 하나의 12·12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71> 유신의 몰락, 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프레시안 : 1978년 12월 12일에 치러진 12·12총선은 박정희 정권이 종말로 치닫게 되는 분수령으로 꼽힌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박정희 유신 체제의 몰락은 12·12총선, 국회의원의 3분의 2를 선출하는 선거였는데 이 선거에서 패배한 것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난 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 1978년 12·12선거를 중시하고 있다.

유신 체제 시기에 그래도 선거에 가까운, 선거 모양새를 하고 있는 선거가 있다면 이 12·12선거라고 얘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전에 치러진, 그러니까 1973년 2월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는 말이 선거이지 엄혹한 유신 체제 초반 분위기 속에서 선거 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우선 입후보 자체가 많은 부분 중앙정보부의 통제 아래 이뤄졌다. 그래서 유신 체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로 출마했다. 야당의 경우에도 유신 체제를 지지하겠다고 하거나 적어도 반대하지는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다 그런 사람들이었던 건 물론 아니지만, 그런 사람들이 다수 출마했기 때문에 선거 같은 모양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에 비하면 12·12선거는 그래도 선거의 모양을 어느 정도 보여줬다. 또한 그러한 선거를 치르니까 바로 민심의 이반을 잘 보여준 선거가 됐다. 민심 이반을 가져온 핵심 요소는 장기 독재 그리고 경제 실패였는데, 그런 점에서도 이 선거는 아주 중요하다. 자세히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공화당의 사실상 참패로 막을 내린 12·12총선

프레시안 : 12·12총선 결과는 어떠했나.

서중석 : 유신 체제 제2기를 맞기 위해 치러진 이 선거에서 공화당은 31.7퍼센트밖에 득표하지 못했다. 그런데 제1야당인 신민당은 32.8퍼센트로 공화당보다 1.1퍼센트포인트 더 많이 득표했다. 거기에다가 신민당보다 선명성을 더 강조한 민주통일당 득표율 7.4퍼센트를 합하면 야당이 8.5퍼센트포인트나 많이 득표하는, 유신 체제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졌다. 무소속 득표율은 28.1퍼센트였는데, 여기엔 친여 쪽도 있고 친야 쪽도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하나로 얘기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원래 이 선거를 치를 때 공화당에서는 자신들이 40퍼센트를 득표하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가서는 6:4로 신민당을 누르겠다고 나왔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역전패였다. 공화당은 1961년 5·16쿠데타 이후 치러진 총선 가운데 가장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고, 의석 숫자도 68석으로 그때까지 공화당이 치렀던 총선 중에서 가장 적었다.

한 신문은 이 선거 결과를 '공화 퇴조, 신민 강세, 무소속 부상(浮上)'으로 표현했다. 이때는 한 선거구에서 두 명을 뽑았다. 그래서 한 선거구에서 여당, 야당이 한 명씩 되기 마련이었는데, 수도권과 대도시에서 여야 후보가 현격한 표차를 보였다. 예컨대 부산의 경우 5개 선거구에서 10명을 뽑았는데 공화당 4명, 신민당 5명, 무소속 1명이 됐다. 그런데 공화당은 어느 한 곳에서도 1위를 하지 못했다. 또 이렇게 당선된 공화당 4명과 야당 당선자들의 표차가 현격했다.

1963년 총선 이래 공화당이 항상 신민당을 비롯한 야당을 결과에서 압도했는데 이 선거에서는 농촌에서도 공화당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지역이 여러 군데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대도시에서 신민당이 47.7퍼센트나 득표한 데 비해 공화당은 27.1퍼센트로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얼마만큼 공화당이 미움을 받고 있는가, 다시 말해 유신 정권이 미움을 받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제3공화국에서 계속해서 국회의장(1963~1971) 직위에 있었고 12·12선거가 치러질 때에는 공화당 의장 서리였던 이효상의 얘기에서도 이 점을 느낄 수 있다. 이효상은 1973년 유신 체제에서 첫 번째로 치러진 선거에서는 7만6000여 표를 얻었는데 1978년 이때는 그보다 훨씬 적은 5만여 표를 얻었다. 그러면서 "내 정치 생활 중에서 이번처럼 고전한 적은 없었다", 이렇게 얘기했다.

프레시안 : 선거 운동 과정은 어떠했나.

서중석 : 정치 없는 선거 운동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신 체제에 대해 얘기를 할 수가 없는 선거 운동이었다. 국회의원 선거야말로 정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선거인데, 조금만 '잘못' 말하면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구속될 수 있었다. 긴급 조치 9호가 맹위를 떨치는 상태에서 치러진 선거였기 때문에 유신 체제 문제, 권력 문제 같은 걸 쟁점으로 삼을 수 없었다. 또 선거 운동에서 마이크 방송도 할 수 없어 선거 분위기가 겉으로는 착 가라앉았다고 당시 신문에 쓰여 있다. 이런 여러 면에서 정치가 없는 선거 운동 아니냐고 얘기할 수도 있는데, 놀랍게도 정치 의식이 강하게 담긴 선거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신문을 보면, 과거와 같은 정도의 조직적인 관권 개입은 없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선관위가 공화당 정권의 재벌 편향 정책을 겨냥해 인기를 모은 신민당의 선거 구호를 선거 공보 등에서 직권 삭제하겠다고 밝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일 같은 게 있긴 했지만, 이전의 다른 선거들과 달리 권력과 정부 기관이 여당 후보 당선을 위해 직접적으로, 광범위하게 개입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얘기다. '어차피 국회의원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지명하는 유정회가 차지하니 선거에서 3분의 1만 더 확보하면 모든 걸 할 수 있다. 설마 3분의 1을 확보 못하겠느냐', 그런 생각을 박정희 쪽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금품 수수 또는 금권 선거라고 얘기할 정도로 돈을 많이 쓰는 타락 양상은 나타났다.

이 선거 이후 김영삼은 유신 체제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발언을 할 때마다 '여당은 1.1퍼센트포인트 졌기 때문에 정권을 내놓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게 된다. 물론 엄밀히 얘기하면 공화당은 복수 공천을 하지 않고 신민당은 일부 지역에 복수 공천을 했다는 점에서 꼭 1.1퍼센트포인트 차이는 아니지 않느냐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었고, 이걸 여당 쪽에서 주장했다. 그러나 유신 체제, 그것도 긴급 조치 9호 아래에서 1.1퍼센트포인트 차이가 났다는 점에서 김영삼 발언은 굉장한 호소력을 지닐 수 있었다.

▲ 12·12총선에서 신민당이 득표율에서 공화당을 앞섰다는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78년 12월 13일 자 1면. ⓒ동아일보 갈무리


"'공화 위에 재벌 있다'에 속수무책"…경제 실패로 패배 자초한 유신 정권

프레시안 :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이렇게 야당이 여당을 이긴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한 신문은 12·12선거 투표율이 77.1퍼센트로 1973년 선거 때 투표율(72.9퍼센트)보다 훨씬 높고, 박정희 정권 전 기간 중 투표율이 가장 높았던 총선이었다고 썼다. 그러니까 농촌에서도 농민들이 맘먹고 이 선거에 참여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겠느냐, 그리고 5년 만에 국회의원 선거 투표를 하는 것이었다는 점도 작용해서 투표율이 높은 것 아니었느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다. 국회의원을 뽑는 건 '통대'를 선출하는 것하고는 다르지 않나.

그렇지만 이 선거를 잘 들여다보면 유권자의 참여에 의한 비판 의식이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박정희 유신 독재와 장기 집권에 대한 염증, 경제 실패에 대한 불만 같은 것이 참여에 의한 비판 의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 점은 여러 신문에서 '장기 집권 정당으로서 이미지 쇄신에 실패하면서 공화당이 패배했다', 이렇게 해석한 데서도 나타난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런 놀라운 결과가 나온 것은 유신 경제 정책의 실패와 유신 체제의 도덕성 파탄에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는 야당이 승리한 이유로 10대 총선을 앞두고 부가세, 즉 부가가치세를 강행한 것, 그리고 노풍 피해, 3대 스캔들이라고 불린 스캔들, 재벌 비호 인상을 준 여러 법안 통과를 꼽았다. 3대 스캔들은 3선 개헌(1969년) 때 야당 의원이었다가 변절해 여당으로 들어가 다시 의원이 된 뒤 바로 이 선거가 있기 얼마 전에 여고생 추문 사건의 주역이 된 성낙현 스캔들, 압구정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경북도 교육위원회 교사 자격증 부정 발급을 말한다. 세 번째 사안의 경우 경북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 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그중에서도 특히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은 다수의 서민들에게 크게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이 중 성낙현 스캔들 같은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거의 다 박정희 유신 체제의 경제적 무능 또는 경제 정책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예컨대 부가가치세의 경우 말이 부가세제이지 실제로는 인정(認定) 과세를 혹독하게 매겨 특히 중소 상인이나 기업인들에게 세금 공포증을 유발하고 물가 상승을 불러왔다. 그 결과 이 선거뿐만 아니라 1979년 부마항쟁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부가가치세 도입 초기에는 세무서가 사업자별 개별 사후 심리 과표를 제시한 다음 그 이상의 금액을 신고하도록 권장했다. 이로 인해 일선 세무서에서 증액 신고를 강요하거나 접수를 거부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이와 관련, 매일경제(1978년 6월 2일 자)는 "부가가치세 시행 이후 세무 당국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한 인정 과세가 납세자들로부터 가장 큰 불만의 대상이 되고 있어 부가세 조기 정착의 저해 요인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한 이해에 조세심판소에 접수된 부가가치세 심판 청구 건수의 약 85퍼센트가 '세무 당국이 결정한 인정 과세가 부당하다'며 신청한 사례라고 전했다. 이에 앞서 1978년 4월 공화당 소속인 국회 재무위원장이 국세청장에게 부가가치세 시행 과정에서 인정 과세를 지양할 것을 촉구하는 등 여권에서도 이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결국 이해 9월 1일 국세청은 부가가치세 인정 과세를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성난 민심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편집자) 그에 더해 재벌 위주의 중화학 공업화 추진은 재벌 비대화, 정경유착, 심한 빈부 격차를 유발했다.

프레시안 : 재벌 편향 정책, 그로 인한 빈부 격차 심화는 이 선거 결과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서중석 : 재벌의 비대화와 그 속에서 드러난 심각한 빈부 격차가 선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선거 구호 문제에서도 알 수 있다. 신민당은 선거 구호를 "진짜 민심 보여주자"와 "공화 위에 재벌 있고 신민 위에 서민 있다", 이렇게 정했다. 그런데 "공화 위에 재벌 있고", 이게 인기가 아주 좋았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못살겠다 갈아보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처럼 1978년 이때는 "공화 위에 재벌 있고", 이 구호의 인기가 대단했다. 이 구호가 인기를 끌어서 신민당에서 계속 이 구호를 사용하기로 한 데서도 그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공화당은 신민당의 이 구호가 선거법에 저촉되는 것 아니냐고 중앙선관위에 질의했다. 중앙선관위는 "공화 위에 재벌 있고" 부분을 발표, 유포하는 건 선거법에 저촉된다며 이 구호를 선거 공보 등에서 삭제하겠다고 밝혔다. 선거법이 금지한 특정 정당 비방에 해당한다는 해석이었다. 그러면서 중앙선관위는 "공화"라는 단어를 빼고 "권력 위에 재벌 있다"라고 하는 건 괜찮다고 밝혔다. 신민당은 "선관위는 마치 공화당의 동생과도 같은 기관 노릇을 하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 구호를 둘러싼 논란은 재벌 편향 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이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에 매우 부담스러운 사안이었음을 보여준다. '편집자')

이 점은 청와대에서도 인정했다. 백두진 회고록에 따르면 청와대 비서실에서 작성한 선거 분석 보고서가 있는데 그 보고서에서도 그런 것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걸 보면 "수도권에서 여야 후보의 현격한 표차", 여기에도 현격한 표차라고 돼 있는데, "신인 무소속 진출 등은 부가세, 물가고, 노풍 피해, 각종 스캔들 등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방대한 조직과", 이건 공화당이 갖고 있던 그야말로 방대한 조직을 가리키는데, "국내외적으로 공인된 유신 치적이 있다"고 써놓았다. 이처럼 "공인된 유신 치적이 있다"고 적어놓기는 했는데, 하여튼 "그렇지만 신민당이 내놓은 '공화 위에 재벌 있다', 이런 야당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시종 수세에 몰렸음. 도시 서민층 거의 다 여당을 외면한 듯한 결과", 이렇게 보고서에 쓰여 있다. 신민당은 이 선거 이전부터 경제 실정, 특히 재벌 비대화, 부정부패, 빈부 격차를 거론하며 박정희 유신 정권을 계속 공박했다.

농민들도 이 선거에서 야당을 많이 찍었다. 노풍 피해는 자연재해 때문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전에도 얘기한 것처럼 이것도 박정희의 실책이었다. 이 시기에 박정희는 식량 증산을 직접 독려했다. 새로운 다수확 볍씨로 신품종 노풍이 나오자, 박정희 정권은 충분한 시험 기간도 거치지 않고 성급하게, 전국적으로, 그것도 거의 강제적으로 이걸 심도록 권장했다. 그런데 1978년에 바로 도열병이 돌아서 피해 농민이 속출했다. 그러면서 이농 현상이 또 크게 일어났다. 그러자 신민당은 노풍 벼 피해 전액 보상을 촉구했다. 박정희 정권은 다음 해부터는 노풍을 재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경제 정책 실패, 성급하게 노풍을 심게 한 것이 농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청와대 비서실의 선거 분석에는 이런 내용도 들어 있었다. 공무원의 무사안일한 풍조, 대민 봉사에서 불친절, 업무 추진에서 소극적인 자세 등 관료주의라고 볼 수 있는 것과 함께 관료들의 권위주의적, 위압적 고자세 등도 이 선거에서 불리하게 작용했다고 돼 있었다. 이런 것들은 박정희 유신 독재와 장기 집권의 또 하나의 큰 병폐였다.

박정희는 경제 실정에 책임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오월의봄
프레시안 : 12·12선거 후 박정희 정권은 경제 문제와 관련해 어떤 모습을 보였나. 분노한 민심을 온전히 받아들여 경제 운용의 기조, 큰 틀을 바꿀 만한 정권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민심을 반영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아니었나.

서중석 : 이 선거 결과가 보여준 대로 박정희는 경제 실정에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야당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권력 내부에서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중앙정보부와 공화당, 경찰은 정보 보고에서 공화당이 총선에서 진 건 김정렴 비서실장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남덕우, 재무부 장관 김용환, 농수산부 장관 장덕진의 경제 정책이 잘못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정렴, 남덕우, 김용환은 소위 유신 경제의 3인 체제로 불리던 사람들이다. 박정희는 김정렴을 비서실장에 계속 두려고 했지만, 김정렴 회고에 따르면 경제 시책을 잘못 편 책임을 물어서 이 사람들을 인책해야 한다는 같은 내용의 보고가 3번 올라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박정희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됐다. 그러나 경제 쪽만 인책하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니까 11개 부처 장관을 교체, 개각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처리했다. 그래서 9년 3개월 만에 경제통인 김정렴이 비서실장에서 물러나고 9년 2개월 동안 재무부 장관에 이어서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았던 남덕우도 물러났다. 서강학파의 우두머리였던 남덕우가 물러난 건 박정희 유신 경제 정책이 잘못됐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유신 체제 제2기에 들어가면서 고도성장 비판론이 일정하게 먹혀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인책과 별개로 경제 정책 기조 변화가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고도성장 비판론이 힘을 얻었다는 정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프레시안 : 이 선거 결과에는 정치권에 변화를 촉구하는 의미도 명확히 담겨 있지 않았나.

서중석 : 유신 경제의 책임을 묻는 것과 함께 12·12선거 결과가 얘기하는 아주 중요한 것은 정치에 대한 참여 의식 또는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 의식과 민주화에 대한 기대, 열망 같은 것이 이 선거에서 나타났다는 점이다.

한 신문은 "국회가 이제 다소나마 정치적 색채를 더 가질 것이다", 이렇게 아주 조심스럽게 표현했다. 이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신민당에 건전한 견제 세력의 역할을 기대했다고 쓴 신문도 있다. 심지어 경향신문조차 '야당에 아직도 여당을 견제하라는 기대감이 있다는 것을 이 선거는 보여주고 있다'는 식으로 써놓았다. 요즘과 달리 이 당시 경향신문은 서울신문과 함께 어용 신문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러면서 경향신문은 "여야 밀월은 이제 어려울 듯", 그러니까 이철승의 신민당과 유신 체제의 밀월은 이제 어려울 것 같다면서 "정치 활성화 바람이 일는지"라고, 그러니까 그게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식으로 써놓았다.

이 선거에 대해 각계 인사들이 평한 것을 보면 한 변호사는 "정치 활성을 바라는 국민의 목마름의 표현"이라고 말했고 한 소설가는 "민주 정치에 대한 국민의 절실한 염원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까지 얘기했다. 외신도 비슷했는데, 예컨대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은 "현 체제에 대한 불만이 허용된 범위 내에서 분출한 것"이라고 이 선거에 대해 썼다.

문제는 야당이 이 선거를 겪으면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하는 점에 있었다. 신민당은 이 선거에 대해 "긴급 조치", 이건 긴급 조치 9호를 가리키는데 "관권, 금권 난무 속에 이러한 결과를 주목한다"고 하면서 의회 정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평화적 정권 교체의 기틀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무엇보다도 야당에서 뭔가를 할 만한 건 김영삼 쪽이었는데, 김영삼이 이 선거를 계기로 당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는 평이 나왔다. 김영삼은 "이번 선거는 지나친 금권 선거, 타락 선거이지만 앞으로 할 일은 민주 회복과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한 노력이다"라고 하면서 민주 회복을 위해 싸우겠다는 의사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미국·일본·대만 특사도 오지 않은 쓸쓸한 제2기 체육관 대통령 취임식

프레시안 : 오늘날 많은 사람은 12·12 하면 전두환 일당의 12·12쿠데타를 우선 떠올릴 것이다. 1978년 12·12총선이 유신 독재 몰락의 문을 연 것과 정반대로, 1979년 12·12쿠데타는 유신의 망령을 변형된 모습으로 다시 한국 사회에 불러들였다. 역사적 의미는 상반되지만 두 개의 12·12 모두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오면, 12·12선거 후 박정희는 두 번째로 체육관 대통령에 취임한다. 취임식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12·12선거를 그런 식으로 치르고 나서 열린 취임식이었기 때문에도 두 번째 체육관 대통령 취임식이 퇴색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다른 측면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요소가 있었다.

12월 27일은 제9대 대통령, 유신 체제로는 제2기 체육관 대통령 취임식이 있는 날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날을 임시 공휴일로 정하고 야간 통금도 해제했다. 전국적으로 국기 게양도 하도록 했고 고궁, 어린이대공원 같은 것도 무료로 개방했다. 지하철본부에서는 기념 승차권을 발매했고 전매청에서는 기념 담배, 체신부에서는 기념우표, 총무처에서는 기념 메달을 만들어서 돌렸다. 각지에 경축 탑을 세우고 건물마다 대형 현수막도 걸게 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는 4일에 걸쳐 경축 공연을 했다. 또 서울에서도, 지방에서도 밤에 불꽃놀이를 하도록 했다.

그렇지만 대통령 취임식에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심지어 자유중국(대만)에서도 특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다만 일본에서 기시 노부스케가 한일협력위원회, 한일의원연맹 등에 속한 사람들을 인솔해서 온 것 정도였다. 기시 노부스케를 포함해 12명이었는데, 이 사람들을 외국 축하 사절단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하여튼 그 정도가 왔다. 쓸쓸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취임식도 장충체육관에서 40분 만에 딱 끝내버렸다. 40분 만에 모든 걸 끝내버린 이것도 너무 싱겁지 않느냐는 얘기가 나올 만한 상황이었다. 그날 저녁 박정희 신임 체육관 대통령은 자녀들과 함께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축하 공연에 갔는데 거기서 들은 곡 중 하나가 국악 '장춘불로지곡'이었다. 오래오래 살라는 뜻인데, 그 곡을 들었다.


▲ 1978년 12월, 박정희 정권은 두 번째 체육관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광화문 네거리 등 곳곳에서 경축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장춘불로지곡'을 들은 지 1년도 안 돼 박정희는 10·26을 맞게 된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다시 돌아오면, 박정희 정권에 밉보여 감옥에 갇힌 이들 중 취임식에 맞춰 풀려난 사람은 없나.

서중석 : 대통령 취임식 날 김대중이 풀려나는데, 마치 이것이 경축식보다 더 돋보이는 일인 것처럼 쓴 신문도 있었다. 김대중은 이날 새벽 1시 55분 형 집행 정지로 가석방됐다. 감옥소에 들어간 지 2년 9개월 만인데, 이 사람은 1973년 일본에서 납치된 후 소위 1971년 선거 때의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입건됐다. 그러다가 1976년 3·1 명동 민주 구국 선언 사건으로 구속돼서 서울고등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도 그게 그대로 인정돼 계속 감옥소에 갇혀 있었다.

김대중은 이날 안 나오려고 했다고 한다. 동아일보를 보면 이렇게 돼 있다. "교도소라면 나오지 않았을 것인데 병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왔다." (진주교도소에 수감됐던 김대중은 이때 지병 악화로 서울대병원에서 교도관 감호 아래 치료를 받고 있었다. '편집자') 취임식 전날인 26일 저녁에 '다음 날 새벽 2시에 나가라'고 당국이 이야기하기에 "도둑이 아닌 다음에야 밤에 나갈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거부한 것이다. 27일 새벽 1시 반쯤 당국은 김대중한테 나가라고 했다. 김대중이 이를 거부하자 당국은 김대중을 강제로 끌어내려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김대중이 나오게 된 것이다.

김대중 석방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박정희의 정상 회담을 열기 위한 타협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박정희 체육관 대통령 취임식 때 풀려난 사람들이 좀 있긴 하지만, 김대중을 빼놓고는 널리 알려진 재야인사 중에서 석방된 사람은 없었다. 예컨대 이 시기에 김대중과 더불어 대표적인 정치범으로 얘기되던 김지하의 경우 감형은 됐지만 석방되지는 않았다. 하여튼 정상 회담 성사를 위해 박정희가 김대중을 석방한 것이었는데, 김대중이 다음 해 5월 30일에 치러지는 야당 총재 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줄은 이때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대중 석방에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에서도 오히라 마사요시 수상이라든가 언론에서 일제히 환영의 뜻을 표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일흔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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