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찍었던 사진들이에요."
그곳으로 가기 전 기화 작가가 사진 몇 장을 건넸다. 익숙한 것이 먼저 보였다. 낯익은 것을 먼저 발견하는 자연스러운 시선이었다. 오죽이나 눈에 익어서 시야를 가린 조형물과 멀찍한 거리 따위는 그 기업의 로고와 입구를 알아보는 데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야 보였다. 거북이 등을 닮은 비닐 천막과 거울 기둥에 비친 사람들이 말이다. 나는 그 모습을 내게 익숙한 것들을 다 알아본 후에야 겨우 보았다.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차들이 꼬리를 무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다. 가을과 겨울이 지나갔고 어느덧 여름이 봄의 뒤꿈치에 붙어 따라왔다. 작년 가을 강남 한복판 고층 빌딩 아래에 여섯 장의 파레트를 깔고 자리를 만들었다. 춥고 궂은 날엔 비닐을 둘렀고 볕이 강한 날은 파라솔 아래 둘러앉았다. 거리를 지나가는 수천 개의 발걸음을 머리맡에 이고 거리잠을 자기 시작한지도 어느덧 260여일이 지나고 있었다.
사람들의 무관심한 발길보다 괴로운 것은 24시간 내내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저 '눈'이다. 저들을 향해 하루도 쉬지 않고 말을 걸고 있지만 지켜보는 자들은 답이 없다. 감시카메라는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배제 없는 보상, 철저한 재발방지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깨진 스티로폼을 새 것으로 바꾸는 것과 비오는 날 비닐을 두르는 것, 그늘을 만들 파라솔을 세우는 것에만 관심을 보였다.
여기는 강남역 8번 출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 꾸려놓은 작은 농성장에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사람들이 있다. 2007년 3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하며 삼성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졌다. 삼성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반올림'의 활동도 그와 함께 시작됐다. 올해로 벌써 9년째다.
아버지는 고무신 안에서 피어오른 꽃들을 살뜰히 보살핀다. 이 꽃을 보러 속초에서 서울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온다. 이 꽃들 중에 아버지의 딸 유미가 있기 때문이다. 9년 전 1명이었던 피해자 수가 222명으로 늘었고, 그중 76명이 사망했다. 모두 삼성전자 반도체·LCD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다. 화사한 얼굴로 농성장을 둘러싸고 있는 76개의 고무신 꽃들이 실은 떠난 이들의 얼굴이었다. 안타까운 죽음을 꽃을 피워 기억하려는 반올림의 마음씀이 애달프다.
2014년 11월, 삼성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조정위원회(조정위)를 통해 처음으로 '대화'의 가능성이 열렸다. 삼성, 반올림, 삼성직업병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가 세 주체였다. 그리고 이듬해 조정위의 권고안이 나왔다. 삼성의 공익법인 설립을 통한 보상 및 재발방지대책 수립이었다. 그러나 삼성은 조정위의 권고안을 무시한 채 자체적인 보상위원회를 꾸려 일방적인 보상을 실시하려 나섰다. 그 과정에서 반올림은 배제됐고 피해자의 진심에 가닿는 사과도 물론 없었다. 반올림이 노숙농성장을 꾸린 이유다.
"해결, 마무리, 합의, 최종타결."
속보가 쏟아졌다. 9년 간 쌓인 피로가 단숨에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저 이야기는 반올림의 목소리가 아니다. 올해 초 반올림은 삼성과 사과와 보상을 제외한 재발방지대책에만 합의했다. 반올림이 요구한 사과와 보상 문제는 삼성의 거부로 답보상태였지만 피해자가 더 늘어나는 상황을 막는 것이 중요했다. 쏟아져 나온 속보에서 2개의 의제 해결이 남았음을 알린 곳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세상은 삼성직업병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곳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래서 매일 밤 이어 말한다. 발전기를 돌려 겨우 밝히는 작은 불빛이지만 그 빛 아래로 사람들이 모인다. 그들과 함께 안전한 노동환경과 노동자의 인권에 대해 말한다. 기업과 노동자가 함께 사는 건강한 사회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가끔 노래도 하고 영화도 보고 책도 함께 읽는다. 반올림이 마련한 좁은 자리를 굳이굳이 찾아 들어와 앉아주는 엉덩이들이 있어서, 그 몸들이 만들어내는 빽빽한 밀도가 든든해서 버틴다. 거리를 오가며 작은 눈인사로 아는 체 하는 시민들의 지지와 끼니때마다 도시락을 싸들고 오는 사람들의 정성으로 농성장의 하루하루가 쌓인다.
내가 눈에 익은 것들만 알아보며 사는 사이 많은 노동자들의 건강한 삶이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낯선 풍경을 외면하는 사이 반올림은 직업병이라는 비극을 멈춰보려고 몸부림 치고 있었다. 농성장을 나와 집에 가는 길, 다시 돌아본다. 처음엔 쉬이 알아보지 못했던 그들의 자리가 보인다. 빌딩이 화려하게 들어선 강남 한 복판, 이곳에 세운 비닐천막은 분명 초라하다. 그러나 이 비닐 등껍질을 두른 반올림이 삼성이라는 태산을 등에 이고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노동자의 인권과 건강이 지켜지는 세상으로 그들과 함께 가려고 온몸을 거리로 내던져 놓고 있다.
이 미련한 거북이들이 걷기를 멈추지 않는 한, 삼성직업병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바로 가기 : )은 2015년 7월에 출범한 시민 단체입니다. 흩어져 있는 사회 진보 의제들을 모아 소통하고 공동의 지혜를 그러모으는 장을 만들어보려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는 많은 이가 외면하고 잊어가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 연재입니다. (필자)
<1> '기억'을 기억하다 : "진실을 요구하는 일에는 '강단'이 필요하다"
<2> '기억'을 기억하다 : "현실이 이러니 우리가 할 말 없지요"
<3> '기억'을 기억하다 : "4.11 총선에서 10만3811표 얻었어요"
<4> '기억'을 기억하다 : "세월호 특위, 이번이 끝이 아닙니다"
<5> '기억'을 기억하다 : 사카에서 만난, '밀로의 비너스'
<6> '기억'을 기억하다 : "삼풍 무너져도 정부 책임 생각 안 했죠"
<7> '기억'을 기억하다 : "54.5세 국회의원은 '헬조선' 못 바꾼다"
<8> '기억'을 기억하다 : 그는 왜 '난민'이 새겨진 방수 옷을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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