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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가르침 따른 '죄'에 철퇴 휘두른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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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예수 가르침 따른 '죄'에 철퇴 휘두른 박정희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76> 유신의 몰락, 일곱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프레시안 : 1970년대 노동 운동은 종교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유신 정권 말기에는 그 부분을 겨냥한 공안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나.

서중석 : 국가보위법 등으로 극단적으로 탄압하고 유신 체제를 만들어 억압하는데도 민주 노조 운동은 계속 일어났고 농민 운동도 기지개를 켰다. 그러자 유신 정권은 1979년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을 일으켰다. 그에 더해 산업선교회를, 특히 YH사건 이후에 대대적으로 몰아세우는 작업을 했다. 이제 박정희 유신 체제에서 노동자 편에서 운동을 펴면서 1970년대 노동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 크리스찬아카데미와 산업선교회가 어떻게 유신 권력에 의해 혹독한 탄압을 받는가를 살펴보자. 크리스찬아카데미는 1970년대 운동뿐만 아니라 1980년대 운동, 그중에서도 특히 1980년대 농민 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된다.

크리스찬아카데미는 1979년에 혹독한 탄압을 받을 때까지 각계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중간 집단 육성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특히 노동조합이나 농민 단체, 여성 단체의 중간 지도층을 육성하고 노동자, 농민의 의식을 계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크리스찬아카데미는 1974년부터 중간 지도층 교육을 하는데, 이런 교육 과정에서 동일 부문 활동가들이 연대 의식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그러면서 지역 농민 운동과 민주 노조 운동을 이끄는 주체들이 됐다.

내가 1980년대 초중반에 동아일보사 신동아에 근무할 때 농촌의 어려움에 관한 취재를 자주 했는데, 그때 농민 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가톨릭농민회 사람들도 많이 봤지만 기독교농민회 사람들, 그리고 농민 운동을 벌이는 다른 쪽 사람들도 다수 만났다. 그런데 특히 기독교농민회 사람들이라든가 다른 농민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교육받은 것을 많이 얘기하더라. '왜 농민들이 못사는가, 왜 농촌이 저 지경이 됐는가를 구조적으로 봐야 하고 농민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교육을 감동적으로 받았다. 그래서 이렇게 내가 힘든 농민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런 얘기를 한두 사람이 아니라 많은 농민 운동 활동가들에게서 들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 크리스찬아카데미가 아주 큰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고문과 추잡한 조작으로 크리스찬아카데미 때려잡은 박정희 정권

▲ 당국의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 발표 내용을 옮긴 경향신문 1979년 4월 17일 자 7면. ⓒ경향신문 갈무리
프레시안 :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앞에서 말한 대로 민주 노조 운동이 활성화되고 함평 고구마 사건에서도 잘 드러난 것처럼 농민 운동이 기지개를 켜자, 박정희 정권은 크리스찬아카데미를 의식화 교육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했다. 당국은 1979년 3월 9일 크리스찬아카데미 여성 사회 간사 한명숙을 검거했다. 이를 시작으로 농촌 사회 간사 이우재, 황한식, 장상환, 산업 사회 간사 김세균, 신인령, 그리고 한양대 사학과 교수 정창렬을 연이어 구속하고 김병태, 유병묵 교수를 연행했다.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인 강원용 목사도 연행했다. 그뿐 아니라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교육받은 YH무역 노조 지부장 최순영, 반도상사 노조 지부장 장현자, 동일방직 노조 지부장 이총각, 콘트롤데이타 노조 지부장 이영순 같은 사람들도 연행했고 원풍모방 노조 부지부장 박순희도 불러서 조사했다.

유신 정권에서 불순 세력으로 몰아갔지만, 강원용 목사가 크리스찬아카데미를 만들어서 이렇게 일을 하도록 한 건 우리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이분은 해방 직후에도 개신교 진보 청년 세력을 이끌고 여운형, 김규식과 함께 통일된 민족 국가 건설 운동을 벌였고 1950년대부터는 '기장'(대한기독교장로회) 지도자로서 국내외에서 진보적인 개신교 활동을 많이 펼쳤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 특히 노동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서 크리스찬아카데미가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하게 된다.

당시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활동한 간사도 최고 수준이었고, 여기에 나와서 강의한 분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원로 학자들을 포함해 대단한 분들을 강사로 나와서 강의하게 했다. 나중에 활동한 것만 보더라도 한명숙은 한국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가 되고, 이우재는 국회의원, 황한식은 부산대 교수, 장상환은 경상대 교수, 김세균은 서울대 교수, 신인령은 이화여대 총장이 되는 등 다들 사회의 책임 있는 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하여튼 정보 당국은 "이들의 활동이 북괴와 직접적인 연결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상과 행동을 통하여 북괴의 대남 선전 선동에 적극 동조하였을 뿐 아니라 반국가 단체인 북괴가 주장하는 노선과 체제를 지지한 범죄 사실이 입증됐다"고 발표했다.

프레시안 : 그렇게 발표할 만한 근거가 있었나.

서중석 : 당국의 발표 내용은 혹독한 고문으로 조작해낸 것이었다. 다른 여러 사건과 비슷한 점인데, 그것이 이들의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예컨대 이우재는 "내가 정보부에서 25일간 조사를 받았는데 거의 15일을 고문 받았다"고 하면서 그때 어떻게 당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몽둥이로 때리고, 야전 침대 각목을 무릎 사이에 넣고 양쪽에서 밟으면서 '간첩도 이렇게 네 시간이면 다 얘기한다'고 하면서, 야전 침대봉이 부러지니까 또 가져다가 밟고, 그리고 담뱃불로 지지고", 담뱃불 얘기를 하면서 등을 가리켜 보였는데, "벽에 세워 놓고 주먹으로 가슴을 쳐서 숨을 못 쉬어 골병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이어서 가슴을 가리키면서 "지금도 가슴 여기는 건드리지 못한다"고 하고는 왼쪽 다리를 가리키며 "그리고 지금도 이쪽 다리를 짚으면 '찌릉찌릉' 저린다"고 말했다.

한명숙은 "그 기억을 다시 살리고 싶지 않다. 말하고 싶지 않지만 간단히 얘기하겠다"고 하면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띄엄띄엄 얘기했다. "거기서 '공산당이면 죽인다. 너 공산당이지? 네 남편하고 어떻게 접선했느냐. 네 남편과의 편지가 암호가 아니냐. 암호 풀이를 해라. 이북에서 누가 내려왔느냐. 배후를 대라. 무슨 조직이 있느냐'"고 자신을 몰아붙였다고 말했다. 여기서 남편은 통혁당 사건으로 걸려든 박성준 교수를 가리킨다. 이 사람은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13년이나 복역했는데,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이 터졌을 때도 감옥에 있었다. 그런 남편하고 어떻게 접선했느냐고 몰아세운 것이다.

이어서 한명숙은 "따귀를 맞고 힘찬 구둣발로 몰아대며 야전 침대의 커다란 각목으로 온몸을 두들겨 맞았는데 난 도저히 살아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기억조차 안 난다. 나중에 일어나보니 뼈 마디마디는 부어 있고 온몸에 피가 맺히고 멍이 들어 걷지도 못했다. 나중에 지하실로 옮길 때 수사관이 부축해 옮겼다. 나는 자살하고 싶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완전히 항복했다", 변호사 물음에 이렇게 답변했다.

정말 기가 막히다고 할까, 추악한 것은 정보 기관이 이렇게 고문으로 사건을 조작해내는 정도에 머문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간사들이 성행위를 했다는 식으로 정말 추잡한 조작까지 서슴지 않고 했다는 점이다. 노동자, 농민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해 노동 운동, 농민 운동을 벌이도록 간사들이 헌신적으로 참교육을 한 것을 왜곡해 아주 타락한 행위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그런 짓까지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유신의 참모습이라고 할까, 광태(狂態)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까지 나쁜 짓을 할 수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재판 결과는 어떠했나.

서중석 : 1979년 7월 이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됐다. 9월 22일 서울형사지법은 이우재에게 징역 7년 등 이들에게 최고 7년부터 최하 1년 6개월까지 징역형을 선고했다. 다행이라면 아주 다행인 것이 바로 10·26이 일어났다. 유신 정권이 무너진 후인 1980년 1월에 열린 항소심에서 정창렬, 황한식은 무죄로, 김세균은 선고 유예로, 신인령은 집행 유예로 석방됐고 이우재, 한명숙, 장상환은 감형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지하 비밀 서클 구성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혐의가 없다고 했지만 이우재, 한명숙, 장상환의 경우 여타 행위라는 걸 문제 삼아 실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크게 주목했다. 세계교회협의회, 유럽에큐메니컬아카데미연합회, 일본크리스찬아카데미,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캐나다연합교회 세계 선교부 등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 크리스찬아카데미 격려 및 연대를 다짐하는 전문을 보냈다. 인도에큐메니컬기독교센터는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석방을 요망하는 편지를 보냈다. 독일 쪽에서는 한국을 직접 방문해서 이들이 무죄임을 확신한다는 독일 교회의 입장을 전했다.

유신 정권의 또 다른 표적, 도시산업선교회

프레시안 : 산업선교회 쪽은 어떠했나.

서중석 : 이제 산업선교회 쪽을 어떻게 좌경으로 몰아 때려잡았는지를 장숙경 박사의 글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유신 정권은 특히 YH사건 이후에 산업선교회를 대대적으로 몰아세웠다. 그런데 YH 노조는 1975년에 결성될 때부터 '지오세', 즉 가톨릭노동청년회하고는 관련이 있었지만, 그래서 노동조합에 대해 배우고 그랬지만, 산업선교회하고는 별 관계가 없었다. 1979년 신민당사 농성 이전까지는 산업선교회 쪽과 직접적인 관계를 거의 맺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부, 여당에서는 YH 노조 배후의 불순 세력을 규명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는 산업선교회를 집중적으로 때렸다.

먼저 MBC 같은 데가 동원됐다. 그리고 공화당과 유정회는 1979년 8월 15일, 신민당사 농성 강제 해산 4일 후인 이날 "도시산업선교회가 노사 분규의 배후 세력"이며 YH사건이 일어나게 된 본질적 원인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다음 날 박정희는 직접 "근래 일부 종교를 빙자한 불순 단체와 세력이 산업체와 노동조합에 침투하여 노사 분규를 선동하고 사회 불안을 조성하고 있는 데 대해 그 실태를 철저히 조사, 파악하여 보고하라"고 김치열 법무부 장관한테 지시했다. 그날 공화당 의장 서리 박준규도 YH사건의 본질적 원인은 '도산'(도시산업선교회)이라고 주장했다. 공화당, 유정회 의원들은 합동으로 제출한 보고서에서 "'도산'은 외세의 지원 하에 1단계로 유신 체제를 전복하고 2단계로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시도하고 있으므로 종교 단체의 노동 문제 개입을 정책적으로 저지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철저히 조사하라는 박정희 지시가 떨어진 지 한 달 정도 지난 1979년 9월 14일, 정부는 '산업체 및 농촌 사회에 대한 외부 세력 침투 실태 조사 보고서'라는 것을 발표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특별 조사반은 "도시산업선교회가 용공 단체라는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면서도, '도산'이 불법 활동을 부추겼다고 비난했다. 교계의 반발을 우려해서인지 용공 단체로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한 비난 내용을 살펴보면 박정희 정권이 여타 비판 세력에게 용공이라는 딱지를 붙일 때 쓴 방식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예컨대 "일부 소수 '도산' 목사들은 (…) 근로자들에게 노동 관계 법규를 위반하면서 불법 투쟁 방법을 쓰도록 교사·선동", "법 적용을 할 경우 종교 탄압이라고 왜곡 선전·선동함으로써 사회적 물의마저 야기", "계급투쟁 의식을 근로자들에게 심어주는 (…) 의식화 운동의 과정에서 핵심 요원들이 근로 현장에서 근로자들에게 노동 법규는 물론 헌정 질서까지 부인, 파괴하는 교육을 시키고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보고서에 명시한 것에서도 그러한 점은 잘 드러난다. 아울러 특별 조사반은 가톨릭농민회도 "일부 지도신부와 이들의 영향을 받고 있는 일부 농민회 회원들의 활동 방법이 순박한 농촌 사회에 대립 의식과 계급 의식을 조장, 대화와 협조가 아닌 과격한 수단에 호소하는 등 사회적 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특별 조사반은 대검 공안부장, 치안본부 3부장, 문공부 종무국장, 노동청 노동국장 등으로 구성됐다. '편집자')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이 좌경으로 몰아간 산업선교, 그 실상은 어떠했나.

서중석 : 산업선교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산업선교는 산업 전도에서 시작됐다. 미국 장로교가 1952년 한국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어라복 선교사, 미국 이름은 따로 있고 한국식으로 어라복으로 한 건데, 이 사람을 파견했다. 1957년 4월에는 예수교장로회 전도부 산하에 산업전도위원회가 설치됐다.

이런 활동은 조지 오글 목사가 오면서 활기를 띠게 된다. 오글 목사는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인혁당 사건은 고문으로 조작된 것이다"라고 얘기했다가, 그 당시에는 정말 하기 힘들었던 용기 있는 발언을 했다가 추방되는 분인데 1955년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러면서 산업 전도 활동을 하게 된다. 1961년 공장 전도, 말 그대로 공장 노동자들에게 전도한다는 뜻인 이것을 위해 공장 노동자들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인천산업전도위원회가 조직됐다. 그러면서 산업선교를 개척하게 되는데, 이때 목회자들은 지난번에 동일방직을 다루면서 말한 조화순 목사 사례처럼 직접 공장에 들어가 6개월 또는 1년 이상 노동자와 똑같이 일하며 공장 노동을 체험했다. 1968년 산업 전도는 인더스트리얼 미션(industrial mission), 산업선교로 이름이 바뀐다. 이때부터 산업선교라는 말을 쓰게 된다.

산업선교를 대표하는 두 개의 단체가 있었다. 하나는 영등포산선으로 불린 영등포산업선교회다. 예수교장로회의 영등포산업전도위원회로 출발해 이름을 영등포산업선교회로 바꾼 단체다. 다른 하나는 감리교의 산업전도회에서 만든 인천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다. 이게 유명한 인천산선, 일각에서는 '인천도산'으로도 불린 단체다. 이것들 말고도 여러 단체가 있었지만 제일 대표적인 단체로 이 두 곳을 꼽을 수 있다.

1970년대에 산업선교 활동은 경제적 정의 문제, 인간의 존엄성 문제, 인간 소외 극복을 위한 결속의 문제 등에 중점을 뒀다. 소외라는 이 말은 1970년대에 참 많이 사용됐다. 나도 소외에 관한 책을 읽어보고 그랬는데, 민중이라는 말과 함께 소외라는 말이 참 많이 쓰였다. 그것들과 함께 산업선교 활동은 절망에 항거하는 희망의 투쟁 등과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노동자, 특히 여성 노동자들이 정신적·재정적으로 버텨내는 데 큰 힘이 됐다.

영등포산선과 함께 산선 활동의 쌍벽이었던 인천산선은 1968년부터 노동 문제 세미나를 실시했다. 노동조합 조직 절차, 운영 요령, 활동 내용 같은 것과 노동법, 단체 협약, 단체 교섭에 관한 것, 노조 지도자들의 리더십 계발, 공중(公衆) 연설 방법, 회의 진행 요령 같은 것을 가르쳤다. 오글 목사는 노동 운동이 한국을 민주주의와 경제가 함께 발전하는 길로 이끌 것이라고 믿고 이러한 프로그램 개발과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 노동 운동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1971년 미국 연수를 막 마치고 돌아온 조승혁 목사가 산업선교회 교육을 할 때 일어났다.


▲ '공순이'로 불리며 업신여김을 당하던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자이자 여성임을 자각하면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한국의 고도성장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견뎌낸 이들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사진은 봉제 작업을 하는 구로공단의 여성 노동자들(1986년 3월 15일). ⓒ연합뉴스

가난한 노동자와 함께한 이들의 헌신, 좌경으로 몰아간 박정희 정권의 광기

프레시안 : 어떤 사건인가.

서중석 : 이때는 동일방직에서 여성 노조 지부장이 탄생하기 전이었는데, 동일방직 노동자 이영숙이 "동일방직에서는 남녀를 구별해 임금 인상을 하는데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질문했다. 조승혁 목사는 이렇게 답했다. "여성 조합원이 4분의 3이나 되는데 왜 노조 지부장과 집행부를 장악하지 못했는가. 억울하면 여성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노동조합을 장악해라."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이 전부 이 한마디 때문이라고 볼 수는 물론 없지만, 이러한 교육을 통해 여성 노동자들은 큰 각성을 하게 된다.

당시 생산직 노동자는 단순 사무직 노동자보다 60퍼센트 가까이 임금이 낮았다. 또한 여성 노동자 임금은 남성 노동자 임금의 42~46퍼센트로 반절이 못됐는데, 이건 일제 때도 그랬다.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간부들의 성추행이나 욕설, 폭력 같은 것에도 당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까 '이런 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좋은 데로 시집가는 것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여성 인권, 여성 운동은 고학력 여성한테나 필요한 것이라는 사고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속에서 인천산선의 조화순은 가난하고 힘없는 여성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존감을 가질 수 있도록, 단결된 힘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것도 여성 노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된다. 또한 소규모 그룹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게 했다. 동일방직의 경우 1971년에 여성 노동자 165명이 소그룹 15개를 조직해서 무려 672회나 모임을 했다. 그러면서 1972년에 드디어 여성 노조 지부장이 탄생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공순이'는 여성 노동자로 새로 태어났고 인간으로서 긍지를 갖게 된다.

동일방직을 효시로 1974년에는 반도상사 부평 공장에서, 1975년에는 YH무역에서 노조가 결성되면서 여성 지부장이 선출된다. 그러면서 여성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공장 중 여러 군데에서 이제 여성 지부장, 여성 대의원들이 투쟁하게 된다. 1977년 말에는 전국 11개 노조, 56개 분회에서 여성이 지부장, 분회장을 맡게 된다.

프레시안 : 오늘날에도 제대로 된 노동 운동을 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인데 박정희 정권 때에는 어땠을까 싶다.

서중석 : 전태일 분신 사건이 잘 말해주듯이 1970년대에 노동 운동을 한다는 건 참 지난한 일이었다. 유신 치하에서는 특히 더 그랬다. 극도의 탄압, 억압을 받았고 걸핏하면 좌경, 용공, 빨갱이로 몰려 감옥소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도 종교 단체의 지원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70년대 민주 노조는 대개 산선이나 '지오세' 같은 곳과 관련을 맺었고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고 그랬다.

산선이나 '지오세'는 때로는 교단과 마찰, 갈등을 빚었다. 크리스찬아카데미 간사들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는데, 그런 속에서도 학생 운동, 사회 운동 활동가 상당수가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물론 교계 사람들이 들어가서 그러한 활동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승혁, 조화순 목사 같은 목회자, 그리고 신부들과 활동가들은 노동자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노동 체험을 직접 하면서 가족 이상으로 노동자들에 대해 동지애를 느끼며 희생적·헌신적으로 노동자와 함께했다. 그러면서 노동자 의식 계발, 조직 활동에 헌신하고 투쟁을 함께했다. 1980년대 노학 연대, 존재 이전으로도 불린 학생들의 노동 현장 위장 취업, 노동자들의 투쟁과 함께 한국 민주주의 운동사에 길이 남을 뜨거운 열정의 노동 운동을 1970년대의 이 사람들은 남겼다.

이처럼 종교의 우산 아래 활동하는데도 박정희 유신 정권은 산선, 크리스찬아카데미 등을 좌경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YH 노조는 산선과는 별 관계가 없었는데도 산선을 좌경으로 때려잡고 탄압했다.

"'도산'이 들어가면 도산한다"? 꼭두각시 언론들의 추태

ⓒ오월의봄
프레시안 :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라는 건 예수의 가르침에서 핵심 중 하나다. 물론 목회자들이나 신도들 중에도 예수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과거에도 많았고 오늘날에도 많긴 하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예수가 부와 권력을 움켜쥔 이들의 편에 서는 대신 낮은 곳에서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고난의 길을 걸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산업선교회, '지오세' 등은 그러한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분투했다. 교인으로서 함께한 이들뿐만 아니라 교인은 아니지만 동참한 이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이름을 내걸고 예수를 욕되게 하는 일을 서슴지 않은 일부 목회자들이나 신도들에 비하면, 교인은 아니지만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데 헌신한 이들은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예수의 가르침에 훨씬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응답이 극렬 좌경 세력이라는 낙인이었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다른 사안을 하나 짚었으면 한다. 1970년대에 일부 교계 인사들이 노동 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노동자들을 지원한 것에 대해 그 의의와 헌신성을 인정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그것이 노동 운동의 독자적인 발전을 제약한 면도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어떻게 보나.

서중석 : 1980년대에 산선에 대해 그런 지적과 비판이 나왔다. 또한 산선 내부의 활동가와 교회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산선 활동이라는 것이 교회에서 파견하고 재정을 지원하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1980년대에는 산선이 전혀 역할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별 역할을 못한다. 1980년대에 가면 종교 단체와 연결해 활동하는 것을 떠나서 노학 연대의 시대, 위장 취업한 학생들과 손잡고 노동자들이 전면에 나서 싸우는 시대로 바뀌지 않나. 종교계와 노동 운동이 그런 식으로 밀접하게 연계하는 건 1970년대에 일어난 1970년대만의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여튼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박정희가 직접 "일부 종교를 빙자한 불순 단체와 세력이 (……) 노사 분규를 선동하고 사회 불안을 조성하고 있"다며 그 실태를 조사하라고 법무부 장관한테 지시한 직후인 8월 17일 서울시경은 YH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최순영 등 YH 노조 간부 3명과 배후 조종자로 인명진 목사, 문동환 목사, 시인 고은 등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YH 노조 간부들은 무산 계급이 지배하는 사회 체제를 건설하는 것이 기독교 사명이라고 표방하고 도시산업선교회 목사의 조종을 받아 사회 혼란을 조성하고 국가, 사회의 변혁을 획책했다"고 발표했다. 별 관련이 없는데도, 마치 YH 노조 활동에 산업선교회가 깊이 개입한 것처럼 발표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제 신문들이 나서서 유신 정권이 하라는 대로 앞다퉈서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언론에서는 도시산업선교회 혹은 산업선교회라는 정식 명칭 대신 '도산'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도산'이 들어가면 도산(倒産)한다"는 신조어, 산업선교회와 노동자들을 매도하는 그런 새로운 말까지 생겼다. 조선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등은 "'도산'이 들어가면 도산한다"고 하면서 도시산업선교회 관련 기사를 연속 특집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그해 8월 하순부터 연재했다. 그렇지만 산업선교회 측의 입장이나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 왜 노동자들이 그렇게 투쟁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이런 신문들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프레시안 :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하면, 유신의 몰락을 다루는 이번 이야기 마당에 해당하는 기간은 짧은데 굵직한 사건이 꽤 많다. 예컨대 YH사건뿐만 아니라 부마항쟁, 김영삼 의원직 제명, 김형욱 문제, 거기에다 10·26까지 모두 유신 말기인 1979년 하반기에 연이어 발생했다. 전두환 일당의 12·12쿠데타는 박정희 사후에 일어난 일이니 여기서는 일단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말 그대로 격동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많다. 유신 체제의 모순이 그렇게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박정희가 정신 못 차리다 10·26을 맞게 되는 것 아닌가. 유신 체제의 모순, 박정희 잘못 때문에 생긴 일들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일흔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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