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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최측근 이후락·김형욱은 왜 도망쳐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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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 최측근 이후락·김형욱은 왜 도망쳐야 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77> 유신의 몰락, 여덟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프레시안 : 이번에는 김형욱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김형욱 실종 사건은 그 이전에 미국에서 전개한 박정희 비판 활동과 직결돼 있다. 그런 점에서, 김형욱이 파리에서 실종된 시점은 김영삼 의원직 제명 이후이지만 김형욱 실종 사건을 먼저 다루는 게 좋을 것 같다.

서중석 : 김형욱은 박정희가 죽기 직전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로 기억하는데 미국의 한 신문은 김형욱 사건이 나자 "김형욱은 박정희 치부의 최대 공범자였다"고 썼다. 적절하게 표현한 것 아니냐고 난 생각한다.

박정희가 1970년대 중후반 유신 체제 시기에 아주 두려워하고 분노했던 인물이 바로 김형욱 아니겠나.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던 김형욱과 이후락, 경호실장이었던 박종규는 박정희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건 김정렴하고도 또 다르다. 김정렴은 큰 사건에 개입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김형욱, 이후락, 박종규 이 세 사람은 공단 위치 결정 문제, 그러니까 울산에 세우느냐 마산에 세우느냐 하는 문제까지 포함해서 중요한 문제에 다 개입했다. 그런 점에서 김정렴이 9년 3개월 동안 비서실장을 했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김형욱 사건, 이건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미국에서 한 활동을 가리키고 또 하나는 납치·살인 사건을 말한다. 김형욱 납치·살인 사건은 사건 자체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미스터리에 싸여 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유발했는데, 사실 더 중요한 건 미국 의회에서 김형욱이 어떤 활동을 했는가, 바로 그 문제다. 그러한 김형욱 사건을 말하기 전에 우선 이후락 도피 사건을 간단히 살펴보자. 이후락 도피 사건은 박정희가 어떤 사람인가를 이해하는 데에도, 김형욱 사건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청와대·중앙정보부 긴장시킨 '박정희교 신도' 이후락의 해외 도피 사건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김형욱과 이후락, 이 두 사람은 박정희가 어떤 사람인지를 구체적인 사건이라든가 행위를 통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해외로 도피했다가 돌아오고 다른 한 명은 망명해서 박정희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됐다는 것은 유신 체제의 속성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난 때는 1973년 12월 3일이다. 그런데 보름 남짓 후인 그해 12월 19일 이 사람은 김포공항을 혼자 빠져나간다. 이 사람이 빠져나간 것을 후임 중앙정보부장인 신직수도 몰랐고 박정희도 전혀 몰랐다. 이후락 도피 사건에 대해 제일 상세하게 쓴 건, 그중 주로 초기 과정에 대해서이긴 하지만, 이종찬이 2015년에 낸 회고록이다.

이종찬은 중앙정보부에 근무했고 이때는 주영 한국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일했는데, 부친이 사망해서 서울에 들렀다가 영국에 귀임하던 중 이후락을 만났다. 그때는 대만에서 환승하게 돼 있었는데, 대만 비행장에서 짐도 없는 단벌 신사가 눈에 들어와서 보니까 그게 바로 자기들을 호령하던 이후락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좋든 싫든 임시 수행원이 돼서 이후락과 함께 홍콩으로 갔다. 홍콩 호텔의 식당에 가서 밥을 먹으려고 했는데 거기서 차지철, 임충식 같은 의원들이 밥을 시켜서 먹고 있었다고 한다. 그걸 본 이후락과 이종찬은 차지철 일행과 마주치는 걸 피하고 따로 밥을 시켜서 방에서 먹었다.

사흘째이던 12월 21일,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본 이종찬이 이후락한테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그런데 아무 데도 갈 곳이 없고 그저 무조건 나온 것이었다. 이종찬한테 그렇게 답변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종찬이 '그러면 영국으로 가자'고 하니까 이후락이 '먼저 출발하라'고 하면서 1000달러를 줬다. 내가 왜 1000달러를 얘기하느냐 하면, 당시 1000달러는 큰돈이었기 때문이다. 이후락이 이때 돈은 꽤 갖고 나왔다는 걸 보여준다.

'너 먼저 런던에 가라'는 말을 듣고 이종찬은 런던에 왔다. 그런데 그 이후에 런던으로 오는 비행기 탑승자 명단에 이후락 이름은 있었지만 이후락한테 연락은 안 왔다. 그래서 이종찬은 중앙정보부 본부에 연락을 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중앙정보부 영국 현지 책임자인 김동근 공사한테 혼도 나고 그랬다.

이후락의 은밀한 출국을 알게 된 서울의 중앙정보부는 발칵 뒤집혔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후락을 빨리 찾아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김동근, 이종찬 등은 혈안이 돼서 영국 곳곳을 뒤졌다. 그렇지만 아무리 찾아도 1974년 1월 말까지는 이후락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김동근 등은 '이후락 소재 확인은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프레시안 : 1973년 4월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미국으로 망명했는데 그로부터 여덟 달 후에는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나자마자 몰래 출국했으니 청와대도, 중앙정보부도 정말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후락 출국 사실이 알려진 후 외신에서 망명설을 보도하자 박정희 정권은 '이후락은 정부 허가를 얻어 출국했다'고 거짓 발표를 했지만, 망명설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후락도 김형욱처럼 망명을 염두에 두고 빠져나간 것인가?

서중석 : 2월 중순 이후락이 런던의 김동근 공사한테 전화했다. '난 바하마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에 있던 사위하고 상의한 결과 제일 안전한 지대가 카리브해 휴양지 바하마라고 본 것 같다. 바하마에 머물면서 귀국 후 신변 안전 보장 문제에 관한 협상을 박정희와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후락 아들의 장인인 사돈 김종휘 한국화약 회장이 박정희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후락은 런던을 거쳐 1974년 2월 27일 서울로 돌아와 은거했다. 그러면서 살아남게 되는데 이른바 떡고물이 워낙 많아서 잘살기는 했다. 나중에 부정 축재 문제로 비판받자 이후락은 "떡을 만지다 보니 고물이 묻기 마련"이라고 변명했는데, 그 떡고물이 194억 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는 게 신군부 조사에서 드러난다고 전에 얘기하지 않았나.

그런데 사실 이후락처럼 박정희를 위해 일한 사람은 없다고 난 본다. 이후락을 박정희교(敎) 신도라고 보통 얘기하는데 정말 성심을 다해서, 최선의 방식으로 박정희가 계속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그 머리 좋은 사람이 온갖 지혜를 다 짜냈다. 김종필 등 여러 사람을 견제하면서 그렇게 했다. 1971년 대선 때 박정희로 하여금 '후계자를 양성하겠다'는 발언까지 하게 할 때에도 그렇고 다른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정말 지극정성으로 박정희를 위해 일했다. 그래서 박정희의 분신이라는 얘기까지 들었다. (1969년 3선 개헌 공작에 앞장섰던 이후락은 3선 개헌 후 청와대 비서실장에서 밀려나 주일 대사로 가게 된다. 비서실장에서 물러나는 날 이후락은 비서실 직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교주로 하는 박정희교를 신앙하는 기분으로 일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떠났다. 주일 대사 이후락은 도쿄에서 생선 초밥을 맛있게 만드는 음식점을 알게 되자 그 초밥을 냉동 포장해 청와대로 공수했다. 이후락이 박정희를 어떻게 '모셨는지' 느낄 수 있는 일화다. '편집자')

그런 이후락이 권력에서 밀려났을 때 공포감에 휩싸였다. 이 사람이 망명 문제를 얼마만큼 생각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튼 간에 그런 공포감에 휩싸였다는 건 박정희라는 사람이 얼마나 냉혹하고 무서운 사람인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 그 사실을 이후락이나 김형욱처럼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는 점에서 주시할 필요가 있다.

▲ 이후락(왼쪽)과 박정희(1979년). ⓒ연합뉴스


김형욱은 왜 망명을 결심했나

프레시안 : 결국 이후락의 도피에 담긴 뜻은 '정권의 비밀과 치부를 속속들이 아는 날 건드리지 마라'는 것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제 김형욱 문제를 살펴봤으면 한다. 김형욱 실종 사건은 그동안 주목을 참 많이 받지 않았나.

서중석 : 1979년 10월 7일 김형욱이 파리에서 실종된다. 수많은 미스터리를 낳게 되는데 그러면서 국내 신문, 잡지 등 여러 군데에 이것에 관한 글들이 실리게 된다. 그런데 거듭 말하지만 김형욱과 관련해 제일 중요한 건 미국에서 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김형욱은 6년 3개월이나 중앙정보부장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박정희의 수족으로 박정희의 지시를 받으면서, 어떤 건 박정희보다 더 앞장서서 사건을 조작하고 고문도 자행했다. 그러면서 일종의 악마라고 할까, 악의 화신처럼 비친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특히 1960년대에 학생 운동을 한 사람들은 김형욱 하면 막말로 이가 갈린다고 할까, '저런 나쁜 놈이 있느냐'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별명인 돈가스 같은 것으로 부르기 전에 악의 화신으로 생각하고 그랬다. 그런데 김형욱은 3선 개헌 과정에서 결국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1971년 5월에 치러진 선거에서는 공화당 전국구 5번을 받았다. 5번이니까 순번이 상당히 빠르기는 했다. 그렇게 해서 국회의원이 되긴 했지만 1973년 3월 유정회 의원을 뽑을 때에는 거기에 들어가지 못했다.

김형욱 사건을 보면 '출국부터 역시 중앙정보부장 출신답다'는 말도 나오는데 영화에나 나올 법한 탈출을 했다. 김형욱은 '나와 주변 인물이 감시당하고 있다. 세무 사찰을 받는 것을 보더라도 이건 뭔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러면서 사채를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부동산도 처분하고 그 돈을 해외로 빼돌렸다. 1973년 1월 5일 김형욱의 부인이 먼저 미국으로 갔다. 2남 1녀는 이미 미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국내에 자기 혼자만 남게 된 것이다. 김형욱 본인만 떠나면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김형욱이 이렇게 망명 결심을 하게 된 건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난 이후의 여러 사태를 직접 목도한 것과 관련이 있다.

프레시안 : 김형욱이 망명을 결심하는 데 어떤 사건들이 영향을 끼쳤나.

서중석 : 1972년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박정희는 보안사령관한테 야당 의원들 명단까지 주면서 '이자들을 족쳐라'라는 아주 강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나. 그런 것도 그렇고, 그 전해인 1971년에는 한때 제2인자라고까지 얘기를 듣던 김성곤, 길재호 등 공화당의 실력자들이 10·2 항명 파동으로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지 않았나. 김성곤이 죽는 건 김형욱 망명 이후이긴 하지만, 김성곤 등이 어떤 식으로 당했는가를 김형욱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김형욱이 망명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 중 하나가 1973년에 터진 윤필용 사건이라고 난 본다. 윤필용 일파가 심한 고문을 당한다는 소식을 매일 듣다시피 했다고 김형욱은 자신의 책에 썼다. 윤필용이 이후락한테 '형님이 차기를 맡으셔야죠', 이런 식으로 술자리에서 말했다고 해서 이 사건이 터지지 않았나. 이후락도 윤필용 사건으로 구속될 뻔했다. 이후락을 그렇게 다뤄선 안 된다고 주위에서 박정희를 만류해서 이후락은 간신히 살아났지만, 그 사건도 이후락이 해외로 나가게 되는 데 있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윤필용처럼 박정희한테 충성을 바친 사람도 드물었다. 방첩부대장을 할 때 수많은 언론인 테러를 일으킨 자가 윤필용 아닌가. 물론 위세도 부리긴 했지만 방첩부대장, 수경사령관을 할 때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박정희한테 충성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참 나쁜 짓이긴 했지만, 박정희 쪽에서 볼 때에는 박정희를 위해 성심성의껏 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윤필용이 얼마나 고약한 죄목으로 당하고 있는가를 이후락이나 김형욱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권력 내부를 속속들이 알았기 때문에, 그걸 단순하게 생각한 게 아니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건 내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형욱은 "윤필용 일파가 모진 고문을 당한다는 정통한 정보를 거의 매일이다시피 듣고 있던 1973년 4월 12일 아침 나는"이라고 하면서 망명을 결행하는 이야기를 회고록에 썼다.

"심복마저 고문하는 박정희…누가 목숨 바쳐 충성하겠나"

ⓒ오월의봄
프레시안 : 김형욱의 망명 작전,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4월 15일 김형욱은 그전에 자신의 비서실장을 했던 문학림과 함께 보따리 몇 개를 들고 김포공항에 갔다. 출국 허가를 받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김형욱이 대만에 가는 걸 박정희 정권에서 끝까지 문제 삼기는 힘들었던 것이 대만의 권위 있는 중화학술원에서 김형욱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게 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초청장이 김형욱한테 왔다. 도대체 김형욱 같은 사람한테 명예박사를 준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중화학술원에서 수여하는 명예박사 학위, 이건 중국 정부에서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걸 김형욱이 어떻게 따냈는지 참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역시 중앙정보부장은 다르다는 생각도 든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 트랩에 올라섰을 때 김형욱은 이철승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별일 없느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 비행기는 대만으로 바로 가지 않고 도쿄에 도착했는데, 주일 공사 김기완이 마중을 나왔다. 김기완은 이로부터 넉 달 후에 일어나는 김대중 납치 사건과 관련된 일본 주재 인사들 중 상위에 속한 인물이었다. 김형욱은 도쿄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대만에 갔다. 4월 19일 중화학술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장개석(장제스) 아들이자 이때 실권자이던 장경국(장징궈)도 만났다.

그러고 나서 김형욱은 문학림한테 갑자기 홍콩행 비행기 표는 취소하고 뉴욕행 비행기 표를 두 장 마련해오라고 했다. 4월 21일 도쿄를 경유해 뉴욕에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도쿄 하네다 공항에 내렸는데, 공항 보세 구역에서 중앙정보부 일본 총책인 김기완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날 잡으려고 하는 것 아니냐'고 김형욱은 긴장했다. 그렇지만 그건 아니었다. 유고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리 여자 탁구 선수들이 1등을 하는 유명한 사건이 그때 있었는데, 김기완은 그 선수단을 환영하러 나온 것이었다.

어쨌든 간에 김형욱은 뉴욕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때까지 얼마나 가슴 졸였겠나. 비행기 안에서 문학림한테 말했다. 미국 가면 당분간 한국에 안 돌아가겠다고. 망명하겠다는 말이냐고 문학림이 물어보니까 김형욱은 "글쎄, 망명 아닌 망명일지도 모르겠어", 이렇게 답변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런 결심을 한 이유를 설명했다. "박 대통령의 비상사태 선언, 국민 투표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정, 야당에 대한 정치 보복, 이후락의 망동 등은", 이후락의 망동이라는 게 뭘 가리키는 건지는 분명치 않은데, "사태의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지금 잡혀가 있는 윤필용 건만 해도 그렇지. 내가 윤필용을 옹호하는 게 아니야. 그러나 박정희라는 인물은 이제 자신의 심복에게까지도 필요하다면 처참하고 무지막지한 고문을 자행하는 인면수심의 인간으로 표변했소. 생각해보시오. 장차 누가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을 하겠소?"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고 회고록에 써놓았다. 정확히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와 비슷하게는 얘기했을 거라고 본다. 그러고 나서 문학림하고 이제 각자 다른 길을 가자고 하고는 자기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곳으로 김형욱은 가게 된다.

김형욱 회유에 안간힘 쏟은 박정희 정권, 결과는 헛수고

프레시안 : 미국에 간 김형욱은 한동안 외부와 거의 접촉하지 않았지만, 박정희 정권 비판 활동을 공개적으로 하기 전에도 김대중 납치 사건과 관련해 나름대로 움직인 것으로 돼 있지 않나.

서중석 : 김형욱은 김대중 납치 사건에 큰 관심을 표명했다. 그것과 같은 일이 자신한테도 일어날 줄은 몰랐겠지만 어쨌건 이 사건에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1974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직접 가서 현지 책임자인 김기완 공사를 비롯해 옛날에 자기 부하였던 중앙정보부 요원들한테 얘기를 자세히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형욱은 김대중 납치에 동원된 공작선 용금호 선원들이 묵은 오사카 도쿠야마 부두 인근의 나폴리 호텔에 투숙하면서 종업원들을 상대로 탐문 조사도 해서 자신이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김형욱은 박정희한테 그렇게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었다. 문제는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포스트가 1면 톱기사로 '한국 정부, 미국 관리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뇌물로 제공'이라는 전단(全段) 제목 아래 폭로 기사를 게재하면서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본격적으로 터진 것이다. 한미 관계 최대의 위기였고 한국전쟁 이후 미국이 한국에 대해 가장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하는 코리아게이트가 이것을 계기로 전면에 부상하게 된다.

1976년 11월 26일에는 주미 대사관 참사관 직함을 가졌던 김상근이 본국 정부의 귀국 명령을 거부하고 미국에 망명했다. 이 사람은 동양의 제임스 본드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김형욱의 도움을 받아 망명하게 된다. 그러면서 김형욱이 다시 주시 대상이 된다.

김상근이 FBI에 망명 선물로 제공한 것이 이른바 백설 작전이라는 대미 매수공작 계획안이었다. 백설 작전은 1975년 6월 중앙정보부 차장보 양두원이 미국 의회 로비스트인 김한조한테 넘겨준 건데, 지휘 연락 체계가 암호명으로 돼 있었다. 박정희는 불국사 주지, 김한조는 해밀턴 박사, 신직수는 도지사, 양두원은 신부, 김상근은 교수로 돼 있었다. 이런 것들이 흥미를 유발하기는 하는데, 하여튼 제대로 실현되지도 못했으면서 미국 언론이 한국을 악의 소굴처럼 보도하는 데 상당히 근사하게 활용됐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백설 작전 내용이 미국에 넘어간 것도 유신 정권에 타격이었겠지만 최고 권력자와 정권의 치부를 아는 정도 등에서 김형욱은 김상근 같은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 아니었나.

서중석 : 문제는 김형욱이 미국 의회의 청문회 같은 데에서 증언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형욱을 어떻게 해서든지 회유하려 했다. 그래서 김형욱은 백두진과 1번, 정일권과 2번 만났고 정일권과 함께 온 장경순의 권유도 받았다. 야당 정치인 이철승도 김형욱을 설득했다. 누구 청탁을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철승은 뉴욕에서 김형욱한테 귀국을 권유했다. 박병배, 고흥문, 노진환 같은 여야 의원들도 열심히 귀국을 권했다.

김형욱과 육사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홍종철 청와대 사정 담당 특보도 귀국을 간곡히 권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김종필 총리의 특사로 어떤 실업인이 김종필 친서를 갖고 방문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중용할 것이니 돌아오라는 내용을 기본으로 한 것들이었다고 한다. 김동조 주미 대사도 두 차례 찾아와서 '당장 돌아오기 싫으면 마음도 정리할 겸 멕시코나 브라질 대사로 나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박정희의 제안을 전달했다고 한다.

1977년에 들어서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도 귀국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것에 이어서 이번에는 김종필한테서 '내가 그리 가겠다'는 전갈이 왔다. 김종필과 2박 3일 동안 골프도 치고 하면서 만났는데, 김종필이 아무리 설득해도 김형욱은 돌아가겠다는 말을 끝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드디어 입 연 김형욱, 박정희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다

▲ 1977년 미국 의회에서 증언하는 김형욱. ⓒ연합뉴스
프레시안 :
결국 김형욱은 박정희를 제대로 들이받지 않나. 박정희 정권이 그토록 김형욱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헛심만 쓴 셈이었다.

서중석 : 박정희가 두려워했던 김형욱의 폭로는 1977년 6월 6일 뉴욕타임스에 대문짝만하게 나오면서 시작됐다. 1면에 김형욱 사진과 함께 '박정희에게 하야를 요구한다'는 제목으로 나왔다. 김형욱은 '박정희는 점점 영구 집권을 위한 독재자가 되고 있으며 부도덕한 인간으로 그의 사상을 믿을 수 없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박정희가 이후락에게 직접 지시한 것이다. 박동선은 내가 직접 조종한 로비스트였으며, 내가 암시장에서 한국 돈을 달러로 바꿔 파우치(외교 행낭)로 보내줬다', 이런 주장을 했다. 백설 작전 및 통일교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러면서 6월 22일 김형욱이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 일명 프레이저 위원회의 청문회에 나가서 증언한다는 게 알려졌다. 그러자 박정희가 직접 나섰다. 박정희는 김형욱과 같은 황해도 출신이자 군 선배인 무임소 장관 민병권을 특사로 보냈다. 민병권은 6월 19일 김형욱을 찾아갔다. 그때 민병권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 그리고 박근혜가 준비한 물품, 그러니까 김형욱이 평소에 좋아한 인삼, 오징어포, 마른안주 같은 선물까지 가지고 갔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오기 힘들다면 청문회에 나가지는 말고 제3국에 나가 있어 달라는 얘기를 했다고 하는데, 물론 김형욱은 거절했다.

그다음 날 김형욱 집에서 민병권이 다시 얘기를 했다. 김형욱에 따르면 박동선 사건에 박 대통령이 직접 개입됐다는 사실만 언급하지 말아달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이때 김형욱이 '치명적인 내용은 고려해보겠다'고 언급했다는 글이 있다. 다시 그다음 날인 21일, 그러니까 청문회 전날인데 민병권이 또 찾아올 것 같아서 김형욱이 자리를 피했다. 아니나 다를까 민병권은 역시 찾아왔는데, 자신이 자리에 없자 이번에는 자기 부인을 협박했다고 김형욱은 썼다. '그런 증언을 하고 나서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고 김형욱은 주장했다.

프레시안 :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김형욱은 어떤 얘기를 했나.

서중석 : 6월 22일 드디어 김형욱이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게 된다. 프레이저 위원회 쪽에서도 이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자, 방청객들이 막 몰려와서 긴 행렬을 이루자, 이들의 소지품을 철저히 검사하고 공항에서나 볼 수 있는 엑스레이 탐지 장치도 동원하고 정사복 경찰을 회의실 주변에 배치했다고 한다.

이날 김형욱의 증언 내용을 살펴보면, 예상과 달리 박정희의 개인 추문이나 비행, 부도덕한 부분을 폭로한 부분은 적었다. 그러나 박정희 권력의 치부에 대해서는 통렬한 타격을 가했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거의 몰랐던, 지금은 대개 많이 알려져 있긴 하지만, 사항을 증언했다. 예컨대 "박 대통령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1971년 그와 대결했던 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 씨와 미국의 대한 정책을 좌우하는 미국 국회입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개인 김대중 씨의 문제를 그는 소위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해결하려 했고,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집단인 미국 국회에 대해서는 소위 '박동선 뇌물 공작'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

7월 11일, 프레이저 청문회에 두 번째로 나가서 다시 증언했다. 7월 15일에는 '내외 국민에게 드리는 특별 성명서'라는 이름으로 "국민과 역사 앞에 참회합니다"라는 장문의 글을 발표했는데, 그걸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통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이 글에서 김형욱은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 동백림 사건, 3선 개헌 파동, 유신 독재 성립 과정, 김대중 납치 사건, 박동선 뇌물 사건 등 당시 큰 쟁점이 됐던 것들에 대해 청문회에서 증언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박정희 정권이 자신을 어떤 식으로 회유하려 했는가도 폭로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도 기술했다.

그런 가운데 1977년 9월에는 뉴욕 총영사관 소속으로 정부 지시에 따라 김형욱 귀국 공작을 하던 손호영이 그게 되지 않자 망명하는 사건이 터졌다. 손호영은 김상근과 마찬가지로 미국 하원 윤리위원회에서 증언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박정희 대통령한테 김형욱은 굉장한 미움의 대상, 두려움과 분노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으로서는 정말 크게 우려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가 또 생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일흔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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