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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파와 어버이연합은 닮았다…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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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파와 어버이연합은 닮았다…왜?" [프레시안 books]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현대 경제학은 때로 물리학에 버금가는 수학적 기법, 통계학 못지않은 계량 기법으로 무장한 채 스스로 엄밀 과학임을 내세운다. 인접 사회과학 영역에까지 침투함으로써 제국주의적 학문이라는 말까지 듣는다. 대중은 물론 다른 분야의 학자들로부터 경제학은 흔한 비호감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비판의 근거 중 하나는 경제학이 현실에서 사랑하고 슬퍼하며 매일 세 끼를 먹어야 하며 무더위(!)도 피해야 하는 사람에 관한 학문임을 망각한다는 것이다. 사실 비주류 경제학을 전공한 나도 이러한 비판에 슬쩍 한 다리 걸쳐두는 경우가 많거니와, 주류 경제학에 맞서 싸우는 이른바 통일 전선(이것은 종북의 표지가 아님을 부디 헤아려주시길!)에서 "적의 적은 동지"라는 논리가 작동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임을 고백한다.

앨버트 허시먼의 짧은 책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강명구 옮김, 나무연필 펴냄)를 읽다 보면, 무엇보다도 "경제학은 인간의 조건에 관해 인간이 수행하는 연구"라는 20세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전설적인 여성 경제학자 조앤 로빈슨의 정의를 저절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경제학 전공자의 관점에서는 허전할 정도로 수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매우 치밀한 논리로, 그러나 차분하게 허시먼이 보여주는 것은 역설적으로 경제학이 인문학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온갖 취미 동호회에서 밴드 같은 소셜 미디어로 대표되는 사이버 모임, 기타 크고 작은 조직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는 늘 떠날지, 남을지를 결정해야 하는 고민 속에 살아간다. 대체 동문회 밴드에는 왜 그리 귀찮게 구는 영업사원이나 시시껄렁한 음담패설, 극단적 정치 성향의 글로 도배하는 친구가 많은지? 그저 조용히 앱을 삭제하고 사라져버릴 것인가, 끝까지 맞서 싸워 조직을 '정화'할 것인가? 조직의 품질 저하(혹은 내 의도에 맞지 않게 변화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다)에 대처하는 태도로 우리는 이탈(exit)을 택할 수 있고, 항의(voice)할 수도 있다.

사실 끝까지, 아니 얼마 동안이라도 조직 안에 머물면서 바꾸려 노력하는 이는 해당 조직에 어느 정도의 충성도(loyalty)를 갖고 있다. 남의 집 아이에게는 공부가 전부가 아니라고 짐짓 의연한 척하다가도 제 아이의 성적표 앞에서는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내 유전자를 향한 충성도 때문이다. 물론 이탈과 항의, 그리고 충성도의 관계가 한두 단락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문제였더라면 허시먼은 이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저 좁은 의미의 '조직'론에 국한되는 문제였다면, 이 책이 세월을 견뎌내는 고전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남미 여러 나라에서는 정적을 추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관행이지만,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은 까닭을 설명하는 부분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헬조선에서 탈조선으로 이어지는 담론을 떠올리게 된다.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원한다"는 멘트와 함께 물러나는 미국의 고위 공직자들을 보면서 온갖 비리 의혹에도 마지막까지 권력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한국의 "그들"을 대비하며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면, 그것이 결코 개인의 다정다감함 덕분이 아니며, 사생활의 가치를 소중하게 평가하는 문명 수준의 차이 때문도 아닌, 복잡 미묘한 원인과 효과 때문임을 허시먼의 치밀한 설명을 통해 깨달을 수 있게 된다.

▲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앨버트 O. 허시먼 지음, 강명구 옮김, 나무연필 펴냄). ⓒ나무연필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끊임없이 한국의 정치, 그리고 사회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새 정치" 혹은 "중도신당"을 꿈꾸는 그대들에게는 미안하기 짝이 없으나, 흔히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중위 투표자 정리(median voter theorem)가 소박하게 이해되듯이 투표 성향은 중간으로 모인다는 예상과는 다르다는 사실, '경제 민주화 할아버지'께도, "흙수저"를 자처하는 신임 당대표께도 미안하기 짝이 없으나, 우리가 당신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저 우리에게 대안이 없기 따름일 뿐이라는 현실, 그리고 주사파나 어버이연합마저도 그저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이기 때문에 저처럼 극단적 목소리를 내지, 그 어떤 거창한 소신을 가진 건 아니라는 생각, 핀란드로 유학 떠나 웬만하면 그곳에 눌러 앉겠다는 제자 앞에서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던 나의 무기력함 등속이 줄곧 내 머릿속을 무겁게 짓눌렀다.

삶의 총체적 진실을 담는 것이 장편 소설이라면, 이 책이 어쩌면 경제학이면서 동시에 장편 소설에 해당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책을 남길 수 있었던 허시먼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면서도 가슴 한편에 피어오르는 질투심을 감추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한마디. 경제원론을 공부한 독자라면, 가격이 오르고 내릴 때 수요량이 변화한다는 수요 곡선의 기본 원리를 쉽게 기억해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품질은 어디로 간 것일까? 품질이 변할 때 소비자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조금 비싸더라도 품질이 좋다면 기꺼이 달려가는 소비자와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그래서 품질 따위는 과감하게 포기할 수밖에 없는 소비자, 불매 운동이라도 조직해서 맞서려는 소비자와 조용히 사라지는 소비자. 부끄럽게도 명색이 경제학자인 내가 오랫동안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문제들에 관해 이 책 '부록'의 그래프와 함께 얻을 수 있는 통찰은 끝까지 따라 읽은 독자에게 주어지는 보너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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