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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하늘이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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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하늘이 구했다 [김태호의 중국 군사세계] 전쟁의 교훈② ‘대만 해방전’과 진먼다오 포격전

1949년 10월 1일 '신중국'이 대륙에서 성립되었으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특히,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장악하고 있는 대만과 공산 정권이 점령하지 못한 티베트(西藏)가 남아 있었다.

중국 대륙과 대만 사이에는 중국 쪽에 붙어있는 작은 섬들이 있는데 이를 통칭해서 '외곽도서'라고 부른다. 외곽도서 중 일부는 이미 중국이 점령했고, 나머지 일부도 군사적으로 점령이 가능하나 대만의 지배 하에 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이 소도마저 점령할 경우 대만이 정치적으로 대륙에서 더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진먼다오(金門島)와 마주다오(馬祖島)이다.

1949년 당시 마오쩌둥은 대만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굳은 결의를 갖고 있었고, 이를 위해 대만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도서부터 차례로 점령했다. 이를 발판으로 대만 본섬을 탈환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이 계획은 현재까지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수차례에 걸친 공격 시도(1949-50년, 1954-55년, 1958년)가 있었으나 "폭이 160km나 되는 대만해협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라는 난제가 남아 있었다.

▲ 진먼다오와 마주다오가 표시된 지도. ⓒwikimedia.org


1949-50년: 준비 부족과 2개의 우연

'대만 해방전'의 임무를 부여 받은 것은 제3야전군 사령원 천이(陳毅)와 부사령원 쑤위(粟裕)였다. 제3야전군은 예하의 제10군단(사령원 예페이[葉飛])에게 샤먼(廈門)과 진먼다오의 '해방' 작전 업무를 부여했는데, 대륙에서의 대승(大勝)과는 달리 섬의 탈환에는 상륙전 능력, 특히 공군과 해군의 역할이 중요했다.

실제로 1949년 10월 24일 인근의 샤먼과 타 지역에서 징발한 어선에 분승한 중국군 9000여 명이 진먼다오에 상륙했으나 처절한 결과를 맞게 된다. 최신 연구를 보아도 약 9000명 중 5000명이 포로가 되었다는 설과 9000명 중 일부가 대륙으로 송환되고 다른 인원은 모두 전사하거나 실종됐다는 설이 있다. 9000명이 모두 전사했다는 설도 있다.

대패(大敗)의 원인에는 중공군 측의 해공군 지원 부족, 수송 수단 제한, 날씨 및 조류에 대한 무지뿐만 아니라, 대만군의 항전 의지, 부대 전력, 효과적인 포대 이동 등도 그 원인에 포함된다. 이후 마오쩌둥은 보다 철저한 준비를 했는데 적어도 두 가지의 고려가 있었다. 첫째는 미국과의 교전을 피하면서 대만이 중국의 '국내 문제'라는 점을 각인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대만을 그대로 둘 경우 대만의 독립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사는 마오가 원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1954년 미국에서 출간된 책 <대만을 구한 우연(The Fluke That Saved Formosa)>과 유사한 제목으로 미 국무부 보고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우연은 사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잘 알려진 대로 한국전쟁 발발(1950년 6월 25일)로 인해 미 태평양 함대가 대만 해협에 파견되어 동 해역을 중립화시킨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륙전에 대비해 공산당군을 양쯔강 유역에서 수영 및 도강 훈련을 시키는 과정에서 달팽이가 옮기는 기생충인 시스토소마 자포니쿰(Schistosoma japonicum)으로 인해 숫자 미상의 중국군 사병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결국 '대만 해방전'은 훗날로 미뤄지게 된다.

참고로 포모사(Formosa)는 포르투갈어로 보물섬인데, 과거 대만을 이렇게 불렀다. '우연'이라는 영어 표현인 'fluke'의 원래 발음은 '플루크'인데, 일본식으로 동화되어 '후루쿠'라고 사용되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는데, 사실 당구를 쳐 본 사람은 '후루쿠'가 무엇인지 잘 알 것이다.

1954-55년: '적극 방어' 전략과 최초의 합동작전 사례

한국전쟁(1950-53년)이 끝나자마자 마오쩌둥의 '대만 해방전'이 재개되었다. 1953년 12월 저장성 사령관에 장아이핑(張愛萍) 장군이 임명되었는데, 저장성은 해안선이 길고(약 2200km), 국민당이 통제하고 있는 외곽도서가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이장산(一江山)다오나 다천(大陳)다오는 타이베이에서 300km이상 떨어져 있고 상하이에 가깝기 때문에 국민당군의 대륙에 대한 정보 수집, 게릴라 활동, 선전물 배포 등에 이용될 수 있었다.

장아이핑의 작전은 '적극 방어(積極防禦)'였는데, 연안에서 적을 기다리기 보다는 외곽도서를 공격하는 것이었고, 한 번에 한 섬씩, 방어가 어려운 최북단에서 남하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1949-50년 진먼다오의 교훈을 잊지 않고 적어도 적에 비해 수적 우세, 합동작전 수행, 상륙 전(前) 포격 실시 등이 가능한 시점에 공격이 이뤄졌다. 국민당군은 1천명 이상, 공산당군은 15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장아이핑의 전략은 주효했다.

남쪽에 위치한 진먼다오의 경우 포격 외에도 국민당군의 공군기와 함정에 대한 공격이 이뤄졌다. 공산당군의 목표는 진먼다오에 주둔하고 있는 8만 명의 국민당군과 5만 명의 주민을 대만 본섬으로 철수시키는 것이었는데, 장제스는 이를 용인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수차례에 걸친 대형·소형 수송함을 통해 진먼다오에 대한 보급품 및 생필품 공급이 이뤄졌고, 미국 함정이 대만 선단을 호위하거나 아니면 동시 출항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대만(중화민국)은 1954년 12월 이미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중국은 미군 함정의 파괴나 미군의 살상을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다. 더욱이, 1955년 2월 당시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원자 미사일(atomic missiles)'의 사용 가능성을 내비쳤고, 당시 부통령인 닉슨은 "전술 원자무기는 재래식(무기)이고 침략군 타겟에 대해 사용할 수 있다"고까지 말하며 중국을 위협했다. 서방의 핵·미사일 전문가 중에는 당시 미 행정부의 핵 위협이 중국으로 하여금 핵무기를 개발하도록 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하는데, 적어도 중국의 핵 개발 원인의 하나는 될 수 있다고 본다.

▲ 진먼다오를 순시하는 장제스(1956년). ⓒwikimedia.org

1958년 진먼다오 포격

1958년 7월 진먼다오에 대한 포격이 시작된 시점에 중동에서는 반제국주의 투쟁이 한창이었고, 국내적으로는 대약진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운동은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 전략으로서 이미 소련과의 불화를 배태하고 있었다. 과거 일부 연구자들은 1950년 2월에 체결한 중·소 우호협력및상호원조 조약의 유효성을 시험하기 위해 마오가 이 포격을 실시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장기간에 걸친 진먼다오 포격에서 마오의 전쟁 명령은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미군과의 교전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우선 첫 단계를 시행하고, 다음 단계를 시행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피라"는 것이었다. 즉, 전장(戰場)의 상황 변화에 따라 전술뿐만 아니라 전쟁 목표까지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교훈을 토대로 1958년 포격에는 MiG-17기를 포함한 공군 전력이 동원되었고, 소형 선박으로 구성된 해군 지원부대도 배치되었다. 또한, 야전 사령관들은 포격으로 인해 하루 400톤의 생필품이 필요한 진먼다오는 이미 고립되었고, 공군력에 의한 폭격으로 이 섬을 초토화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

단, 마오의 최종 결정은 1) 진먼다오에 상륙하지 않는다. 2) 미군과 교전하지 않는다. 3) 미국인/미군을 살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상륙전이 불필요하기 때문에 공군력의 동원도 필요 없게 되었고, 진먼다오에 대한 보급을 둘러싼 양측의 치열한 공방 끝에 진먼다오는 다시 평온을 찾게 되었다. 마오의 판단을 훗날 '올가미(noose)' 전략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진먼다오 그리고 마주다오를 대만에 맡겨 정치적·사회적 연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 3회에 걸친 외곽도서에 대한 공격은 양안 간 군사적 대치 시기에 해당한다. 더 이상 양측은 '대만 해방'이나 '본토 수복'을 외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는 상기 전투 중에도 대만 이슈가 '국제화'되는 것을 우려했고, 결과적으로 중국의 입장에서 소위 '대만 문제'가 시작되었다. 또한, 상륙전의 경우 합동전력의 중요성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해군의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양안 간에 벌어진 과거의 군사적 대결을 통해 교훈을 얻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으나, 미래전의 발발에 대비해 (상대)전력, 전략, 전장 및 상황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절대 게을리 할 수 없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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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현대중국연구소장 겸 한림대만연구소장을 맡고 있고, 국방부와 해군의 자문위원이다. SSCI 등재지 The Korean Journal of Defense Analysis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중국의 3事(人员, 外事, 軍事)이다. "Sino-ROK Relations at a Crossroads" "China's Anti-Access Strategy and Regional Contingencies" 등 150여 편의 논문이 있고,<동아시아 주요 해양 분쟁과 중국의 군사력>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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