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대선이 한국 정치 발전의 계기가 되려면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할까. 유력 대선 주자와 정당은 무엇을 '시대정신'으로 내걸고 경쟁해야 할까. 많은 이들이 분권형 개헌을 이야기한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제한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런데 '합의제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지 않고 있는 한국 정치 현실에서 분권형 개헌은 얼마만큼의 힘을 가질 수 있을까. <프레시안>이 만난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과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 교수 모두 부정적이었다.
오히려 자칫하면 지역 맹주 간 권력 나눠 먹기로 끝날 공산이 크다는 게 두 사람의 공통 의견이었다. 이들은 분권형 개헌보다는 비례 대표제 확대를 통해 정당 정치를 바로 세울 것을 우선해서 주문했다. '합의제 민주주의'야 말로 작금의 시대정신이란 지적이다.
남재희 전 장관은 대담 내내 "최근의 개헌 논의가 어떻게든 종지부를 찍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해 보이지도 않는 개헌 얘기에 마침표를 찍어야 비로소 대선판이 짜인다는 얘기다. 남 전 장관은 그러면서 김종필 전 총리와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가 추석 후에 하기로 한 '냉면 회동'을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이 회동에서 김 전 총리는 안 전 대표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게 될까. (☞ 관련 기사 : 남재희 "JP '냉면 파티', 安 새누리 입당 제안하나")
한편, 최 교수는 "문재인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과연 이전보다 나은 정부를 운용할 것인가"란 질문을 던졌다. 문 전 대표에 대한 개인 평이 아니다. 새누리당이든 더불어민주당이든 역대 정권 중에 민심과 지지층에 대한 '반응성'이 충분했던 정권이 하나도 없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최 교수는 '변화'의 시작은 "합의제 민주주의라는 시대정신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있는 개혁안의 제시"라고 했다.
남 전 장관은 이날 김종인 전 더민주 대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김 전 대표가 지난 3월 민주노총을 찾아가 노동계의 정치·사회 발언을 비난한 것부터, 지난 총선 전 정의당과의 협력을 거부하고 박근혜 정부의 비민주성을 한 번도 제대로 비판하지 않은 것, 기어이 최근에는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를 즉각 찬성한 일까지 모두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경제 민주화와는 아예 반대되는 행동이라는 비판이다. 남 전 장관은 최근 김 전 대표가 개헌 관련 언급을 한 것을 보고 "퍼즐이 맞춰졌다"고도 했다. 김 전 대표가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닌 박근혜-더민주 양쪽의 협력을 바탕으로 한 19대 대통령일 것이라는 예측이다. 남 전 장관은 "헌법 119조 2항을 김종인 법으로 명명한 것은 바로 나"라면서 김 전 대표에게 "배반감을 느낀다"는 말도 남겼다.
대담은 지난 7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박인규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이사장의 사회로 진행했다. 2회에 걸쳐 대담 내용을 게재한다.
문재인, 강한 비전이 안 보인다…'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얘기해야
프레시안 : 다음 대선을 앞두고 야권의 흐름은 어떤가. 혹자는 세종대왕이 더민주 당내 경선에 뛰어들어도 지금으로선 문 전 대표를 당내 경선에서 못 이긴다고 하더라. 이렇게 야권 대선 후보 결정 과정이 문 전 대표만의 '독무대'처럼 치러진다면 안정적으로 패배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남재희 : 문 전 대표가 야권 안에서는 압도적인 힘을 지닌 것 같은데, 정작 국민한테는 강한 어필을 못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한테 지난 대선에서 2%포인트 차이로 진 것은 결코 자산이 아니다. 새로 창출을 해야 한다. 국민에게 강한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작금의 남북관계나 국내 빈부 문제에 있어서 특히 뭐가 하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게 없다. 남북 관계는 아예 안 건드리려고 한다. 그래서야 어떻게 어필하나. 선거 때는 국민들도 현명해진다. 무난하게 더민주 대선 후보가 되겠지만 국민을 확 잡아끄는 힘 없이는 대통령을 할 수 없다.
최태욱 : 문재인 전 대표가 대선 후보가 되어 혹 당선되더라도 '과연 잘할 수 있을까'란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도 많다. 문 전 대표가 과연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뛰어난 인물인가? 그 두 전 대통령도 정권을 잘 운용한 편이 아닌데, 문 전 대표는 특별히 잘할까. 이런 우려다. 사실 이건 인물이 아니라 민주당 계열 전체의 능력, 더 나아가서는 한국 민주주의 체제의 문제일 수 있다. 아까도 얘기가 나왔지만, 한국의 민주정부들은 시민들의 요구에 대한 반응성이 너무 부족했다. 아무리 중요하고 급한 걸 얘길 해도 잘 듣질 않는다. 문 전 대표를 포함해 야당 지도자들은 '왜 민주당 정권 10년 동안 잘 못 했을까'에 대한 답을 좋은 후보와 함께 제시해줘야 한다. 김대중-노무현 전 정권에 대한 진솔한 평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이러한 것을 잘 못 했는데, 5년 기회를 다시 주면 이번엔 새롭게 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린 이러저러한 걸 다 바꿀 것이니까 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뭘 어떻게 바꿀 것인가? 그걸 제대로 얘기해줘야 한다. 그게 바로 요즘 뜨고 있는 협치 혹은 합의제 민주주의라는 시대정신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있는 개혁안의 제시 아니겠는가. 어떻게 합의의 정치를 제도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지, 그 방안을 얘기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정권을 잡으면 집권당인 더민주는 누구를 위해 일할 것인가? 사회 경제적 약자? 그렇다면 그들의 이익과 선호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잘 대표하고, 최대한 관철해줄 것인가? 당이 그들의 요구에 민감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방안이 무엇인가? 또한 사회경제적 강자를 대표하는 다른 정당 혹은 다른 정치세력들과는 어떻게 타협하고 협상하여 약자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보호해낼 것인가? 그 합의의 정치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도록 할, 그것을 안정화할 수 있는, 시민들이 믿을만한 어떤 제도화 방안이 있는가? 단순히 경제 민주화를 이루겠다, 복지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등의 그런 이상적인 목표만 말하지 말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이 무엇인지, 그 정치적 해결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협치 혹은 합의제 민주주의의 제도화라고 작금의 시대정신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탱자' 되어버린 김종인…2년 토막 대통령 노리나"
프레시안 : 김종인 전 더민주 대표의 행보는 어떻게 보고 있나. 최근 연일 경제민주화 홍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대선 플랫폼'을 설계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직접 '링' 위에 오를 거라는 말도 있다.
남재희 : 이제 퍼즐이 풀렸다. 김 전 대표가 지난 4.13 총선에선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지 않았는데, 얼마 전 <한겨레> 성한용 선임기자가 쓴 김 전 대표 관련 기사를 읽고 비로소 그 퍼즐이 풀렸다. (☞ 관련 기사 : ) 김 전 대표는 "내년 12월 선출되는 19대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를 20대 국회의원 4년 임기에 맞춰 2020년 5월까지로 단축하고 개헌을 추진하면 된다"고 했다. 다음 대통령을 임기 2년 3개월짜리 '토막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기사에는 김 전 대표가 직접 나갈 가능성도 언급됐다.
이렇게 퍼즐이 풀렸다. 김 전 대표는 더민주에 몸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박 대통령하고는 '탯줄'을 유지함으로써 양쪽의 협력하에 그 토막 대통령을 자신이 하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김 전 대표는 박 대통령의 대선 시기 선거대책기구인 국민행복추진위에서 위원장을 지냈다. 편집자) 이를 염두에 두었으니 총선 때 '문제는 경제다'라고만 하고 박 대통령의 각종 비민주적 행태 등에 대해서는 일절 비판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가장 아픈 곳은 안 건드린 것이다.
김 전 대표는 '북한 궤멸론'을 언급하더니 최근에는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가 논란이 되자 즉각 찬성해버리기까지 했다. 박 대통령과 아주 북 치고 장구 친 것이다. 어떻게 바로 찬성을 하나. 그건 말이 안 된다. 국회에서 충분히 논의를 한 후에 가부간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국회에서 논의를 하자'는 얘기까지는 (김 전 대표가) 해야 했던 것 아닌가. 그래야 국민이 사드에 대해 알 기회가 생기질 않나. 이런 숙의 과정을 생략하다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경제 민주화도 이제 탱자가 되어버렸다. 강남 귤이 강북에 가면 탱자가 되듯이(江南種橘江北爲枳) 김종인 전 대표의 경제 민주화는 이제 탱자다. 경제 민주화는 하나의 큰 흐름이다. 경제 민주화로 포장된 어떤 정책이나 법만 토막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번 보자. 김 전 대표는 지난 3월 민주노총에 찾아가서 "노조가 너무 사회적인 문제에 집착하면 근로자 권익 보호는 상당히 소외된다"고 말했다. 위원장이 노동법에 반대하다 구속되어 있는데 거길 가서 '용용 죽겠지'하며 나무랐다. 이건 경제 민주화와 정말 안 맞는다. 경제 민주화에선 노동 세력이 중요한 기둥이다. 노동 세력이 경제 문제, 더 나아가 정치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좋다고 보는 게 바로 경제 민주화다. 독일에서도 그랬다.
총선을 앞두고 정의당과 협력을 거부한 것도 경제 민주화와 안 맞는다. 노동조합에 부정적인 사람, 평화적 남북 관계에 부정적인 사람, 진보 정당이나 진보 세력에 부정적인 사람이 어떻게 경제 민주화를 할 수 있나. 독일은 1차 대전 후 로자 룩셈부르크의 공산 혁명이 있었고, 그 다분히 혁명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집권한 사회민주당도 사회주의적이고 사민주의적 이념과 정책, 법질서를 수용하게 되었다. 개별적인 이익을 초과하는 사회 연대적인 가치를 중시하게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런데 김종인 전 대표가 더민주의 수장을 맡은 이후 보인 행보는 이런 것과는 정반대다.
사실 헌법 119조 2항을 '김종인 조항'이라고 명명한 게 바로 나인데. 내가 과잉 선전을 한 게 되었다. 나도 책임이 있다. 김 전 대표는 노태우 정권 때부터 금융 실명제를 극렬하게 반대했고, 부동산 과제도 반대했다. 그런데 119조 2항을 김 전 대표가 조문화했을 것이란 심증으로 선전원이 되어줬다. 북 치고 장구 쳐준 나로선 김 전 대표에게 배반감을 느끼고 있다. 내 잘못이고 할 말이 없다. 지식인으로서 지금이라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김 전 대표를 비판할 수밖에.
김 전 대표의 우향우를 보면서 '민주당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는 생각도 하게 됐다. 태곳적으로 올라가면 한민당, 극우 정당이다. 이것이 조병옥·김준연·신익희를 지나 조금씩 변질되다가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대중경제론, 그리고 노무현을 거쳐 지금의 경향성을 갖게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리영희 선생을 문재인 전 대표도 탐독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정체성을 띄는 거냐, 알 수가 없다. 막연히 새누리당에 비해 개혁적이다 정도다.
김대중-노무현의 유산도 옅어지고 있다. 진보(Progressive)까지는 아니고 개혁(reformist)적인 것이 좀 남아있기는 한데, 김종인 전 대표는 이걸 확 우선회를 시켰다. 문 전 대표가 이를 원위치할지, 추미애 대표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아직 알 수 없다. (끝)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