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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5월, 전두환 세력은 왜 거리 진출을 방치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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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5월, 전두환 세력은 왜 거리 진출을 방치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98>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일곱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프레시안 : 1980년 5월은 서울역 회군, 5·17쿠데타, 광주항쟁이 연이어 일어난 달이다. 말 그대로 결정적 국면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를 찬찬히 되짚었으면 한다. 우선 이때 학생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나.

서중석 : 신군부가 기다리던 5월이 드디어 왔다. 신군부는 소위 혼란이라는 걸 조장해 집권 기회로 삼으려 했다. 5·16쿠데타 세력이 1961년 4·19 1주년에 즈음해 '시위를 크게 해라. 거리에 나가라'고 학생들을 부추긴 것하고 비슷한 면이 있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5월에도 대체로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계엄 철폐 요구는 5월 이전에도 여러 차례 나왔는데, 5월 들어서도 여러 대학에서 제기됐다. 5월 1일 서울대 복교생 300여 명이, 이 사람들은 주로 긴급 조치 위반자들이었는데, 민주화를 위한 시국 성토대회를 열고 비상 계엄을 즉각 해제할 것을 요구했다. 시위대는 1500여 명으로 불어났고, 그러면서 교문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이날 성균관대 학생들도 시위를 했다. 당국이 입영 훈련을 거부한 1학년 학생들한테 징병 검사 영장을 발부하자, 그것에 반발한 1500여 명이 영장 철회,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교문 앞까지 진출해 시위를 했다.

서울대 학생들은 5월 1일 복교생 시위에 이어 2일에는 학생 총회를 열었다. 1만여 명이 모였는데, 1학년생들은 입영 훈련에 참가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철야 농성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면서 학생들은 전두환을 유신 잔당의 수괴로 규정하고, 모든 반동적 야욕을 포기하고 즉각 공직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또한 "비상 계엄을 해제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까지 행진했다. 같은 날 성균관대, 충남대 학생들도 교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고려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그 후에도 계엄 해제 등을 요구하는 시위, 성토대회, 농성 같은 것이 전국의 여러 대학에서 계속됐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10일까지는 거의 거리에 나가지 않았다. 학교 바깥으로 나가 시위하는 것을 자제했다. 오히려 전국 23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5월 9일부터 10일 새벽까지 고려대에서 회의를 열고, 당분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교내 시위를 하겠다고 밝혔다. 11일부터 12일 새벽까지 서울대에서 열린 전국 26개 대학 학생회장단 회의에서는 가두시위를 자제한다는 방침을 다시 확인했다.

교문을 박차고 나온 학생들, 결국 서울역 회군

프레시안 : 학생들은 언제 학교 밖으로 진출했나.

서중석 : 5월 13일 연세대를 비롯한 6개 대학 학생 3000여 명이 종로 등 시내 중심가로 나왔다. 드디어 가두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동안 가두시위를 유보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던 학생회장단이 13일 밤 고려대에 모여서, 이때는 27개 대학에서 모였는데, 교문을 박차고 나가 싸우자고 결의했다. (이러한 변화와 관련해 '5월 12일 쿠데타설 및 남침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5월 12일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 그리고 북한이 곧 남침할 것이라는 미확인 정보가 이 시기에 돌았다. 이에 당시 학생 운동 주류는 각 대학 농성장에 있던 학생들에게 몸을 피하라고 연락했다. 그렇지만 우려했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군부에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며 가두시위를 자제하던 학생 운동 주류는 이 일로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된다. '편집자')

5월 14일 서울 시내에서 21개 대학, 7만여 명이 거리로 나왔고 지방 주요 도시에서도 3만여 명이 거리로 나왔다. 이날 서울에서는 비가 오는 속에서도 밤 10시까지 광화문, 종로, 시청, 서울역, 영등포 등에서 시위를 했다.

15일에는 더 많은 대학에서 나왔다. 서울의 35개 대학과 지방의 24개 대학에서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서울의 경우 학생들은 거의 모든 사진에 나오는 모습 그대로 서울역 광장에 집결했다. 일부 학생들은 시청 앞 저지선을 뚫기 위해 경찰과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날 참가 인원이 몇 명이냐에 대해서는 5만, 7만, 10만, 이런 식으로 글마다 다르게 나오는데, 서울역에 집결한 학생 수가 최고 7만여 명에 달한 것으로 추산한 당시 기사가 사실에 가까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0만 명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고 7만 명 정도 또는 그 이하일 것이라고 난 본다.

그런데 서울역 일대에 집결한 학생들이 회군했다. 회군이라는 말을 거의 모든 글에서 쓰고 있는데, 학생회장단은 내무부 장관과 통화해 학교로 안전하게 귀환하는 걸 보장받은 다음에 학생들을 설득해 각 대학에 돌아가게 했다. 이게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다. (회군 결정 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 인물로 심재철과 이수성이 거론된다. 심재철은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다. 논의 과정에서 고려대 등에서는 철수 반대 의견을 냈지만, 서울대 총학생회의 회군 주장을 넘어서지 못했다. 서울대 학생처장이던 이수성은 내무부 장관 등과 연락해 안전 귀환 보장 등의 타협안을 만들어내며 회군에 힘을 실었다. 훗날 심재철은 MBC 기자를 거쳐 한나라당,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되고 이수성은 서울대 총장을 거쳐 김영삼 정부 때 총리를 지낸다. '편집자')

그러고 나서 27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15일 자정부터 16일 아침 7시까지 토론한 끝에 일단 가두시위를 중단하고 수업을 정상적으로 받으면서 국민들에게 상황을 알리기로 결의했다. 16일 오후 5시 이화여대에 다시 모인 55개 대학 학생 대표들은 격론을 벌인 끝에 전두환·신현확 퇴진, 비상 계엄 해제를 주장하고 5월 22일까지 계엄을 해제하라고 시한을 딱 정했다. 이 요구 사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전국에서 시위를 벌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토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그때까지는 손을 대지 않았던 신군부가 움직였고 그에 따라 경찰이 이화여대를 덮쳤다. 그때까지는 총학생회장 회의가 열려도 그냥 놔뒀는데 이때는 다르게 대응한 것이다. 물론 미리 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학생들이 피신하긴 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대응한 이게 뭘 뜻하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 속에서 16일 밤 10시 반,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를 방문하기 위해 10일 출국했던 최규하 대통령이 일정을 앞당겨서 서울에 도착했다.


▲ 1980년 5월 14일과 15일의 학생 시위 상황을 보도한 동아일보 1980년 5월 15일 자 6면과 7면. ⓒ동아일보 화면 갈무리


회군한 서울과 달리 횃불 시위까지 벌인 광주 학생들

프레시안 : 이 무렵 광주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서울에서 5월 14일, 15일에 수많은 학생이 시내에 나왔는데 그때 광주에서도 학생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14일 오전 10시쯤 전남대 학생 6000여 명이 교내에서 시국 대회를 열었다. 이때 일부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본래 다음 날인 15일에 가두시위를 할 예정이었는데, 일부에서 먼저 치고 나간 것이다. 학생들은 광주역 광장으로 몰려가서 스크럼을 짜고 "비상 계엄 해제하라", "유신 잔재 쳐부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도청 광장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도청 광장에서 민주 성회(민족 민주화 성회)를 진행했다. 이름을 민주 성회라고 한 게 눈에 들어온다.

오후 6시 무렵 민주 성회를 마무리했는데, 대회를 마치기 전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만일 정부가 특단의 조치와 함께 휴교령을 내리면 그다음 날 아침에 자동적으로 교문에 모여 시위를 하자.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정오에 도청 광장에 모이자', 이렇게 참석자들에게 얘기했다. 공개적으로 약속을 한 것이다.

그다음 날인 15일에도 학생들은 민주 성회를 열었다. 전날과 달리 전남대뿐만 아니라 조선대, 광주교대 등 광주 지역 8개 대학 학생들이 동시에 가두시위를 했다. 학생들은 1만 5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교수들도 일부 동참했다. 오후 2시 30분쯤 이들은 도청 광장 분수대 주변에 앉아서 두 번째 민주 성회를 진행했다. 오후 6시가 되자 민주 성회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갔다. 14일과 15일에 있었던 시위와 민주 성회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됐는데, 광주 시민들은 이러한 학생들에게 박수와 격려를 보냈다.

16일 학생들은 다시 도청 광장에 모였다. 9개 대학, 3만여 명이 도청 광장을 꽉 메우고 시국 성토대회를 거행했다. 오후 8시가 되자 학생들은 어둠이 깔린 속에서 횃불, 피켓,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시위를 했다. 횃불 시위를 한 것이다. 학생들은 '정부에서 휴교령을 비롯한 특단의 조치를 취하면 모여서 시위를 하자'고 다시 한 번 약속하고, 사흘에 걸친 시위를 일단 마무리했다.

이날 시위도 질서 정연하게 이뤄졌다. 경찰은 14일에 전남대 학생들이 처음에 거리로 진출할 때는 좀 막는 듯했지만, 그 후에는 시위를 강하게 저지하기보다는 사실상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프레시안 : 이 시기 광주에서는 다른 도시에 비해 시위 규모가 컸다. 서울에서 학생들이 5월 15일 서울역 회군을 한 후 16일에는 시위를 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광주 학생들은 16일 대규모 횃불 시위를 했다. 광주 시민들도 그런 학생들을 응원했다. 이런 부분들을 어떻게 보나.

서중석 : 왜 광주에서는 도시 규모에 비해 월등 큰 시위가 벌어졌느냐. 그와 관련해서는 우선 1979년 10월 26일에서 그해 말까지 대학가 시위는 오로지 전남대, 전북대에서만 열렸고 다른 대학에서는 시위가 없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1980년 5월 2일, 이때는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자제할 때였는데 전북대 학생들은 시내에 나가서 연좌 농성을 했다. 그러니까 10·26 이후 호남 쪽에서 학생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서울에서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이 일어난 지 4일 후인 1979년 11월 28일 광주 YWCA 회관에서도 '통대'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반대하는 대회가 열렸다. 대회는 가두시위로 이어졌는데, 시민들이 속속 합류해 시위대가 3만 명이 넘을 정도였다. 계엄 당국이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관련자들을 대거 구속하던 때였음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11월 30일에는 전남대 학생 2000여 명이 유신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 반대 등을 외치며 거리에서 시위를 했다. 12월 5일에는 전북대 학생 1500여 명이 유신 잔당 퇴진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편집자')

그렇게 된 데에는 10·26 이후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다른 지역보다 호남 쪽에서 월등 컸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민주화에 대해 그처럼 더 큰 기대를 갖게 된 건 호남 쪽이 박정희 집권기에, 그중에서도 특히 유신 체제에서 심한 차별 대우를 받은 것과 관련이 있다.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정부의 여러 주요 직책을 맡는 문제 등을 비롯한 인재 등용 같은 것에서도 차별이 심하지 않았나. 그건 지독히 비민주적인 권력에서 비롯된 문제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화가 되면 그런 경제적, 인적 차별 같은 게 소멸되고 민주주의와 함께 이제 모두 과거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기대가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다른 지역에 비해 차별을 받은 것에 대한 불만이 컸던 것이 하나의 요인이었고 그것 때문에도 더욱더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1980년 5월이 되면 '이러다가 전두환·신군부가 집권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민주화 열망이 짓밟히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안 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도 광주에서 더 많은 학생이 모였다고 볼 수 있다. 그와 함께 김대중에 대한 기대도 상당히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도 생각해볼 수 있다.

▲ 1980년 5월 광주항쟁 직전 거행된 민족 민주화 성회 모습.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갈무리


학생들의 거리 진출을 막지 않은 신군부의 일대 도박

프레시안 : 다시 서울 상황으로 돌아오면, 서울역 회군에 대해 1980년대부터 많은 논의가 이뤄졌다. 평가가 엇갈리는데, 그중에는 서울역 회군은 결정적 잘못이며 그것이 신군부가 광주 학살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줬다는 주장도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서중석 : 지금까지 나온 거의 모든 글에서 '서울역 회군은 문제가 있다. 그렇게 많은 학생이 집결한 만큼 강하게 투쟁을 했어야 할 것 아니냐'고 썼다. 일각에서는 광주항쟁과 같은 투쟁을 했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런 주장들과 관련해 여러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뭐냐 하면, 우선 계엄 상태였는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시내 중심가까지 나올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당시 상황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5월 14일에도 그렇고 15일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부분이 제일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1979년 11월 24일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을 보면 계엄사 병력이 민주화 운동 세력에게 얼마나 무자비한 짓을 저질렀나. 그리고 학생들이 시내 중심가까지 나오고 나서 며칠 후에 일어나는 광주항쟁에서 전두환·신군부가 보여주는 모습이 있지 않나. 그런데 이때는 왜 서울이건 광주건 가두시위를 하려고 학생들이 나오는 걸 방치했느냐, 이 말이다.

이 부분에 관해 이도성 기자가 쓴 글에 중요한 내용이 나온다. 그걸 보자. 1980년 5월 13일 밤에 학생회장단이 모여서 토론한 끝에 교문을 박차고 나가서 싸우자고 결의했다고 앞에서 말하지 않았나. 이 결정을 내린 게 14일 새벽인데, 이렇게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총궐기 가두시위를 결의하자 신군부는 바로 이날 오전 8시 50분에 소요 진압 본부를 개설하고 진압군 투입 지시를 내렸다. 그야말로 신속하게 움직인 것이다.

이렇게 진압군 투입 준비를 완료한 신군부는 그동안 철통같이 지켰던 대학 교문을 열었다. 그전에는 학생들이 거리에 나오는 걸 강하게 막았는데, 이때는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경찰에 최루탄 공급도 중단했다. 경찰로서는 최루탄이 중요한 무기였는데도 그렇게 한 것이다. 물론 서울시청 근처에서는 쐈을 터이니 부분적인 공급 중단이었을 것이다. 하여튼 그러면서 각 대학 교문 앞에서는 맨손에 방패만 든 경찰이 학생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다치는 상황이 벌어졌다. 관할 경찰서장들이 핸드 마이크로 "우리는 이제 모두 물러간다. 부디 평화적인 시위를 해달라"고 호소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유신 시기에도 그랬고 10·26 이후에도 학생 시위는 대부분 교내에서 했다. 경찰이 교문 방어선을 지키면서 막았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런데 이제 거리로 나오라고 한 것이다. 세종로, 중앙청, 청와대 같은 핵심 지역만 지키고 있었다.

신군부로서는 아주 큰 모험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서울에서도 광주처럼 시민들이 대거 호응하면 신군부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 말이다. 그런데도 신군부가 놀라운 짓을 한 것이다.

혼란 조장하고 그걸 빙자해 쿠데타 일으키려 미리 병력 움직인 신군부

프레시안 : 신군부는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인가.

서중석 :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 그걸 말하기 전에, 진압군 투입 준비가 완료됐다고 앞에서 얘기했는데 그 상황을 간단히 언급하고 가자. 미국 쪽 동향을 보면,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은 미국 국무부로 긴급 타전한 1980년 5월 8일 자 비밀 전문에서 "법과 질서 유지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경우", 즉 사태 진압을 위해 "경찰에 군을 가세시킨다는 한국 정부의 비상 계획들에 미국 정부가 반대한다는 어떠한 시사도 이 두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두 사람은 전두환과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을 가리킨다. 글라이스틴은 5월 9일 전두환과 최광수를 만나서 그러한 입장을 전달했다. 이처럼 미국 측은 계엄군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에 대해 어떠한 반대도 하지 않겠다는 걸 주한 미국 대사가 이미 5월 8일 자로 미국 국무부에 보고한 것이다.

그런데 병력은 그 이전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전두환·신군부는 5월 3일 특전사령부 예하 9공수여단을 수도군단에 배속시키고, 6일에는 해병 1사단 1개 연대를 소요 진압 부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1996년 검찰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러한 조치는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사전 보고도 없이 이뤄졌다. '편집자') 6일부터 9일 사이에는 2군 및 수도권 지역 전 부대를 대상으로 소요 진압 준비 태세를 점검했다. 또한 포천에 주둔하던 13공수여단을 서울 거여동 3공수여단 주둔지로, 화천에 주둔하던 11공수여단을 김포 1공수여단 주둔지로 이동 배치했다. 9일에는 해병 1사단 1개 연대를 추가로 소요 진압에 투입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14일에는 앞에서 얘기한 대로 육본 작전참모부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소요 진압 본부를 설치하고 전군에 소요 진압 부대 투입 지시를 내렸다. 또한 이날 3공수여단을 국립묘지에 배치했다. 15일에는 양평에 주둔하던 소요 진압 부대인 20사단의 2개 연대를 잠실체육관과 효창운동장으로 이동시켰다. 지방에서도 2군 사령부가 부산, 대구, 광주 지역에 군을 배치했다. 17일에는 20사단 60연대, 또 하나의 연대인데 이것이 태릉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조치는 서울에서 14일, 15일 학생들을 진압하기 위해 취한 게 아니다. 그 학생 시위가 커지면서 상황이 혼란으로 들어갔다는 걸 빙자해 5월 17일에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 '민주화를 완전히 짓밟는 그 쿠데타를 일으키면 굉장히 많은 학생, 시민이 봉기할 수 있다. 그런 봉기가 있을 것이다'라고 보고 그것에 대비한 것이었다.

학생들 응원한 광주와 달리 무표정했던 서울 시민들

프레시안 : 앞에서 서울역 회군과 관련해 생각해볼 문제로 학생들이 거리에 나오는 걸 신군부가 방치한 점을 지적했다. 더 살펴볼 사안으로 어떤 것이 있나.

서중석 : 시민들의 반응 부분이다. 5월 14일과 15일에 서울에서 시위가 있었을 때 광주와는 또 다르게 시민들이 무표정했다. 이 점을 중시해야 한다. 예컨대 서울대에서 시청까지는 상당히 멀지 않나. 그런데 학생들을 더 힘들게 한 건 시민들을 설득하려고 도처에서 대화를 시도했는데 시민들이 별로 호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도 학생들이 서울역에 모였을 때 더 피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민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이유에 대해 잘 분석해놓은 글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나도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운데, 다만 짐작컨대 경제가 아주 어려웠기 때문에 시장 사람들이 시위에 대해 우려하는 점이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하나 든다. 유신 말기에 경제가 매우 좋지 않았고 그게 1980년에도 이어진다고 전에 얘기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모두들 당연히 민주화는 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서는 시민들이 지지를 유보했던 것 아닌가, 그렇게 보인다.

당시 나도 학생들한테 많이 물어봤다. 서울역까지 올 때 어떤 길로 왔느냐, 오면서 어떠어떠한 활동을 했느냐, 경찰이 어느 정도 막았느냐, 이런 걸 물었다. 경찰이 조금 막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게 세게 막지는 않았다고들 말하더라. 시민들 반응에 대해서도 '무반응이었다. 아주 냉정했다', 이렇게 답하더라. 이번에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다시 살펴본 몇 권의 책에서도 다들 같은 이야기를 해놨더라. 거듭 말하지만, 당시 시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나 하는 부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서울역 회군과 관련해 검토할 문제가 하나 더 있다.

5·17쿠데타 후 왜 광주는 외롭게 싸워야 했나

ⓒ오월의봄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5월 17일 전두환·신군부가 1979년 12·12쿠데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권력을 탈취하는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나. 그리고 5월 18일 이후에는 광주에서 유혈 사태가 일어났다. 전두환·신군부가 저지른 만행이 당시 보도는 제대로 안 됐다고 하더라도, 운동권은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여러 경로로 상당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5·17쿠데타에 반대하고 광주항쟁에 호응하는 투쟁이 목포를 비롯한 광주 인근 지역을 제외하면 서울에서건 다른 지방에서건 한 군데도 안 일어났다. 그리고 목포 등 광주 주변 지역에서 일어난 시위는 광주항쟁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전두환·신군부는 5·17쿠데타를 자행하면 굉장한 반발이 일어날 거라고 보고 서울에 그 많은 병력을 미리 배치했는데, 5·17쿠데타 후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자 그 병력의 상당 부분을 광주로 이동시키기까지 했다. 광주를 아주 단단히 때리려고 그랬던 것이다.

이런 사태까지 일어나게 되는데, 그 점도 회군 문제와 관련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광주에서 일어난 유혈 사태는 정말 많은 사람을 분노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도 왜 이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는 학생들 움직임이 없었느냐 하는 것을 회군 문제와 관련해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회군은 그 자체로 봐서는 누가 봐도 '저거 뭐 저래?', 이런 면이 있었다. 그 많은 사람이 거기까지 나왔으면 뭔가를 보여줬어야 하는 건데, 그런 것 없이 '안전하게 귀환하는 걸 보장해달라'고 하고는 학생들을 빼버린 것이다. 그건 문제가 있었다. 그건 문제이긴 했지만, '회군하지 말고, 더 큰 시위를 벌이고 더 나아가서 계엄군이나 전두환·신군부 쪽과 투쟁했어야 한다. 학생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나. 좋은 기회 아니었나', 이런 주장과 관련해서는 거듭 말하지만 몇 가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리하면, 그것과 관련해 내가 얘기한 건 크게 보면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당시 학생들이 별다른 저지를 당하지 않고 거리에 나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전두환·신군부로서는 자신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었다는 점에서 일대 도박을 한 셈인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걸 핑계 삼아 일정한 시간이 되면 쫙 5·17쿠데타 작전에 돌입하는 것이 전두환·신군부의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시민들 반응이 어땠는가 하는 문제다. 그 부분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는 광주를 제외하면 5·17쿠데타에 반대하는 투쟁이 일어나지 않았고 광주 인근 지역을 제외하면 다른 지방에서는 광주항쟁에 호응하는 투쟁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바로 그 부분이다. 5·17쿠데타 이건 1972년 유신 쿠데타하고도 또 다르다. 학생들이 그렇게 많이 나왔는데 그런 것을 전면 부정하고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짓밟는 쿠데타를 일으킨 것 아닌가. 그런데도 광주를 제외한 다른 지방에서는 가만히 있었다. 광주항쟁 때에도 그러했다. 광주를 제외하면 학생들이 서울이건 다른 지방이건 대응하지 않았는데, 그런 점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 (서울역 회군과 관련해 많이 제기된 비판 중 하나는 당시 학생회장단을 비롯한 이른바 현장 지도부가 뚜렷한 계획을 갖고 임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와 관련, 대다수가 민주화를 바란 건 분명하지만 그걸 실현할 역량을 민주화 운동 세력이 갖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냉정히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아울러 객관적인 역량 문제와 별개로, 만약 서울역에서 회군하지 않고 5·17쿠데타 후 다른 지역에서도 저항이 있었다면 전두환·신군부가 광주에 병력을 더 투입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은 광주항쟁 이후 형언하기 어려운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한 요소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아흔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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