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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600명? 전두환조차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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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북한군 600명? 전두환조차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07>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열여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환각제에 취한 공수 부대? 그런 말이 나돈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프레시안 : 광주항쟁을 되짚을 때 빠뜨릴 수 없는 사안 중 하나가 유언비어 문제다. 이 문제, 어떻게 보나.

서중석 : 광주항쟁, 광주사태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큰 쟁점이 유언비어 문제다. 당시 나돌았던 유언비어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포함해서 유언비어가 어떤 역할을 했느냐 하는 것 등이다.

생각해보면 어디에서나 큰 사건이 벌어질 때에는 유언비어가 나돌기 마련이다. 1919년 3·1운동, 1960년 4월혁명, 1987년 6월항쟁 등도 그렇고, 출처가 불분명한 소문이나 과장된 소식이 시위와 투쟁에 영향을 끼치는 건 전 세계의 큰 사건에서 다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급박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모든 걸 사실 그대로 다 파악하고 그것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 아닌가. 사람들이 분노하거나 흥분할 때 경우에 따라서는 잘못된 사실도 일부 작용할 수 있다.

당시 계엄사는 '광주사태와 관련해 이러저러한 유언비어가 유포됐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사례를 제시했다. 그게 얼마만큼 잘못된 것인가 하는 게 논쟁의 초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광주항쟁 직후인 1980년 6월 9일 계엄사는 '일부 언론인이 불순 세력과 연계해 악성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고 있다'며 언론인 8명을 연행, 조사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유포했다는 유언비어 8개를 제시했다. 이에 대해 김영택은 이 8개 중에서 "현 통치보다는 김일성 치하가 나을 것이다" 등 5개는 광주항쟁 당시 한 번도 유포된 적이 없으며, 나머지 3개 중 '계엄군에게 환각제를 먹였다'를 제외한 2개는 항쟁 당시 실제로 있었던 일에 더 참혹한 대목을 추가해 계엄사에서 유언비어로 조작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편집자')

제일 많이 지적되는 것으로 '공수 부대원에게 환각제를 먹였다. 독한 술을 먹였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 이런 것들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당시 공수 부대원들에게 환각제나 술을 먹였다는 부분은 외신에도 보도된 바 있다. 사실 여부를 알 수는 없지만 이건 공수 부대원들이 너무나도 심한,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른 것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어떻게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시민들 사이에서 이런 의혹이 제기되면서 독한 술 또는 환각제를 먹였다는 소문이 돌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김영택 기자가 지적한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느냐 하는 게 중요한 것이다.

1988년에 천주교 광주 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펴낸 <광주 시민 사회 의식 조사>를 보면 광주항쟁 당시 군인들에게 술과 흥분제를 먹여 투입했다고 보느냐는 문항에 25.7퍼센트가 '그건 사실이다', 55.8퍼센트가 '상당 부분 사실일 것이다', 이렇게 답변했다. 무려 80퍼센트가 넘는 응답자가, 그것도 1988년에 와서도 상당 부분 사실일 것이라거나 사실이라고 답변한 것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얼마나 군인들이 있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느냐 하는 걸 말해준다. 당시 광주에 있었던 신고르넬리오 신부가 쓴 글에도 "마약을 먹었는지 눈이 번쩍번쩍했다", 공수 부대원들에 대해 이렇게 쓴 게 나온다. 공수 부대원들의 만행이 '비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면 저런 짓을 할 수가 있느냐', 이런 생각을 누구라도 갖게 한 것이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 이 부분을 보자. 공수 부대원들 중 일부는 경상도 말씨를 쓰는 사람이 있었을 터이고 그러면서 지역적인 것도 작용하고 해서 '경상도 사람이니까 여기 와서 저런 짓을 하는 것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일부에서 했을 수 있다. 예컨대 한 기자가 쓴 걸 보면, 1980년 5월 21일 경상도 말씨를 쓰는 동아일보 취재 기자한테 한 아낙네가 "경상도 기자 양반이 와서 보기를 잘했소. 서울 가거든 군인들이 광주 사람 다 죽인다고 좀 알려주시오"라고 얘기하면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는 소문과 관련해서는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실세가 경상도 사람이라는 것이 사람들한테 은연중에 떠오르고 또 어쩌면 그들에게 연행된 김대중도 생각나지 않았을까, 이런 점도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 '공수 부대원에게 환각제를 먹였다. 독한 술을 먹였다'는 소문이 돈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진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광주항쟁 당시 공수 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은 '어떻게 온전한 정신으로 저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많은 사람이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독침 사건과 계엄사의 교란 작전

프레시안 : 전두환·신군부가 광주항쟁을 왜곡하고 시민들을 흔드는 과정에서 독침 소동도 일어나지 않았나. 어떤 사건이었나.

서중석 : 독침 사건을 보자. 간첩이 들어왔다는 소문과 관련이 있는 독침 사건 하나만 보더라도 어떤 식으로 유언비어가 돌았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강준만 교수 책을 보면, 5월 25일 아침 술집을 운영하는 장계범이라는 사람이 도청 농림국장실에 쓰러지다시피 들이닥쳐 "독침을 맞았다"고 소리를 쳤다고 한다. 시민군 한 사람이 장계범의 어깨를 살펴보려고 다가서자, 장계범은 "너는 필요 없어"라고 하면서 옆에 있던 정한규라는 운전사를 지목했다. 정한규는 상처에서 독을 몇 번 빨아내는 시늉을 하더니만 전남대병원으로 장계범을 실어갔다.

이 독침 사건이라는 게 발생하자, 간첩이 침투했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돌고 모두들 수군거리며 '불안해서 도청 안에는 더 이상 못 있겠다'고 하면서 일부는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 사건은 미리 계획된 것이었다. 당국에서 침투시킨 정보 요원들이 전개한 도청 교란 작전의 일환이었다.

당시 학생수습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던 김종배는 시민군의 동요를 가라앉히고 순찰대원들한테 이 사건에 대해 다시 확인해보라고 지시했다. 그에 따라 순찰대원들이 전남대병원에 가보니까 장계범은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순찰대원들은 달아나지 못한 정한규를 붙잡아서 물어봤다. 정한규 진술에 의하면, 정한규 이 사람은 23일 오후에 어떤 여자를 도청 안에서 만났는데 그때부터 그 여자를 통해 지속적으로 바깥과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도청 상황을 시민군 무전기로 계엄군에 보고한 첩자였던 것이다.

복면군과 관련해서도 이런 문제가 제기됐다. 복면군은 말 그대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을 말하는데, 당시 복면군 문제가 시민군 사이에서 있었다. 복면군이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람들은 과격 투쟁 같은 걸 막 주장하고 그랬다. 그래서 주위에서 의심을 받기도 했고, 이 사람들 가운데에는 모처에서 보낸 자들도 들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김영택에 따르면, 계엄군 철수 다음 날인 1980년 5월 22일부터 시위대, 그중에서도 시민군 가운데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부쩍 늘어났다. 그 이전, 즉 서울의 봄에서 광주항쟁 전반기까지는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김영택은 복면 부대가 무기 반납을 강하게 반대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다가 무력 진압 직전인 5월 26일 밤 이후 거의 자취를 감췄다며 의문을 표했다.

한편 계엄군이 요원들을 광주에 투입해 시민들을 교란한 사실은 계엄사 발표에도 나온다. 1980년 5월 31일 계엄사는 "시내에 은밀히 폭도를 가장, 침투시켰던 요원과 매수했던 난동분자"를 활용해 작전을 전개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에는 광주항쟁 당시 보안사 요원들이 광주에 잠입해 지하 정보 활동 및 특수 임무를 수행한 사실이 담겨 있다. 또한 동아일보는 2013년 5월 23일, 정수만 전 5·18민주유공자유족회장이 찾아낸 군 작전 일지 등을 바탕으로 광주항쟁 당시 신군부가 비밀리에 민간인으로 위장한 군인 300명을 1980년 5월 25일 서울에서 광주로 보내 선무 공작을 전개했다고 보도했다. 그와 함께 선무 공작 요원 투입 6일 전에는 편의대(농민, 행상 등으로 가장해 주민과 함께 움직이며 임무를 수행하는 임시 특별 부대)를 운용했다는 사실도 전했다. '편집자')

광주사태는 고정 간첩 때문? 허위 사실 마구 퍼뜨린 계엄사

ⓒ오월의봄
프레시안 : 앞에서 유언비어 문제를 살펴봤지만 광주항쟁 당시 전국적으로 거짓 선전을 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한 핵심 당사자는 정부, 계엄 당국 아니었나.

서중석 : 계엄사 쪽, 실제로는 전두환·신군부 그쪽인데 여기에서는 불순분자, 고정 간첩, 그리고 유언비어가 광주사태를 그렇게 크게 만들었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그렇지만 계엄사에서 발표한 김대중 사건처럼 사실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한 건 무엇으로 봐야 하는 건가. 그렇게 해가지고 일반 국민들을 오도하고 광주 시민들을 분노케 한 건 무엇으로 봐야 하는 건가.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발표한 담화문, 그것도 광주 시민들한테는 '유언비어 중에서 이렇게 고약한 유언비어가 어디 있느냐', 이런 생각을 갖게 할 수 있었다. 전에 살펴본 것처럼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첩'들" 때문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나. 광주 시민들이 생각하기에 이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자신들을 모욕하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겠나.

담화문뿐만 아니라 이희성 이름으로 나온 경고문에도 그 얘기가 또 나온다. "시민 여러분, 소요는 고정 간첩, 불순분자, 깡패들에 의하여 조성되고 있습니다"라는 삐라를 만들어서 막 돌렸다. 그럴 때마다 광주 시민들의 분노는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계엄사가 허위 사실을 퍼뜨린 게 얼마나 많았나. 광주 시민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간첩 얘기도 그것과 비슷한데, 도대체 당국이 발표한 대로 당시 광주에 간첩이 그렇게 많았다면 도처에서 붙잡혔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프레시안 : 광주가 아니기는 했지만 이 시기에 당국에서 남파 간첩을 체포했다고 발표한 사례가 있지 않나.

서중석 : 간첩으로 얘기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누구냐 하면 이창용이라는 사람이다. 1980년 5월 23일 이창용을 체포했다고 그다음 날(24일) 발표됐는데,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를 보면 당시 보안사에서 이창용을 어떻게 규정했는가 하는 내용이 나온다. 보안사 자료에는 이렇게 돼 있다. "5·23 광주 지역에 침투하여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것을 임무로 침투한 북괴 간첩 이창용이 서울역전에서 주민들의 신고로 검거되었음. 이 간첩은 독침까지 휴대하고 있어 시위 군중 속에 들어가 시위자를 살해하여 폭동을 더욱 격화시킬 준비마저 갖추고 서해안으로 침투, 잠입한 자였음."

이처럼 전두환·신군부 세력은 남파 간첩으로 내려온 이창용을 광주에서 일어난 시위와 연관시켰다. 그렇지만 수사 기록과 재판 기록에 의하면, 이창용은 그해 5월 16일 전남 보성을 통해 침투했고 광주에서 일어난 시위와는 상관없이 남파됐다. 광주항쟁과 관련된 임무나 광주에 잠입하기 위한 시도도 발견할 수 없었다. 수사 기록, 재판 기록을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신군부 세력은 광주민주화운동이 북한과 연관된 것처럼 여론 조작을 하기 위해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국방부 과거사위는 보고서에 썼다.

거듭 강조하지만 계엄사령관 이름으로 낸 담화문, 경고문에서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 고정 간첩과 연관돼 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지 않았나. 그게 뭘 뜻하는 것이겠나. (계엄사만이 아니라 정부에서도 광주항쟁이 마치 북한과 연결된 것처럼 잘못 생각하게 만드는 발표를 했다. 정부 대변인인 이광표 문공부 장관은 광주항쟁 무력 진압 전날인 1980년 5월 26일 성명을 발표하고 "북한 공산 집단은 5월 25일 평양 시민 군중 대회를 개최, 광주 지역의 소요를 공공연히 지시, 선동하는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대립을 조장, 대중 봉기를 통한 폭력 혁명을 계속 책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광주항쟁은 북한의 지시, 선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편집자')

제 역할 못한 언론, <투사회보> 등으로 진실 알린 시민

프레시안 : 간첩 또는 북한과 관련된 것처럼 왜곡해서 오월 광주를 어떻게든 물어뜯으려는 시도는 광주항쟁이 막을 내린 후 30년 넘게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3년 일부 종편에서 내보낸 '5·18 당시 600명 규모의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했다'는 주장이다.

이게 얼마나 황당한 주장인지는 심지어 전두환조차 이걸 인정하지 않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전두환은 2016년 <신동아>와 한 인터뷰에서 "5·18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의 광주) 침투와 관련된 정보 보고를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전혀" 없다고 답했다. 또한 '북한 특수군 600명 침투' 주장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600명이 뭔데? (…) 오, 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례는 한국 사회에서 언론 개혁이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가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한다. 1980년 당시에도 대다수 언론은 오월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전하기는커녕 입을 다무는 것으로도 모자라 왜곡 보도까지 하지 않았나.

서중석 : 유언비어 같은 것이 일정하게 유포되고 또 힘도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게 크게 작용했다. 진실, 사실을 일반 국민이나 광주 시민들이 제대로 알 수 있었다면 유언비어가 도는 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1980년 5월 20일 밤과 21일 새벽에 광주 MBC, KBS가 불탄 것이 뭘 얘기해주느냐, 이 말이다.

이 때문에도 광주 시민들은 경상도와 관련해 지역감정을 유발하지 말라고 촉구하는 활동, 즉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일부 도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활동을 한편으로 전개했다. 그와 동시에 나름대로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고 그랬다. 진실,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보고 그렇게 한 것이다.

5월 18일 첫날부터 전남대의 '대학의 소리' 팀, 극단 광대 팀, 백제야학 팀에 의해 여러 종류의 유인물이 제작됐다. 윤상원이 중심이 된 들불야학 팀에서는 19일부터 유인물을 제작했다. 21일부터는 들불야학 팀에서 본격적인 소식지를 만들었다. <전남민주회보>와 8호까지 나온 <투사회보>를 제작했다. 그다음에 나온 유인물은, 호수는 <투사회보>를 잇는 의미로 9호를 사용하면서 명칭을 <민주시민회보>로 바꿨다. 제호를 투사에서 민주 시민으로 바꾼 것은 의미가 클 수 있다. 변화를 보인 것이다. 제10호 <민주시민회보>는 27일 인쇄만 하고 미처 배포하지 못한 상태에서 계엄군이 진입하면서 계엄군에 압수를 당했다. 이것과 관련해서 더 얘기하면, 광주항쟁에서 윤상원 등이 무조건 강경파였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광주 정신, 항쟁 정신과 연관해 더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투사회보>를 비롯한 유인물은 항쟁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광주 일원에만 배포돼 국내 전체에서 널리 읽힐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을 전달하기보다 선전이나 투쟁 의식 고취에 역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광주 시민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에는 기여했지만, 희생자 숫자 보도 등에서는 과장이나 추측도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일선 기자들이 진실을 보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 광주 상황을 담은 동아일보 1980년 5월 22일 자 1면. 계엄사의 검열에 막혀 사실의 많은 부분을 덜어낸 보도였는데도 가판 40여만 부가 순식간에 팔렸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광주의 진실을 알고 싶어 했다. ⓒ동아일보


부끄러워 붓을 놓은 기자들…그러나 조선일보는 달랐다

프레시안 : 어떠한 노력을 했나.

서중석 : 지난 번에 '게라지' 사례를 얘기했는데 동아일보 기자들만 하더라도 5월 19일, 20일 광주항쟁에 대해 현지에서 써 보낸 글을 어떻게 해서든지 신문에 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검열에서 그게 통과될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광주항쟁이 나기 전부터 이미 기자들은 검열 철폐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광주항쟁 이틀 전인 5월 16일에는 한국기자협회장 김태홍 주관 아래 회의를 열고, 5월 20일 자정을 기해서 계엄사의 보도 검열을 거부하자는 결의를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동아일보 기자들의 노력도 5월 19일, 20일에 보였지만 전남매일 같은 데서도 나름대로 기자들이 노력한 게 있다.

전남매일에서는 5월 20일 기자들이 결의해서 18일, 19일에 있었던 특전사 군인들의 잔학상을 기사로 썼다. 그런데 인쇄 직전에 중역실 간부가 쫓아 나와서 판을 엎어버렸다. 그러자 전남매일의 모든 기자가 사직하기로 결의하고 다음과 같은 집단 사직서를 써서 광주에 뿌렸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부끄러워 우리는 붓을 놓는다. 전남매일 기자 일동."

광주의 유혈 사태, 광주항쟁은 너무나도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기자들이 취한 태도가 다른 사안하고는 달랐다. '다른 사안의 경우 계엄사가 검열하는 것에 따라가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도 광주에서 일어난 일, 이건 그럴 수 없다. 그것조차 검열대로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기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광주 시민을 난동분자, 폭도로 표기할 것을 강요하는 것에 제작 거부로 맞서야 한다고 해서 5월 20일부터 경향신문 등에서 제작 거부 투쟁이 벌어졌다.

경향신문의 경우 대부분의 평기자들이 제작 거부에 동참했다. 그렇지만 부장과 차장 등 몇몇 사람이 변칙적으로 신문을 제작했다.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에서도 19일 총회를 개최하고,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왜곡 보도를 시정하고 진실을 보여줄 수 있을 때까지 제작을 거부한다고 결의했다.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에서는 20일부터 25일까지 제작을 거부했다. 그러나 소수가 제작하면서 왜곡과 은폐가 더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판단하고 27일 제작에 복귀했다. 한국일보에서도 19일 기자 총회를 열고 20일부터 검열 거부, 제작 거부에 돌입했다. 동양통신 기자들은 21일부터 검열 거부,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이렇게 많은 주요 언론의 기자들이 나름대로 노력을 하긴 했지만 전부 검열이라는 데서 막혔고, 회사 상층부에서는 일부 간부들을 데리고 신문을 계속 내버렸다.

당시 광주에서 현장을 낱낱이 취재했던 김영택 기자는 동아일보 상황에 대해 이렇게 썼다. 동아일보에서는 19일부터 사설 없는 신문을 나흘째 냈는데, 22일에 1면 전체와 사회면 일부를 광주 기사로 꽉 메운 지면을 검열관에게 내밀었다. 물론 일부만 통과되고 나머지는 '안 된다. 삭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래서 다시 쓰기를 반복했는데, 그렇게 고쳐 쓴 것이 세 번째 만에 통과됐다. 그렇게 해서 네 시간이나 지연돼서 '광주 데모 사태 닷새째'라는 제목의 1면 기사가 발행됐다. 그러자 가판 40여만 부가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계엄사에서 진실 보도를 막고 사실의 많은 부분을 깎아낸 것이었는데도 그렇게 팔려나간 것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광주의 진실을 알고 싶어 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있었던 건 틀림없다. 그러나 당시 매스컴들이 한 짓을 전체적으로 보면, 특히 조선일보 같은 신문들을 보면 광주 사람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22일 이전에는 광주에 대한 보도 자체를 찾아보기가 어려웠고, 5월 22일부터는 중앙 일간지가 광주 기사를 많이 실었지만 대개는 계엄사 발표를 그대로 옮기는 수준이었다.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그런 발표를 게재해 광주를 '폭도의 도시'로 고착화했다. 조선일보의 경우 '광주의 소요'와 '간첩의 준동'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등 전두환·신군부의 의도를 뒷받침해주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도 했다.

(전두환·신군부는 광주항쟁의 진실을 가리고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언론사를 겁박하는 한편 돈을 뿌렸다. 이에 대해 경향신문 기자였던 윤덕한은 <한국 언론 바로 보기 100년>에 실린 글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광주에서 유혈극이 절정에 달하고 있던 (1980년) 5월 22일 전두환은 각 언론사 발행인을 불러 계엄 확대 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언론계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어 사태 보도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사회부장들을 요정으로 불러내 똑같은 당부를 하고 1인당 100만 원씩 촌지를 돌렸다. 당시 중앙 일간지의 부장급 월급이 45만 원 내외였으므로 100만 원은 촌지의 수준을 넘는 거금이었다."

보안사 정보처는 자신들이 원하는 기사를 생산하기 위해 광주 현지에서 기자들을 인솔할 계획(1980년 5월 24일, 광주 소요 사태 언론인 취재 유도 계획)을 세웠다. 국방부 출입 기자와 사회부 기자 등 총 49명을 불러 보안사 간부의 인솔 아래 광주에서 취재하게 하되 사회부 기자들에게는 1인당 30만 원, 국방부 출입 기자들에게는 각 20만 원씩 총 820만 원을 배정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처럼 전두환·신군부는 여론 조작을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그렇지만 언론사들이 권력에 당하기만 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오월 광주에 관한 낯 뜨거운 기사들이 난무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일부 언론사는 정말 해도 너무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보도에 앞장서며 전두환·신군부와 밀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조선일보는 전두환 정권 시기에 몸집을 엄청나게 불리며 한국에서 가장 힘센 신문으로 거듭나게 된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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