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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허수아비' 만든 자들의 권력 찬탈 칼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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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허수아비' 만든 자들의 권력 찬탈 칼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09>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열여덟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권력 찬탈 기구 국보위 출범

프레시안 : 그간 1979년 10·26 직후부터 1980년 오월 광주에 이르는 역사를 살펴봤다. 이제 전두환 정권 중반기에 이른바 유화 국면이 나타날 때까지 상황이 어떠했는지 짚어봤으면 한다. 1980년 5월 27일 무력으로 광주항쟁을 짓밟은 전두환·신군부가 권력 찬탈을 위해 밟은 다음 수순은 무엇이었나.

서중석 : 그해 5월 31일 이광표 문공부 장관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한다고 발표했다. 국보위 설치령은 5월 27일 국무회의에서 이미 가결된 상태였는데, 대외비로 국무위원들한테 철저한 함구령을 내렸다가 31일 이날 발표한 것이다. 27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하는 형식을 밟았다.

국보위는 대통령령으로 설치하게 되는데, 이걸 왜 설치했느냐. 이것에 대해 권정달은 내각을 조종, 통제하고 강력히 독려할 수 있는 기구로 국가 보위 비상 기구를 설치하는 방안이 나왔다고 진술했다. 실질적으로는 일종의 혁명 평의회 비슷한, 쿠데타 권력의 최고 기구라고 얘기할 수 있다.

맨 처음에는 대통령의 긴급 조치권을 발동하는 형식으로 비상 기구를 설치하려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최 대통령이 "얼마 전에 긴급 조치 9호를 해제했는데 또다시 다른 긴급 조치권을 발동할 수 없다. 이런 일은 5·16 한 번으로 족하다"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래서 전두환·신군부는 대통령령으로 설치하는 자문 기구라는 형식을 밟았다. 그런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실제는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그러니까 1961년 5·16쿠데타 세력이 만들었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비슷한 힘을 가진, 혁명 평의회 성격을 띤 기구로 국보위를 만들었다.

국보위 설치 역시 전두환·신군부가 시국 수습 방안을 구체적으로 현실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국보위를 만드는 과정을 보면 5·16쿠데타나 1972년 10·17쿠데타(유신 쿠데타)와는 달리 합법성을 띠려 했다. 처음에는 긴급 조치권 발동으로 하려다가 그게 안되니까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령으로 하는 방식을 택한 것에서 그런 점이 잘 드러난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봤거나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또 당시 반대 세력이나 정부 내지 정치 세력, 국민들의 반발을 고려했기 때문에도 그랬던 것 같다.

이처럼 합법성을 띠려 했지만 훗날 결국 단죄 대상이 된다. 1995년 김영삼 정권 때인데, 처음에는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해 10월 노태우의 비자금 계좌가 탄로 나면서 12·12쿠데타, 5·17쿠데타 관련자들이 대거 구속돼 단죄를 받게 된다. 1997년 4월에는 대법원에서 이들의 행위를 국헌 문란으로 규정하고 단죄했다.

프레시안 : 국보위는 어떻게 구성됐고 언제부터 활동이 이뤄졌나.

서중석 : 국보위 발족 시기는 형식상으로는 5월 31일이지만 실제로는 비상 계엄 전국 확대 결정을 내린, 즉 쿠데타를 결행한 5월 17일 직후부터 분과 활동이 부분적으로 이뤄졌다. 국무회의 의결 같은 것과 상관없이 그 이전에 이미 그렇게 한 것이다. 5월 17일 직후 운영위원장으로 이기백(육군 소장), 운영위 간사로 최평욱(대령)이 임명됐고 이 두 사람이 총무처, 보안사에서 보내온 명단을 가지고 국보위 구성 절차를 밟게 된다.

국보위 명단을 보면 대통령 최규하가 위원장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국무총리 서리 박충훈과 부총리, 몇몇 장관,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 등 군 수뇌급과 이너 서클 핵심 인사들이 들어가 있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인 최광수도 포함돼 있었다.

이렇게 국보위에 최규하 대통령이니 장관이니 하는 사람들이 들어가 있긴 했지만 실제로는 유명무실했다. 실질적인 국권 찬탈 기구는 국보위 상임위원회였다고 볼 수 있다. 국보위 상임위원회는 위원장과 30명의 상임위원으로 구성됐다. 상임위원은 임명직 16명, 그리고 13명의 분과위원장과 사무처장 등 당연직 14명, 이렇게 30명이었다. 그런데 상임위원의 과반수가 현역 군인이었다. 각 분과에는 위원들이 있었는데, 예컨대 올해(2016년) 총선을 앞두고 야당 대표로 영입된 김종인이 재무분과 위원으로 들어가 있었다.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물론 전두환이었다. 국보위가 발족한 후에는 전두환이 실질적인 권력 행사를 하게 되고 대통령, 총리 이런 사람들은 그전에도 힘이 별로 없긴 했지만 이제는 말 그대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게 된다.


▲ 1980년 8월 이진희 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과 대담하는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 이진희는 전두환을 노골적으로 찬양했다. ⓒ연합뉴스

박정희 집권기 주요 인사 9명, 드러난 부정 축재액만 853억

프레시안 : 전두환·신군부는 국보위를 만들어서 어떤 일을 했나.

서중석 : 5·17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권력형 부정 축재자들을 잡아들였다고 전에 얘기했는데, 이건 직접적인 국보위 활동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고 합수부에서 잡아넣은 것이지만 이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가를 먼저 살펴보자.

6월 18일 계엄사령부는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지목된 9명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김종필 216억 원, 이후락 194억 원, 이세호 111억 원, 김진만 103억 원, 김종락 92억 원, 박종규 77억 원, 이병희 24억 원, 오원철 21억 원 등 부정 축재액이 총 853억 원에 이른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자진 헌납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이걸 국가에서 몰수하겠다고 나왔다.

6일 후인 6월 24일에는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지목된 이 사람들이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김종필 같은 경우 공화당 총재직, 국회의원직은 물론이고 한일의원친선협회 한국 측 회장직, 5·16민족상 총재직 같은 것까지 다 내놓았다.

국보위가 발족하면서 국보위 상임위원회 사회정화분과위원회에서 6월 5일부터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간 것이 공직자 '숙정'이다. 공직자를 대규모로 내쫓는 것이었는데, 6~7월 두 달 동안 모두 5490명을 '숙정'했다. 많은 사람이 쫓겨난 건데, 그래도 5·16쿠데타 이후만큼은 아니었다. 5·16쿠데타가 났을 때는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내쫓지 않았나. 하여튼 5490명뿐만 아니라 국영 기업체, 공기업, 금융 기관, 정부 산하 단체 임직원 3111명도 '숙정'됐다. 이도성 기자 글에 의하면 여기에다가 중앙정보부 직원 400여 명과 언론계, 교육계에서 숙정된 사람까지 합치면 그 수가 1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8월 8일 정부는 이들 해직자가 2년 이내에는 정부 투자 기관은 물론이고 유관 업체에도 취업할 수 없다고 했다. 이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는 있었지만, 그 경우 구속하겠다는 협박이 뒤따랐다. 이 사람들은 1987년 6월항쟁 이후에 '억울하다'고 하면서 80년전국해직공직자복권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복권 운동을 벌이게 된다.

보안사와 사주들의 비판 언론인 찍어내기 합동 작전, 언론 대학살

프레시안 : 전두환·신군부의 칼날은 언론계도 겨냥하지 않았나.

서중석 : 언론계 숙청, 이것도 꼭 국보위 활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안사 준위 이상재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일이지만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에 여기서 같이 얘기해도 될 것 같다. 6월 9일 합수부 수사관들이 경향신문 기자 홍수원, 박우정, 박성득을 연행했다. 그것에 이어서 서동구 조사국장, 이경일 외신부장, 경제부 기자 표완수도 잡아갔다. 그리고 같은 계열사였던 문화방송 보도국 노성대 부국장, 오효진 기자 등도 연행했다. 이들이 악성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명목으로 그랬던 것인데, 실제는 제작 거부도 했던 이들을 내쫓기 위해 이런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달여 후인 7월 18일에는 경향신문 사장 이진희가 차장 이하 56명을 내쫓았다.

(이진희는 기자로 일하다가 유신 체제에서 유정회 의원으로 들어간 인물로 언론계 복귀 후 노골적으로 전두환을 찬양하는 데 앞장섰다. 1980년 8월 MBC 대담 프로그램에서는 "그동안 국보위를 만드시고 노고가 크신 전 장군께서는 새 시대를 영도해야 할 역사적 책무를 좋든 싫든 맡으셔야 할 위치에 있지 않나 봅니다"라는 등의 낯 뜨거운 발언을 쏟아냈다. 전두환 정권 출범 후에는 문공부 장관을 맡기도 했다. 전두환을 비롯한 육사 11기와 가까운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동생 이상희(민정당·한나라당 의원, 과기처 장관 등 역임)가 신군부의 핵심인 허삼수·허문도와 고교 동창(부산고 10회)이었던 점도 이진희가 권력을 행사하는 데 유리한 조건이었다. 참고로 부산고 10회는 이들 외에도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신한국당·한나라당 의원을 지낸 최병렬, 하나회 출신 육군 참모총장 김진영, 검찰총장 정구영 등을 배출한 이른바 잘나가는 기수로 통한다. '편집자')

8월 16일 정부에서 작성한 '언론인 정화 결과'라는 문건에는 언론인 중에서 이 시기에 쫓겨난 사람이 933명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이상재가 만든 보안사 언론대책반에서 이른바 정화 대상자로 찍어서 조치를 요구한 사람은 336명으로 돼 있다. 이 336명 중에는 군사 정권에 절대 충성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소위 구제됐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걸 감안했을 때 보안사 명단에 의해 해직된 사람은 298명으로 본다. 그러면 933명 중 298명을 제외한 635명은 뭐냐. 이건 언론사 사주들이 끼워 넣기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정론 직필을 주장해 사주들한테 눈엣가시로 여겨진 사람들이 주로 그렇게 된 것 아니겠나.

보안사는 앞에서 얘기한 숙정 공직자 취업 제한처럼 '정화 언론인 취업 허용 제한 기준'이라는 걸 만들었다. 해직된 언론인은 언론사 및 관계 단체, 공직, 국영 업체, 정부 투자 및 출자 법인 등에 취업할 수 없도록 했다. 심지어 사기업의 홍보 및 광고 담당 요원으로 취업하는 것까지 제한했다.

예컨대 동아일보 논설 주간 박권상은 '극렬 반정부'로 찍혀서 이때 쫓겨났다. 몇몇 기자들은 '국시 부정'이라는 명목으로 쫓겨났다. 박권상뿐만 아니라 한국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에서 쫓겨난 기자들도 대개 사유가 '극렬 반정부'로 돼 있다. 동양통신이나 동양방송(TBC), 동아방송(DBS)에서 쫓겨난 기자들도 그런데, 이 사람들의 취업이 다 제한돼 있었다.

▲ 언론 대학살이 자행된 1980년, 각종 매스컴에선 듣기 민망한 전두환 찬가가 난무했다. 이미지는 새 시대의 구심점이라며 전두환을 띄운 경향신문 1980년 8월 20일 자 3면. ⓒ경향신문


프레시안 : 933명이면 당시 기자의 30퍼센트 정도다. 대규모 해직 사태라는 점뿐만 아니라 언론이 권력에 빌붙어서는 안 된다고 여긴 이들이 대거 쫓겨났다는 점에서도 말 그대로 언론 대학살이었다. 전두환·신군부가 1980년 7월 31일 독재 권력에 비판적이던 <씨알의 소리>, <뿌리 깊은 나무>, <창작과비평>을 비롯한 정기 간행물 172종을 강제 폐간한 것도 언론 대학살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1980년 언론에 듣기 민망한 전두환 찬가가 난무한 것도 이러한 상황과 관련 있다. 5·16쿠데타 직후와 비교하면 그때는 그래도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언론이 심하게 타락한 것에 더해 1980년에 언론 대학살 등까지 겪으면서, 대다수 주류 언론은 언론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오늘날에도 상당수 언론이 언론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적지 않은데, 그것은 독재 정권 시절에 매우 좋지 않은 쪽으로 형성된 언론의 틀을 바로잡지 않은 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다시 돌아오면, 정치권 쪽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김종필 등 일부는 권력형 부정 축재 혐의로, 김대중 쪽은 사회 혼란 조성 및 소요 관련 배후 조종 혐의로 5·17쿠데타 때 구속됐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박정희 정권이 유신 쿠데타 직후 야당의 강성 국회의원들을 상당수 붙잡아다가 지독한 고문을 가했는데, 그것과 비슷한 일을 전두환·신군부도 1980년에 했다.

계엄사는 1980년 7월 19일 여야 정치인 17명을 연행해 조사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여기에는 전 내무부 장관 구자춘, 김현옥 등 공화당에서 잘나가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신민당에서 고위급에 있었던 사람들도 포함돼 있었다. 김영삼의 왼팔, 오른팔로 불린 최형우, 김동영 같은 사람을 비롯해 3김 아래 급들을 싹쓸이하려 한 것이다.

전두환·신군부는 이 사람들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 국회 별관, 이때는 국회 별관으로도 끌어갔는데 하여튼 거기로 끌고 가서 육군 형무소 죄수복을 입혔다. 그러고는 아주 심하게 고문을 하면서 재산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졸업정원제 실시하고 학도호국단 부활시킨 속내

ⓒ오월의봄
프레시안 :
국보위는 교육 문제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았나.

서중석 : 국보위의 소위 개혁이라는 것 가운데 국민들이 환영한 것도 있었다. 교육 개혁에서 과외 금지가 바로 그것이다.

1980년 7월 30일 국보위는 대입 본고사를 폐지하고 졸업정원제를 실시하는 대학 입시 제도 개혁안과 과외를 금지하는 교육 정상화 및 과열 과외 해소 방안을 발표했다. 그 내용을 보면, 과외 열풍을 해소하기 위해 재학생의 과외 및 대학생과 현직 교사의 과외 지도를 금지하고 8월 1일부터 문교부, 내무부, 국세청으로 과외 단속반을 편성해 단속에 나서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981학년도부터 대입 본고사를 폐지하고 고교 내신 성적과 예비고사 성적으로 신입생을 선발토록 하며, 1981학년도 신입생부터 졸업정원제를 실시해서 대학 입학 인원을 첫해에는 130퍼센트, 그다음 해에는 150퍼센트, 이런 식으로 늘리겠다고 했다.

여기서 적지 않은 국민들한테 환영받은 게 군부 파시스트다운 방식으로 과외에 철퇴를 가하겠다고 한 부분이었다. 당시 과외비로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은 게 사실이었다. 그런 과외를 당장 두들겨 패서 막겠다고 하니까 '그러면 이제 과외비가 안 들어가겠네' 하는 생각으로 환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과외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1980년 6월부터 KBS 1TV에서 '가정 고교 방송'을 내보냈는데, 이것도 인기가 좋았다.

그 후 과외를 받은 사실이 적발된 재학생은 정학이나 퇴학 조치를 받고, 그 학부모는 직장에서 면직되고, 과외를 한 대학생은 구속되는 일이 생겼다. 그렇지만 이러한 조치로 과외를 근절하지는 못했다. 자기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하는 건 많은 학부모의 공통된 생각이었기 때문에 비밀과외, 당시 '몰래바이트'(몰래 아르바이트)라고도 불렸던 이걸 막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과외 금지 조치 때문에 오히려 변칙적인 과외가 생기는 것 아니냐는 비난을 듣고 그랬다.

프레시안 : 실제로 효과를 거뒀느냐 하는 것과는 별개로 과열 과외를 해소하겠다는 것 자체는 누구도 딴죽을 걸 수 없는 명분이다. 그렇지만 졸업정원제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전두환·신군부는 왜 졸업정원제를 도입한 것인가.

서중석 : 소위 교육 개혁이라는 것과 관련해 이규호 문교부 장관의 졸업정원제가 관심을 모았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규호가 잘 설명했는데, 들어갈 때에는 이탈리아처럼 마음대로 들어가게 하고 나올 때에는 성적이 나쁜 사람은 졸업을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마음대로 들어가게 한 건 아니었고 정원의 130퍼센트 선에서 뽑게 했다.

졸업정원제를 채택한 가장 큰 이유는 학생들이 공부에만 열중하게 해서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고 시위 같은 것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 그건 1980년 2학기에 학도호국단을 부활시킨 것과 맞아떨어지는 것이기도 했다. 이 학도호국단도 우리 역사에서 기구하다. 이승만 정권 때 만들었는데,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마자 없어졌다. 그런데 1975년에 박정희가 유신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학원 병영화 심화 조치의 일환으로 부활시켰다. 그렇지만 10·26 후 학원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고 학생회가 부활하면서 사라졌던 건데, 전두환·신군부가 또다시 등장시킨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시기쯤 와서는 대학생이 대거 증가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었다. 그 점도 생각을 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너나없이 자기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는 강한 욕구를 갖고 있었다. 심지어 1950년대, 1960년대에는 결혼을 잘 시키려면 모 여대에 보내야 한다는 사고를 가진 학부모들이 사실 많았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1980년경이 되면 고교생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1960년에 27만여 명이었는데 1979년에는 156만 명이나 됐다. 1979년쯤 돼서는 여고생이 거의 반절을 차지하게 된다. 남녀 비율이 1 대 1에 육박하게 된 것이다.

또 이때쯤 되면, 유신 말기 그리고 전두환 정권 초기에 경제 상황이 안 좋기는 했지만 그래도 1960년대 등 그 이전 시기보다는 생활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됐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수도권에서 대학 숫자를 계속 늘리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조금 있으면 지방대 육성책을 내놓게 된다. 또 서울 지역 대학들의 지방 캠퍼스, 일종의 분교 같은 것들인데 그런 걸 장려하는 정책도 내놓았다.

그러면서 대학생 숫자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970년만 해도 대학생 숫자가 남학생 11만 4000명, 여학생 3만 2000명, 그래서 총 15만 명이 안됐는데 1980년에는 남학생 31만 2000명, 여학생 9만 1000명, 그래서 총 40만 명을 넘어섰다. 그게 1985년에는 앞에서 말한 여러 정책이 작용해서 68만 명까지 늘어난다. 그에 따라 교수 숫자도 부쩍 늘어난다. 그런데 이렇게 대학생이 증가하고 지방에 많은 대학 또는 그 분교가 들어선 것은 6월항쟁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게 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열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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