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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밥상과 청와대 메뉴는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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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밥상과 청와대 메뉴는 닮았다 [김형찬의 동네 한의학] 할머니의 김장과 왕의 밥상
"이번에는 또 무슨 일 하셔서 탈 나셨어요?"

"마늘 한 접 까고 났더니 허리를 펴질 못하겠어. 내가 다 해서 보내줘야 해. 조금씩 한다고 하는데도 힘드네. 올해는 배춧값도 비쌀 거라고 하는데 그것도 걱정이고."

몸을 살피면서 김장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몇 해 전 배춧값이 폭등해 국정 감사장에 배추가 등장하고, 배추가 비싸니 양배추를 먹으라고 하던 분이 떠올랐습니다. 올해도 김장 배춧값은 고공 행진을 계속하리라고 하는데, 워낙 큰 사건이 터졌으니 배추가 국감장에 등장할 일은 없겠지요.

할머니의 김장 이야기를 들은 후, 포털을 가득 채운 뉴스를 살피다 보니 지난 여름 쟁점이 되었던 청와대의 코스요리가 떠올랐습니다. '할머니께서 걱정하시는 배춧값 상승 사태가 조선 시대에 일어났다면 어땠을까'하는 한가한 상상을 해봤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수라상에 올라오는 채소의 맛이 떨어지고 가짓수가 줄어드는 것을 눈여겨본 왕은 어느 날, 작년 이맘때쯤 맛있게 먹었던 겉절이가 올라오지 않자 사옹원 제조에게 묻는다. "올해 경기도의 비 피해가 큰가 보오."

그 질문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는 제조는 이리 대답한다. "네, 전하. 때아닌 폭우로 인해 채소의 작황이 좋지 않사옵니다. 게다가 이득을 노린 상인들의 매점매석으로 인해 백성들이 김치를 금치라고 부른다고 하옵니다." 묵묵히 생각에 잠겼던 왕은 상을 물리며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갑작스러운 비는 과인의 부덕을 탓하는 하늘의 경고일 것이오. 아무래도 감선(날에 변고가 있을 때 임금이 근신하는 뜻으로 반찬 가짓수나 식사 횟수를 줄이는 일)에 들어가야겠소. 경기 지역에 휼전을 베풀고 진상도 그만두라 이르시오. 또한 꼭 필요한 채소를 매점매석해서 과도한 이득을 취한 상인은 발본색원하여 엄히 문초하시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오늘 조회에서 대책을 논의해야겠소." "망극하옵니다. 전하!"

조선 시대 왕의 밥상은 팔도의 진상품으로 이루어집니다. 왕의 건강은 나라의 명운(집권 세력의 명운이라고 해야겠지요)과 직결되었으므로, 식사와 간식 모두 검증을 거쳐 건강에 도움이 되도록 구성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왕은 나라의 최고 권력자이므로 가장 좋은 것을 먹었을 테고, 먹고 싶은 것은 다 먹을 수 있었겠지요. 왕의 식사는 영양의 섭취라는 본연의 의미는 물론, 각 지역의 특산품을 통해 그곳의 상황을 살피는 정치적 의미를 함께 지녔다고 합니다. 따라서 제 상상 속에 등장한 이상적인 왕의 모습도 가능했을 거라고 봅니다. 물론 달리 생각해 보면, 왕이 밥상에서나 민심을 살폈으니, 왕과 백성 간 소통이 잘 되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요.

여하튼 왕이 어떤 음식을 먹는가, 어떤 약을 먹는가는 당시에도 큰 관심거리였습니다. 심지어 왕이 즐긴 음식이 시중에 유행했다고도 합니다. 최근에도 여러 매체를 통해 왕이 즐겨 먹었던 음식은 심심치 않게 다뤄지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왕의 음식은 왕 각각의 체질과 건강 상태, 그리고 질병 상황에 맞춘 개인별 체질식입니다. 따라서 지금 유행하는 궁중 음식은 현대적 관점에서 다시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우리 음식이고 왕실 음식이어서 좋다고 할 게 아니라, 과거 음식이나 조리법이 가진 장점은 살리되, 과거와 달라진 지금을 사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가꾸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세상을 살리는 음식이 되어야 합니다. 로컬 푸드, 자연 농법, 공정 무역, 도농 직거래와 같이 작게는 내 몸을 건강하게 하고, 크게는 세상을 살리고 농사짓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방법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당연히 현대적 의미의 왕의 밥상은 이러한 조건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왕의 밥상>(함규진 지음, 21세기북스 펴냄)이란 책을 보면, 왕은 식사를 통해 자신의 입과 위장으로 세상을 돌아보았습니다. 자연히 고르게 먹으려고 노력한 왕이 선정을 베풀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여름 청와대의 고급 식사는, 그리고 사회 지도층이 최고급 식당에서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을 한 끼 식사비용으로 쓰는 행태는 아쉽습니다. <왕의 밥상>을 보면 연산군의 식사가 이러한 부류 사람들의 식습관과 닮았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밥상을 통해 시대를 바라본다면 지금은 1400년대 말 조선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선까지는 아니더라도 배춧값이 폭등하면 적어도 힘들어할 국민과 우리나라 농업에 관해 고민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세상이 좋아지고 그 나라에 사는 사람도 건강하고 행복해 질 테니까요.

할머니께서는 김장할 때까지 몇 번은 신세 질 거라고 하시면서 단감 몇 개를 주고 가십니다. 올가을, 할머니의 배춧값 걱정이 기우로 그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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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찬
생각과 삶이 바뀌면 건강도 변화한다는 신념으로 진료실을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텃밭 속에 숨은 약초>, <내 몸과 친해지는 생활 한의학>, <50 60 70 한의학> 등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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