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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쥐? 美, 왜 전두환에게 날개 달아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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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쥐? 美, 왜 전두환에게 날개 달아줬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스무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고문으로 조작한 김대중 등의 내란 음모 사건

프레시안 : 1980년 하반기와 1981년 상반기에 대통령 취임식이 연이어 거행됐다. 반년 만에 전두환이 두 번이나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생긴 일인데 그 과정을 짚어봤으면 한다.

서중석 : 이제 이른바 제5공화국, 그러니까 전두환·신군부 정권의 탄생 과정을 살펴보자. 그러한 전두환·신군부 정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 이른바 김대중 등의 내란 사건이다.

1980년 5·17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김대중도 사회 혼란 조성 및 소요 관련 배후 조종 혐의로 연행되고 5월 22일에는 그 혐의라는 것이 1차로 발표됐다는 걸 지난번에 살펴봤는데, 5월 31일 계엄사는 "김대중이 전남대와 조선대의 추종 학생들을 조종, 선동하여온 것이 (광주) 소요 사태의 발단이 됐다"고 발표했다. 어느 때보다도 구체적으로 광주항쟁 배후에 김대중이 있었던 것처럼, 김대중이 그걸 조종한 것처럼 조작해서 발표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계엄사는 7월 4일 "김대중과 추종분자 일당들이 국민연합을 주축, 전위 세력으로 하여 방대한 사조직을 형성, 주로 복학생을 행동대원으로 내세워 대중 선동에 의해 학원 소요 사태를 일으키고 이를 폭력화하여 전국에서 일제히 민중 봉기를 일으킴으로써 유혈 혁명 사태를 유발, 현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 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권을 수립, 집권하려는 내란 음모 행위의 전모가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김대중 등 37명을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전두환·신군부는 7월 4일에 와서 내란 음모라는 죄목을 뚜렷하게 하는 한편 사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또 하나의 조작을 했다. 내란 음모로는 징역형밖에 때릴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이었나.

서중석 : 뭐냐 하면 7월 4일 이날 계엄사는 내란 음모 이외에도 "김대중이 반국가 단체인 재일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을 발기, 조직, 구성하여 그 수괴로 있으면서 북괴의 노선을 지지, 동조하는 등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하고 외화를 불법 소지, 사용한 혐의 등도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렇게 되면 국가보안법을 적용해서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우에는 김대중 납치 사건(1973년) 후 한일 정부 간에 이른바 타결이라는 걸 봤는데 그것에 위반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정부가 그것에 대해 반발할 수 있었다.

7월 9일 김대중과 관련자들에게 구속 영장이 발부됐다. 이 사람들은 5월 17일 밤 또는 그 직후부터 연행돼 길게는 53일 동안 불법 감금 상태에서 아주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다가 7월 9일이 돼서야 구속영장이 발부된 것이다. 전두환·신군부는 7월 31일 최종적으로 김대중, 문익환, 시인 고은, 김상현 등 24명을 군법회의에 기소했다. 여기에는 심재철도 포함돼 있었다. 하여튼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란 음모를 가지고는 사형까지 갈 수 없기 때문에 한민통 쪽으로 꿰맞춰가지고 사형을 선고할 수 있게끔 기소한 것이다.

그에 앞서 7월 15일 김대중은 육군 교도소로 이송됐다.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갇힌 지 거의 60일 만에 이송되면서, 잡혀간 후 바깥세상을 처음으로 구경했다. 전두환·신군부 쪽에서 김대중을 내란 음모로 엮을 때 긴밀히 연결시켜놓은 게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이다. 이 사람을 혹독하게 고문해서 '김대중한테 돈을 받고 광주에서 학생들을 선동했다'고 억지 자백을 하게 한 것이다. 이에 대해 김대중은 자서전에, 그전부터 계속 많이 주장한 것인데, "난 정동년이라는 학생을 알지 못했다"고 썼다. 아무튼 군 검찰은 처음에 내란죄로 몰려고 했으나 너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내란 선동죄로 바꿨다. 이 내란 선동죄라는 건 고문으로 강요한 정동년 자백 외에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9월 17일 계엄보통군법회의 선고 공판, 이게 1심이었는데 여기서 김대중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항소심 선고 공판은 11월 3일 육본 대법정에서 열렸다. 항소를 기각하고 역시 1심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김대중은 자서전에 그 이틀 후인 11월 5일, 사형 선고보다 더 낙담한 일이 일어났다고 썼다. 뭐냐 하면 한국 시각으로 이날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패한 것이었다. 김대중은 "정녕 사형이란 말인가. 하느님이 나를 버리셨단 말인가"라고 자서전에 썼다.

전두환·신군부 이너 서클이 7년 단임 대통령제로 합의를 본 속사정

ⓒ오월의봄
프레시안 : 김대중 등의 내란 음모 사건을 조작해 야권 중 김대중 쪽 및 재야를 옭아매는 것에 더해 전두환·신군부는 어떤 움직임을 보였나.

서중석 : 전두환·신군부는 자신들이 집권하기 위한 헌법 만들기에 들어갔다. 7월 중순경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실에서 보안사 참모 정도영, 권정달, 허삼수, 이학봉, 허화평 그리고 이종찬 중앙정보부 총무국장, 허문도 중앙정보부장 서리 비서실장, 노태우 수경사령관과 함께 국보위에서 연구한 개헌안 골격을 보고받고 대통령 선출 방법과 임기, 국회의원 선거구제 등을 논의했다.

새 헌법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대통령의 임기와 연임 문제였다. 대통령의 중임 문제, 연임 문제는 쉽게 합의를 볼 수 있었다. 뭐냐 하면 '단임으로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쉽게 합의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신군부 이너 서클 구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리고 12·12쿠데타와 5·17쿠데타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전두환이 제일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건 확실하지만 노태우라든가 다른 여러 사람들도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만 계속해서 대통령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군부 이너 서클에서 합의를 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단임으로 합의한 것이다.

문제는 임기였다. 1980년 8월 초순에 신군부 이너 서클에서 6년 단임으로 합의가 됐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7년으로 바뀌었다. 1년 연장한 건데, 전두환이 강력하게 주장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전두환이 7년을 주장하니까, 합의 사항을 변경하기 위해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핵심에 속하는 자들이 따로 모임을 열고 임기를 1년 연장키로 했다고 한다.

단임으로 결정된 큰 이유 중 하나는 이너 서클 구성이 보여주듯이 '전두환 너만 대통령 해먹느냐. 그다음에 우리도 해먹어야 한다', 이런 게 기본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에 전두환도 동의를 한 것이다.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 또 하나의 큰 이유는 국민들이 박정희의 18년 장기 집권에 염증을 느끼면서 그걸 아주 싫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장기 집권 정부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정서가 대단히 강했기 때문에도 단임으로 결정됐다.

이제 전두환이 대통령에 오를 차례였다. 그런데 관심을 끄는 건 전두환이 2단계로 대통령이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먼저 최규하를 하야시키고 자신이 '통대'에 의해 대통령이 된 다음에, 자기들이 만든 헌법에 따라 또 대통령이 되는 방식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이렇게 이너 서클에서 헌법의 골격을 만들고 있을 때 전두환에 대한 강력한 지지가 미국 측으로부터 왔다.


전두환에게 확실하게 힘을 실어준 미국, 한국인을 쥐에 비유한 주한 미군 사령관

▲ 미국이 전두환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다고 1면 톱기사로 보도한 경향신문 1980년 8월 8일 자. ⓒ경향신문
프레시안 : 미국 쪽에선 어떤 신호를 보냈나.

서중석 : 미국 측은 5월 17일 이전 군 출동과 이동 배치를 지지하는 태도를 취했고 5·17쿠데타에 대해서도 묵시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광주항쟁 시기에도 안전, 안정을 주로 강조하면서, 전두환·신군부가 지휘한 계엄군의 행위를 역시 묵시적으로 지지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즉 1979년 12·12쿠데타에서 1980년 8월 초까지는 드러내놓고 전두환을 직접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전두환을 지지한다', 이렇게 명시적으로 나오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8월 초에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8월 7일 주한 미군의 한 고위 당국자가 한 얘기가 AP통신하고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나왔다. 뭐라고 했느냐 하면 "만약 전(두환) 장군이 한국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보여준다면", 이건 전두환 쪽에서 K-공작을 진행하면서 이때쯤 와서는 언론이 전두환을 신처럼 막 떠받드는 보도를 더 많이 하고 있던 것과 연결해 생각할 수 있는데, "그리고 한국 정세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그를 지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한국 국민이 원하는 바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최근 전 장군과 미국의 관계가 개선됐고, (전 장군은) 미국을 이해하고 있으며 또 미국에 호의적이고 미국과 강력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익명으로 이 얘기를 했지만 누구인지는 바로 드러났다. 이 사람은 바로 존 위컴 주한 미군 사령관이었다.

위컴은 이때 '한국인들은 언제나 권력자에게 착 줄을 서서 복종하는데 아마 전 장군에게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얘기도 했다. 이 대목에서 위컴은 쥐를 예로 들면서 한국인이 쥐떼처럼 전두환한테도 쫙 복종할 것이라는 식으로 말했다. 이게 소위 들쥐 발언으로 알려지게 되고, 그때부터 위컴은 한국인들로부터 더 미움을 많이 받게 됐다. 이 발언이 두고두고 비판을 받게 된다. (위컴은 이때 레밍(lemming, 나그네쥐)이라는 표현을 썼다. 한국 언론은 미국이 전두환을 지지할 것임을 드러낸 주한 미군 고위 당국자(위컴)의 발언을 바로 대서특필했다. 예컨대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은 이것을 1980년 8월 8일 자 1면 톱기사로 내보냈다. '미(국), 전두환 장군 지지'로 제목이 똑같은데, 레밍 발언이 담겨 있지 않은 것도 공통점이다. '편집자')

8월 8일에는 전두환이 뉴욕타임스와 회견했다. 여기서 전두환은 "지도력은 단순히 본인이 원한다거나 야망만 가지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말하는 신의 섭리나 중국인들이 말하는 천명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얘기는 또 어디서 들었는지 천명을 운운하면서 '내가 대통령이 되는 건 신의 섭리나 천명에 의한 것이다. 중국에서 천자가 탄생하는 것과 똑같은 원리다'라는 식의 주장을 한 것이다.

바로 다음 날인 8월 9일 미국 쪽에서 공식 입장을 표명하게 된다. 이날 국무부 공보관 애니터 스토크먼은 "한국의 지도자 선택은 한국 국민이 해야 할 일"이라고 얘기했다. 이게 뭘 얘기하는 건지는 뻔한 것이었다. 그 이전인 6월에 이미 에드먼드 머스키 국무부 장관은 "한국의 사정을 고려할 때 안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얘기했다. 이것이 뭘 얘기하는 건지도 뻔한 것이었다.

전두환 추대 관제 열풍으로 어수선했던 1980년 여름

프레시안 : 이승만, 박정희 집권기에 미국은 한국 정부와 때때로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독재 정권을 용인하고 지원했다. 한국의 정권이 강력한 반공 기조를 유지한다면, 그렇게 해서 미국의 세계 전략에서 한국에 부여된 동아시아 반공 보루라는 역할만 충실히 해낸다면 독재 정권이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쿠데타로 헌정을 짓밟고 국민을 학살하기까지 한 전두환·신군부에게도 미국이 1980년 8월 초에 그러한 신호를 명확하게 보낸 셈이다. 미국 쪽에서 그런 신호까지 보냈으니 전두환으로서는 날개를 단 셈 아닌가.

서중석 : 미국 국무부 공보관 얘기가 나온 다음 날인 8월 10일, 어디선가 강한 압력을 받았겠지만 최규하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전두환·신군부의 강박에 의해 8월 13일 김영삼이 정계 은퇴를 발표했다. 8월 14일에는 김대중 등 24명에 대한 군사 재판이 시작됐다. 8월 16일에는 마지막 수순으로 최규하가 대통령을 사임했다.

이러한 수순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도성 기자가 쓴 글에 의하면 방방곡곡은 전두환 추대라는 관제 열풍에 휩싸였다. 중앙정보부가 중심이 됐는데 그중에서도 중앙정보부 정치팀이 주로 활약했다고 그런다.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저격한 10·26 이후 한동안 기능이 정지되다시피 했던 중앙정보부에 중요한 임무가 떨어진 것이었다. 각 시·군에서 매일같이 군중 집회가 열렸는데, 지역 유지들과 군중 수천 명을 거기에 동원하느라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는 중앙정보부라는 이름을 그대로 썼다.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뀌는 때는 1980년 말이다. 하여튼 중앙정보부뿐만 아니라 언론도 전두환 추대를 위한 관제 열풍 조성에 부응하는 활동을, 종이 신문이건 TV건 열심히 했다.

8월 21일에는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구국의 일념으로 탁월한 영도력을 발휘해 국가의 위난을 수습하고 새 시대, 새 역사의 지도자로 국내외에 뚜렷이 부각된 전두환 대장을 국가 원수로 추대"하자고 제의했다. 그래서 그렇게 결의를 했다.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이번에도 장충체육관에 모여서 대통령을 선출했다. 총 투표자 2525명 중 찬성 2524명으로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이 됐다. 나머지 1표는 무효표였다. 박정희와 똑같이 전두환도 그야말로 100퍼센트에 가까운 지지를 '통대'로부터 받았다. 박정희, 최규하에 이어 전두환까지 체육관 대통령이 된 것이다.

새 헌법에 담긴 전두환 측 지향은 박정희보다 덜 욕먹으면서 권력 움켜쥐기

▲ 1980년 8월 5일 자로 대장 계급장을 단 전두환은 그달 27일 '통대'에 의해 대통령으로 옹립됐다. 사진은 대장 진급 후 전역식을 하는 전두환. ⓒ연합뉴스
프레시안 :
전두환이 2단계로 대통령 노릇을 하려 했다고 앞에서 지적했다. 그 첫 번째 단계로 전두환은 '통대'를 동원해 일단 청와대에 들어앉았다. 그렇지만 새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정권으로 포장하고 싶었을 전두환·신군부로서는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통해 만든 방식으로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는 게 여러모로 찜찜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통대'가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대통령이 되는 것은 유신 헌법을 그냥 둔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울러 전두환·신군부는 박정희가 키운 세력이자 유신 정권을 이어받은 자들이었지만, 유신 헌법을 철폐해야 한다는 국민 다수의 바람을 전두환이 청와대를 차지한 후에도 계속 외면하는 건 정치적으로 불리한 일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저런 이유로 유신 헌법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는 상황 아니었나.

서중석 : 이제 새 헌법을 확정할 차례였다. 1980년 9월 29일 전두환 쪽에서 헌법 개정안을 공고했다. 이 개정안을 보면 대통령 임기를 7년 단임으로 하고 중임을 금지했다. 나중에 더 얘기하겠지만 5000명 이상의 선거인단을 구성해 대통령을 뽑게 돼 있었다.

그런데 이 개헌안에 또 뭐라고 돼 있었느냐 하면, 선거인단의 과반수 득표를 해야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다고 돼 있었다. 과반수 득표자가 없으면 2차 투표, 3차 투표도 할 수 있게끔 돼 있었다.

왜 이런 조항을 넣었느냐. 박정희 유신 정권이 몹시 욕을 얻어먹은 것 중 하나는 도대체 한 사람이 영구 집권하게 하기 위해서 이런 이상한 헌법을 만들 수 있느냐, 이것이었다. 유신 체제에서는 2차, 3차 투표 같은 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박정희 혼자 후보 등록을 하고 '통대'가 그걸 지지하는 식 아니었나. 그런데 그게 욕을 많이 얻어먹으니까, 전두환 쪽에서 '우리는 여러 사람이 입후보하게 한다'는 형식을 취한 것이었다. 그래서 헌법에 과반수 득표자가 없으면 2차 투표를 하고 그것으로도 안 되면 3차 투표를 또 하게 한다는 조항을 넣어둔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실제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조항이었다.

그리고 유신 헌법에서는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게 하지 않았나. 이것도 박정희 유신 정권이 몹시 욕을 얻어먹게 만든 것 중 하나였다. 어떻게 대통령이 추천하는 사람으로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그대로 채울 수 있느냐, 이것이었다.

전두환·신군부는 그 부분도 바꿨다. 중선거구제로 해서 한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을 2명 뽑는 걸로 한 건 유신 헌법과 같지만,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게 하는 대신 전국구로 두고 각 정당에 배당하게 했다. 그렇지만 제1당이 전국구의 3분의 2를 차지하도록 규정했다. 20퍼센트를 득표하건 10퍼센트를 득표하건 제1당이 무조건 3분의 2를 차지하게 한 것이다. 전두환·신군부의 당이 제1당이 되는 건 확실하다고 보고, '박정희처럼 국회 의석의 3분의 2까지는 욕심내지 않고 3분의 2에 가까운 의석수를 확보하면 된다', 이런 방식으로 변형한 것이다. 전국구 중 나머지 3분의 1은 지역구에서 5석 이상 차지한 정당들이 의석 비율에 따라 나눠 갖도록 돼 있었다.

국회의원 임기도 바꿨다. 유신 헌법에서는 지역구에서 뽑힌 국회의원들의 경우 임기가 6년이었는데, 이것도 장기적으로 해먹기 좋게 만든 것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전두환·신군부는 개헌안에서 그걸 예전처럼 4년으로 바꿔놓았다.

그리고 유신 체제를 긴급 조치 체제라고 부르지 않나. 그만큼 긴급 조치를 남발했고 그것도 박정희가 그렇게 비난을 받게 한 요소 중 하나였는데, 전두환·신군부는 그걸 없애고 비상 조치를 대통령 권한으로 부여했다.

프레시안 : 전두환이 훗날 실제로 비상 조치를 발동한 적이 있나.

서중석 : 안 했다. 전두환은 계엄령 선포도 한 번도 안 했다. 그 부분에 대해 나중에 자랑도 하지 않나. <전두환 육성 증언>을 보면, 전두환이 그 부분을 얘기하면서 자기는 박정희하고 다르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개헌안을 계속 살펴보면, 유신 헌법과 달리 국회에 국정 조사권을 부여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국회가 얼마나 전두환·신군부 정권에 종속됐는가는 나중에 살펴볼 정당 만들기에서 명확히 알 수 있다. 그와 함께 유신 헌법에 비해 대통령 권한도 약간은 축소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컨대 유신 헌법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대법원장과 대법원 판사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임명권을 갖도록 돼 있었지만, 대통령의 일반 법관 임명권은 폐지하고 그 권한을 대법원장한테 부여했다.

10월 22일 국민 투표에 부쳐 이 개헌안을 확정했는데, 95.5퍼센트의 투표율과 91.6퍼센트의 찬성률을 기록했다. 그렇지만 이 투표 결과의 공정성을 누가 믿을 수 있었겠나. 투표가 실제로 어떻게 치러졌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열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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