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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띠고 김근태 고문한 전두환의 하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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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미소 띠고 김근태 고문한 전두환의 하수인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24> 6월항쟁, 여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고문 위에 세워진 박정희·전두환 정권

프레시안 : 1985년 김근태가 고문 실상을 폭로했다. 정권 차원에서 고문을 밥 먹듯이 자행한 탓에 그 피해자가 무척 많았는데, 그 가운데 김근태의 경우 자신이 당한 고문의 전모를 낱낱이 드러내 주목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 더 나아가 극우 반공 체제의 본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고문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먼저 전두환 정권은 왜 김근태를 그토록 심하게 고문한 것인가.

서중석 : 박정희 유신 정권이나 전두환·신군부 정권은 고문 위에 세워진 군인 파시즘 정권이라고 볼 수 있다. 유신 정권 시기에도 그렇고 1980년대에도 무수히 많은 고문 사건이 있었다. 김근태뿐만 아니라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간부 이을호 등 여러 사람이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것 때문에 이을호는 정신적으로 질병을 앓기도 했다. 또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 관계자들, 그리고 이른바 용공 좌경 사건에 엮인 수많은 사람이 엄청나게 심한 고문을 당했다. 여기서는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김근태 고문 사건을 대표적인 사례로 살펴보자.

김정남에 의하면 민청련의 활동에 치명적인 재갈을 물릴 기회를 엿보던 전두환 정권의 공안 당국이 학생 운동과 민청련을 한데 묶어 처단할 궁리를 하게 됐고, 그러면서 깃발 사건(민추위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학내·외에서 일어난 각종 시위와 노사 갈등의 배후에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가 있고, 여기서 핵심 역할을 한 문용식의 배후에 민청련 의장으로 활동한 김근태가 있다는 각본을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각본을 짜고 김근태를 고문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전두환 정권은 그해 5월 학생들의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으로 인한 분노, 그래서 대학가를 옥죄기 위한 학원안정법을 제정하려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악감정 같은 것이 쌓인 상태였다. 그러한 분노와 악감정 등이 겹쳐, 청년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김근태를 육체적, 정신적으로 파괴하기 위해 고문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게 이해하지 않으면 도대체 김근태라는 한 개인을 왜 그렇게 심하게 고문했는지, 특별히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려 한 것도 아닌데, 도무지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권의 하수인 이근안 등에게 처참하게 고문당한 김근태

프레시안 : 김근태는 어떻게 고문을 당했나. 상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서운 장면이긴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하나하나 되짚었으면 한다.

서중석 : 김근태 고문을 상세히 다룬 글들이 여러 책에 실려 있고, 영화로도 나왔다. 여기서는 김근태가 1986년 봄 서울구치소에서 쓴 항소 이유서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고문 실상을 살펴보자.

김근태는 1985년 8월 24일부터 9월 4일까지 경찰서에서 구류를 살았다. 1983년 민청련 의장을 맡은 후 2년 동안 거듭 구류를 당했는데, 이때가 일곱 번째 구류였다. 9월 4일 새벽 5시 반 김근태는 남영동의 치안본부 대공분실 5층 15호실로 끌려갔다. 김근태는 이때부터 23일간 대공분실에 갇혀 있게 되는데, 그 기간 동안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훗날(1987년 1월) 박종철도 김근태가 고초를 겪은 대공분실 5층에 끌려와, 방은 달랐지만, 고문 사망하게 된다. (박종철이 끌려간 것 역시 얄궂게도 깃발 사건과 관련돼 있었다. 공안 당국은 깃발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학교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며 박종철을 연행, 고문해 끝내 죽음에 이르게 했다. 박종운은 그 후 한나라당 소속 정치인으로 변신해 국회의원 선거에 거듭 출마한 것에 이어 극우 성향 매체의 논설위원으로 목청을 높였다. '편집자')

9월 4일 김근태는 오전 7시 반경,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온 지 2시간이 지난 이때부터 낮 12시 반까지 물고문을 5시간 동안 받았다. 그날 저녁 8시경 두 번째 물고문이 시작됐는데 그다음 날 새벽 1시경까지 계속됐다. 이때도 무려 5시간이나 물고문을 받은 것이다.

9월 5일 한 사내가 델시 상표가 붙어 있는 사무용 가방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 90킬로그램에 육박할 것 같은 건장한 체구의 고문 전문가 또는 전담자가 온 것이었다. 이 사람은 김근태한테 작업을 차근차근 할 테니까 단단히 각오하라고 말했다.

프레시안 : 그자가 바로 악명 높은 이근안 아닌가.

서중석 : 그 사실이 나중에 드러나게 된다. 전기 고문은 9월 5일 오후 8시 반부터 6일 새벽 1시경까지 계속됐다. 전기 고문에 앞서 물고문으로 시작했는데, 어느 정도 물고문이 진행돼 몸이 땀에 흠뻑 젖으면 그때부터 전기 고문을 했다. 김근태를 발가벗기고 눈을 가려 '칠성대' 위에 꽁꽁 묶은 다음 전기가 잘 통하도록 머리, 가슴, 사타구니에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했다. 처음에는 짧고 약하게 전류를 흘리다가 점점 길고 강력하게 전류 세기를 높였고, 그 후 중간에 다시 약하게 했다가 별안간 전류 세기를 아주 강하게 했다. 전기 고문을 할 때에는 비명이 바깥에 새어 나가지 않게 하려고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

이근안은 가끔씩 김근태의 발등에 전기를 직접 갖다 대기도 했다. 그 때문에 김근태 발등의 살가죽이 꺼멓게 타버렸다. 전기 고문은 김근태의 핏줄을 뒤틀어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디마디를 끊어버리는 것 같았다. 극심한 통증과 죽음의 공포가 김근태에게 몰려왔다.

그것에 대해 김근태는 이렇게 썼다. "빠개질 듯이 아픈 머리가 큰 수박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기도 했고 나는 칙칙하고 끈적끈적한 외마디를 계속 질러댔다. 멱따진 돼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헉헉 꺼이꺼이 하면서 어두운 비명을 토해냈다. 거기에는 슬픔이라든지 뭐 외로움이라든지 그런 것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었다. 드디어는 축 늘어졌다."

▲ 김근태 고문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남영동 1985>의 한 장면. ⓒ아우라 픽처스


자기 가족 걱정하면서 미소 띠고 고문한 '짐승들'

프레시안 : 사람의 탈을 쓴 짐승들의 시간, 그것도 국가 권력이 허가하고 부추긴 짐승들의 시간이었다. 고문은 미리 계획된 것이었고 그들은 분노나 흥분의 빛이 없이 미소까지 띠고 고문했다고 김근태는 밝혔다. "그동안 장의사 일이 없어서 한가했는데 이제 일감이 풍족하게 생겨서 살맛이 난다"(이근안)는 말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고문을 하면서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잘 치렀는지 모르겠다"는 등 자기 가족에 대한 애정 어린 얘기를 주고받았다는 것 또한 소름 끼치는 대목이다. 9월 6일부터 고문은 어떤 식으로 계속됐나.

서중석 : 9월 6일 처음으로 김근태에게 점심 식사를 줬다. 그날 저녁 7시가 조금 지나서 다시 전기 고문이 시작됐다. 그날의 고문은 포악하고 격렬했다. 격렬한 전기 고문을 길게, 아주 길게 가했다. 김근태는 온몸이 고문대 위에서 오그라드는 것 같았고 뼈만 남아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고문은 이튿날 새벽 1시경까지 쉬지 않고 계속됐다.

9월 8일, 이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오전 10시경 고문 기술자들이 들이닥쳤다. 배후를 대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남민전 이재문이가 어떻게 죽었는 줄 알아? 전민노련 이태복 얘기, 너도 들었을 거다. 이재문이는 여기서 당해서 이미 속이 부서져서 감옥에서 병사한 거야. 너도 각오해"라고 협박했다.

이날은 남영동에서 고문을 당한 날 중에서 최악의 날,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날이었다. 가장 혹독하고 긴 고문을 받았다. 8일 오후 1시 반경 일단 오전 고문은 끝났다. 그러나 저녁 7시경 또 전기 고문이 시작돼 밤 12시까지 계속됐다.

9월 10일에는 저녁 7시경부터 10시경까지 전기봉 고문을 당했다. 이자들은 9월 13일 밤 10시에는 "오늘이 금요일이고 13일이다",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 날이다"라고 하면서 전기 고문을 두 차례 가했다. 그다음 날 새벽 2시 반까지 고문을 계속했다. 새벽 2시 반에 고문이 끝난 줄 알았는데, 이자들은 새벽 3시경부터 5시 반경까지 또 김근태를 고문했다.

9번째 고문이 있었던 날부터 남영동을 떠나는 26일까지 김근태는 목이 붓고 쉬어서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머리는 깨져나갈 것 같았고, 온몸이 산산이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고문을 가한 자들은 김근태에게 14일부터 19일까지 평균 4시간 동안만 잠을 자게 했다. 정신적 고문을 병행한 것이다. 20일 저녁 8시경에서 10시 반경까지 김근태에게 마지막 고문을 가했는데, 역시 전기 고문과 물고문을 번갈아가면서 했다. 25일에는 김근태에게 집단 폭행을 가한 다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어라'라고 강요했다.

참혹한 진실, 용기 있는 폭로, 통곡 터진 법정

ⓒ오월의봄
프레시안 : 그곳에서 23일 동안 겪은 고통, 생지옥이라는 말이 조금도 과하지 않을 그 고통을 건조한 활자로 어찌 다 옮길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 음습한 곳에서 이뤄진 고문의 진실을 밝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않았나. 살벌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도 그렇고, 고문을 자행한 자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하기도 어렵지 않았나.

서중석 : 김근태는 자신을 고문한 사람들의 이름까지 잘 기억하고 있었다. 총경 윤재호, 경감 김수현, 백남은, 경위 김영두, 경장 정현규, 최상남, 박병선, 임희갑 등과 이름 모르는 고문 전문가 한 사람, 이게 이근안인데,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고문할 때에는 서로 이름 대신 '사장', '상무' 이런 식으로 불렀지만 조서에 서명할 때에는 이름을 써야 하지 않나. 김근태는 그걸 눈여겨보고 이름을 기억한 것이다.

1985년 12월 19일 김근태는 법정에서 고문 실상을 폭로했다. 너무나도 참혹한 진실에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고 곧 울음바다가 됐다. 나중에는 통곡까지 나왔다. 심지어 교도관들조차 숙연한 분위기가 됐다.

그토록 심한 고문을 한 것에 대해 김근태는 이렇게 얘기했다. "이 사건은 정치적 보복이며 그 대상으로 본인이 찍힌 것입니다. 1985년 5월 학생들의 미 문화원 사건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정치 군부는 학생 운동에게 그리고 민주화 운동에게 복수하고자 하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소위 학원안정법 제정 기도였습니다. 국민의 한결같은 반대로 학원안정법 제정은 물러서게 되었습니다. 정치 군부는 이것을 수치나 치욕으로 판단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표적으로서, 희생양으로서 본인은 선택되었습니다."

김근태 고문 사건을 계기로 각계의 민주화 운동 세력과 신민당 등 정치권이 참여하는 '고문 및 용공 조작 저지 공동 대책위원회', 약칭 고문 공대위가 1985년 10월 17일 결성됐다. 법정에서 폭로하기 이전에 고문 공대위가 결성될 수 있었던 건, 김근태가 검찰로 송치되던 중 짧은 시간 동안 만날 수 있었던 부인 인재근에게 고문 실상을 얘기했기 때문이다.

1987년 박종철이 고문 사망하자 2·7 추도 대회와 3·3 평화 대행진을 이끌어간 단체가 바로 이 고문 공대위다. 고문 공대위는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을 계기로 국민 추도회 준비위원회로 바뀌는데, 그것은 6월항쟁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는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 발족으로 이어지게 된다. 김근태의 고문 실상 폭로가 6월항쟁에서 구심점이 되는 국본을 조직하는 데까지 이어진 것이다.

(고문으로 조작된 죄목으로 김근태는 전두환 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도 풀려나지 못했다. 6월항쟁 1년 후인 1988년 6월 30일이 돼서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그 후 여러 활동을 전개하지만, 2011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얼굴 없는 고문 기술자'로 불리던 이근안은 1988년 12월 그 실체가 밝혀지면서 수배됐다. 그렇지만 11년이나 잠적했다가 1999년 10월 28일 자수 형식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1999년 12월 16일 검찰은 이근안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박처원(1985년 김근태 고문 사건 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장)이 ▲"혼을 내서라도 철저히 밝혀내라"는 정형근(1985년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단장)의 말에 따라 김근태 수사에 이근안을 투입했다 ▲수사 상황을 정형근과 치안본부장, 검찰 등에 수시로 보고했다 ▲김근태 고문 사실이 폭로된 후 정형근을 비롯한 안기부 관계자들, 검찰 관계자들 등과 함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대책 회의를 열었다는 등의 진술을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999년 이때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정형근은 1985년 당시 박처원에게 수사를 지시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그 후 목사로 변신한 이근안은 자신이 한 건 고문이 아니라 심문, "일종의 예술"이었으며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또한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라고 강변했다. 지난날 고문 기술자들을 부추기고 비호한 세력이 여전히 막강한 현실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참담한 풍경이다. '편집자')

미국 문화원에 이어 민정당 연수원 점거한 학생들

프레시안 : 다른 사안을 짚었으면 한다. 1985년 5월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에 이어 그해 하반기에 또 하나의 점거 농성 사건이 일어나지 않나.

서중석 : 1985년 11월 18일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 농성 사건이 일어났다. 이날 오전 8시경 전학련 '민중 민주 정부 수립과 민족 자주 통일을 위한 투쟁위' 산하 '파쇼 헌법 철폐 투쟁위원회' 소속 14개 대학, 191명의 학생이 서울 가락동에 있는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에 기습적으로 쳐들어와 점거 농성을 벌였다.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과 달리 이때는 경찰력이 바로 투입됐다. 긴급 출동한 특수 테러 진압대를 포함해 정사복 경찰 2100여 명이 학생들이 있는 연수원 본관을 에워쌌다. 그런 가운데 학생들은 옥상에서 집회를 여는 한편 건물 내부 벽에 녹색 페인트로 '광주사태 원흉 처단하라', '장기 집권 획책하는 일당 처단하라' 등의 구호를 써놓았다.

낮 12시가 조금 지나서 진압 작전이 시작됐다. 소방 호스로 물을 퍼붓고, 고가 사다리차를 동원해 옥상을 향해 물줄기도 쏘고, 최루탄도 발사했다. 오후 2시가 지난 시각, 진압 작전이 종료되고 학생들이 모두 연행됐다.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 농성은 그렇게 6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전두환 정권은 점거 농성에 참여한 학생들을 폭력 방화 사범으로 몰아 구속했다. 언론은 6개월 전에 있었던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과 마찬가지로 도시 게릴라, 적군파식이라는 극렬한 용어를 쓰면서 학생들을 매도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스물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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