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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성고문하고 검찰은 피해자 '두 번 죽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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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경찰은 성고문하고 검찰은 피해자 '두 번 죽이고'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26> 6월항쟁, 여덟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프레시안 : 언론과 관련해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1986년에 일어났다. 그중 하나가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이다. 아울러 이해에는 독재 정권이 어떤 정권인지 그 밑바닥을 다시 한 번 여실히 보여준 성고문 사건도 터졌다. 이 사건들을 하나씩 짚어봤으면 한다.

서중석 : 1986년 5·3 인천 사태 이후, 특히 그해 10월 아시안게임이 끝난 후부터 전두환은 개헌 세력을 분쇄하고 개헌 열기를 잠재우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유성환 의원의 국시 발언 사건, 금강산댐 사건, 김일성 사망설 사건에도 그러한 총력전의 형태로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1986년에 일어난 시민운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6월항쟁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 한국에서는 관존민비로 불리는 관 우위의 사회가 오랫동안 지속됐다. 그리고 일제의 유산, 미군정의 친일파 중심 현상 유지 정책, 극우 반공 세력의 반공주의와 권위주의에 의해 권력이 과대 성장해 시민 사회가 정상적으로 형성되기 어려웠다.

자유당 정권에서는 거의 모든 단체가 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거나 어용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조합은 말할 것도 없고, 어민 단체건 교원 단체건 미용사 단체건 마찬가지였다. 1960년 4월혁명을 계기로 달라질 수도 있었지만, 5·16쿠데타가 1년 후에 바로 일어나면서 그 가능성이 막혀버렸다.

박정희 정권은 1961년 5·16쿠데타로 등장한 군사 정부에서 1963년 말에 유사 민간인 정부로 넘어간 이후에도 대통령의 권한을 계속 강화하며 행정 독재 국가를 구축했다. 또한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정보 수집, 광범위한 사찰을 통해 시민 사회를 엄격히 감시했다. 1972년 유신 쿠데타 후 시민 사회의 취약성은 더욱 심했다. 영역이 넓어지고 있던 대중문화도 권력의 통제 아래 놓였다. 그러나 1985년 2·12총선 이후, 특히 1986년에 들어서면서 시민 사회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땡전 뉴스’는 이제 그만! 시민운동의 문을 연 KBS 시청료 거부 운동

프레시안 : 그러한 변화를 잘 보여준 사안 중 하나인 KBS 시청료 거부 운동,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1986년에 전개된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은 최초의 본격적인 시민운동으로 평가할 만하다. 언론 통제 강도는 박정희 유신 정권 후기에 더 셌지만, 전두환·신군부도 언론 통제 정책을 강력하게 폈다. 전두환·신군부가 1980년 11월 언론 통폐합을 단행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KBS가 초대형 언론 독점 기관으로 성장했다. KBS는 MBC 주식의 70퍼센트, 서울신문 주식의 99퍼센트, 연합통신 주식의 30퍼센트 등을 소유해 주요 언론 기관을 통제할 수 있었다. (다른 언론 기관에 대한 KBS의 주식 보유 비율은 시기에 따라 변화를 보인다. 예컨대 KBS는 1980년 말 MBC 주식의 65퍼센트를 인수하고, 1981년 7월 5퍼센트를 더 인수했다. 그리고 동아일보 1987년 2월 12일 자에 따르면 KBS는 이 시기에 연합통신 주식의 70퍼센트를 보유했다. '편집자') 그러한 KBS 사장은 대통령이 직접 임명했다. KBS는 그야말로 전두환·신군부 정권의 막강한 선전, 홍보 기관이었다.

KBS의 여러 편파 방송 가운데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것이 9시 '땡전 뉴스'였다. 저녁 9시에 땡 하고 울리면 "전두환 대통령은…"이라는 말로 뉴스가 시작돼 그런 이름이 붙었다. 시민들은 KBS의 편파성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고,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심각하다고 여겼다. 고려대 신문방송연구소가 1985년에 대학생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92.6퍼센트가 언론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고 답했고, 언론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는 항목에 99퍼센트가 동의했다.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은 도시가 아니라 농촌에서 먼저 일어났다. 1980년대에 농민들이 부당 농지세 시정 투쟁을 전개했다고 지난번에 얘기했는데, 1980년 KBS는 농지세 문제 왜곡 보도 등 편파 방송을 내보내 전라도 농촌 지역의 반발을 샀다. 1985년 4월에는 전북 완주군 고산에서 성당과 가톨릭농민회가 한데 뭉쳐 시청료 거부 운동을 벌였다.

이런 움직임이 있긴 했지만, 시청료 거부 운동이 범시민 운동으로 전개되는 때는 1986년이다. 1986년 1월 교회, 여성 단체, 청년 운동 단체 대표들이 중심이 돼서 KBS TV 시청료 거부 기독교 범국민운동본부가 발족했다. 4월에 들어와 23개 여성 단체가 KBS 시청료 폐지 운동 여성 단체 연합을 결성하고 시청료 폐지 촉진 대회를 여는 등 이 운동은 각계로 번졌다. 천주교 쪽에서도 지지했고 문화계도, 불교계도 적극 참여했다.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은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 재야 단체나 학생들보다는 주로 종교 단체, 여성 단체, 문화 단체에서 앞장서고 여기에 시민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이 운동은 빠르게 확산됐다. KBS에는 날마다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시민들은 너도나도 자기 집 대문과 자동차 문에 "상업 광고, 편파 보도 KBS TV 시청료를 낼 수 없습니다"라는 스티커를 붙였다. 시청료 거부 운동 단체에는 격려 전화와 성금, 각종 우편물이 쇄도했다.

그 결과 1986년 KBS 시청료 징수 실적은 목표액에 26.4퍼센트 미달했고, 징수율도 1985년의 88.2퍼센트에서 72.4퍼센트로 낮아졌다. 1987년에는 징수율이 더욱 낮아져 63.9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 KBS 시청료 납부 거부 스티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인면수심 성고문 버젓이 자행한 현직 경찰 문귀동

프레시안 : 1986년에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은 사건도 터졌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다. 피해자 권인숙은 왜 경찰에 잡혀갔나.

서중석 :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을 벌일 때 여성 단체는 KBS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있는 점, 광고 방송이 퇴폐적인 소비문화를 조장하는 점에 대해 특히 강한 비판을 했다. 그것이 일반 시민의 관심을 끌었고 그러면서 시민 참여 의식을 높였는데, 그런 속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까지 일어나게 된다.

이 사건은 한 여대생의 용기 있는 행동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얼마나 큰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줬다. 아울러 경찰 하위직부터 검찰 간부, 제도 언론, 권력의 정상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얼마나 추악하게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가도 잘 드러냈다.

1986년 6월 경찰이 경인 지방 노동자들의 자취방을 덮쳤다. 6월 4일 부천에 있는 가스 배출기 제조업체에서 일하던 한 여성이 자취방에서 경찰에 끌려 나왔다. 이 여성은 서울대 의류학과에 다니던 권인숙이었는데, 허명숙이라는 가명으로 취직해 일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고통을 함께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노동 현장에 들어간 '학출'이 1980년대에 많았다고 전에 얘기하지 않았나. 권인숙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권인숙과 같은 '학출'을 잡기 위해 경찰이 노동자들의 자취방을 덮친 건 아니었다. 잡으면 1계급 특진이 따르는 5·3사태 수배자, 노동 운동 쪽에서도 여러 명이 수배됐는데, 그 수배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덮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권인숙을 끌고 간 경찰은 권인숙이 위장 취업자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경찰은 위장 취업 부분을 조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5·3사태 수배자 이름을 제시하면서 '이 사람 지금 어디 있느냐'며 권인숙을 집요하게 추궁했다. 그 과정에서 권인숙은 부천경찰서 경장 문귀동에게 끔찍한 성적 고문을 당하게 된다.

피해자 권인숙을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운 후안무치 검찰

프레시안 :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안의 특성상 다른 경우보다 진실을 밝히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됐나. 그리고 박종철 고문 사망에 앞서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힌 이 사건에 전두환 정권은 어떻게 대응했나.

서중석 : 6월 16일 권인숙은 교도소로 이송됐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나. 그렇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진실을 드러내고 가해 세력과 싸우기로 결심하게 된다. 교도소에 있던 양심수 70여 명은 권인숙이 경찰서에서 어떠한 성고문을 당했는가 하는 얘기를 듣고, 부천서에서 성고문을 자행한 담당 형사 문귀동을 구속하라고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권인숙 본인도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7월 3일 권인숙은 자신에게 성적 고문을 저지른 경장 문귀동을 고소했다. 그런데 바로 이날 권인숙은 오히려 공·사문서 위조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 적반하장 격으로 그다음 날 문귀동은 권인숙을 명예 훼손 혐의로 맞고소했다. 7월 5일 조영래를 비롯한 9명의 변호사가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만행이 제도적으로 자행되는 걸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면서 문귀동과 부천경찰서 서장 옥봉환 등 6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그에 앞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알려지면서 천주교, 개신교, 여성 단체, 불교 단체 등에서 공동 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파문이 크게 일자 검찰은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대해 상당히 깊게 조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당히 넘어간 게 아니라 문귀동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성고문을 자행했는가를 아주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조사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7월 16일 검찰 발표는 그것과 전혀 달랐다. 이건 유신 시대나 전두환 시대에 특히 많이 나타났고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보이는 현상인데, 발표 내용은 조사 결과와는 딴판이었다.

검찰은 이 사건에서 성적 모욕은 없었고 폭언, 폭행만 있었다고 발표했다. 더 나아가 검찰은 "폭행 사건을 성 모욕으로 날조·왜곡, 혁명 투쟁을 확산하고 공권력을 무력화하려는 것으로 판단된다", "운동권 세력이 벌이는 상투적인 투쟁 수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성적 불량 대학생, 가출 대학생으로 급진 좌경 사상에 물들어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까지 이용하는 거짓말쟁이라고 권인숙을 몰아세웠다. 이건 적반하장도 도를 넘어선 것이고, 후안무치하고 철면피하기가 그야말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로 그런 모습을 검찰이 보여줬다. 각 신문은 검찰 발표를 그대로 옮겨 크게 보도했다.

(이러한 보도는 정권 차원에서 보도지침으로 통제하고 언론이 그것에 순종한 결과였다. 전두환 정권은 검찰 발표 이전에는 '성폭행 사건 대신 부천 사건으로 표현할 것', '검찰 발표 때까지 보도를 자제할 것' 등의 지침을 내렸다. 검찰 발표 직후에 나온 보도지침에는 '검찰이 발표한 조사 결과만 보도할 것', '검찰 발표 전문은 꼭 실을 것', '발표 외에 독자적인 취재 보도는 불가', '사건 명칭을 성추행이라고 하지 말고 성 모욕 행위로 할 것', '사회면에서 취급하되 크기는 재량에 맡김', '반체제 측의 고소장 내용이나 여성 단체 등의 사건 관계 성명은 일체 보도하지 말 것' 등의 내용을 담았다. '편집자')

▲ 검찰의 부천서 성고문 사건 수사 결과 발표 내용을 게재한 경향신문 1986년 7월 17일 자 6~7면. "성적 모욕 행위 없었다"(7면)는 검찰 발표에 더해 "반정부 확산 노린 조작극"(6면)이라는 제목을 붙여 '공안 당국 분석'이라는 괴상한 자료도 실었다. ⓒ경향신문


관계 기관 대책 회의 거쳐 정권 차원에서 진실 왜곡 공작

프레시안 : 검찰이 7월 16일 문귀동에 대해 "폭언, 폭행 부분은 (…) 우발적인 과오"이고 "10년 이상 경찰에 봉직하면서 성실하게 근무해왔다"며 기소 유예 처분을 할 방침이라고 밝힌 것도 인상적인 대목이다. 피해자를 터무니없이 몰아세우며 '두 번 죽이는' 한편 가해자에게는 솜방망이 처분을 한 것이다.

이러한 대응은 정권 차원에서 결정된 사항이었다. 6월항쟁 이후인 1988년 조영황 변호사(훗날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역임)가 최초의 특별 검사 격인 '공소 유지 담당 변호사'로 임명돼 부천서 성고문 사건 당시 검찰 기록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건 당시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성고문 진상을 모두 밝혀내고도 수사 내용을 대부분 숨긴 채 수사 결과를 수정, 시나리오에 따라 거짓 발표를 하고 문귀동에게 기소 유예 처분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관계 기관 대책 회의였다. 검찰 기록 조사 결과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88년 5월 9일 자)와 관계 기관 대책 회의를 전면 분석한 한겨레 기사(1992년 9월 30일 자) 등을 종합하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수사 결과 발표 방향은 1986년 7월 13일부터 15일까지 사흘 연속 열린 관계 기관 대책 회의에서 결정됐다.

인천지검은 그해 7월 10일경 수사를 사실상 마무리하고, 문귀동을 구속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첨부해 서동권 검찰총장에게 보고했다. 대검에서는 그 방향으로 국민에게 공표할 수사 결과 발표문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관계 기관 대책 회의에서 허문도 청와대 정무1수석과 경찰 쪽에서 문귀동 구속 기소를 거세게 반대했다고 한다. 반대한 자들은 "성고문 사실을 그대로 발표할 경우 격렬한 시위 사태로 시국 혼란이 가중된다", "나라가 망하면 당신이 책임지겠느냐", "문 경장이 구속 기소되면 시국 치안을 맡고 있는 경찰의 사기가 떨어져 일을 못하게 된다"고 강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검찰은 진실을 왜곡, 은폐, 조작하는 쪽으로 발표문을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 장세동의 진술도 눈길을 끈다. 5공 비리 문제로 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1989년 3월 장세동은 "문귀동 경장을 기소 유예 처분하기로 한 것은 검찰의 수사 보고를 받은 전두환 대통령이 최종 결정한 것으로 안다"고 진술한 것으로 보도됐다.

이러한 사실들은 전두환 정권이 어떤 식으로 이 사건에 대응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이런 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검찰이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건 전혀 아니다.

서중석 : 박종철 사건도 그렇고 다 그런 식이었다. 이런 큰 사건이 나면 안기부가 중심이 돼서 관계 기관 대책 회의를 열었다. 그래서 자기들 딴에는 종합적으로 처리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이때에도 변호사들이 "검찰이 저렇게까지 조사를 했는데 어떻게 발표가 저런 식으로 나오느냐. 이건 뭔가 이유가 있다"고 얘기하고 그랬다.

권인숙이 법정에 제출하기 위해 감방에서 쓴 7월 28일 자 변론서에는 당시 학생들이 무엇을 고민했고 어떻게 살려고 했는지가 절절히 담겨 있다.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유신 헌법을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된 산물이라고 극구 칭찬했었고, 저는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했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친구들과 얘기했는지 모릅니다. (…) 대통령 '서거' 소식에 접해서 마치 부모님 초상이라도 난 듯이 엉엉 통곡을 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 이 땅은 한 청년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통렬한 고발에도 치유될 없을 만큼 심각하게 병들어 있었고, (…) 소위 공안 당국이 의식화·좌경화되었다고 몰아치는 우리는 다만 이 땅의 아픔과 현실의 엄청난 억압과 횡포를 아는, 즉 진실을 아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전두환 정권이 파렴치한 모습을 계속 보이자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더 거세게 터져 나왔다. 7월 27일 서울 성공회 집회를 시작으로 청주, 익산, 부산, 광주, 대구에서 성고문 사건 규탄 기도회가 연이어 열렸다. 그런가 하면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이 당당하게 가해자를 고발하는 사례가 증가했다. 여성들은 부천서 성고문 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단결하는 한편 다른 재야 단체와 연대를 강화했다.

8월에도 규탄 대회는 계속됐다. 8월 14일 신민당과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이 '고문, 성고문, 용공 조작 범국민 폭로 대회'를 열었을 때에는 많은 시민이 신민당 당사 밖에서 스피커에 귀를 기울였다. 이날 민주언론운동협의회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 보도와 관련해 제도 언론 간부들이 당국으로부터 촌지를 받아먹은 것을 폭로, 규탄하는 집회도 열었다.

늦게나마 단죄된 문귀동, 그러나 검찰에서는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오월의봄
프레시안 :
재판은 어떻게 진행됐나. 이와 관련, 진실을 왜곡하고 피해자를 매도한 검찰에서 누군가 처벌을 받았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서중석 : 9월 1일 조영래를 비롯한 변호사 166명은, 처음에 9명이었다가 166명으로 늘어났는데, 문귀동에 대한 검찰의 기소 유예 결정과 관련해 법원에 재정 신청을 했다. (재정 신청은 고소·고발 사건에 대해 검사가 내린 불기소 처분이 옳은지 그른지를 가려달라고 법원에 직접 신청하는 제도를 말한다. '편집자') 검찰의 기소 독점주의 남용을 견제하고 수사 권력의 고질적인 인권 침해를 근절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이유 없다며 재정 신청을 기각했다. 문귀동과 이 사건 관련자들이 범죄를 부인하는 건 상투적 수법이었는데도, 또 밀실에서 저지른 짓이어서 다른 증인이 있을 수 없는데도 법원에서 어이없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자 변호사들은 대법원에 재정 신청 특별 항고를 하는 한편 11월 21일 변론 요지서를 작성했다.

변론 요지서는 인권 변호사로 활약했고 <전태일 평전>의 저자이기도 한 조영래가 작성했는데, 명문이었다. "이 재판은 거꾸로 된 재판입니다. 여기에 묶여 서서 재판받아야 할 것은 이 연약하고 순결무구한 처녀가 아니라 바로 이 처녀에게 인간의 탈을 쓰고서도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추악한 만행을 저지른 문귀동, (…) 아울러 문귀동의 범행을 교사, 방조하였던 모든 사람들, 문귀동을 비호하고 그 범행을 은폐하려 들었던 모든 사람들이 그 책임의 경중에 따라 여기에 서서 재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12월 1일 인천지법 판사들은 권인숙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그러고는 도망치듯 법정을 빠져나갔다. 재판 도중 한 양심수의 어머니는 분노해 "성고문 범죄자를 비호하고 피해자를 재판하는 게 사법부냐"라고 고함을 질렀다. 권인숙은 2심에서도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그러니까 주민등록을 위조해 위장 취업한 걸 문제 삼은 것인데, 복역 중 6월항쟁 이후 가석방됐다.

추악한 성추행범 문귀동은 검찰이 기소 유예 처분을 한 덕분에 한동안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변호사들이 특별 항고까지 한 것인데, 권인숙이 6월항쟁으로 가석방된 지 한참 뒤인 1988년 2월 대법원에서 재정 신청을 받아들였다. 1989년 문귀동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을 확정하고 그와 함께 권인숙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그렇지만 진실을 알면서도 '성까지 혁명 도구화했다'고 주장하고 문귀동에게 기소 유예 처분을 한 검찰에서는 아무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오늘날 많은 국민은 검찰 하면 정치 검찰, 스폰서 검사, 벤츠 검사, 성 추문 검사, 그리고 김기춘·우병우·진경준·김형준 같은 이들을 떠올린다. 잘못에 상응하는 처벌도 받지 않고 과거사에 대한 반성도 하지 않으며 개혁을 거부하고 제 식구 감싸기에 매진해온 검찰이 자초한 결과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그리고 검사들 가운데 제대로 된 검사로 살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검찰 개혁이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지를 다시금 느끼게 해주는 사례 중 하나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스물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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