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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 된 날, 노태우는 왜 잠들 수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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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 된 날, 노태우는 왜 잠들 수 없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36> 6월항쟁, 열여덟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체육관 대통령 후보 노태우 확정하고 자축한 민정당

프레시안 : 6·10 국민 대회를 거치며 항쟁의 불길이 본격적으로 치솟게 된다. 그날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1987년 6월 10일, 6·10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만 61년이 되는 이날 두 개의 열차가 마주 보고 달려오고 있었다. 양쪽 모두 상대방을 무시한 채 제 갈 길을 달리고 있었다.

6월 10일 오전 10시부터 잠실체육관에서는 주한 외교 사절, 전직 국회의장·대법원장·국무총리, 그리고 당원과 대의원 등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정당 전당 대회가 열렸다. 대회장은 시종일관 축제 분위기였다. 먼저 민정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제청한 노태우 대표위원에 대한 투표에 들어갔다. 그것에 이어 가수 조영남, 정수라, 이선희, 조용필 등이 나온 여흥 시간이 마련됐다.

(투표는 '1 노태우'라고만 적힌 투표용지에 찬반을 표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임성훈이 사회를 본 여흥 시간에 가수들은 노태우의 애창곡인 '베사메 무쵸' 등을 부르며 흥을 돋웠다. 이에 앞서 개그맨 김병조는 "민정당은 민족에게 정을 주는 정당이고 통(일)민(주)당은 민족에게 고통을 주는 정당"이라는 듣기 민망한 개그를 선보였다. '편집자')

대통령 찬가 합창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전두환이 대회장에 들어섰다. 곧이어 개표 결과가 발표됐다. 노태우는 후보 수락 연설에서 "양대 국가 대사가 성공한 뒤 국민적 여망인 합의 개헌을 반드시 성취해낼 것임을 다짐한다"고 밝혔다. 양대 국가 대사란 1988년 대통령 교체와 올림픽을 가리킨다.

▲ 노태우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는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87년 6월 10일 자 1면. ⓒ동아일보


민정당 전당 대회와 마주 보고 달린 또 하나의 열차, 6·10 국민 대회

프레시안 : 민정당 전당 대회는 쿠데타로 권력을 훔친 후 만든 전두환·신군부 헌법에 따라 노태우를 체육관 대통령으로 세우겠다고 선언하는 자리였다. 그러한 민정당 전당 대회와 마주 보고 달린 또 하나의 열차가 6·10 국민 대회 아닌가.

서중석 : 그것이다. 6·10 국민 대회를 막기 위해 전두환 정권은 전국적으로 경찰을 5만 8000여 명이나 동원했다. 재야인사 등 700여 명을 가택 연금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또한 6·10 국민 대회 장소인 성공회 대성당으로 통하는 골목골목에 철제 바리케이드를 치고 전면 통제했다.

그런 속에서 박형규, 계훈제, 양순직 등 국본(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 간부 20여 명은 가택 연금이나 출입 봉쇄를 피해 며칠 전부터 성공회 대성당에 들어와 대회를 준비했다. 드디어 6월 10일 오전 10시경 각 종교계 대표 및 재야인사 등 6명이 대성당 종각에 올라가 "4·13 호헌 조치에 의한 대통령 후보 선출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민정당 전당 대회 시간에 맞춰 이 시간에 선언한 것이다.

이날 서울에서는 26개 대학에서 출정식을 열었다. 서울 이외 지역까지 합치면 전국 80여 개 대학에서 학생들이 출정식을 열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경찰은 이날 3시경부터 국민 대회가 열리는 곳에 있는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 봉쇄에 들어갔다.

여기서 시간 표기에 관해 미리 말해둘 게 있다. 앞으로 6·10 시위를 포함해 6월항쟁에서 일어난 수많은 시위에 대해 얘기하게 될 것이다. 이 시기에 시위가 엄청나게 많지 않았나. 그런데 이 시위들은 거의 다 오후에 그리고 자정에서 그다음 날 상오 2~3시 사이에 일어났다. 이걸 일일이 '오후 몇 시부터 오후 몇 시까지', 이렇게 표기하면 독자들이 읽기가 불편할 수도 있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오후라는 말을 붙이지 않을 생각이다. 특정한 시간 앞에 내가 별도로 오전이라든가 상오 같은 말을 붙이지 않으면 전부 '오후 몇 시',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시위가 자정에서 그다음 날 새벽에 일어난 경우에는 앞에 상오라는 말을 붙이겠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건 88올림픽에 대비해 이 시기에 실시한 서머 타임(summer time) 제도다. 그 당시 오후 6시는 지금의 오후 5시에 해당한다. 6월은 1년 중 낮이 제일 긴 달 아닌가. 그래서 6시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시기에는 8시, 9시가 돼도 환했다. 게다가 날씨도 따뜻했다. 오후에 시위를 전개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기였고 날씨도 그러했다.

거리 뒤덮은 "호헌 철폐", "독재 타도"…동참하거나 "으쌰! 으쌰!" 응원한 시민들

프레시안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추운 겨울에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야 하는 오늘날과 비교하면 적어도 날씨 하나는 6월항쟁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오면, 가두시위는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6월 10일 학생 시위는 서울에서 5시경부터 규모가 커지고 거세졌다. 5시 35분경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국회의원들,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회원 등 50여 명이 노란색 완장을 차고 차량 3대를 앞세워 450여 명의 군중과 함께 행진을 했다. 학생들은 퇴계로, 남대문시장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남대문시장 상인들은 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을 상점으로 피신시킨 뒤 셔터를 내리기도 하고, 아예 가게 문을 닫고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6월항쟁 시기에는 남대문시장 일대의 건물 사이사이 미로에서 쫓고 쫓기며 벌이는 숨바꼭질 시위가 계속 전개됐다. 신문에서도 남대문시장 일대의 숨바꼭질 시위를 많이 다루게 되는데, 그러한 숨바꼭질 시위가 이날부터 나타난 것이다.

6월항쟁에서 많이 나타나는 사고성 투쟁도 이날 나타났다. 5시 6분경 경희대, 외국어대 학생들이 성북역, 지금은 성북역이라는 이름이 사라졌지만 하여튼 그곳과 인천 사이를 운행하는 전동차를 신이문역에서 막아 세우고 올라탔다. 학생들은 서울역 옆에 있는 남영역에서 하차하면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거리에 나가려는 학생들을 가로막았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자 학생들은 철로에서 자갈을 던지며 응수했다. 그렇게 30분간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면서 열차 운행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서울역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는 5시 58분경 특급 열차를 세웠고, 그 후 서부역 쪽에서 시위를 했다.

6시 성공회 대성당에서 6·10 국민 대회가 거행됐다. 대성당 확성기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고 종로에서는 42번에 걸쳐 종이 울렸다. 왜 42번이냐. 1945년 해방 이후 42년간 분단 독재의 사슬에서 신음하지 않았나. 그 사슬을 끊고 민주주의의 새 시대를 열자는 마음을 42번 종소리에 담은 것이었다. 똑같은 의미를 담아 각 성당과 교회에서도 42번 종을 울렸다.

대성당에서 종소리가 울리자 근처에 있던 버스와 승용차에서 일제히 경적이 울렸다. 태평로 일대에서는 30분 넘게 경적 소리가 계속 들렸다. 버스에 타고 있던 시민들은 박수로 화답하거나 손을 흔들었다. 길가에 있던 시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일부 시민은 차량에 경적을 울리라는 신호를 보내며 "으쌰! 으쌰!" 하고 외쳤다.

김영삼 총재 일행은 6·10 국민 대회 장소인 성공회 대성당에 들어가려 했지만 가로막혔다. 그래서 안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정문에서 몸싸움을 벌이다가 태평로 삼성 본관 건물 앞으로 후퇴했다. 그때 대통령 후보 지명 축하 연회장인 힐튼호텔로 가던 노태우의 차가 지나갔다.

민정당 연회 참석자들까지 덮친 최루탄 연기, 잠 못 든 노태우

프레시안 : 김영삼과 노태우가 마주쳤나.

서중석 : 두 사람이 서로 봤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노태우는 저게 야당 일행이라는 걸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날 최대의 격전은 서머 타임제 때문에 대낮처럼 환했던 7시 20~30분경에서 어둠이 깔린 9시 20~30분경까지 롯데쇼핑센터부터 신세계백화점, 그 뒤에 있는 퇴계 고가 도로, 회현 고가 도로 일대에서 전개됐다. 거리의 투사로 부활한 학생들의 투지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말 그대로 쏟아부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최루탄을 많이 쐈는데도 학생들은 끄떡도 하지 않고 경찰에 대항했다.

남산 3호 터널과 신세계 로터리에서 롯데쇼핑센터 앞에 이르는 대로는 인산인해였다. 사방에서 최루탄이 터지는 속에서도 2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계속해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목이 터져라 외치는 모습은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6월 10일 이날 최대의 효과를 거둔 시위는 힐튼호텔 부근에서 일어났다. 힐튼호텔에서 열린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 축하 연회에 참석한 인물들은 최루탄 연기를 마시면서 곤욕을 치른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음이 무척 무거웠을 것이다. 노태우 내외가 힐튼호텔에 들어섰을 때 호텔 안에서까지 가스 냄새가 나고 있었다.

노태우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집에 돌아와서부터 나는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러다가 대통령 못 되는 것 아냐? 직선제로 밀리는 것 아냐?', 여기까지 생각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 1987년 6월 10일 그날 전국 각지의 거리는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목이 터져라 외치는 시민, 학생으로 가득 찼다. 경찰이 최루탄을 쏟아부었지만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부마항쟁 생각나게 한 부산·마산 시위…이집트 축구 선수들, 최루 가스에 곤욕

프레시안 : 대회에 앞서 국본은 6월 10일에 전국 22개 지역에서 국민 대회를 치른다고 발표했다. 서울 이외 지역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서울 이외 지역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부산에서는 5시 30분경부터 광복동 앞에서 시위가 커졌다. 시위대는 흩어졌다가 8시 30분경 보수동 로터리에 다시 모였다. 이들은 경찰과 격렬한 투석전을 벌여 전경 1개 소대를 무장 해제하고 전경 차량 1대를 탈취했다. 얼마 후에는 기동대 버스 1대를 불태웠다.

10시경 경찰의 최루탄 발사와 투석전으로 자갈치시장 일대가 가스로 뒤덮였다. 자갈치시장 아주머니들은 최루탄을 난사한 경찰에 집단 항의했다. 학생들은 1979년 부마항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태극기를 들고 이곳저곳에서 '흔들리지 않게'라는 노래를 부르며 시위대를 이뤘다가 경찰이 공격하면 흩어지는 동시다발 기동성 시위를 11시 넘어서까지 계속 전개했다.

마산에서는 6시에 3·15의거탑 앞에서 시위를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이곳이 경찰에 봉쇄돼 그 부근에서 6·10 국민 대회를 시작했다. 시위대는 경찰 저지선을 돌파해 경찰 버스 1대를 완전히 태운 다음 공설 운동장 쪽으로 진출했다.

이날 마산 공설 운동장에서는 참으로 보기 드문 풍경이 나타났다. 그때 이 운동장에서는 대통령배 축구 시합이 열리고 있었다. 한국 A팀과 이집트 팀의 경기였는데, 최루 가스가 경기장 안까지 들어간 것이다. 최루 가스 때문에 이집트 선수들은 떼굴떼굴 굴렀다. 결국 이집트 팀에서 경기 중단을 요구했고, 경기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경기장에 있던 관중 가운데 일부도 시위대에 합세했다. 그렇게 해서 크게 불어난, 한 자료에는 3만여 명이라고까지 나오는데, 시위대는 수출 자유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최저임금 보장", "근로기준법과 파업권 쟁취" 등의 구호를 외쳤다.

마산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면서 북마산파출소와 오동동파출소가 불탔다. KBS 보도용 차량 1대도 "보도도 제대로 안 하면서 무슨 취재냐"라는 항의를 받다가 화염병 투척으로 전소됐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자 시민, 학생들은 시청 유리창에 돌을 던졌고 MBC 건물에는 화염병을 던졌다.

마산 시위에는 마산, 창원 지역뿐만 아니라 진주, 고성, 함안, 진해, 함양, 거제 등 인접한 시군의 주민들, 농민들과 경상대 학생들도 다수 참여했다. 가톨릭농민회 경남연합회 회원들도 농촌에서 다수 올라왔다. 그러다 보니까 진주는 시위 규모가 좀 작았다. 울산에서는 노동자들이 많아서 다른 곳보다 1시간 늦게, 그러니까 7시부터 시위를 벌였다.

전국에서 터져 나온 민주주의 함성…수십 년간 시위 없던 곳에서도 동참

프레시안 : 먼 데서 온 이집트 축구 선수들이 한국 축구가 아니라 한국 독재 권력의 매운맛을 톡톡히 본 셈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어떠했나.

서중석 : 광주에서는 5시 30분경부터 시위가 커졌다. 6시에 가톨릭센터와 중앙교회에서 녹음된 타종을 방송하고 옥외 방송으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시민들은 애국가를 따라 불렀고, 시위대는 곧 5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호헌 철폐",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광주 학살 배후 조종 미국 놈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도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이 공격하면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이날 목포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는데, 다방 아가씨들이 얼음과 삶은 달걀을 시위대에 갖다 주는 일도 있었다. 여순사건(1948년) 이후 40년 가까이 시위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순천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대구에서는 5시 30분경부터 시위가 벌어졌다. 8시 20분쯤 시위가 커져 서문시장 앞에서 5000여 명의 시위대가 20분간 대중 집회를 열었다. 9시를 조금 앞둔 시각에는 1만 명에 가까운 시위대가 MBC 앞에서 경찰 닭장차 1대를 부수고 경찰과 대치했다.

경주, 안동, 포항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경주도 그간 시위를 찾아보기 어려운 지역이었는데, 이때 학생들이 시위를 해서 시민들의 관심을 모았다. 안동에서는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이 시위에 많이 참여했다.

전주에서는 5시부터 여러 곳에서 발대식이 열렸다. 6시에는 백제로 사거리에서 자동차 경적의 호응을 받으며 도민 대회가 열렸다. 최루탄을 발사한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 와중에 경찰 오토바이 2대와 경찰 봉고차 1대, 태평동파출소가 불탔다. 이리, 지금의 익산에서는 원광대생이 중심이 돼서 시위를 벌였다. 9시경에는 5000여 명의 시민, 학생이 수출 자유 공단에 들어가 "노동 3권을 보장하라"고 외쳤다.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시위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군산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대전, 천안, 청주, 춘천, 원주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천안의 경우 농민들이 상당수 참여한 것이 눈에 띄었다. 인천에서는 노동자 참여가 두드러졌다. 6시가 되자 택시 기사들이 경적 시위를 했는데, 7시부터 공단 일대의 노동자들이 퇴근하면서 시위 인원이 급증했다. 9시경에는 1만 명에 가까운 시위대가 제3차 대중 정치 집회를 열고 전두환 화형식을 거행했다. 1960년 4월혁명 이후 시위가 없었던 수원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성남에서는 한 자료에 3만여 명이라고 나와 있는데 아주 많은 시민, 학생이 운집해 행사를 열었다.

6·10 국민 대회, 전국 동시다발 시위로 근현대사에 한 획을 긋다

ⓒ오월의봄
프레시안 :
몇 십 년간 시위가 없었던 여러 지역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6·10 국민 대회를 종합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서중석 : 6·10 국민 대회는 민주화 운동사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에서도 한 획을 그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같은 날, 여러 장소에서 이렇게 많은 시위가 벌어진 적이 없었다. 정치인과 재야인사, 학생들이 혼연일체가 돼 시위 투쟁을 벌인 것도 아주 드물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라고 구호가 전국적으로 통일돼 있는 것도 크게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도시에서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시위 모습을 지켜보거나 시위대에 가담했고, 시위대에 음료수와 먹을거리를 건네기도 했다.

이날 경찰은 20개 도시, 106개 장소에서 1만 8550명이 시위에 가담했고 시위 운집 인원은 3만 9500명이라는 이상한 통계를 발표했다. 그와 달리 국본 상임집행위원이던 황인성은 전국 22개 지역에서 24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고 밝혔고,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낸 <6월 민주화 대투쟁>에는 22개 지역에서 40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나와 있다. 대중 집회나 시국 토론회가 열린 것도 과거 시위와 크게 다른 점인데 서울, 마산, 대구, 광주, 성남, 인천, 군산 등 여러 도시에서 대중 집회가 열렸다. 마산, 안동, 전주, 천안 등 농민 운동이 활발했던 곳에서는 농민들이 다수 참여했다.

경찰은 규모가 큰 전국 동시다발 시위를 이날 처음으로 경험했다. 이 때문에 다른 곳도 아닌 서울에서, 정권 안보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수도 서울에서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서울에 지원 병력을 보낼 수 없었다. 이날 서울에는 경찰이 2만 2000여 명이나 배치됐는데 그러한 서울 및 부산, 성남 등 여러 지역에서 경찰이 무장 해제를 당했다. 경찰력만으로는 6·10 국민 대회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프레시안 : 전국 동시다발 투쟁은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1987년에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전두환·신군부가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후 민심이 점점 이반됐고, 그것이 1985년 2·12총선에서 선명 야당 바람으로 나타나지 않았나. 그것은 또한 1986년 상반기에 주요 도시에서 강렬한 개헌 열기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속에서 전두환 정권은 개헌 열기를 무산시키기 위해 극심한 강경책을 썼지만 개헌과 직선제에 대한 강한 욕구를 꺾지는 못했다. 그것이 1987년에 6월항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이 지방 조직을 이전 시기보다 탄탄하게 갖춘 것도 작용했다. 대개 서울 중심이던 과거와 달리 198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 기반이 확산되면서 지방에서도 조직을 잘 갖추게 됐다.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서도 지운협(지역운동협의회) 같은 것이 민통련의 중요한 활동으로 자리 잡는 데서도 그 점은 잘 드러난다. 또한 1980년대에 들어와서 대학생 숫자가 크게 늘어나고 지방대와 지방 분교가 많이 생긴 것 등도 그와 같은 동시다발 투쟁을 가능하게 한 요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서른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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