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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때 군이 출동하지 않은 건 미국 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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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6월항쟁 때 군이 출동하지 않은 건 미국 덕분?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39> 6월항쟁, 스물한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19일의 두 회의…군 투입 지시한 전두환, '정치적 대응 먼저' 당정 회의

프레시안 : 각지에서 항쟁의 불길이 타오르면서 곤경에 처한 전두환은 1987년 6월 17일 "나는 카드를 다 썼어요"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전두환에겐 군 동원이라는 유력한 수단이 남아 있었다. 총칼로 권력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1980년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신군부의 이력을 감안하면, 6월항쟁을 짓밟기 위해 군대를 동원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6월항쟁 때 군은 투입되지 않았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동안 '미국 때문이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등 여러 해석이 나왔다. 전두환이 정말 군을 투입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나뉜다. '전두환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에게는 군을 동원하지 않을 뜻을 분명히 했다'는 증언이 있는가 하면, '군을 투입해 진압하라는 명령을 전두환이 실제로 내렸다'는 증언도 있다.

이처럼 해석과 증언이 엇갈리는 군 투입 문제와 관련해 주요하게 거론되는 것 중 하나가 6월 19일 상황이다. 이 부분을 짚어봤으면 한다.

서중석 : 6월 19일 오전 10시 30분 전두환은 안무혁 안기부장, 이기백 국방부 장관, 박희도 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한 3군 참모총장, 고명승 보안사령관, 권병식 수방사령관 등을 청와대 집무실로 불렀다. 여기서 전두환은 비상 조치를 전제로 한 군 병력 배치에 관한 지시를 내렸다. 강태홍 부산시장이 위급 보고를 계속 올린 것도 이러한 조치가 나오게 된 요인 중 하나였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은 전국의 비상시 지역별 병력 배치 계획, 서울 지역의 병력 배치 계획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그리고 한미 연합사에 사단 이동을 통보하게 함과 동시에 대전과 대구에 1개 사단을 보내고 2개 여단은 광주로 돌리며 부산에 1개 사단과 1개 연대를 보내 우선 부산, 대구, 마산의 시위를 진압하라고 지시했다. 서울의 경우 4개 연대를 주요 대학에 배치하도록 했다.

그런데 전두환이 군 출동 지시를 내린 이날 오후 2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 이춘구 민정당 사무총장, 안무혁 안기부장, 김윤환 청와대 정무1수석, 그리고 안기부장 특보 박철언 등이 청와대 인근 안가에서 당정 회의를 열었다. 이 모임에서는 "비상 조치를 하더라도 정치적 대응을 조금 더 해본 후에 해야 한다", "사전에 정치력을 보이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다. 당정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간부들이 지금은 정치력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 다시 말해 비상 조치에 명확히 반대하는 의견을 말한 것이다.

당정 회의 참석자 중 안무혁 안기부장은 이날 오전에 열린 청와대 회의에도 참석했다. 다른 참석자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오전에 있었던 청와대 회의 내용을 잘 알고 있을 만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비상 조치를 지금 발동해서는 안 되고 먼저 정치력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얘기한 것이다. 전두환이 비상 조치를 내리지 않을 것임을 이 사람들이 알고서 오후 2시 당정 회의를 열고 그런 의견을 말한 게 아니겠느냐,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전두환, 주한 미국 대사 만난 후 군 출동 지시 유보

프레시안 : 이날 미국 쪽도 움직이지 않았나.

서중석 : 전두환은 19일 오전 군 고위 관계자 등을 청와대로 소집해 군 병력 출동에 대한 지시를 내린 데 이어, 당정 회의가 열린 바로 그 2시에는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 대사를 만났다. 릴리는 전두환에게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레이건은 이 친서에서 한국의 계속적인 정치 발전을 위해 정치범을 석방하고, 권력을 남용해 탄압한 관리를 처벌하며, 자유 언론을 신장할 것을 권했다. 그게 친서의 주요 내용이었다. 군 출동을 자제하라는 요청은 친서에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 정치범 석방 등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얘기한 것이었다. 한국의 시위 상황을 지켜본 레이건이 친서를 통해 '민주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고 얘기한 것이다.

릴리는 이 친서를 읽은 전두환에게 계엄령 선포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자신이 단호하게 얘기했다고 나중에 회고록에서 언급했다. 군을 출동시키면 절대로 안 된다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전두환은 릴리를 만난 이후인 이날 오후 4시 30분경 군 출동에 관한 지시를 유보했다.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사람이 '미국의 압력 때문에 전두환이 군 출동 지시를 유보한 것이다. 군이 나오지 않게 하는 데 레이건 친서나 릴리가 한 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알고 있다. 민주화 운동 세력도 그런 주장을 많이 했다.

군 출동 지시 유보한 건 미국 때문? 그렇게 보기 어려운 이유

프레시안 : 19일 오전 10시 30분에 열린 회의에서 군 출동에 관한 지시를 내렸다가 오후 4시 30분경 유보했으니 6시간 만에 결정을 뒤집은 셈이다. 그게 미국의 압력 때문이라는 주장, 어떻게 평가하나.

서중석 :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그렇게 보기가 어렵다. 사실은 19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회의 분위기가 그렇게 심각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또 오후 2시에 열린 당정 회의에서 지금은 정치력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나오지 않았나. 거듭 말하지만 이 회의에서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었던 건 전두환이 군을 출동시키지 않을 게 뻔하다는 걸 참석자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2시 이전에 이미 전두환은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압력, 즉 릴리가 한 말 때문에 전두환이 군 출동에 관한 지시를 유보했다고 볼 만한 증거가 없다. 그리고 레이건 친서에 그런 내용이 전혀 없기도 하다.

사실 이날 릴리와 면담한 것 자체도 전두환이 이미 마음의 준비가 다 돼 있었기 때문에 만난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레이건 친서는 이틀 전, 즉 6월 17일에 이미 도착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미국 쪽의 면담 요청을 청와대에서 거절하다가 19일 이날 만난 것이다. 그걸 보더라도 그렇다.

물론 미국의 영향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미국이 군 출동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전두환이 계산에 넣은 건 확실하다. 그러나 미국 지시에 따라 그렇게 결정했다고 볼 수는 없다. 지난번에 얘기한 것처럼, 6월 17일 저녁 전두환은 "우리가 과거에 하던 식, 군부를 동원하고 비상 계엄을 선포하는 그런 걸 반복하면 안 되지 않겠어?"라는 얘기도 했다. 나중에 상세히 분석하겠지만, 전두환은 6월항쟁 시기에 군을 출동시키지 않으려 했다고 볼 수 있다.


▲ 1987년 6월 19일 전두환은 군 출동에 관한 지시를 내렸다가 유보했다. 그렇지만 그 주요 요인이 미국의 압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진은 전두환과 레이건(1983년). ⓒ국가기록원

별것 아닌 이유를 대며 군을 출동시키지 않으려 한 전두환

프레시안 : 19일 오전 청와대 회의에서 전두환은 '군을 투입하겠다'는 선언 수준을 넘어 '대전과 대구에 1개 사단' 식으로 구체적인 지역과 군 투입 규모까지 지정했다. 투입 완료 시점(20일 새벽 4시까지 해당 지역에 진입)도 결정됐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지시한 부분을 어떻게 봐야 할까.

서중석 : 전두환 정권 시기를 쭉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사람이 쇼를 잘한다. 전에 얘기한 대로 1986년 9월 하순경부터 전두환은 비상 조치 카드를 계속 만지작만지작했다. 그러면서 그해 9월 하순부터 11월 초까지 계엄령을 선포해 군을 출동시키는 것에 관한 지시, 비상사태 시 김대중과 김영삼을 연행해 수사하라는 지시, 김대중을 정계에서 은퇴시켜 재수감과 외국행 중 하나를 택하게 하겠다는 지침 같은 걸 연이어 내리지 않았나. 특히 이 가운데 마지막에 말한 지침 같은 건 극비 형식을 취하면서도 김대중, 김영삼 쪽으로 흘러나가도록 돼 있었다. 하여튼 전두환은 이런 지시, 지침을 연이어 내렸지만 일종의 연습 비슷한 식이었을 뿐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6월항쟁 때에도 비슷하다. 1987년 6월 14일에 이미 전두환은 회의에서 군 출동 준비 지시를 내렸다. 유사시에 군이 출동하도록 그렇게 준비는 해놓았다. 그렇지만 14일 이 회의에서 정말 군을 출동시키겠다는 긴박감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고 돼 있고, 이때 추가 지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6월 19일에는 군 출동 문제에 대해 14일보다 더 센 지시를 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날 오후 그 지시를 유보하는데, 그것에 대해 나중에 아주 희한한 주장을 한다. 뭐냐 하면, 전두환은 19일 그날 오후 권복경 치안본부장한테 전화로 이렇게 물어본다. "자신 있느냐?" 군이 출동하지 않아도 치안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뜻일 터인데, 권복경은 자신 있다고 답했다. 당연히 그렇게 대답하지 않겠나. 그러자 전두환은 그러면 군이 출동할 필요가 없다고 해버린다.

이 부분은 <전두환 육성 증언>에 그대로 나온다. 노태우 회고록에도 이 부분은 똑같이 나온다. <전두환 육성 증언>하고 노태우 회고록이 똑같은 데가 그렇게 많지 않은데, 이 부분은 같다. 그러니까 군 출동에 대한 지시를 19일 오전에 내리긴 했지만, 바로 그날 오후에 별것 아닌 이유를 대면서 군을 출동시키지 않으려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난 오후 2시에 열린 당정 회의, 비상 조치를 발동하더라도 정치적 대응을 먼저 해본 후에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 그 회의가 그걸 단적으로 얘기해준다고 본다.

미국 부분을 조금 더 살펴보자. 미국 의회는 일찍부터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보였다. 언론도 그랬다. 그렇지만 레이건 정부는 이때까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6월 17일에 도착한 친서부터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지만, 그것 때문에 전두환이 군을 출동시키지 않았다고 볼 만한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 돈 오버도퍼를 비롯한 여러 사람도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 나도 아까 얘기한 것처럼 '미국의 압력도 작용은 했다', 이렇게 쓰고 있다. 그렇지만 그게 주요 요인은 아니다. 전두환은 군 병력 출동을 유보한 대신 이한기 총리에게 '과격 시위가 계속되면 정부는 비상한 각오를 할 수밖에 없다'는, 즉 비상 조치를 내릴 수도 있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도록 했다.

비상 조치 풍문 속에서도 계속된 시위와 한 전경의 안타까운 죽음

프레시안 : 비상 조치에 관한 풍문이 나도는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는 이어지지 않았나.

서중석 : 6월 19일에도 시위가 계속 일어났다. 1987년에 부산은 비 오는 날이 많았다고 하는데, 19일에도 비가 내리는 가운데 부산 시내 10개 대학 및 3개 전문대 학생들이 연합 시위를 벌였다. 대구에서는 돌도, 최루탄도 없는 '무석무탄(無石無彈)'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와 전경들이 합의해, 시위대는 비폭력을 외치며 행진하고 전경들은 길을 비켜줬다. 그렇지만 날이 어두워진 후 최루탄이 날아오고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맞서는 일도 생겼다.

대전에서는 7시 45분경 시위가 시작됐다. 9시가 넘으면서 시위대는 5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경찰이 다탄두 '지랄탄'을 퍼부었지만 시위대는 완강히 버텼다. 그런데 이날 대전에서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11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 대전역 부근에서 시위하던 사람들이 버스 1대를 탈취해 기동대를 향해 돌진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전경 3명이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 이 가운데 20세의 박동진 일경은 결국 숨졌다. 그다음 날(20일) 국본 충남본부는 경찰과 시위대 양쪽의 폭력 사용 자제를 호소하는 '전경과 대학생을 보호합시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최루탄 추방의 날(18일)에는 조용했던 청주에서도 19일에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충주, 광주, 목포, 순천, 전주, 익산, 군산, 춘천, 원주, 인천, 성남, 안양, 안산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 춘천에서는 9시경 시위대 규모가 1만여 명에 이르렀는데, 11시를 전후해 운교동파출소를 전소시켰다. 시위대는 출동한 소방 차량 2대를 탈취하기도 했다.

성남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말>에 따르면, 9시 반경 시위대가 시청 앞 광장으로 향했을 때 시위 인원이 4만여 명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시민들의 기세에 놀란 경찰은 시청 앞에서 '사과탄', 최루탄을 무차별적으로 쏘아댔다. 시청 관계자는 시위대가 연좌하지 못하도록 소방차 호스로 계속 물을 뿌렸다. 시위대는 성남파출소를 완전히 태우고 중앙파출소, 신흥파출소, 태평2동파출소를 부쉈으며 소방차 1대를 잠시 탈취하기도 했다.

이날 고려대 교수들은 교내에서 시위를 했다. 그때 내가 이 자리에도 찾아갔는데, 고려대 교수 19명은 지체 없이 민의에 순응할 것 등을 요구하며 연좌시위를 했다. 교수들이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는 일은 1986년 봄에도 적지 않았고 1987년 4·13 호헌 조치 이후에는 아주 많았지만, 교수 시위는 1960년 4월 25일 대학 교수단 시위 이래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영수 회담 우선이냐 평화 대행진이냐…국본 내부 팽팽한 줄다리기

ⓒ오월의봄
프레시안 : 국본(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 쪽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국본은 최루탄 추방 대회 이후 전두환 정권에 타격을 가할 또 하나의 전국 동시다발 대회를 계획했다. 국민 평화 대행진을 하자는 안이 17일에 제출됐다. 그러나 이 문제를 놓고 내부에서 의견이 대립하면서 18일에도 확정하지 못했다. 투쟁 열기를 더욱 조직적으로 담아내야 한다는 세력과 정치 협상을 통해 파국을 막아야 한다는 야당 등의 의견 차이가 또다시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19일 밤 다시 국본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상도동계, 동교동계 모두 비상 조치가 있을 수 있다고 하면서 영수 회담을 기다려보자고 주장했다. 특히 설훈 등 동교동계에서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영수 회담이 열린다고 하더라도 국민 평화 대행진을 추진해야 하며 그래야 야당도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팽팽한 대립이 계속되면서 합의는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20일 상오가 돼서야, 월요일(22일)까지 정부의 반응을 기다려보고 아무런 민주적 조치가 없으면 평화 대행진 실시 계획을 23일에 공표한다는 데 겨우 합의했다.

시위 규모 한층 커진 광주·호남

프레시안 : 20일 시위는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6·10 국민 대회 이후 광주에서는 규모가 큰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6월 19일에 시위 분위기가 다시 고조되는 것 같더니만 20일부터는 광주뿐만 아니라 호남 전체적으로 시위가 한층 더 커졌다.

20일 광주에서는 시위대가 중앙로 앞까지 도로를 완전히 점거했다. <6월 민주화 대투쟁>에 9시경 원호청과 광주은행 사이에 운집한 인파가 약 20만 명이라고 쓰여 있을 정도로, 지하상가에서 서현교회에 이르는 도로를 시위대가 가득 메웠다. 목포와 순천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전주에서도 광주와 마찬가지로 20일에 시위 규모가 훨씬 커져 경찰과 공방전을 거듭했다. 익산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최루탄 추방을 요구하고 경찰 폭력에 항의하는 범이리 시민 총궐기 대회를 열었다.

부산에서는 19일에 이어 20일에도 비가 내렸지만 시위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전보다 규모가 약간 작아지긴 했지만, 20일 부산에서는 학생을 비롯한 2만여 명의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우고 격렬히 시위했다. 학생, 시민 7000여 명이 시내버스 48대 등 50여 대의 차량을 탈취해 이들 차량을 앞세우고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려 했다고 조선일보는 보도했다.

대구 시위도 이날 더 격렬하게 전개됐다. 9시경 시위대가 대구백화점 앞에서 연 대중 집회에는 회사원, 노동자, 상인, 접객업소 종업원에 더해 재수생까지 참여했다. 10시 40분경에는 달성파출소가 전소되는 등 4개 파출소가 불탔다.

전경 1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있었던 대전에서도 시위는 계속됐다. 20일 5시가 가까워졌을 때 시위대는 KBS 소속 승용차 1대를 불태우고 도청 신관과 도경 차고의 유리창을 부쉈다. 그러자 경찰이 다연발탄을 쐈고 주변은 뿌옇게 변했다. 춘천, 인천, 성남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20일에는 해외 두 지역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미국 뉴욕에서 2000명쯤 되는 한국인이 궐기 대회를 열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약 200명의 한국인이 "독재 타도", "호헌 철폐"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마흔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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