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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두환에게 강펀치를 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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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영삼, 전두환에게 강펀치를 먹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40> 6월항쟁, 스물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기로에 선 민정당과 노태우

프레시안 : 1987년 6월 17일 전두환은 노태우를 중심으로 시국 수습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 노태우와 민정당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나.

서중석 : 노태우와 민정당은 6월 18일, 19일 시위 상황을 보면서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토요일인 20일에도 격렬한 시위가 계속됐을 뿐만 아니라 광주, 순천, 익산, 목포 등 호남 지역에서 시위가 대단한 기세로 커지고 있었다.

민정당에서 보기에 상황은 점점 심각한 쪽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민정당은 전두환이 1986년 하반기부터 계속 만지작거린 비상 조치 카드를 바랄 처지가 아니었다. 군이 전면에 나서면 노태우 정권 출현이 뿌리째 흔들리면서 원치 않는 방향으로 상황이 뒤집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1980년 5·17쿠데타 직후 공화당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로 전락했나. 군이 출동하면 민정당 역시 5·17쿠데타 직후 공화당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민정당은 21일 의원 총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하기로 했다.

노태우는 6월 20일에 와서야 국민당 총재 이만섭, 신민당 총재 이민우와 회담했고 김수환 추기경도 만났다. 이들은 모두 노태우에게 직선제를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김 추기경은 "노 대표, 마음을 비우는 자에게 하느님은 복을 주십니다. 이 말씀을 잊지 마세요", 이렇게 덧붙이기까지 했다.

프레시안 : 민정당 의원 총회가 열린 21일에도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나.

서중석 : 일요일이던 21일 광주에서는 3시 30분경부터 시위가 일어났다. 7시 20분경 광주공원에서 전경과 대치했을 때에는 시위대가 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목포에서는 3일 연속 시위가 벌어졌는데, 21일에 가장 규모가 큰 시위가 일어났다. 18일부터 시위가 불붙은 순천에서도 21일 이날 가장 격렬했다. 특히 순천에서는 수많은 고교생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전체 시위대의 80퍼센트 정도가 고교생이라고 얘기될 정도였다.

제주에서는 1948년 4·3항쟁 이후 처음으로 규모가 큰 시위가 일어났다. 전주, 익산, 부산, 안동, 인천에서도 규모가 큰 시위가 발생했다. 해외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20일에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위가 벌어진 데 이어 21일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1000여 명이 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민정당 의총에서 터져 나온 "직선제로 정면 돌파하세요"

ⓒ오월의봄
프레시안 : 민정당 의원 총회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21일 오전 9시 30분부터 민정당 의원 총회가 열렸다. 6·10 국민 대회 이후 처음 열리는 의원 총회였는데, 무려 6시간 10분 동안이나 계속됐다.

이종찬 회고록에 따르면 이날 서울 지역 분임 토의에서 전날에도 "이제 체육관 선거는 그만해야 해"라고 직설적으로 얘기했던 홍성우 의원이 다시 체육관 선거 불가론을 제기했다고 한다. 홍성우 이 사람은 1978년 12·12선거 때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탤런트 출신으로 서울 도봉구에서 당선돼 화제를 모았는데, 평이 괜찮았다. 하여튼 그러자 서울시당 위원장이 뜯어말렸고 허청일 의원은 "지금 당장 직선제로 간다면 이것은 우리 당이 백기 들고 나오는 격이다"라고 말했다.

시도별 분임 토의가 끝나고 의원 총회 전체 회의가 열렸을 때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전국구 의원인 이용훈이 등단해 직선제를 해야 한다고 외쳤다. 이용훈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때 서울지검 검사였는데, '무리한 사건이다. 기소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상부의 기소 방침에 반대하다가 검사직을 떠난 사람이다. 이용훈이 이렇게 발언하자마자 홍성우 의원이 벌떡 일어나서 "직선제로 정면 돌파하세요"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자 침묵을 지키던 의원들의 소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한 신문은 서울 출신 의원의 경우 14명 중 5명이 직선제도 수용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고 보도했다.

그다음 날(22일) 민정당 중앙집행위원 간담회가 열렸을 때 노태우 대표의 표정이 대단히 어두웠다고 이종찬은 썼다. 그 전날 의원 총회 분위기를 보고받은 것 같았다. 22일 식사 때 노태우는 홍성우 의원이 "너무 야당이나 시위 학생들 의견에 부화뇌동하는 것 같소"라고 참았던 불만을 드디어 뱉어냈다. 이종찬 회고록에 이 내용이 그대로 나오는데, 이 시기에 이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프레시안 : 의원 총회까지 거쳤으니 노태우도 뭔가 제시했어야 할 텐데, 어떤 방안을 내놓았나.

서중석 :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22일 오전 청와대에 올라가 전날 의원 총회에서 나온 의견을 보고하고 개헌 논의 재개, 구속자 석방, 김대중 가택 연금 해제를 건의했다. 이 가운데 개헌 논의 재개 부분의 경우 6월 17일 전두환이 내린 지시 자체가 '이제 개헌 논의 재개하자. 그걸 너희들이 해라', 그런 뜻을 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어쨌건 22일 전두환은 노태우의 건의를 수용했다.

아울러 노태우는 특히 여야 영수 회담을 권했다. <노태우 육성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전두환의 지론은 우선 발등에 떨어진 위기를 막고 보자는 것이었고 그것도 타협이나 대화보다는 물리적인 힘으로 막아놓고 그다음에 어떻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예비군까지 동참해 전주 역사상 최대 규모 시위

프레시안 : 22일 시위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전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가 이날 격렬하게 전개됐다. 정오가 지나자 시민, 학생들이 연좌시위에 돌입했다. 3시가 가까워질 무렵 1만 5000여 명의 시민이 코아백화점 앞에 모였다. 3시 반쯤 익산에서 증원 부대가 도착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학생, 시민들이 격렬히 저항하자 경찰은 한 발 물러섰다. 경찰은 도청, 시청, 도경, 민정당 당사 등 주요 거점을 지키는 데 치중했다.

6시경 전북대 복학생 200여 명이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다가 가두 행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예비군 복장까지 갖추고 반정부 시위를 한 것이다. 10시경에는 시위대 1만 5000여 명이 서중 로터리에 집결해 대중 정치 집회를 연 뒤 해산했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곳곳에서 계속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시위대가 투척한 화염병과 돌 등으로 인해 전주에 있는 거의 모든 파출소가 파손됐다. 8개 파출소가 습격당했고 이 중 3곳이 불탔다. KBS 오픈 스튜디오도 불탔다. 또한 시위대는 안기부 대공 상담소에 돌을 던지고 상담소 간판을 떼어냈다. 시경 대공분실, MBC, 교육청 등에도 돌을 던졌다.

익산, 광주, 제주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제주에서는 제주대 학생 2000여 명이 시내 중심가를 행진했는데도 경찰이 막지 못했다. 대구, 대전, 천안, 공주, 원주, 인천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그리고 22일까지 103개 대학 중 90개 학교가 방학에 들어갔다. 그런데 22일 이날 부산에서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일어났다.

"다 죽여버려", 경찰에게 무차별 폭행당한 부산 가톨릭센터 농성 참여자들

프레시안 : 무엇이었나.

서중석 : 부산에서 6월 16일 밤늦게까지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던 시위대가 최루탄과 백골단을 피해 가톨릭센터에 들어가면서 농성이 시작되지 않았나. 가톨릭센터 농성은 부산에서 항쟁의 불길을 이어가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농성 참여자들은 21일 저녁부터 해산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토론은 22일까지 이어졌고, 결국 두 차례의 투표를 거쳐 22일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경찰로부터 안전한 귀가를 보장받은 다음 농성 참여자 130여 명 중 부산대와 동아대 학생들은 학교 버스로 귀가했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 시민 등 14명은 교구청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이 버스에는 신부 2명이 동승했다.

그런데 이 버스가 남부경찰서 앞 바리케이드를 막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무술 경관들이 버스를 둘러쌌다. 이들은 차를 세운 다음 죽도로 버스 유리창을 부쉈다. 양효섭 신부가 밖으로 나와 "시경에서 안전한 귀가를 약속했다"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새끼들 다 죽여버려"라는 소리와 함께 방독면을 착용한 전경들이 '사과탄'과 총유탄 30발 정도를 버스 안에 마구 던져 넣고 쏘아댔다. 운전기사는 기절해 쓰러졌고, 버스 안은 순식간에 생지옥으로 변했다. 경찰은 최루 가스를 못 견뎌 창문으로 나오려는 사람들을 죽도로 사정없이 내리치는 한편 버스에 있던 사람들을 문 밖으로 끌어내 군홧발로 짓밟았다.

경찰은 버스 탑승자들을 남부경찰서에 끌고 가서 다시 두들겨 팼다. 신부들이 항의하자 경찰은 "이 새끼야, 네가 신부면 다냐? 네가 주동자지?"라고 폭언을 하면서 학생, 시민들에게 계속 폭행을 가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경찰의 최루탄 투척과 집단 폭행으로 탑승자 중 4명이 최루탄 파편이 박히는 등의 중상을 입었고 11명은 전신에 타박상을 입었다. 부산 교구 소속 사제들은 24일 정오부터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도로 뒤덮은 촛불 대행진, 경찰은 막을 엄두도 못 냈다

프레시안 : 국본(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 쪽을 짚어봤으면 한다. 국민 평화 대행진 추진을 놓고 국본 내부에서 팽팽한 의견 대립이 벌어졌다. 그 후 어떻게 진행됐나.

서중석 : 22일까지 정부의 반응을 기다려보고 아무런 민주적 조치가 없으면 평화 대행진 실시 계획을 23일에 공표하기로 겨우 합의했다고 전에 말하지 않았나. 그런데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국본 대표들을 만나서 평화 대행진 날짜 발표를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논란 끝에 23일 국본은 26일 6시 '민주 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 평화 대행진'을 전국에서 동시에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평화 대행진에 앞서 여야 영수 회담 등을 통해 정부가 실질적 행동을 보여준다면 적극 환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26일에는 6시 국기 하강식과 더불어 애국가를 제창하고 전국의 교회와 사찰에서는 종을 울리고 차량은 경적을 울리며, 밤 9시에는 10분간 TV를 끄고 소등할 것을 행동 지침으로 제시했다.

프레시안 : 23일 시위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전주에서는 23일에도 규모가 큰 시위가 발생했다. 6시경부터 1만 명이 넘는 학생, 시민이 모여들었다. 9시 40분경부터 10시 30분경까지는 '민주 부활을 기원하는 평화의 촛불 대행진'이 전개됐다. 박정일 주교를 비롯한 신부, 수녀들이 앞에 서고 장애인들이 촛불을 그러쥐고 휠체어를 탄 채 그 뒤를 따랐다.

전동성당에서 출발한 촛불 대행진 행렬이 시위대와 합류하면서 6차선 도로 1킬로미터를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 이 인파에 대해 동아일보는 1만 5000명, <말>은 4만 명으로 보도했다. 경찰이 촛불 대행진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도로를 가득 메운 시위대는 풍물 잔치, 농민들이 참여한 시민 강연회에 이어 전두환, 노태우 화형식을 거행했다.

익산에서도 곳곳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광주에서는 신흥택시 기사들이 이색적으로 시위에 대거 나섰다. 4시 30분경에는 중앙로 4거리에서 조흥은행에 이르는 도로를 택시 시위대가 완전히 점거했다. 순천, 여수, 제주, 대구, 안동, 원주, 안양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앞으로의 시위 투쟁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학생들의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연세대 등 25개 대학 학생 2만여 명이 3시에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서대협(서울 지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 주최로 '호헌 철폐와 독재 종식을 위한 서울 지역 청년 학도 결의 대회'를 열었다. 2만여 명이 한자리에서 9시 10분경까지 장장 6시간 넘게 대회를 진행하며 시종 민주화 열기를 고조시켰다. 이날 나도 현장에서 지켜봤는데, 학생들이 마지막까지 흐트러지지 않고 참 잘하더라.

이 대회에서 향후 투쟁의 주된 구호를 직선제 쟁취로 확인한 것은 의미가 있었다. 학생들은 투쟁 열기를 6·26 국민 평화 대행진으로 총집결할 것을 거듭 다짐하고 대중과 연대하는 활동도 강화하기로 했다.

회담 결렬 선언한 김영삼, 당황한 전두환과 민정당

프레시안 : 그런 속에서 여야 영수 회담이 열리게 된다.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나.

서중석 : 24일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드디어 전두환과 김영삼의 영수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은 아주 길었다. 오전 10시 30분에 시작됐는데, 오찬을 거쳐 오후 1시 반까지 이어졌다.

김영삼은 4·13 호헌 조치 철회, 선택적 국민 투표 실시, 김대중 가택 연금 해제 등을 요구했다. 전두환은 개헌 논의를 하겠다고만 말할 뿐, 그러니까 4·13 호헌 조치를 사실상 철회한 셈인데, 즉답을 피했다. 그러다가 어려운 대목에 부딪히면 '노태우와 만나 의견을 절충하라'면서 노태우에게 미뤘다. 그때마다 김영삼은 '노태우는 만날 필요가 없다. 당신이 책임자 아니냐. 왜 자꾸 미루느냐'고 다그쳤다. 전두환은 오찬 약속이 있다면서 회담을 끝내려 했다. 김영삼은 핀잔을 놓으면서 전두환을 주저앉혔다.

회담이 끝나자 김영삼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내외신 기자 80여 명과 기자 회견을 했는데, 여기서 김영삼은 전두환에게 4·13 호헌 조치 철회를 요구했으나 전두환이 응하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실제는 그게 아니라고 볼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얘기했느냐. 김영삼은 대통령이 개헌 논의를 즉각 재개할 것만 약속했을 뿐 선택적 국민 투표 제의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두환을 몰아세웠다. 바로 이 부분이다. 선택적 국민 투표 제의에 응하지 않았으니까 4·13 호헌 조치 철회 요구에 응하지 않은 것이라는, 김영삼다운 화법이었다.

기자 회견 후 김영삼은 긴급 정무 회의를 주재하고, 영수 회담이 결렬됐다고 밝히면서 대여 강경 투쟁을 선언했다. 국민 평화 대행진을 강행할 것이며 전두환을 다시 만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김영삼은 감각의 정치인으로도 불리는데, 김영삼 평생을 통틀어 감각의 정치가 최고로 잘 살아난 게 난 이것이 아닐까 싶다. 기가 막히게 나온 것이다.

프레시안 : 전두환 쪽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나.

서중석 : 전두환과 민정당은 당황했다. 다급한 처지에 놓인 여권은 결렬 선언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논리적으로 보면, 전두환이 개헌 논의 재개에 동의했으면 그건 4·13 호헌 조치를 철회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영삼에게 그건 의미가 없었다. '대통령 직선제와 내각 책임제에 대해 선택적 국민 투표를 실시하겠다', 이렇게 할 경우에만 김영삼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선택적 국민 투표를 하면 대통령 직선제가 압도할 거라는 건 누가 봐도 확실했다.

김영삼이 결렬을 선언한 그날 결국 전두환과 노태우는 일단 6·26 국민 평화 대행진을 보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직선제로 가자는 데 합의했다. 직선제에 대한 준비는 25일부터 하기로 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김대중의 연금은 해제해주는 게 좋겠다는 데에도 동의했다. 22일에 노태우가 건의한 사항에도 그게 들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24일 자정 5분 전 마포경찰서 서장이 김대중 자택에 찾아와 자정을 기해 연금이 해제된다고 직접 통보했다. 78일 만이었다.

▲ 1987년 6월 24일 영수 회담을 위해 만난 전두환과 김영삼. ⓒ국가기록원


6·26 대행진 전열 흩트리려는 전두환 계획, 물거품으로 돌아가다

프레시안 : 김영삼의 영수 회담 결렬 선언이 6월항쟁 전개 과정에서 어떤 의미가 있었다고 보나.

서중석 : 김영삼이 직설적으로 회담 결렬을 선언해 전두환, 민정당에 강펀치를 먹이고 평화 대행진 강행이 당연하다고 발언한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만약 김영삼이 자기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영수 회담이 반쯤은 성공하지 않았느냐. 전두환의 태도를 좀 더 지켜보자', 이렇게 얘기했다면 6·26 국민 평화 대행진은 파열음을 낼 수도 있었다.

전두환의 계획은 영수 회담을 통해 통일민주당이 6·26 국민 평화 대행진에 참여하는 것을 막고 대행진의 전열을 흩트리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치 감각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김영삼이 재빠른 공격으로 전두환의 그러한 계획을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게 만든 것이다.

그렇지만 6·26 국민 평화 대행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김영삼과 김대중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다. 당시 두 사람은 직선제를 쟁취할 아무런 실질적인 방안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입지를 학생들의 폭력 투쟁으로 상실할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전두환과 민정당, 그리고 모모 신문도 마찬가지로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6·26 국민 평화 대행진이 얼마나 규모가 크고 격렬한가에 따라 자신들의 정치 운명이 판가름 날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6·26 국민 평화 대행진은 한판 '판갈이' 싸움이었다. 중국에서 잘 쓰는 사자성어로 말하면 건곤일척의 전쟁이었고, 일본식으로 얘기하면 진검 승부처였다. 평화 대행진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민권이 위대한 승리를 거둘 것인가, 군부 독재가 용기를 얻어 시간을 끌면서 다른 간특한 방안을 내놓을 것인가가 결판나게 돼 있었다.

24일에도 시위는 계속됐다. 서울, 광주, 여수, 전주, 남원, 원주에서 시위가 있었다. 전주 시위는 이날도 규모가 컸다. 25일에는 광주, 여수, 전주, 익산, 부산, 안동, 제천, 원주, 인천 등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전주, 익산의 시위는 규모가 꽤 컸고 부산에서는 연합 시위가 벌어졌다. 물론 서울에서도 시위는 계속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25일 일본 오사카에서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대회가 조총련 주최로 열렸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마흔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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