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참가 중인 문재인, 안희정, 이재명(가나다 순) 후보 측에 세 가지 질문을 공통으로 던졌습니다.
1) 000의 사건 세 가지, 2) 000을 만든 세 사람, 3) 000이 바꿀 미래 세가지.
후보들이 보내온 답변에 맞춰 한 후보당 1-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두번째로 이재명 후보의 '세 가지'입니다.
이 후보는 이후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로 활동하고, 성남시장이 되고, 지금은 대선 후보로 출마했지만, 소년공 시절을 그는 잊지 못합니다. 이재명 후보처럼 어린 시절 극도의 가난을 겪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기업 CEO가 되고 정치인으로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계급 배반'으로 어린 시절의 경험을 풀었다면, 이재명 후보는 여전히 '나는 노동자 출신'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는 듯 합니다. 2017년 대선 출마 선언 장소로 소년공으로 일했던 성남 오리엔트 시계 공장을 택한 것도 이런 의식의 반영입니다.
이 후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육신을 낳아주신 어머니가 계시다면 일베였던 대학생 이재명을 바꾼 사회적 어머니"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5.18의 진실에 대해 뒤늦게 알게 된 것은 그 정도로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라고 합니다. 어린 이재명은 당시 방송과 신문을 보고 "광주사태는 북한군과 연계된 반국가 세력이 폭동을 일으켜 경찰과 군인을 쏴 죽인 사건이다"라고 얘기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학에 가서 학교 선배들이 제 한 몸 아끼지 않고 뿌린 대자보와 유인물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되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 후보는 이번 대선 경선 예비후보를 등록하고 현충원에 참배한 후 가장 먼저 국립 5.18민주묘지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이 후보가 세 번째로 꼽은 사건은 2014년 4월 16일 벌어진 세월호 참사입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야권 정치인들은 대다수가 고개를 숙이며 '책임'과 '반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후보 역시 "죄송하다. 정말 죄송하다. 저도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국가의 가장 큰 의무는 국민의 목숨을 지켜주는 일이다. 한 번의 일이 벌어지면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했어야 한다"며 "우리가 남의 일로 외면하고 관심 갖지 않았기 때문에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제 잘못이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후보는 한발 더 나아가 극우 세력(정치인, 언론, 단체)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비난 여론'을 쏟아낼 때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억투쟁'을 이어갔습니다. 이 후보는 지난해 초 성남시청사에 게양된 세월호기를 내려 달라는 당시 새누리당 시의원의 요구에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게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아직도 게양하고 있습니다. 성남시청 청사 벽면에는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세월호 기가 걸려있습니다. 성남시청 광장에는 단원고 희생 학생 가족이 진도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삼보일배를 하는 긴 여정을 함께해온 세월호 모형배가 설치돼 있습니다. 이 후보는 "세월호가 인양되고 있지만 진실이 밝혀지고 책임자가 처벌받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다잡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 후보는 이재명을 만든 '세 사람'으로 어머니, 노동법연구회, 김혜경(부인)을 꼽았습니다.
이 후보는 본인에게 '어머니는 하늘'이라고 표현합니다. 대선 출마선언에서도 이런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솜털이 남아있는 고사리 손 아들을 시커먼 고무공장까지 바래다 준 어머니는 밤 열시가 넘어 퇴근 하시고도 철야를 마치고 새벽 4시가 되어야 귀가하는 어린 아들을 기다려 주셨습니다. 고된 밭일로도 자식들 먹여살리기 어려워 약장사에 밀주까지 팔면서 힘겨운 삶의 무게에 부엌 구석에서 몰래 흐느끼시던 어머니, 고무공장 샌드페이퍼에 깎여 피가 배어나오는 제 손바닥을 보고 또 우셨습니다. 단칸방 가족들이 잠들었을 때 마당에 물통을 엎어놓고 공부하던 저를 보고 우셨고 장애와 인생을 비관해 극단적 시도를 두 번이나 하는 저를 보고 또 우셨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키운 아들이 사법시험에 합격하자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판검사가 되길 바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후보는 독재정권의 주구 노릇을 할 수 없고 노동현장의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기 위해 성적이 미치지 못해 판검사를 못하게 됐다고 거짓말을 했고, 아들의 거짓말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선택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고 합니다.
이 후보가 두 번째로 꼽은 사람은 '노동법연구회'를 함께한 동료 법조인들입니다. 이 후보는 1987년 사법연수원 동기들과 함께 '노동법연구회'라는 이른바 '언더서클'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폭압 정치로 국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고, 급기야 그해 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발생해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됐습니다. 하지만 법조계처럼 보수적인 집단에서, 더군다나 법관 임명을 앞둔 사법연수원생들이 대놓고 '노동법'을 공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이 후보와 연구회를 함께한 이들로는 정성호 의원, 문병호 의원, 최원식 전 의원 등이 있습니다. 정 의원은 이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정 의원은 당시에 대해 "이 시장의 연수원 성적은 좋은 편이었지만 그는 판검사가 아니라 변호사를 선택했다. 노동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돕겠다고 했다. 입신양명보다 세상을 위해 기여하고자 했던 정의감과 용기가 지금의 이재명을 만들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예정되어 있던 다섯 번의 맞선 중에서 세 번째로 만난 사람이 지금의 아내였고, 첫눈에 반했습니다. 빨간 원피스를 입고 나왔는데 제 생에 그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두 번째 보던 날 집 앞에 가서 '바다나 갑시다'로 시작해 다음 해 봄에 결혼했습니다."
이재명 후보가 밝힌 다소 손발이 오그라드는 부인과의 첫 만남입니다. 이 후보가 세번째로 꼽은 사람은 부인 김혜경 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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