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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 거짓말, 버티기…전두환·박근혜는 닮은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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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 거짓말, 버티기…전두환·박근혜는 닮은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52> 6월항쟁, 서른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1987년 대선 당시 양김 분열, 한국 정치에 두고두고 악영향

프레시안 : 6월항쟁과 이어지는 광주항쟁 진상 규명 및 5공 비리 청산 작업이 1988~1989년에 일부 이뤄졌다. 물론 매우 부분적으로 이뤄졌고 한계도 뚜렷했지만, 그 정도라도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1988년 4·26총선 결과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4·26총선에서 5공 청문회, 광주 청문회에 이르는 과정을 짚어봤으면 한다.

서중석 : 총선으로 가보자. 1987년 대선이 끝나고 1988년 총선으로 가게 됐을 때 운동권 세력이나 야당 정치인들 사이에서 '늦었지만 이제라도 두 당(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은 합당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됐다. 김대중 자서전에는 문익환 목사가 평화민주당 당사에 찾아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합당을 재촉했다고 나와 있다.

두 당이 합당을 했더라면, 1987년 대선에서 크게 노출된 지역주의를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었고 민주화 운동 세력을 다시 통합할 수 있었다. 또한 1990년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민자당)이 출현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당이 통합했다면 민정당을 이길 수 있는 단일 거대 야당이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대선에서 이루지 못한 민주화가 강력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다.

또 생각해야 할 것은 김영삼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김영삼계가 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어진 그쪽에 계속 남아 보수 세력화했다는 점이다. 김무성도 그중 한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면서 새누리당 쪽에서 경상도를 완전히 장악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최근에 와서야 경남 일부 지역과 부산에서 지금의 민주당 쪽이 간신히 교두보를 마련했다. 노무현 정권 때에는 노무현이 영남 사람인데도 그걸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지역색이 단단히 굳어지는 데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이 두 당의 통합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 하나의 요인이었다.

선거구 획정을 놓고 벌어진 각축과 양김의 엇갈린 주장

ⓒ오월의봄
프레시안 : 4·26총선,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이 총선에서는 선거구가 쟁점이 됐다. 소선거구제로 할 것인가 중·대선거구제로 할 것인가, 이것이 중대 쟁점이었다.

민정당의 경우 이종찬 등 일각에서는 1선거구 2인 선거 제도를 주장했다. 유신 체제나 전두환·신군부 정권 때 있었던 건데, 이때는 좀 생각을 달리한다고 하면서 중선거구제라고 볼 수 있는 이 주장을 했다. 그러나 노태우 쪽, 즉 청와대 쪽은 소선거구제를 주장했다. 통일민주당은, 대통령 선거 결과가 잘 보여주듯이 중·대선거구제가 자신들에게 유리해서 그랬겠지만, 중·대선거구제를 주장했다. 통일민주당과 달리 평화민주당은 소선거구제를 강력히 주장했는데, 이것 또한 대선 분석 결과와 연결돼 있었다.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소선거구제로는 충청도 독식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선거구제를 주장했다.

논란 끝에 4당 총무가 농촌에서는 한 사람, 대도시에서는 두 명 내지 세 명을 뽑는다는 1선거구 1~3인제에 어렵게 합의했다고 이종찬 회고록에 나온다. 이 제도가 여러모로 좋았던 것 아닌가 싶다. 장점으로는 지역주의를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요새 많이 등장하는 표현이지만 소수 세력을 대변하는 정당의 역할이 커질 수 있었다. 일본 참의원 선거 제도도 기본적으로 그렇게 돼 있지 않나. (일본 참의원 선거의 경우 기본적으로 중선거구제지만 1인 선거구도 일부 있다. 인구가 적은 현의 경우 한 개 현에서 또는 두 개 현을 합쳐 1명의 당선자를 뽑는다. '편집자')

그런데 이종찬 회고록에 따르면 갑자기 김영삼이 김대중의 소선거구제로 기울면서 상황이 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소선거구제가 탄력을 받았고, 노태우도 '잘됐다' 싶어 소선거구제로 마음을 완전히 굳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김영삼의 태도 변화 때문에 소선거구제로 가게 됐다는 게 이종찬 주장이다. 이렇게 소선거구제로 합의됐지만 선거 운동 방법과 비례 대표 분배 방식에서 이견이 해소되지 않아 결국 1988년 3월 8일 새벽에 여당 단독으로 선거법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김영삼 회고록과 김대중 자서전에 이 부분이 상당히 다르게 나온다. 그게 참 재미난데 한 번 보자.

프레시안 : 김대중은 어떤 주장을 폈나.

서중석 : 김대중 자서전에는 김영삼이 1987년 12월 30일 송년 간담회를 열 때부터 '통합하자'고 하면서 포문을 열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자신은 야권 통합을 할 때 소선거구제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썼는데, 이건 꼭 잘못된 말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무슨 얘기냐 하면, 야권 통합이 이뤄질 경우 한국에서는 소선거구제가 야권에 꼭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근래 얘기가 적잖게 나온 소수 세력의 역할 확대, 그 부분만 빼면 그렇다. 과거에 신민당, 민주당이 다 그런 식으로 했다. 영호남을 각각 독식하는 지역주의만 제거할 수 있다면 소선거구제가 꼭 나쁜 건 아니다. 다시 말해, 합당하면 소선거구제로 해도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역주의에 근거해 할거하는 상황에서, 다시 말해 김영삼 쪽과 김대중 쪽의 합당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소선거구제는 지역주의를 강화하는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이 부분을 사람들이 상당히 복잡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서 찬찬히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튼 김대중은 중·선거구제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김영삼이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이때는 김영삼이 총재직에서 사퇴했을 때인데, 통일민주당은 이를 거부했다. 통일민주당은 통합 논의를 할 때 계속 중·선거구제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자 보다 못한 민정당이 국민의 뜻이라며 소선거구제를 들고나왔고 그래서 소선거구제가 됐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 김영삼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주장을 내놓았나.

서중석 : 김영삼 쪽 주장을 보자. 1988년 1월 6일 김영삼의 총재직 사퇴 여부를 묻는 통일민주당 임시 전당 대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김영삼을 지지하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나왔다. 그러자 김영삼은 평화민주당을 포함한 모든 야권 세력이 이제 통일민주당의 깃발 아래 다시 모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건 평화민주당 쪽에서 들으면 아주 기분 나쁠 수 있는 얘기였다. 당 대 당 통합이 아니라 흡수 통합을 주장한 것 아닌가.

김영삼은 그해 2월 8일 야권 통합을 위한 결단으로 자신이 전격적으로 총재직에서 사퇴한다고 밝혔다. 이때 사퇴한 건 사실이다. 그러면서 통합 논의의 쟁점이 '김대중도 평화민주당 총재직에서 사퇴하라'는 문제와 함께 소선거구제 도입 여부로 압축됐다. 김영삼은 이러한 상황에서 "2월 23일 김대중을 만나 그의 주장인 소선거구제를 수용해주었다", 딱 이렇게 썼다. 그런데 그렇게 수용했는데도 통합 협상은 금방 벽에 부딪혔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때문에 벽에 부딪혔다는 게 김영삼 쪽 주장이다.

(김영삼에 이어 김대중이 1988년 3월 17일 평화민주당 총재직에서 사퇴했다. 이 시기에 양김이 자기 당 총재직에서 사퇴한 배경은 1987년 대선에서 양김 분열로 야권 패배를 자초한 것에 대한 거센 비판 여론이었다. 물론 일시적으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일 뿐이었다. 4·26총선 직후 양김은 자기 당 총재로 복귀했다. '편집자')

▲ 4·26총선 결과를 보도한 동아일보 1988년 4월 27일 자 1면. ⓒ동아일보


지역주의가 기승을 부린 4·26총선…평민당, 소선거구제에 힘입어 2당으로 부상

프레시안 : 4·26총선 결과는 어떠했나.

서중석 : 선거 결과 민정당은 지역구 87석에 전국구를 합쳐서 125석, 평화민주당은 지역구 54석에 전국구를 합쳐서 70석, 통일민주당은 지역구 46석에 전국구를 합쳐서 59석을 차지했다. 이 선거에서 이철승, 민한당 총재 유치송, 국민당 총재 이만섭 등이 낙선했는데 그런 점에서도 이변이 있었다.

이 선거에서 평화민주당이 제2당이 됐지만 득표율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전국 득표율을 보면, 민정당은 33.9퍼센트로 125석이나 획득한 반면 통일민주당은 23.8퍼센트를 득표했는데도 3등밖에 못했다. 그와 달리 평화민주당은 19.2퍼센트를 득표했는데도 2등을 했다. 4퍼센트포인트 넘게 통일민주당 득표율이 평화민주당 득표율보다 높은데도 그랬다.

이건 소선거구제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왜냐하면 김영삼을 지지하는 쪽은, 경상도 쪽이 특히 그랬는데, 민정당을 지지하는 쪽과 겹치는 데가 많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평화민주당은 광주, 전남북을 합쳐 37석 중에서 36석을 휩쓸어버렸다. 광주에서 평화민주당 지지율은 88.6퍼센트를 기록했다. 호남 지역 당선자 중 나머지 1명은 한겨레민주당 소속이었는데 곧 평화민주당에 들어갔다. 평화민주당은 서울에서 17명, 경기도에서는 1명이 당선됐지만 그 이외 지역에서는 전멸했다.

통일민주당은 부산 15석 가운데 14석을 휩쓸었다. 그러나 경남에서는 22개 지역 중 9개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호남을 제외하면 골고루 몇 석씩 차지했다. 평화민주당보다는 고른 분포를 보였다. 민정당은 대구 8석을 다 차지했고 경북 21개 지역 중 17개, 경기 28개 지역 중 16개를 차지했다. 즉 전라도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골고루 의석을 확보했다.

프레시안 : 1987년 대선과 마찬가지로 야권이 분열된 상태이기 때문에 여당이 무난히 과반수 의석을 확보할 것이라는 다수의 예측은 빗나갔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요소가 작용했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지역주의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지 않나.

서중석 : 이 선거에서는 1987년 대선 못지않게 지독한 지역주의가 쓰나미 현상처럼 유권자들의 마음을 쓸어 담았다. 대선과 총선에서 지역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린 데에는 박정희, 전두환·신군부가 장기 집권을 하고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 분배나 경제적 측면에서 특정 지역에 대단히 편중된 정책을 쓴 것이 직접적으로 작용했다. 그렇지만 장기간에 걸쳐 권위주의를 하는 동안 누적된 반공 냉전 의식 및 그것과 결합된 이기주의가 사회에 널리 퍼져 시민 의식 또는 공공 의식이 마멸된 것이 기본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그와 함께 김대중, 김영삼이 분열된 상태에서 소선거구제를 채택한 것이 또 하나의 구조적 요인이 됐다.

지역주의가 몰고 온 쓰나미 현상은 1987년 6월항쟁에서 보여줬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시민 의식을 삼켜버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쓰나미 현상은 권위주의 시대의 관권도 부분적으로 삼켜버렸다. 그래서 공무원조차 지방색에 따르게 하고, 1967년 6·8선거부터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던 선심 공약도 맥을 못 추게 했다. 오랫동안 선거판을 뒤흔들었던 금권 선거도 퇴색하게 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상한 방식으로 과거의 문제점을 제거한 면도 있다.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광주항쟁과 5공 비리 진상 규명 문제

프레시안 : 득표율은 물론 의석수에서도 야당이 여당을 앞선 건 이때가 처음 아닌가.

서중석 : 제일 놀라운 것은 이 선거 결과 여소야대 국회가 출현하게 됐다는 것이다. 여소야대 국회는 민주화를 추진하는 데 일정 기간 동안,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동력으로 작용했다. 새로운 여소야대 국회가 문을 열자마자 광주항쟁과 5공 비리의 진상 규명 문제가 최대 쟁점이 됐다. 1988년 6월 13일, 헌정 사상 최초로 청문회 제도 신설을 골자로 한 국회법 개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6월 27일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 조사 특위', 이게 광주 특위인데 이것과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 권력형 비리 조사 특위', 즉 5공 특위 등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그해 11월 3일, 5공 특위에서 전두환의 일해재단에 대한 청문회를 열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열린 청문회였다. 이날 청문회는 서울 시내 36개 대학에서 학생 1만여 명이 각각의 대학에서 전두환·이순자 체포 결사대 출정식을 열고 곳곳에서 격렬히 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진행됐다.

얼마 전만 해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위세를 자랑하던 장세동을 비롯한 전두환·신군부 정권 실세들과 정주영을 비롯한 재계 거물들이 줄줄이 청문회에 불려와 호통을 당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매일같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면서 청문회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MBC, KBS에서 생중계했는데 시청률이 각각 56퍼센트, 64퍼센트까지 오를 정도였다. 이건 두 달 전에 있었던 88올림픽 개막식 때보다도 높은 시청률이었다.

노무현 의원 같은 청문회 스타도 탄생했다. 정주영이 증언대에 서자 의원들은 갑자기 "증인님", "회장님" 하면서 굽실거렸다. 정경유착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러한 모습에 많은 국민이 분노했다. 그런데 바로 그 정주영이 초선인 노무현 의원에게 집중타를 맞고 말문이 막혔다. 정주영은 결국 바른말을 못해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 총칼로 권력을 훔치고 천문학적인 검은돈 문제를 일으킨 전두환·노태우가 함께 법정에 선 모습을 담은 경향신문 1996년 3월 12일 자 1면. ⓒ경향신문


증언대에 서긴 했지만 궤변과 변명만 늘어놓은 전두환

프레시안 : 광주 학살의 주범을 밝히고 전두환을 증언대에 세우는 문제 또한 초미의 관심사이지 않았나.

서중석 : 1988년 11월 18일 김대중의 증언을 필두로 광주 청문회가 시작됐다. 그러나 증인으로 소환된 전두환과 최규하는 출석하지 않았다. 광주항쟁 당시 국방부 장관, 육군 참모총장 등을 맡고 있었던 군 수뇌부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광주 청문회의 핵심은 전두환을 증언대에 세우는 일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전두환 일가족을, 거기에는 형제들은 물론 처남도 포함됐는데, 구속하고 장세동 등 전두환·신군부 정권의 핵심 실세들을 소환했다. 전두환 일가의 극심한 부정부패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끓어오르고 광주 학살의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는 요구가 거셌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제공한 선거 자금 등 정치 자금 액수를 들이대며 증언을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그해 11월 23일 전두환·이순자 부부가 정치 자금 139억 원 및 자택 등 수십 억 원을 국가에 헌납하고 백담사로 떠나는 것으로 낙착을 봤다. 현대판 귀양이었는데 전두환이 139억 원도 내려고 하지 않아, 이 사람은 항상 이런 식으로 돈을 안 내려고 버티는데, 청와대 측에서 50억 원을 보탠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에서는 전두환에게 해외에 나가라고 종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차라리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외국에는 나가지 않겠다"며 장기 외유를 강하게 거부했다.

전두환·이순자가 백담사로 떠나긴 했지만, 광주 학살 진상 규명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1989년 1월 광주 특위는 전두환, 최규하에게 동행 명령장을 전달했다. 그러나 전두환, 최규하는 이번에도 증언을 거부했다. 동행 명령장이 다시 발부됐지만 전두환 등은 계속 증언을 거부했다. 그런 속에서 1989년 12월 16일 노태우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은 전두환이 청문회에 나와서 1회 증언을 하되 녹화 중계하고 질의는 서면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1989년 12월 31일, 1980년대의 마지막 날인 이날 전두환이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예상대로 전두환은 1980년 당시 자신이 '광주사태'에 관여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강변했다. 정치 자금 문제에 대해 입을 열면 새로운 사태가 일어날 것이라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전두환 출석에 TV 시청률이 한때 81퍼센트까지 치솟았지만, 전두환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하자 시청률은 곤두박질쳤다.

(전두환은 이날 광주항쟁 당시 시민을 겨냥한 발포에 대해 "자위권 행사 문제는 초기에는 군인 복무규율에 따라 불가피한 상황 하에서 행사된 것으로 판단되며 현지 상황이 더욱 악화됨에 따라 (1980년) 5월 22일 자위권 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령부의 작전 지침이 지휘 계통을 통해 하달된 것으로 안다"고 이야기했다. "자위권" 운운한 전두환의 변명은 야당 의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평화민주당의 정상용, 조홍규 의원 등은 전두환의 발언대 앞으로 나아가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 밝혀라", "사람을 죽여놓고 자위권 발동이 뭐냐"고 고함쳤다. 민정당 쪽에서 이를 몸으로 가로막으면서 회의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또한 평화민주당 이철용 의원은 발언대로 돌진해 전두환의 팔을 붙잡고 "당신은 살인마야, 살인마 전두환"이라고 질타했다. 전두환이 시종일관 변명을 늘어놓고 퇴장하자 통일민주당 노무현 의원은 명패를 발언대 쪽으로 던졌다. '편집자')

프레시안 : 천문학적 규모의 부정부패, 뻔한 거짓말, 그러면서도 끝까지 버티는 전두환의 모습은 오늘날 박근혜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든다. 세간에서 박정희의 양자로 불린 전두환과 박정희의 딸 박근혜, 이 두 사람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의와 상식을 바라는 다수 국민의 속을 뒤집어놓는 행태 그리고 반성과 참회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 등 여러 면에서 닮은꼴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단죄는 김영삼 대통령 때에 이뤄졌다. 1995년 7월 검찰은 전두환 등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의 궤변은 수많은 국민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편집자') 그러나 그해 10월 노태우 비자금 계좌가 폭로되면서 11월에 노태우가, 12월에 전두환이 구속됐다. 그해 12월에는 5·18특별법, 공소 시효 특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12·12쿠데타 및 5·18사건 등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전두환은 무기 징역에 추징금 2205억 원을,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대법원은 황영시, 허화평, 이학봉에게 징역 8년, 정호용, 이희성, 주영복에게 징역 7년, 허삼수에게 징역 6년, 최세창에게 징역 5년, 차규헌, 장세동, 신윤희, 박종규에게는 징역 3년 6월형을 각각 확정했다. 12·12쿠데타(1979년), 5·17쿠데타(1980년) 등의 주역들에 대한 심판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1997년 12월 대선 직후 석방됐다. 이건 당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쪽 입장이었다고 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쉰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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