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입양됐던 입양인이 지난 21일 밤 경기도 일산의 한 아파트 건물 앞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고(故) 필립 클레이(42) 씨. 경찰 조사에 따르면, 그는 이날 밤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14층 높이에서 투신 자살했다. 열살 때 미국으로 입양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
필립은 미국으로 간지 27년 만인 2012년, 한국으로 추방됐다. 미국 양부모들이 필립의 시민권 획득 절차를 밟지 않아 시민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입양된 입양인이 시민권을 얻지 못해 본국으로 추방되는 경우는 필립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1년 이태원에서 노숙자로 발견됐던 팀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해 한국으로 추방된 케이스였다. (☞관련 기사 : 미국 입양된 아이가 34년만에 이태원 노숙자로 발견된 사연) 지난 2001년 입양과 동시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미국 시민권 취득에 대한 법이 개정됐지만, 그 이전에 입양된 아동들은 양부모가 시민권 취득 절차를 밟지 않아 '무국적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2012년 보건복지부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전쟁 이후 미국으로 입양된 11만 명의 입양인 중 1만8000여 명이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했다.
한국으로 강제 추방된 이후에도 필립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국적만 겨우 회복했을 뿐 한국은 그에게 '고국'이 아닌 '타국'이었다. 말도 모르고, 가족은 커녕 아는 사람조차 없는 한국에 그가 순탄히 적응하기를 기대하는 건 억지에 가까운 얘기다. 필립은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기도 했다. 출생가정, 입양가정, 성인이 되어 다시 찾은 한국사회까지, '세 번의 버림'을 받은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결코 많지 않았다.
필립의 장례식은 일산의 한 병원에서 치러졌다. 입양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 보건복지부 산하의 중앙입양원 등이 주관했다. '해외입양인연대' 에이케이 샐링 사무국장은 필립의 죽음에 대한 보도자료를 내고 "필립의 자살은 우리가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는 고통을 덜기 위해 홀로 죽는 것 이외의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고 애도했다. 그의 장례식엔 아이를 입양 보낸 한 어머니가 참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아픔을 입양인과 그 가족들은 자신의 것으로 깊이 공감하고 있다.
해외입양인들을 위한 비영리 민간단체인 '뿌리의 집'의 시몬 하우츠 국제협력팀장은 "입양인들 다수가 한국말을 모르기 때문에 홀트와 복지부 관계자들에게 24일 가진 필립의 추도식을 영어로 진행하거나, 영어로 통역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처음에는 거절당했다가 이후에야 승낙을 받았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시몬은 이 문제를 그저 "슬픈 이야기로만 접근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 이는 한국의 입양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 시몬은 입양인의 국적 취득 문제는 일차적으로 아이를 일단 입양 보내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의 입양기관과 한국 정부에 있다고 지적했다. 또, 자신의 국내 정치적 입지를 위해 이주자들의 해외 추방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은 트럼프 정부에서 제2, 제3의 필립은 계속 생겨날 수 있다.
"한국은 가장 오래된 입양 송출국 중 하나이지만, 입양에 대한 정책과 시스템은 매우 느리게 변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성인이 돼 한국으로 돌아온 입양인들의 목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당사자인 이들을 입양 정책 파트너로 인정해야 한다.
또 미국을 비롯해 한국 아이를 입양하는 입양 국가들도 왜 한국 아이를 입양하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한국은 더이상 자국의 아이를 키우기 어려울 정도의 저개발국가가 아니다. 2015년에도 여전히 300여 명의 아이가 해외로 입양됐다."
한국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부터 해외입양을 보내 2016년까지 16만6512명의 아동을 해외로 입양보냈다. 2010년까지만 해도 한 해 1000명이 넘는 아동을 해외로 입양보내다가 그나마 많이 줄어 2016년 334명의 아동이 해외로 보내졌다. 절대적인 숫자는 줄었지만, 비중은 여전히 전체 입양아동의 40%다. (보건복지부 통계) 반세기 넘는 시간 동안 해외로 축출된 아동은 '잊혀진 아이들'이자, '잊혀진 역사'였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