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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자 김대중, 민주주의의 적통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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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자 김대중, 민주주의의 적통을 열다 [김대중 자서전 서평] 1400쪽 분량도 모자란 '거인'의 삶
참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이 나왔다. 대통령 후보로만 27년, 그의 삶은 그 자체가 한국현대정치사였다. 그처럼 역사의 중심에서 일생을 보낸 사람은 격동의 한국현대사에서 다시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자서전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사당에 앉는데까지 9년, 1970년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무려 27년이 걸렸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 6년간 감옥에 있었고, 수십 년 동안 망명과 연금 생활을 했다. 대통령 후보, 야당 총재, 국가 반란의 수괴, 망명객, 용공분자 등 나의 호칭이 달라질 때마다 이 땅에는 큰 일이 있었다.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워낙 겪은 일이 많은 분인지라, 책의 분량이 만만치 않다. 1권과 2권을 합하여 근 14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김대중 대통령 자신의 구술을 바탕으로 경향신문 김택근 논설위원이 대표집필 했고, 김대중 대통령 자신의 검토와 수많은 관련인사들의 자문과 감수를 받았다고 한다. 가히 '정본 자서전'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 1권과 2권을 합하여 근 14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김대중 자서전>이 나왔다. ⓒ연합

김대중 대통령은 이 자서전을 통해 처음으로 당신의 어머니가 작은댁이었음을 고백했다.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정치인이 된 뒤에도 그는 이 문제 때문에 "많은 공격과 시달림을 받았지만 침묵"했었다고 말했다. 김대중은 이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고 다만 "하늘에 계신 어머니 당신이 이 세상에서 맺었던 모든 인연과 화해하셨을 것"이라는 표현으로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감싸 안았다.

그가 태어난 해는 1924년. 일제는 1944년부터 조선청년들에 대한 징병을 실시했다. "묻지마라 갑자생"이라는 말은 일제 때는 징병 1기로, 한국전쟁 때는 국민방위군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던 1924년 갑자년 생들의 고단한 삶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김대중이 바로 그 갑자생이다. 일제하에서 전쟁터에 끌려갈까봐 걱정하던 평범한 청년이던 김대중은 호적을 고쳐 징병을 모면했고, 그러던 사이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목포에서 사업을 하며 건국준비위원회와 진보적인 신민당에 잠시 몸담았던 김대중은 이 경력 때문에 평생 '용공분자'라는 비난과 의심을 수구진영으로부터 받아야 했다.

"김구, '좌우합작'에 뛰어들었어야…조봉암, 난국 돌파하는 요령 부족"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김대중이 살아오면서 직간접으로 접했던 수많은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이다. 특히 백범 김구와 조봉암에 대한 평가에서는 김대중의 삶의 자세가 묻어난다. 김대중은 '정치인' 김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김구 선생을 감히 평한다면 길이 빛난 독립투사였으며 절세의 애국자였지만 정치인으로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좌우 합작' 논의가 있을 때 선생은 그 속으로 뛰어들었어야 했다. 분단을 막아야 한다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했다. 그리고 신탁통치를 받아들여 3년이나 5년 후에 독립을 모색했어야 했다. 때를 놓쳐 남쪽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다고 결정되었다면 총선에 참여했어야 옳다고 본다. 김구 선생이 전면에 나서 총선에 참여했다면 소속 정당은 과반 의석을 확보했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이승만과 한민당은 궁지에 몰렸을 것으로 본다. 이것은 나만의 추측이 아니라 다시 민심의 도도한 흐름이었다." (1권 67쪽)

김대중은 "역사에 가정법을 동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지만"이란 단서를 달고 만약 김구가 5.10선거에 참여했더라면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이 땅에 반공을 빙자한 친일파에 의한 독재가 발붙이지 못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정치인' 김대중은 "정치인은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 상황이 나쁘면 최악을 피하고 차악을 택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정치인이란 현실을 살펴 미래를 향한 진리를 구하는 것이지 진리만 붙들고 현실을 도외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 정치인으로서의 내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김대중은 또 자신이 조봉암에게 과거 공산당의 핵심 간부였다가 전향한 조봉암이야말로 "국민에게 왜 공산당이 나쁜지를 알리는 적임자"라며 왜 공산당을 그만두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을 권유했던 사실을 고백했다. 이에대해 조봉암은 "김 동지 말이 맞긴 한데, 그럴 경우에 지지층이 이탈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했다. 김대중은 이렇게 썼다.

"나는 실망했다. 지도자라면, 적어도 조봉암 같은 큰 정치인이라면 국민을 위해 결단할 때 결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집결되는 표도 중요하지만 그 표에 대해서 할 말을 하는 그런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설사 그 표가 떨어져 나가더라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 후 선생이 간첩 혐의로 사형을 당했기에 더욱 아쉬웠다. 내가 아는 조봉암 선생은 인간미가 넘치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단지 난국을 돌파하는 요령이 부족했다." (1권 98~99쪽)

김구와 조봉암에 대한 평가를 보면 김대중이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남았는지가 분명해진다. 김대중은 이 험난했던 한국현대사에서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살아남았고, 마침내 평생의 소원인 대통령까지 되었다. 그는 "상황이 나쁘면 최악을 피하고 차악을 택"하는 인내와 "난국을 돌파하는 요령"을 김구와 조봉암의 좌절이라는 역사적 비극으로부터 배웠다. 정말 그는 친일파가 득세하여 반공을 내세워 독재를 일삼던 이 땅에서 김구와 조봉암처럼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꿈을 정책으로 집행해 볼 기회를 가진 정치인이었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방법에서는 유연한 실사구시"를 추구했다.

"87년 대선, 나라도 양보했어야…"

1970년대와 1980년대 청년 학생들은 김대중이 진보적이지 못하다고, 정치노선이 선명하지 못하다고 비난하거나 낮게 평가했던 적이 있다. 그 자신이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지난 일이지만 너무도 후회스럽다"라고 이 자서전에서 고백한 1987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보인 분열과 패배의 책임은 그에게 결코 벗겨지지 않는 멍에로 남아있다. 한 때 열심히 운동하던 사람들 중에도 김대중이 싫다고 신한국당이나 한나라당으로 가버린 자도 한둘이 아니다. 특히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이 5.16 군사반란의 '원흉' 김종필과 손잡았을 때, 진보진영의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병 환자' 김대중에게 손가락질을 해댔다.

한 사람의 삶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어떻게 살아왔나보다 어떻게 죽었나가 그의 삶의 색깔을 보다 분명히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수없이 타협하고 돌아가야 했던 김대중의 삶은 어쩌면 2009년 8월의 그의 '전사'가 아니었으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칙을 져버린 권모술수에 능한 한 정치인의 삶으로 저평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등장 이후 민주주의 위기, 남북관계의 위기, 서민경제의 위기 등 3대 위기가 닥치고, 급기야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늙고 병든 김대중은 뜬구름 잡는 우아한 얘기만 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2권 585쪽)라는 한마디는 참으로 무게가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입원하기 전까지 두 달 동안 이 땅에서 90을 바라보는 노인 김대중만큼 열심히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과 맞장을 뜬 사람은 없다. '행동하는 양심'이었던 그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결국 악의 편이라며, 하다못해 바람벽에 대고 욕이라도 하라며 자신보다 젊은 모든 사람들을 독려하다가 지쳐 쓰러졌다. 김구와 조봉암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민주주의 전선에서 쓰러진 것이다.

눈물 많은 정치인 김대중

김대중은 눈물이 많은 정치인이었다. 1987년 10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처음으로 망월동 묘지를 방문하여 광주 유가족들과 부둥켜안고 통곡했고, 1994년 1월 문익환 목사의 빈소에서 오열했고,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울음을 터트린 것은 필자의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이 자서전을 보니 그 때 이외에도 김대중은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을 때, 함께 사고를 당한 택시기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고, 납치사건에서 살아 돌아와 기자회견을 하며 눈물을 흘렸고,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대전교도소에 있던 큰아들 홍일이 보낸 편지를 받고 눈물이 앞을 가려 몇 시간 동안 봉투를 어루만지기도 했다. 어디 김대중만 울었었나, 그는 지지자들의 눈물을 타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 특히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 그의 지지자들은 슬픔을 넘어 절망의 눈물을 흘렸고,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을 때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에서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오열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
"한여름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막 퇴근한 가장처럼"

김대중 자서전은 모두 2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권은 대통령이 되기까지, 2권은 대통령 취임이후 서거까지의 기간을 담았다.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워낙 오랜 기간 한국현대사의 한복판에 있었다보니 1400페이지라는 적잖은 분량도 그가 겪은 일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로만 27년을 보냈는데, 27년이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역사가 가장 긴 단체인 임시정부의 활동기간과 일치한다. 1924년 출생부터 1997년 말의 대통령 선거까지 70년이 넘는 기간을 담은 1권은 호흡이 대단히 빠른 반면, 대통령 재임기간 5년을 500여 쪽 이상 할애한 2권의 호흡은 1권과는 전혀 다른 책이라 할 만큼 좀 쳐지는 느낌이 든다. 2권에 서술 된 사건이나 내용은 '일지'라 할 만큼 여러 가지 일을 빠짐없이 담다보니 너무 번잡해져버렸다. 집중과 선택의 아쉬움이 남는다. 1권의 경우 김대중만이 증언해 줄 수 있는 흥미로운 사건들이 대단히 많은데, 너무 호흡이 빠르게 처리된 점이 아쉽다. 이것은 어쩌면 현대사학도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일반 독자들이 책을 읽기에는 1권은 아주 잘 쓰였다. 한국현대정치사의 큰 흐름의 여운을 남기면서 빠르게 전개된다. 특히 1973년 납치사건에서 살아 돌아와 귀가하는 과정을 한 단락으로 묘사한 부분은 참으로 압권이다. "대한민국, 한여름 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막 퇴근한 가장처럼."

모든 자서전에서 똑같이 마주하게 되는 문제이지만, 당사자가 말하고 싶어 하는 문제와 독자나 연구자들이 알고 싶어 하는 문제가 일치하는 법은 없다. 아무리 솔직하고 자세한 자서전도 감추거나 빠트린 것이 있다. 여기에는 의도적으로 감춘 것도 있을 것이고, 당사자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언급하지 않은 것도 있을 것이다. 자서전의 집필자인 김택근 논설위원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집에서 청소하는 사람이나 밥하는 사람이나 모두 20년 이상 DJ 곁을 머물던 이들이다. 사람을 내치지 않더라"라고 썼지만, 늘 감시와 회유와 공작의 대상이 되었던 김대중의 정치적 동지들 중에는 김대중에 의해서 내쳐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갈등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권노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1997년 말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외환위기를 불러온 책임을 물어 재벌개혁과 관료개혁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당선자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 왜 원래 구상했던 재벌개혁과 관료개혁에서 멀어졌는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킬 때 대중들의 가장 적극적인 호응을 끌어낸 예비군 폐지문제를 왜 대통령이 된 뒤 안보 환경이 1971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거론조차 안 했는지 아쉽게도 아무런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서자'로 태어나 민주주의 '적통'을 세운 거인의 삶

나는 인권 대통령 김대중의 주요업적 중의 하나로 그가 2001년 8월의 한국-베트남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월남전 참전과 관련,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사과한 것을 주저 없이 꼽는다. 그런데 자서전에는 1998년 정상회담 당시 불행한 과거사를 한국 대통령으로서 처음 언급한 사실만 기록돼 있을 뿐,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이 크게 여론화된 뒤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에 정식으로 사과한 일이나, ODA의 자금으로 민간인 학살 지역 40여 곳에 학교를 지어준 일은 빠져있다. 또 2002년 10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문제가 불거졌을 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인권대통령으로서는 뜻밖에도 양심적 병역 거부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한 일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런 사안들은 자서전이 아니라 평전이 쓰여질 때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는 대목인데, 당사자의 입장을 들을 수 없는 점이 아쉽다.

김대중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거인이었다. 민주주의는 그의 일생을 관통한 신념이요 가치였다. 그가 동구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원인을 사회주의가 잘 못 돼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 것은 참으로 김대중다운 탁견이라 할 수 있다. 김영삼에게 민주주의란 대통령이 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면, 김대중은 "민주주의가 후퇴한다면 나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라는 말을 삶과 죽음을 통해 보여주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제 김대중이 남긴 역사와 유지를 떠나서는 이야기 할 수 없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란 분단과 친일파의 득세로 이지러진 민주주의를 바로 잡아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자'로 태어난 김대중은 이 힘겨운 여정에서 민주주의의 '적통'을 확립했다.

▲ 서자로 태어나 민주주의의 적통을 확립한 김대중 전 대통령. 그는 2009년 8월 영면에 들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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