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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공론화,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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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공론화, 그 후 [초록發光] 탈핵·에너지 전환으로 향한 문, 열쇠는 참여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은 사회구조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그에 따라 이른바 전문가나 과학기술관료들이 사회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정책결정에 시민들이 참여하기 어렵다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에서 다양한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는 이전에 없었던 독특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정부의 공론화 결정에 대한 의문, 진행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가지 문제점, 그리고 큰 폭으로 벌어진 시민참여단의 결론 등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탈핵운동 진영과 원자력 산업계의 입장과 논리들이 다각도로 드러났고, 주장하는 내용은 구체화 되었으며, 원하는 목표는 명확해졌다. 더불어 각 진영은 자신들과 상대방이 처한 위치, 가지고 있는 능력, 혹은 함께하는 세력이나 동지들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특히 탈핵 진영은 내부적으로 공론화와 탈핵에 관한 다양한 의견과 관점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시민들에게 핵발전소 건설이 새로운 이슈로 부각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탈핵운동 진영과 원자력 산업계가 아니라,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신고리 5, 6호기가 이렇게 뜨겁게 논란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원전 노동자와 원전학계, 원자력 산업계, 건설재개를 원하는 지역민, 심지어 자유한국당까지 나서서 신고리 5, 6호기와 관련해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적이 있었던가? 언론에서 이렇게 많은 횟수로 보도해 준적이 있었던가? 원전업계의 반응과 언론보도는 탈핵 진영의 입장에서 본다면 노이즈 마케팅에 해당하는 것일 수 있지 않을까? 긍정적이진 않지만, 이런 것들이 신고리 5, 6호기를 논쟁의 중심에 올려놓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여간 공론화가 진행되는 세달 동안, 이전의 탈핵 진영에서 진행해왔던 모든 액션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게 핵발전소 문제가 시민들에게 노출되었다. 다양한 정보와 지식들이 체계화 되었고, 그림과 도표 등 구체적인 형태로 제공되었다. 대단한 학습의 효과까지는 기대하지 못하더라도, 시민들의 주목을 끌기에는 충분했으며, 일부에서는 공론화라는 절차적 참여민주주의·숙의민주주의가 새로운 논쟁의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참여단의 결론과 상관없이, 또한 어떤 평가와 분석과도 상관없이 계속되는 질문이 있다. 그 질문은 신고리 5, 6호기를 넘어 '탈핵·에너지 전환은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1년 전만 해도 우리는 탈핵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정부가 들어설 것이라 상상할 수 있었을까? 이 정권에서 탈핵, 혹은 에너지 전환이 가능하다면 정권이 또 바뀌었을 때 여전히 탈핵·에너지 전환이 가능할까? 탈핵·에너지 전환은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

그 해답은 여전히 시민들의 요구와 역량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전국적 사안으로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라는 과정을 경험한 정부에서는 지속적으로 공론화라는 형태, 혹은 그와 비슷한 숙의민주주의 절차를 다양한 과학기술 정책에 적용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산업부는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를 연내 출범시키고자 준비하고 있다. 물론 공론화가 만능이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로서, 절차적으로나마 숙의민주주의를 시도하려는 노력은 긍적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정부가 이런 절차적 시민참여를 시행하면 광역시도나 기초지자체에서도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에너지 전환, 지역에너지와 관련해 서울, 경기, 충남, 제주, 대구, 안산 등 시·도와 노원구, 광산구 같은 지방정부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시민참여 절차들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신재생에너지 확대 방안, 민관 거버넌스 형성으로 시민참여 확대, 에너지협동조합 설립으로 에너지 시민 역량 강화 등 에너지 전환 모범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례들은 후발주자인 부산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확산될 가능성 역시 높다.

탈핵·에너지 전환을 위한 시민참여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지역에서, 바닥에서,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작은 곳에서 진행되는 온갖 시민참여 제도에 지금부터 '내'가 참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직접 참여해서 다른 의견을 듣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논쟁을 일으키고, 기존 프레임을 흔들어야 한다. 시민참여 제도가 이번 공론화처럼 문제가 많다면 문제가 많음을 알리고, 갈등을 드러내고,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시민참여는 '참여'로 이루어진다. 숙의민주주의는 어쩌면 더 많은 논란과 논쟁, 갈등을 동반하면서 진행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시민의 역량은 커지고 숙의민주주의도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인정하는 합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탈핵 진영에서는 오래전부터 시민들이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탈핵을 원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했고, 절차적으로도 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제도화하기를 주장했다. 이제 그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형식적이고 통과의례적인 제도가 되어 면죄부를 줄 것인지, 정책 결정에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진정한 기회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이제 우리가 만들면서 걸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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