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환경운동이 민주화운동 속에서 발전해온 것은 잘 알려진 터, 탈핵운동도 예외는 아니다. 1987년 이후 30년 만에 이뤄진 탈핵 선언은 오랜 기간 싸워서 쟁취해낸 에너지 민주주의의 표상이다. 하지만 <1987>이 보여주지 않지만 체험으로 알고 있듯이, 광장의 열기가 식어 가면 민주주의도 후퇴한다. <1987>은 감동적이지만 역사 속의 1987년 이후를 되돌아보면 실망과 냉소가 적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미 열기가 식고 있는 2017년 탈핵 선언은 30년 뒤 탈핵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서사로 남을 수 있을까?
1987년, 원전 국산화의 안전성 논란에서 반전반핵까지
잠시 탈핵의 시계를 1987년 즈음으로 되돌려본다. 대중의 기억 속에 남은 반핵운동은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이겠지만 1980년대 후반 반핵운동의 지평은 생각보다 넓었다. 1985년 영광 주민들의 피해보상운동으로 물꼬를 튼 반핵운동은 1989년 핵폐기장 부지선정을 반대한 영덕, 영일(포항), 울진을 거쳐 이듬해 안면도로 이어졌다. 월성, 고리 등 원전 주변지역에서는 피해보상과 함께 중수 누출, 방사성폐기물 관리가 쟁점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반핵운동이 지역주민의 반대운동으로 제한된 것은 아니었다. 단적으로 원전 11, 12호기(영광 3, 4호기)는 안전성 논쟁과 5공 비리가 맞물리면서 국회 안팎에서 논란이 되었다. 영광 3, 4호기는 원전 국산화 계획에 따라 컴버스천엔지니어링(combustion engineering)과 공동설계를 하게 되었는데, 기존 모델을 축소설계한 것이 문제였다. 축소설계 모델에 대한 실증 실험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평민당을 비롯한 야당은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컴버스천엔지니어링과의 계약이 뇌물 수수 때문이 아닌지 추궁했다. 원전 안전성 논란은 원전 노동자들의 피폭 문제와도 연결되었다. 한때 반핵운동의 선전물에 심심치 않게 등장했던 대두아는 당시 피폭 노동자의 아이 사진이었다. 다른 한편에선 "반전반핵"이 외쳐졌다. 비단 반미운동, 통일운동만의 요구는 아니었다. 환경운동연합의 모태가 된 공해추방운동연합 역시 반핵운동을 반전평화운동과 연결시켜 핵무기 철수, 감축을 강하게 주장했다. 1989년 공해추방운동연합이 펴낸 "이땅의 반핵운동"은 당시 반핵운동의 주장을 압축하고 있는데, 반핵평화운동이 "남북한 상호불가침 선언을 쟁취해내야 할 것이며, 휴전협정을 폐기하고 평화협정을 쟁취해야할 것"을 주창했다. 그렇게 반핵운동은 피해보상과 피폭에서 부지선정, 안전성, 비리, 핵무기 반대를 횡단했다.
그러나 반핵운동의 외연 확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원전 국산화를 둘러싼 논란은 점차 비리에 초점이 맞춰졌고 미국 국립연구소의 안전성 보고서가 제출되면서 일단락되었다. 반핵운동은 안전성 논쟁을 이끌어갈 대항전문성을 보유하지 못했고, 생태윤리적 문제제기로는 공학지식의 방벽을 뚫지 못했다. 또한 반핵운동은 값싼 전기소비사회에 대한 사회적 열망이 빠르게 확산되는 것에 대응하지 못했다. 연속적인 전기요금 인하로 수출산업을 위한 가격보조가 확대되었다.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상승하면서 이른바 마이카, 마이홈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고 시민들의 에너지 소비도 날로 늘었다. 그만큼 전기요금 인상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커졌다. 원전의 국산화, 표준화 이전인 만큼 원전의 경제적 비교우위는 더욱 더 불확실했지만 어느새 원전은 값싼 전기공급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간주되었다. 비슷한 시기 한반도 비핵화선언과 함께 반핵무기운동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핵무기 철수를 요구했던 반미운동, 통일운동은 핵무기의 폐기를 추구하는 평화주의 운동으로 가는 문턱에서 멈춰섰다. 이후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반핵무기운동은 설 자리를 잃었다.
반핵운동의 흐름에 비춰보면,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반핵운동의 공간이 위축되는 상황에서 분출된 강렬한 저항사건이었다. 안면도 이후 반핵운동의 지역화는 가속화되었다. 다만 지역반핵운동은 격렬하게 타올랐다. 그렇게 굴업도, 부안을 거쳤고, 에너지 민주주의의 싹을 지켜냈다. 그러나 지역으로 고립된 반핵운동은 참여와 보상이 결합된 새로운 추진 전략 앞에 무기력했다.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부지선정을 계기로 반핵운동의 암흑기가 찾아온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2018, 탈핵 선언 이후의 에너지 민주주의
주지하듯이, 반핵운동이 활력을 되찾은 것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의 일이다. 삼척, 영덕, 밀양 등지에서 다시 에너지 민주주의를 향한 싸움이 불붙었다. 원전 국산화에서 독자 모델로의 전환점에 위치한 APR-1400 모델인 신고리 3, 4호기의 시험성적서 조작 사건 등 원전 비리, 안전성 문제도 불거졌다. 그리고 2016년 경주 지진을 거치며 탈핵은 마침내 대선 공약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촛불시민은 대선 공약을 탈핵 선언으로 전환시켰다.
탈핵 선언 이후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일례로, 평가가 엇갈리지만, 탈핵의 시각에서 2017년을 떠올릴 때 탈핵 선언과 함께 가장 오랜 기간 대중의 기억 속에 남을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가 추진되었다. 기술관료와 원자력전문가가 독점해온 원자력 정책결정 과정은 점점 더 개방되고 있다. 철옹성처럼 남아있던 원자력 연구개발 분야도 일부 개방되어 최근 파이로-고속로 사업 재검토위원회가 꾸려졌다.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탈핵진영에서 활동하던 전문가가 임명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변화다. 원자력 안전규제가 원자력 기술개발, 원전 진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다만 낙관하기에는 이르다. 파이로-고속로 사업 재검토위원회는 시작부터 불공정성 시비가 일고 있다. 재검토위원회는 인적, 물적 불균등성을 감안하지 않은 채 반대측에도 단기간에 방대한 양의 자료를 검토하여 답변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하여 논란을 사고 있다. 원자력안전위원회 역시 줄기차게 요구되었던 조직의 독립성 자체가 강화된 것은 아니다. 모습을 드러낸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재생에너지 3020 계획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제약이 있겠으나 대규모 재생에너지 프로젝트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또한 값싼 전기소비에 대한 기대, 에너지 전환 비용에 대한 외면도 계속되고 있다.
나아가 탈핵운동이 1987년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는지 다각도로 따져봐야 한다. 탈핵운동의 진전과 성과를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탈핵의 담론 지형은 1987에 마주했던 거대한 장벽을 뚫지 못한 듯하다. 탈핵 정책과 원전 수출을 동시에 추진하는 문재인 정부의 이중적 탈핵 정책은 탈핵이 경제주의적인 에너지산업육성의 기조 아래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수출산업이 흔들릴 때, 재생에너지산업의 경쟁력 확보가 지연될 때도, 탈핵은 공고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 한편 북핵과 핵잠수함 건조는 한층 더 복잡한 사안이 되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362사업"을 통해 핵잠수함 도입을 시도한 바 있는데,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동아시아 지역의 군사주의 강화가 맞물리면서 "핵없는 세상"을 꿈꾸는 평화주의가 설자리는 더욱 더 협소해졌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느리더라도, 때론 뒷걸음질 치더라도 앞으로 나아간다. 민주주의가 배제된 목소리를 끊임없이 정치의 장으로 불러내는 근대의 기획이라면 말이다. 관건은 배제된 목소리를 웅성거림으로 모아내는 일이다. 정치적 참여를 확장시킬 새로운 정체성이 출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 중요한 까닭이다. 에너지원의 교체를 넘어서 에너지 민주주의를 갈망한다면, 탈핵 선언 이후 에너지 민주주의가 발을 내딛어야할 곳도 여기다. 따라서 민주적 스펙터클로 인해 역설적으로 탈핵의 국지화, 지역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예의주시해야한다.
나아가 값싼 전기소비의 불가능성을 직시하고 사회생태적 공정성의 확대를 모색하면서 에너지 수요의 축소를 지향하는 탈성장 전략을 찾아야한다. 수출주의에 입각한 성장전략은 평화주의를 토대로 한 공존전략으로 대체되어야할 것이다. 에너지 민주주의의 미시적 실험과 에너지 민주주의를 위한 거시적 기획은 분리될 수 없다. 쉽지 않지만, 다양한 운동, 여러 가지 목소리가 마주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질 때 배제된 존재를 위한 에너지 민주주의도 확장될 수 있다. 그렇게 탈핵 선언이 능동적 에너지 시민들의 자기 통치의 확장과 연결될 때, 탈핵 선언은 30년 뒤 "핵없는 세상"을 향한 에너지 민주주의의 서사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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