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89년에 대학에 입학한 89학번입니다. 89학번들은 1991년에 3학년이 되어 학생회를 맡게 됩니다. 사회부장이었던 저는 정기적으로 정치 토론회을 열고, 거리 시위가 있는 날은 시간과 장소를 비밀리에 과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열심히 교과서를 외우다 대학에 들어갔던 저와는 달리, 당시 새내기였던 91학번들은 전교조 사수투쟁 등 고등학생 때부터 학생 운동을 한 사람들이 많아 긴장했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예의>를 보며 뒤늦게 놀랐던 것은 1991년의 많은 죽음들이 단 한 달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시간이 단지 한 달뿐이었다니! 분노와 슬픔과 걱정과 절망의 양으로 따지자면 몇 년치 분량을 그 한 달 동안 다 겪었던 것 같습니다.
4월 26일 강경대 님의 죽음 후 박승희 님이 "'불감증의 시대'라고 하는 지금, 명지대 학우의 슬픔과 연민을 가지다 다시 제자리로 안주해 커피나 콜라를 마시는 2만 학우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죽음들이 이어졌습니다. 어떤 죽음 뒤엔 "제 친구예요"라며 울던 91학번 후배를 달래느라 애가 탔던 시간도 있습니다.
그 시간은 여전히 무수한 잔상들로 기억됩니다. 교문 앞에서 선전전을 하고 도로 중앙에 서 있으면 유인물을 받으려고 차창 밖으로 내밀던 무수한 손들. 지하철에서 선전전이 끝나고 나면 쏟아지던 박수 소리. 그리고 신촌로터리를 가득 메우고도 끝이 안 보였던 김귀정 님 장례식날의 추모 행렬들….
그런데 그 열기는 신문에 밀가루와 계란을 뒤집어쓴 정원식 총리의 사진이 등장하면서 차갑게 식어 버립니다. 도로 중앙에서 유인물을 펄럭거려도 더 이상 내미는 손은 없었고 지하철에서 선전전을 하면 욕설이 쏟아졌습니다. 여론이 운동 세력에 적대적으로 변한 바로 그 순간에 강기훈 씨의 유서 대필 의혹이 제기됩니다.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말도 안 되는 사기극에서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강기훈 씨는 2015년에 와서야 무죄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유서 대필 의혹을 받았던 강기훈 씨의 이야기를 담은 <국가에 대한 예의>는 끊임없이 마음을 일렁이게 합니다. 1991년의 거리에 섰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강기훈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무죄 입증을 위해 24년간이나 법정 공방을 벌여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 세월이, 시작부터 지금까지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저는 그때 강기훈 씨를 위해 싸우지 않았습니다. 조직 사건이 터질 거라는 소문에 학교는 흉흉했고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저희 과 선배는 조직의 중요 문서를 숨겨서 도피하다가 3층 건물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선배의 허무한 죽음과 방금 지나온 5월의 뜨거움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저는 곧 모든 생각을 멈추고 눈앞에 주어진 일만 했습니다. 그 뒤로 '강기훈'이라는 이름이 가끔 불러지기는 했지만, 눈앞에 주어지는 일들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눈물로 쓴 보고서>(최성혁 지음, 봄 펴냄)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서점에서 그 책을 허겁지겁 읽으며 저는 어떻게든 1991년을, 그 죽음들과 저의 혼란을 정리해야 한다고 다짐했지만 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영화에는 강기훈 씨에게보다 더 미안한 사람들이,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1991년 5월 18일, 여덟 번째로 죽음을 선택한 이정순 씨의 여동생 이옥자 씨가 말합니다.
"우리는 학생이 없잖아요? 또 저뿐만 아니라. 저는 감수했어요. 왜 그냐 하면 우리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는 이옥자 씨를 카메라는 멀찍이서 바라보다가 결국 그가 기대앉은 나무로 시선을 돌립니다. 카메라가 파란 하늘 아래 고요히 서 있는 나무를 오래오래 응시하는 동안 이런 자막이 흐릅니다.
"이옥자 씨는 25년 동안 노동자 윤용하와 정상순의 추모사업을 함께 챙겨 왔다."
학번을 가진 저는 1991년 그때, 조직을 지키려다 추락사한 81학번 선배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열사 정국'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시간을 막 지나온 그때, 열사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나 허무한 죽음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 그 혼란을 기억 깊숙이 묻어 버렸습니다.
<국가에 대한 예의> 덕분에 1991년 그때, 선배의 허무한 죽음 앞에서 혼란스러워했던 마음을 이제야 정리합니다. 저는 저희 과 선배의 죽음을 모두가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 애통했습니다. 21살 저의 시야는 딱 그만큼이었습니다. 그리고 <국가에 대한 예의> 속 이옥자 씨의 흐느낌을 보며 제가 기억하지 않았던 이정순 씨의 이름을, 윤용하 씨와 정상순 씨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 봅니다. 영혼의 무게는 평등하기에 죽음도 같은 무게의 슬픔으로 애도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했습니다. 운동을 위해 친구의 죽음을 이용했다는 비이성적인 가설에 인권의 이름으로 모두가 저항했어야 했습니다.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미안합니다.
눈물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태도에 대해 덧붙이고 싶네요. 영화가 시작하고 2분이 지나면 강기훈 씨의 기자회견 장면이 나옵니다. 미리 적어 둔 글을 읽던 강기훈 씨가 단상에 엎드려 눈물을 흘립니다. 기자회견 장면은 아마도 방송 자료일 것입니다. 화면 속 카메라는 그 눈물을 클로즈업으로 보여 줍니다. 연이어 시끄럽게 터지는 카메라 셔터 소리들. '운동을 위해 친구의 죽음을 이용한 남자'로 이미 낙인을 찍어 버린 카메라들은 강기훈 씨의 눈물조차도 볼거리로 전시하기 위해 악착같이 달려듭니다.
그래서 45분 24초에 등장하는 이옥자 씨의 눈물과 그 눈물에 대한 카메라의 태도가 더 빛이 납니다. <국가에 대한 예의>를 말하는 이 영화의 카메라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지킵니다.
이 영화를 정말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습니다. 1991년을 기억 저편으로 묻어 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 기억을 불러오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밀린 숙제를 하게 해 주신 권경원 감독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문의: [email protected])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