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기필마
유라시아를 횡단한 동방의 사내가 있었다. 원대한 꿈을 꾸었다.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19세기 말이다. 고속철도도 고속도로도 없던 시절이다. 단기필마, 홀로 말을 타고 달렸다. 베를린에서 출발했다. 폴란드를 지나 러시아에 들어섰다. 볼가강을 따라 우랄 산맥을 넘고 시베리아를 통한다. 이르쿠츠크에 닿아 바이칼을 가슴에 담았다. 옴스크에서 남하하여 우르무치에 닿았다. 고비사막을 지나 몽골에서 만주로 질주한다. 아무르/흑룡강을 거쳐 지린과 훈춘에 이르렀다. 마침내 해삼위, 블라디보스토크에 당도했다. '동해!'라고 탄성을 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닛뽄카이(일본해)!'라고 찬탄했을 법하다. 원산과 부산을 거쳐 나가사키로 귀국했다. 고베와 오사카, 교토, 나고야를 지나 요코하마, 도쿄에 입성한다. 1만4000km, 끝끝내 열도국가의 수도에 다다른 것이다. 1892년 2월 11일에 출발하여 1893년 8월 12일에 도착한다. 17개월, 500일 유라시아 견문이다. 맹렬한 겨울폭풍에 말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고도, 극한불모의 시베리아에서 콜레라를 앓으면서도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그 불굴의 걸출한 인물이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島安正)이다. 메이지일본의 특출난 정보장교였다.
너덜너덜 넝마가 된 먼지투성이 군복 차림으로 천황을 알현했다. 막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건설되고 있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소상히 보고했다. 거리에서는 대중들에게 일장 연설했다. 히말라야가 내다보이는 파미르 고원을 낭만적으로 환기시켰다. 유라시아를 횡단했던 네 마리 말 가운데 두 마리의 이름을 '우랄'과 '알타이'라고 지었다. 우랄로, 알타이로, 파미르로 달려가서 카스피 해의 물을 마시자고 2030 청춘들을 독려했다. 러시아와 중국과 몽골의 경계인 알타이 설산을 넘는 모습이 그의 상징이 되었다. 흡사 알프스 산을 넘어가는 나폴레옹에 근사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그 장면을 상상으로 묘사한 회화과 판화가 날개 돋은 듯 팔려나갔다. '19세기의 칭기스칸'에 방불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1852년에 태어난다. 막부 말기 마츠모토 번의 사무라이 집안 자제였다. 칼 대신 총을 찼다. 서구식 병법을 열심으로 공부했다. 서양어 학습도 성심으로 진력했다. 문/무를 겸장한 것이다. 1874년 영어 통역장교로 발탁되어 발군의 실력을 선보인다. 능력을 인정받아 베이징부터 베를린까지 근무한다. 중국과 조선, 몽골 등을 답사한 것이 1879년이다. 그해부터 중국어 공부도 시작했다. 1883년 중국 대사관의 정보장교로 발령된다. 1886년 6개월간 버마와 인도도 시찰하고 견문기(<印度紀行>)를 남긴다. 독일 대사관으로 전근한 것은 1887년이다. 베를린에만 머물지 않았다. 5년간 유럽 전역을 탐방한다. 1889년과 1890년 발칸 반도를 찾았음이 눈에 든다. 서유라시아 새판짜기의 핵심 현장을 살핀 것이니, 과연 눈썰미가 빼어나다. 이미 유라시아의 동서남북을 사통팔달 조감하는 안목을 기르고 식견을 키웠다. 베를린 근무를 마칠 무렵 일어, 영어, 중어에 독어와 노어까지 갖추었다. 한자와 로마문자, 키릴문자에 모두 능통했다.
동료들처럼 배를 타고 귀국하지 않았다. 말을 타고 유라시아를 횡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1891년 1월 1일 군부 상부에 계획서를 제출한다. 세계의 대세가 변하고 있다고 했다. 서세동점, 서구 열강의 갈등이 동아시아로 이전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의 향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철도와 증기선과 전선으로 유럽과 아시아가 하나가 되고 있었다. 필히 알아야 했다. 필시 보아야 했다. 모름지기 지피지기, 아는 것이 힘이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견문의 으뜸 목적 또한 정보 수집을 꼽았다. 그 중에도 대영제국과 러시아제국의 길항, '그레이트 게임'을 육안으로 관찰하겠노라 했다. 그럴싸하게 포장하면 호연지기라고 할 수 있다. 혈기가 차오르고 결기가 넘쳐흘렀다. 비딱하게 꼬면 객기와 치기라고도 할 수 있다. 칭기스칸보다는 돈키호테에 빗댈 수도 있다.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았다. 그런데 메이지 정부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실행해 보거라, 허가를 내린다.
일부 노선만 수정했다. 본래 계획은 이집트로 가서 오스만과 페르시아를 지나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하여 중앙아시아와 신장, 동시베리아에 다다르는 여정이었다. 군부는 동유럽을 통하여 러시아에 직접 들어가라 했다. 단기필마 횡단이 시작된 1892년 2월 11일부터 의미심장하다. 일본의 건국기념일에 맞춤한 것이다. 독일의 카이사르는 베를린을 떠나는 후쿠시마의 무사 여행을 기원하는 축하연을 열어주었다. 발트해를 지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하자 러시아의 차르도 호의로 화기애애한 만찬을 베풀었다. 아직 일본을 경쟁국으로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메이지 천황이 러시아 차르를 누르는 사태를 상상할 수 없었다. 서쪽에서는 대영제국과 경쟁하고, 동쪽에서는 대청제국을 경계하던 무렵이다. 중간에서는 오스만제국과 일합을 겨루었다. 극동의 대일본제국은 등한시했으니 치명적 오판이었다. 러일전쟁, 러시아제국의 해체를 촉발한 나라는 영국도 오스만도 중국도 아닌 떠오르는 태양, 일본이었다.
대륙을 통하여 유라시아를 횡단한 후쿠시마는 열도에 안주하지 않았다. 못다 이룬 본래 계획을 재차 감행한다. 1895년 10월부터 1897년 3월까지 대양을 통하여 유럽으로 이동한다.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로 건너가 인도를 살피고 오스만제국과 페르시아와 코카서스까지 견문했다. 이번에는 오스만의 술탄과 페르시아의 샤도 접견한다. 당시에 보고들은 바를 <중앙아시아부터 아라비아로>로 썼다. 바그다드도 방문하여 메소포타미아를 '투르크의 아라비아'로 표현한 점이 흥미롭다. 오늘날 파키스탄을 비롯하여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도 두루 살폈다.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타슈켄트 등 실크로드의 거점도시까지 샅샅이 조사했다. 정부에 올린 공식 보고서만 32편에 이른다. 사적으로 기록한 일기는 10권에 달한다. 둘 다 20세기 일본 대외 정책의 초석이 된 문헌이다. '다른 백년'을 여는 귀하고도 굉장한 글을 남겼다. 유라시아를 망라한 정보를 수집하고 지식을 섭렵함으로써 일본의 제국화에도 기여한다. 주요 전쟁마다 후쿠시마의 공헌이 빛났다. 청일전쟁에 가담하고 의화단운동을 진압했다. 각종 조약과 회담에도 직접 나섰다. 1902년 영일동맹 체결의 일등 공신 또한 후쿠시마였다. 런던으로 몸소 달려가 돌아올 때는 영국령 인도의 총독과도 회담한다. 아시아의 변방 일본을 세계적인 열강으로 각인시킨 러일전쟁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다. 무주공산이 된 만주 전장에서는 마적들을 규합하여 백인종 러시아 군대에 맞서 진두지휘했다. 오스만제국의 정보망을 총동원하여 이스탄불에 기착해 있는 러시아 함대 동향도 실시간으로 수집했다. 러시아가 쓰시마 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발트해 함대만으로는 부족했다. 흑해 함대가 황해로 파견되는 시점과 노선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했다. 후쿠시마의 머리 속에서 발트해와 발해만은 하나로 이어졌다. 대한해협과 보스포루스해협을 동시에 관찰했다. 요동반도와 한반도를 크림반도와 발칸반도와 연동시켜 사고했다.
2. 만추리아와 몽골리아
'동구의 충격'에 가장 기민하게 대응한 나라 역시 일본이었다. 대청제국의 동쪽 끝 연해주를 러시아가 차지하자(1860), 곧장 북방으로 진출하여 홋카이도를 일본의 영토로 복속시켰다(1868). 올해로 150주년을 맞는 메이지유신과 동시적 사건이었다. 1910년 조선을 병합시키고도 내선일체에 그치지 않았다. 만선(滿鮮)일체, 만주와 조선을 연동시킨다. 대청제국을 대신하여 러시아제국에 맞서 아시아를 수호하겠노라 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앞장서 시베리아 출병을 감행한 까닭이다. 동시베리아에 친일적인 극동 공화국을 세우고자 했다. 끝내 실패하고 거대한 소련이 들어서자 만추리아에 더더욱 공을 들였다. 1920년대 극동국은 좌초되었지만, 1932년 만주국은 기어이 출범시켰다. 대륙 깊숙이 진입함으로써 '탈아입구'(脫亞入毆)는 형해화되었다. 이념과 체제와 사상의 대반전이 일어난다. 유럽형 국가에서 벗어나 유라시아형 제국으로 진화한다. '왕도낙토'와 '오족협화'를 내세운다. 동양적 왕도를 실현하는 이상향을 지향하고, 일본인과 조선인, 만주인과 몽골인, 한인들이 공존공영하는 제국을 표방했다. 동방의 유토피아 만주국의 수도는 신쿄(新京)라고 지었다. 동경과 북경과 남경은 옛 도시이다. 20세기 신상태(New Normal)와 신시대(New Period)를 상징하는 신경의 한복판에는 '대동(大同)광장'을 만들었다. 지리적으로 만주의 한복판에 자리한 신경은 대륙 교통의 허브가 되었다. 내륙의 하얼빈과 내해의 대련을 잇는 아세아호가 쾌속으로 질주했다. 1932년 10만에 그쳤던 신경은 1945년 300만 대도시로 변신한다.
만주국이 대척에 둔 나라는 역시나 소련이다. 러시아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공산국가가 들어선 곳이 (외)몽골이었다. 만선과 만몽(滿蒙), 만주는 조선만큼이나 몽골과도 이웃지간이다. 만주 벌판에는 반도의 초가집과 초원의 게르가 공존한다. 조선의 황소와 몽골의 순양이 나란히 풀을 뜯는다. 만주국은 외몽골의 과학적 무신론 국가와는 다른 모델을 추구했다. 근대화=세속화를 윽박지르며 종교를 타파하기보다는 전통문화의 수호자로서 매력 공세를 펼친다. 모스크바에 충성하는 볼셰비키의 꼬붕들은 토착적인 불교를 탄압했다. 칭기스칸을 봉건의 화신으로 억압하는 '붉은 몽골'은 영 어색했다. 사적 유물론과 샤먼적 영물론은 영판 어울리지 않았다. 계급론과 연기(緣起)론 역시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투쟁과 싯다르타의 자비는 물과 기름이었다. '적색 제국주의'를 저격하는 반공주의의 최일선에 만주국을 자리매김한 것이다. 만추리아의 왼편은 몽골리아의 남쪽, 내몽골이 위치한다. 만주국과 협력하는 내몽골을 전초기지로 삼아 외몽골까지 연합하는 통일몽골국을 만들자고 했다. 바이칼 호수부터 고비 사막을 아우르는 대몽골연합을 이루자는 것이다.
동북의 만주 평원을 넘어 몽골의 초원에 닿으면 서북의 고원과도 직통한다. 서장(티베트)과 신장이 지척이다. 통일몽골국은 만주국에 대한 서장의 우호를 증대시킬 것으로 기대되었다. 신장에도 친일적인 이슬람 위성국을 세우고자 했다. 몽골과 서장과 신장으로 진출하면서 칭기스칸도 더욱 적극적으로 환기시켰다. 일찍이 유럽을 정복한 아시아의 영웅으로 칭기스칸을 호명한다. 몽골세계제국을 대일본제국의 청사진으로 삼아 범아시아주의와 대아시아주의를 선전하고 선동했다. 러시아의 정교와 중국의 유교에 순치됨으로써 왕년의 기상을 잃었다며 북방 유목민의 후예들을 격발하고 촉발한 것이다.
이 북방연합을 통하여 중원에서 근근이 버티고 있던 중화민국도 압박했다. 만주족-몽골족 연합으로 명나라를 치고 청나라를 세운 17세기의 대전략(Grand Strategy)과 판박이였다. 중화민국 내부에서도 호응하는 '제5열'이 필요했다. 충칭의 장제스와 경쟁하던 상하이의 왕징웨이를 수장으로 삼는 괴뢰 중화민국도 기획한다. 열도와 반도, 북방과 중원까지 모조리 일본의 영도 아래 대연합을 이룸으로써 소비에트연방에 맞서 동유라시아의 패권을 쥐고자 한 것이다. 으리으리한 야심이었다. 어마어마한 야망이었다.
3.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동북에 이르면 서북이 지척이고, 서북에 닿으면 중앙아시아가 근방, 금방이다. 북방의 슬라브인과 중원의 한족과는 다른 투르크들이 살아가는 땅이었다. 유교와 정교 사이 무슬림이 다수다. 소련을 제압하기 위해서도, 중화민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요긴한 지역이었다.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일본 판 서유기가 유장하게 펼쳐진다. 인류학과 고고학과 민속학과 언어학을 총동원하여 우랄-알타이와 일본의 근친성을 탐구한다. 2억 무슬림의 정신적 지주인 칼리프와 만세일계 천황의 합작도 궁리한다. 동지중해부터 동시베리아까지 무슬림 네트워크를 일본의 정보망으로 삼는 방안도 탐색한다. 흔히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영일동맹만 일방으로 강조하는 편향이 심하다. 그러나 일본은 오스만과의 동맹도 추진하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이야말로 대영제국에 앞서 러시아와 경합했던 백년의 앙숙이었기 때문이다.
적극 호응한 이가 이브라힘(Габдрәшит Ибраһимов, 1857~1944)이다. 부하라 출신의 러시아 무슬림으로 카잔에서 공부했다. 메카와 메디나에서 유학하고 이스탄불을 거점으로 반러 운동을 펼치는 종교 지도자로 남러시아의 이슬람세계를 대일본제국과 연결시키려고 했다. 1909년 2월부터 6월까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체류하며 후쿠시마 등 아시아주의자들의 환대를 받으며 돈독한 친분을 쌓는다. 카잔에서 발간되는 타타르 신문(Bayan al-Haq)과 이스탄불에서 발행되는 오스만 신문(Surat Mustakim)에 일본에 대한 기사와 논설을 집중적으로 발표한다. 일본 언론에는 러시아 치하 카잔에 대한 폭로성 기사를 썼다. 러시아의 지배 아래 신음하고 있는 타타르를 통하여 유럽에 의한 아시아의 고통을 상기시켰다. '지하드'라는 제목의 논설에서는 타타르 공화국의 분리 독립과 무슬림의 해방을 위한 일본의 지지와 지원도 요청했다. 이들이 6월 7일 창립한 단체가 아시아의회(亜細亜義会)이다. 이브라힘의 여행기 <Âlem-i İslâm>(이슬람 세계)에도 이 단체를 소개하고 있다. 일본과 이슬람세계를 연결하는 허브가 되었다. 대일본제국과 오스만제국의 동/서 연합, 범아시아주의와 범이슬람주의를 결합시키는 대아시아, "大東"(대동)을 표방한다.
1932년 만주국이 들어서면서 하얼빈의 무슬림 정보망도 신경으로 이전했다. 1934년 선린교회(善隣敎會)를 세운다. 본부는 동경에 두었지만, 실질적인 중심 역할은 신경에서 맡았다. 1935년 월간지 <회교권>도 발행한다. 1944년 8월까지 총 146호를 발간했다. 신경과 카불과 바그다드와 이스탄불과 카이로를 꿰는 무슬림 정보망이 가동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만주와 몽골, 서장과 시장,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친일적 이슬람 세력을 양성하기 위한 회심의 프로젝트였다.
이브라힘이 재차 도쿄를 방문한 해는 1933년이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또 한 명의 일본인, 와카바야시 한(若林半)과 조우한다. 1937년에 출간한 <회교세계와 일본>(回敎世界と日本)으로 유명한 지식인이다. 1938년 찍은 5쇄 본에는 이브라힘의 아랍문자 손 글씨가 표지로 들어갔다. 일본과 이슬람세계의 밀월이 절정에 이른 해는 1938년이다. 대일본제국의 황도 도쿄에 거대한 모스크가 들어선 것이다. 이브라힘이 초대 이맘이 되었다. 대일본제국과 3억 움마의 연대를 표방하는 대일본 회교회도 만들어진다. 아시아인들과 무슬림이 합심하여 대동아공영권, 대유라시아 공영권을 만들자고 의기투합한 것이다.
4. 친일, 반일, 항일
'대유라시아 공영권'은 과장이 아니다. 대일본제국의 네트워크는 이슬람세계는 물론이요 러시아혁명을 피해 유럽으로 망명한 유라시아주의자들에게도 닿아 있었다. 그 자료들을 죄다 모아 소장하고 있는 곳이 홋카이도 대학 중앙도서관이다. 본디 삿포로에는 한 주만 머물고자 했다. 남하하는 러시아와 북진하는 일본 사이, 홋카이도의 선주민 아이누의 곡절을 추모하는 글을 쓰고자 했다. 그런데 시베리아에 대한 자료들도 연해주의 극동연방대학보다 더 훌륭하게 구비했다. 만추리아와 몽골리아와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와 유라시아를 엮은 문헌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졌다. 말을 타고 유라시아를 횡단한 후쿠시마부터 '도쿄의 무슬림' 이브라힘까지 '다른 20세기', 다른 일본사와 다른 세계사가 매직아이처럼 떠올랐다. 도저히 떠날 수가 없었다. 모아 읽지 않고서는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한 달을 더 머물기로 작정했다. 유난히 눈이 잦았던 2017년 12월을 꼬박 설국에서 보낸 것이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미지의 보물을 발굴하듯, 미궁의 세계를 탐사하듯 도서관을 오고갔던 하얀 나날들이다.
한때는 북해도제국대학이라고 불리었다. 북방개척의 전초기지였다. 북양은행, 북해은행 등 북(北)의 기호학이 삿포로 도처에서 펼쳐진다. 대학 정문에는 "큰 뜻을 품어라"(大志を抱いて) 교훈을 새긴 비석이 섰다. 창립자 클라크 박사의 언명으로 알려졌다. "Boys, Be Ambitious!",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직역보다 훨씬 더 고상하고 품격 있게 옮겼다.
지난 1000일, 일본어 학술서의 혜택을 크게 입었다. 히말라야를 넘어간 두 번째 해부터는 한글 문헌보다는 일어 자료가 훨씬 더 유용했음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선린(善隣)보다는 악우(惡友)에 더 가까운 일본의 행보는 여전히 미덥지 못하다. 일본에서 처음 공부했던 전후 60주년(2005)보다 더 퇴보한 것도 같다. 그럼에도 일본이 축적해둔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은 더없이 부러운 지점이다. 인도학도 페르시아학도 터키학도 슬라브학도 몹시 빼어나다. 영미권에 견주어도 턱없이 밀리지 않는다. 메이지유신 150년, 제국의 저력은 여전한 것이다. 한창 문부성이 주도하는 21세기 프로젝트로 중국과 인도와 이슬람도 집중 연구하고 있다. 한때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운운했던 한국은 얼마나 착실하게 준비를 하고 있나 모르겠다. 반도인의 자잘한 사고의 사이즈가 어느 만큼이나 뻥뻥 뚫렸을랑가 모르겠다.
정녕 반일(反日)은 쉽다. 남 탓에 그친다. 자기 극복이 부재한 안일한 태도이다. 나는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가장 큰 적폐가 만연한 남 탓이라고 여긴다. 그렇다고 친일(親日) 또한 안이하기는 매한가지다. 나를 버리고 남에 굴종하는 노예의 길이다. 동방을 버리고 서방을 맹종하는 백년의 누습과도 직결된다. 나의 타성을 타파하고 남의 관성도 혁파하는 상호진화가 요결이다. 나도 바꾸고 남도 바꾸는 항일(抗日)이 요체이다. 친일 제국주의와 반일 민족주의를 모두 돌파하여 항일 세계주의로 도약하는 패러다임 전환이 요점이다. 반일과 친일과 항일이 난마처럼 교착하는 갈림길에 20세기의 만주가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와 중국, 신/구와 동/서의 제국이 길항하는 복마전이 백 년 전 만주에서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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