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무르강과 흑룡강
이름이 많은 강이다. 러시아에서는 아무르강(река́ Аму́р)이라고 한다. 중국서는 헤이롱쟝(黑龙江)이다. 조선인들은 흑룡강이라고 불렀다. 몽골인들은 검은 강(Хар мөрөн)이라고 한다. 만주어도 보여주고 싶은데 특유의 세로쓰기 글꼴이 먹히지 않는다. '아무르'라는 지명은 시베리아 원주민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한국어의 '물'과 흡사한 발음이다. 일본어의 미즈(水, みず)와도 유사하다.
맑고 얕은 물에서는 피라미만 산다. 깊고 탁한 곳이라야 큰 물고기가 자랄 수 있다. 중국인들은 용이라도 살 것 같다하여 흑룡강이라 했다. 세계에서 9번째이다. 러시아의 볼가 강, 중국의 장강, 동남아시아의 메콩강, 아프리카의 콩고강보다 크다. 시베리아 4대 강 가운데 유일하게 오오츠크해로 흘러나간다. 나머지는 모두 북극해로 빠져나간다. 아무르만이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중국의 똥베이(東北)을 관통하고 러시아의 극동(Дальний Восток)을 지나 일본의 토호쿠(東北)에 가닿는다. 사막과 스텝과 툰드라와 타이가를 에둘러 태평양으로 합류하는 것이다. 그 강물과 바닷물이 합수하는 타타르 해협에 사할린이 자리한다. 사할린 또한 만주어로 검다는 의미의 단어와 발음이 비슷하다. 즉 만주족들은 검은 강과 검은 섬, 아무르와 사할린을 오고가며 살았다. 겨울이면 강도 바다도 꽁꽁 얼기 때문이다. 대륙과 섬이 아이스 로드(Ice Road)로 연결된다. 반대 방향으로 왕래했던 이들이 아이누이다. 아이누 또한 아무르와 긴밀했다. 홋카이도의 원주민에 그치지 않고, 흑룡강을 따라 중국의 동북과 러시아의 극동에 흔적을 남겼다.
가혹한 기후 탓에 본래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제국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기도 했다. 장강의 중원문명과는 만리장성으로 담을 쌓았다. 동방정교의 성소, 모스크바에서도 아득하게 먼 곳이다. 일본의 교토나 도쿄와도 멀찍하다. 이들로부터 모두 자유로운 북방 소수민족들이 활달하게 유랑하던 터전이었다. 아무르/흑룡강을 젖줄로 삼은 북방문명들이 숱하게 명멸했다. 멀리로는 고구려가 있었으며 발해가 그 뒤를 이었다. 요와 금, 원과 청까지 여러 제국들이 천년토록 뜨고 졌다. 황하에 기초한 화북문명과 장강에 토대한 화남문명을 통합한 중화문명과는 일선을 긋는 독자적인 역사-세계였던 것이다. 우수리 강과 송화강과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로 사하동포(四河同胞), 또 하나의 문명권이 작동했다.
1860년 베이징조약이 변화의 기폭제이다. '동구의 충격'으로 러시아와 청, 양대 유라시아제국이 길항한다. 아무르의 물길(River)에 시비르(시베리아)의 철길(Rail)을 보탬으로써 변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우수리 강변에는 하바롭스크가 들어섰고, 송화강 유역에는 하얼빈이 세워졌다. 도시가 서고 철도가 놓이면서 사람들도 몰려들었다. 중원에서는 한족이 장성을 넘었다. 우랄에서는 슬라브족이 산맥을 넘었다. 반도에서는 조선인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다. 열도에서는 일본인이 바다를 건넜다. 외래인들이 퉁구스와 아이누를 비롯한 선주민들과 뒤섞여갔다. 본시 인간의 발자취보다 자연 및 기후의 영향이 드셌던 곳이다. 군사적 충돌과 정치적 경쟁보다 홍수와 추위가 역사를 규정해갔다. '동구의 충격'이 정녕 충격인 것은 만년의 추동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하의 석탄과 석유에 지상의 철도를 결합시킨 사피엔스의 활동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요즘말로 이른바 '인류세'(Anthropocene)에 들어선 것이다. 파란과 격랑의 '장기 20세기'가 펼쳐진다.
2. 천하대란
제국과 제국이 경쟁했다. 대청제국의 아성에 러시아제국과 대일본제국이 도전했다. 혁명과 혁명이 잇따랐다. 메이지유신과 동학혁명과 신해혁명과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과 문화대혁명과 페레스트로이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격발되었다. 전쟁과 전쟁도 연발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과 중일전쟁과 중소(국경)전쟁이 쉼 없이 발발했다.
20세기를 여는 의화단운동은 제국과 제국 사이, 혁명과 전쟁의 복합적 성격을 가졌다. 흔히 8개국 연합군으로 진압했다고 한다. 그 구체적 실상을 살피자면 중국과 러시아 간 유사-전쟁에 가까웠다. 산동반도에서 발기한 의화단은 파죽지세로 요동반도와 동북3성으로 진출했다. 황하 이북에서는 외세 중에서도 연해주를 통으로 차지한데다 만주까지 노리는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가장 심했기 때문이다. 주요 목표물이 된 것도 하얼빈 역이었다. 러시아가 건설한 동청(東淸) 철도의 허브였다. 동/서로는 치타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통과했고, 남/북으로는 대련과 하얼빈을 엮는 만추리아 종단 열차가 지나갔다. 의화단은 하얼빈 역을 점거하고 주요 노선을 파괴함으로써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코자 했다. 그러나 남진을 더욱 재촉하는 자충수가 되고 말았으니, 보국안민(輔國安民)에 실패한 대청제국은 신해혁명으로 무너진다. 동북으로부터 명나라가 망해간 것처럼, 청나라 또한 동북에서부터 멸해갔다.
러시아의 파상공세에 영국은 일본을 키운다. 1902년 극서 영국과 국동 일본의 동맹은 1904-5년 러일전쟁의 전조가 되었다. 이 전쟁에 패함으로써 러시아제국 또한 대청제국의 운명을 뒤따른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발발하여 소비에트연방이 들어선 것이다. 1920년대 하얼빈은 적색혁명을 피해 망명한 백계 러시아 난민들의 거점이 되었다. 러시아 학교가 들어서고 정교회 성당이 세워지고 세계 최대의 러시아인 거리가 조성되었다. 오늘날 중앙대로(中央大路)의 양 편으로 동로마제국, 비잔티움 양식의 중후한 건축물이 즐비했다. 작가와 예술가와 학자들과 성직자들이 집결했다. 교향악단과 극장과 댄스홀과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화려했다. 모스크바보다 더 모스크바다운, '제3의 로마'를 계승하는 '오리엔탈 모스크바'라고 불리었다. 러시아인만 있던 것도 아니다.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그루지아인, 타타르인도 살았다. 조선인과 일본인 등도 합세했으니, 1923년 하얼빈 시민의 국적은 53개나 되었다고 한다.
하얼빈의 봄날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일본이 조선에 이어 만주까지 획득한 것이 1932년이다. 외몽골(소련의 위성국)과 내몽골(중화민국의 일부)의 세력균형이 만주에서 무너졌다. 외만주(북만주)와 내만주(남만주) 모두 대일본제국의 강역이 되었다. 만주국 건국으로 일본이 만추리아의 패자가 된 것이다. 왕도낙토의 '오족협화'에도 소비에트인은 쏙 빼버렸다. 만주국에서 슬라브를 비롯한 유럽계를 숙청하자, 연해주에서는 일본인과 중국인, 고려인 등 아시아계를 대숙청했다.
1945년 소련이 재역전한다. 일본을 밀어내고 만추리아에 재진출한다. 적색 제국이 만주를 장악하고 반도의 북부에는 위성국을 세웠다. 만추리아와 시베리아와 몽골리아와 코리아의 북쪽이 적화되면서 중원의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1949년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도 소비에트연방과 화목하지 못했다. 문화대혁명의 파장 속에 하얼빈의 정교회 성당들은 대거 파괴된다. 1969년 양대 공산주의 대국 간 국경전쟁까지 발발한다. 20세기 전반 만주국의 억압과 20세기 후반 신중국의 탄압으로 1988년 하얼빈에서는 러시아인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1898년 하얼빈 건설 100주년을 적적하게 보내야 했다. 혁명과 열전과 냉전으로 점철된 어지러운 시대가 백년토록 지속된 것이다.
3. 천하와 천주
탕! 탕! 탕!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10월 26일이었다. 1909년이다. 하얼빈 역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다. 러시아의 재무대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코리아와 만추리아와 몽골리아를 두고 러시아의 조차지에서 담판을 벌이려 했다. 조선은 일본이, (외)몽골은 러시아가, 만주는 남/북으로 분할키로 합의할 공산이 높았다. 러시아 당국은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했다. 이름이 Инчин Ангай라고 했다. 한문으로 옮기면 安重根이고, 한글로 풀면 안중근이다.
연해주와 만주 처처에서 그의 흔적을 만났다. 이토 격살을 위해 사격 연습을 했던 블라디보스토크의 훈련장을 둘러보았다. 후견인이었던 최재형의 우수리스크 대저택도 살펴보았다. 10.26 하얼빈 의거 현장도 방문해 보았다. 송화강의 하얼빈에서 시속 300km '조화호'를 타고 달리면 3시간 만에 발해만의 대련에 이른다. 안중근이 처형된 여순 감옥까지는 대련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이다.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부터 3월 26일 집행까지 마지막 40여 일도 더듬어 보았다. 최후의 장소와 최초의 장소가 그리 멀지 않다. 태어난 고향은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이다. 연해주와 만주와 반도의 북부가 하나의 생활 권역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서해와 동해는 사하동포와 사해동포가 합류하는 동북아의 지중해였다. 그 지중해세계를 동분서주하며 32년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이토 사망 확인 직후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였다. 황해도는 서해 건너 서학이 가장 먼저 전래된 땅이다. 세례명이 토마스(Thomas), 도마(多默)였다. 졸지에 조선의 선교를 담당하던 뮈텔 주교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졌다. 일본의 추궁에 시달릴 수 있었다. 프랑스혁명 이래 세속화를 방편으로 삼는다. 정/교 분리, 성/속 분리 원칙을 취했다.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일절 관여치 않는다 했다. 외면할 수 없었던 이는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m)신부이다. 안중근에게 세례를 주었던 신부였다. 사제로서 사명감과 책임감을 저버릴 수 없었다. 주교의 방침을 어기고 뤼순 감옥으로 향한다. 3월 8일부터 11일까지 나흘간 토마스를 면회한다.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도 집행한다. 토마스는 신도로서도 신하로서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였다. 끝내 눈물로서 소망한 일은 오로지 대한제국의 독립이다. 사람을 죽인 행위는 참회하였으되, 천당에 이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빌렘 신부에게도, 가족에 남긴 유언에서도 천당에서 재회하자며 힘주어 약속했다.
면회를 마치면 옥중에서 집필에 전념했다. <안응칠 역사> 자서전을 남겼고, <동양평화론>을 저술했다. 전자는 개인사의 회고이고, 후자는 미래사를 기획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저격한 이는 일본의 후작이었으되, 가장 큰 위협으로 꼽은 나라는 러시아였다. 과연 동북아는 동남아와 달리 서구보다 동구가 더 큰 힘을 떨쳤던 것이다. '동구의 충격'으로 코리아와 만추리아와 몽골리아가 온통 러시아 치하가 될 것을 우려했다. 천주교 신자로서 정교 제국의 남진을 꺼려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바티칸의 교황과도 연대를 도모했다. 중국, 일본, 조선 동양 3국이 합심하여 서세동점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공동화폐를 발행하고, 공동 군대를 만들어 이웃나라 말을 가르치자고 했다. 안타깝게도 <동양평화론>은 그 전모를 알 길이 없다. 본론을 쓸 시간을 허락받지 못한 채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보내온 하얀 명주옷을 입고 담담하고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 거룩하고 숭고한 태도에 일본 순사까지 감화되었다고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다의 예수를 연상시켰을 정도이다.
뤼순 감옥에는 안중근의 유묵들이 수십 점 남아있다. 최후의 한 달, 한시를 짓고 붓글씨를 쓰며 심사를 달래고 심지를 다졌다. 필체가 우렁차다. 장수의 기개가 뿜어져 나온다. 인품을 고스란히 닮았다. 본디 무인 기질이 강했던 사람이다. 활쏘기에 능하고 말 타기에 빼어났다. 강호의 고수, 협객 같은 자였다. 자서전에서도 공부가 부족했다며 겸양한다. 하지만 최초의 안중근 전기를 쓴 박은식에 따르면 경사(經史)와 서예에 통달했었다고 한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고 했던 격언과도 상통하는 진술이다. 6세에 천자문을 배우고, 사서오경도 읽었다. 천주교에 입문한 10대 후반까지 근 10년은 한학 세례를 입은 것이다. 처음 10년 '천하교'를 공부하고, 다음 10년은 천주교를 배운 셈이다. 최후에는 '거대한 뿌리', 유교 경전들이 더 자주 등장한다. <논어>와 <맹자>와 <중용>에서 따온 구절들이 유난히 많다. 내 눈에 유독 든 것은 "志士仁人 殺身成仁"(지사인인, 살신성인)이다. <논어> 위공령 편에서 따왔다.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는 뜻이다. 토마스의 삶을 압축적으로 함축시킨 농밀한 문장들이다. 약지 없는 손바닥을 장인으로 찍은 낙관(落款)마저 서늘했다.
대저 인의(仁義)와 충의(忠義)와 신독(愼獨) 같은 어휘들을 즐겨 구사했다. 아무래도 밥상머리 교육, 가풍과 가학의 소산일 것이다. 조 마리아 여사(女士)부터가 워낙 유명하다. 관동군에 벌벌 떠는 마름들을 대신하여 직접 마차를 끌고 만주 벌판을 내달렸던 여장부였다. 죽음을 앞둔 아들에게도 '의를 행한 것이니, 항소를 하여 일본인들에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며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미에 그 아들, 모자(母子) 모두 선비였다. 맹자 왈, 선비는 인의(仁義)에 투신하는 사람이다. 태평성대에는 자연과 하나 되어 호연지기를 기르고, 천하가 혼란할 때에는 목숨을 바쳐 정의를 구현한다. 충(忠)은 문자 그대로 마음(心)의 중심(中)에 충성하는 것이니, 양심을 따르라는 말이다. 주군에 대한 심복의 복종, 봉건 정신과는 질적으로 판이하다. 흑심이 난무하고 욕심이 만개하는 20세기 물질개벽의 꼭두새벽, 안중근은 양심의 구현자로서 오로지 올곧이 인의에 헌신했다.
고로 안중근은 복합적 인물이다. 동양의 도의를 체현한 인물이자, 서양의 순교를 구현한 인물이다. 문/무를 겸비하고 이성(실학)과 영성(심학)을 겸장했으며 천주와 천하를 회통시켰다. 기도하고 수련하고 독서하며 자기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실천을 감행하는 정치적 영성이 빼어났다. '천당위공'을 내세워 태평천하를 염원했으니 친일로 치달았던 설레발 개화파도 아니었으며, 반일로서 전통을 맹신했던 완고한 척사파도 아니었다. 식민지 사학으로 폄하된 유교와는 전혀 다른 '천하교'의 진수와 정수를 선보였으니, '모던 선비'였다 하겠다. 천주교와 천하교의 공진화를 실천한 선구자였다. 참 신앙인으로 천주교의 토착화에 기여했을 뿐더러, 시대의 변화에 접목하여 현대적 유교 또한 개창하였다. 순국자이자 순교자였으니,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도 임하는 지상천국은 대동세계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동/서와 고/금이 그의 사상 속에서 천하일가(天下2的)로 합류했으니 천주대장부요 천하대장부라 하겠다.
하기에 고루한 민족주의에 가두어서는 아니 된다. 뤼순 감옥에는 주은래의 친필 제사가 전시되어 있다. 하얼빈 역에는 시진핑 집권 이후 안중근 박물관(2014)이 들어섰다. 일제에 맞선 한-중연대의 원조로서 안중근을 기리는 것이다.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하다. 반도를 열도와 떨어뜨리고 대륙에 바짝 붙이고자 한다. 그만큼 모자라고 충분치 못한 시각이다. 안중근은 일본을 배척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회심을 성심으로 희구했다. 다만 단지(斷指)로써 메이지 일본이 체현한 20세기의 시대정신, 부국강병에 죽비를 내리치고 일침을 가했을 따름이다.
4. 만저우리
새천년과 다른 백년, 하얼빈도 변전한다. 2018년, 건도 12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를 예정이다. 하얼빈의 대명사가 된 빙등제도 역대 급으로 준비한다.
국경 전장은 이미 국제 시장이 되었다. 우수리스크와 하바롭스크에서 하얼빈까지 매일같이 국경버스가 오고간다. 국제버스터미널에는 한문과 키릴문자로 새겨진 행선지들로 빼곡하다. 버스마다 극동과 동북을 잇는 보따리상으로 만석이다. 2013년부터 이름을 고친 '러시아-중국 엑스포' 또한 갈수록 성황이다. 아무르/흑룡강에도 장거리 대교가 세워지고 있다. 고속철도를 통하여 동북3성과 동시베리아를 연결시키기 위해서이다. 2019년 10월 완공 예정이다. 하얼빈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속 400km의 부흥호가 달릴 날이 머지않았다. 영상 50도 폭염을 견디고 영하 50도 혹한을 버틸 수 있는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이다. 만추리아에 동청 철도를 놓았던 20세기로부터 시베리아를 일대일로(一帶十路)에 접목시키는 21세기로 반전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베리아만 연결하지 않는다. 하얼빈에서 301번 고속도로를 타고 서북쪽으로 내달리면 만주 평원과 몽골 초원이 만난다. 서만추리아와 남시베리아와 동몽골리아가 접맥하는 곳에 만저우리가 자리한다. 역시나 이름이 여럿이다. 중국어로 满洲里이고, 러시아어로는 Маньчжу́рия이며, 몽골어로는 Манжуур хот이다. 다시금 만주어로는 표기가 힘들다. 만저우리에서 재차 기차를 타면 러시아의 치타와 이르쿠츠크와 울란우데부터 몽골의 울란바토르와 초이발산까지도 한 걸음이다. 북유라시아 내륙교통의 허브 도시인 것이다.
오래전 흉노와 돌궐과 선비가 살았던 장소이다. 지난 천년 거란과 여진과 몽골이 살았던 처소이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러시아와 중국 간 국경무역이 발원한 도시이다. 동남부 연안의 개혁개방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내륙의 첫 번째 혁신도시가 되었다. 지금도 러시아와 동유럽을 연결하는 수출입 화물의 60%를 만저우리가 소화한다. 소비에트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 20세기형 유라시아 제국들의 경합이 끝나자마자 그 이전에 작동했던 장구한 생활세계가 순식간에 복원된 것이다. 부랴트족도 슬라브족도 만저우리 시장까지 차를 타고 나와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간다. 시장 진입로에는 중국을 상징하는 펜더곰과 러시아를 대표하는 북극곰이 나란히 서서 악수를 나눈다. 거리의 간판들도 별세계이고 별천지이다. 중국어와 러시아어와 몽골어에 아랍어와 한글까지 눈에 든다. 조선족일지 고려인일지 장담할 수가 없다. 혹은 고려인/조선족 합작일 수도 있다. 각 나라의 수도와 멀리 떨어진 곳이다. 도쿄와 베이징과 서울과 평양과 모스크바와 멀찍하다. 그만큼 중심부의 구심력이 미약하다. 변경의 활력이, 주변의 원심력이 왕성하다. 만추리아와 몽골리아와 시베리아와 코리아와 페르시아와 아라비아가 장마당을 통하여 융합된다. 국제(國際)와 일선을 긋는 민제(民際)와 시제(市際)가 역력하다. 만저우리는 유라시아의 용광로이다. 미래형 도시의 미니어처이자, 동유라시아 평화론의 모델하우스이다. 중화문명으로 흡수되지도 않고, 정교문명에도 흡입되지 않는 북방의 독자적인 아무르-흑룡강 세계가 귀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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