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양과 심양
시작은 미미했다. 끝은 창대했다. 1583년 일개 부족에서 출발했다. 장백산 기슭이었다. '장백혈통'의 태두, 누르하치 일대기를 기록한 <만주실록>도 장백산에서 시작한다. 높이 200리에 둘레 1000리, 산꼭대기에는 둘레 80리 호수가 있었다. 하늘을 닮은, 하늘을 담은 천지(天池)이다. 천지에서 발원하여 만주를 흐르는 강이 알루(압록강)와 아이후(두만강)와 훈퉁(송화강)이다.
2대 홍타이지는 족명과 국명을 바꾼다. 만주족의 청으로 개명했다. 장성 이남 명과 대등한 청으로 족하지 않았다. 대명(大明)을 대체하는 대청(大淸)을 표방한다. 하늘 아래 태양은 하나이다. 천하의 천자도 유일하다. 만주 벌판을 발판으로 후금칸국에서 대청제국으로 굴기한다. 중원을 치기 위해서는 후방부터 튼튼히 해야 했다. 다시금 요충지는 몽골리아와 코리아이다. 몽골과는 통혼을 통하여 혈연관계를 맺는다. 홍타이지가 가장 사랑한 해란주(海蘭珠)도 몽골 여인이었다. 만주 평원과 몽골 초원은 망망대지로 통한다. 북방불교와 샤머니즘, 정신세계도 공유한다. 만주어와 몽골어는 문자까지 흡사하다. 개문발차, 만몽(滿蒙)연합부터 이룬 것이다.
코리아와는 신성한 산을 공유했다. 조선인들은 백두산이라고 부른다. 형제관계를 도모했다. 환기시킨 것이 몽골세계제국이다. 홍타이지 집권 초기 요와 금은 물론, 송과 원의 정사들을 모두 만주어로 번역했다. 고려 고종의 태자가 원에 입조하여 쿠빌라이를 접견하고 원종이 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명과 조선의 부자(父女)관계를 끊고, 몽골과 고려에 더 가까운 형제지간이 되자고 했다. 만주와 몽골과 조선을 중원문명과는 또 다른 동북일가(東北1家)로 여긴 것이다. 저 멀리 고구려와 발해를 잇는 요하의 적통임을 과시했다. 아무래도 함경도 출신 태조부터가 여진과 무관치 않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성계를 딱 잘라 여진족이라 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기골과 기질을 미루어 보건대 백두혈통의 피가 흐르고 있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 후예들이 명과의 의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청과의 실리를 취하지 못하는 완고함이 답답할 노릇이었다. 끝내 태종이 친히 군사를 몰아 압록강과 대동강을 넘어 한강까지 내려왔다.
인조는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찧었다. 아버지의 굴욕은 대를 이어 아들 소현에도 미쳤다. 청의 볼모가 되어 요동으로 이주한다. 홍타이지의 길을 따라 한양에서 심양으로 끌려간다. 철군하는 태종의 동생 도르곤의 군대를 따라 북진했다. 고양과 파주, 개성과 봉산, 덕연과 평산, 가산과 정주를 지나 의주에 다다랐다. 압록강을 건너 오늘날 단동에 이른다. 위화도 회군(1388) 이래 250년 만에 요동에 닿은 것이다. 한양에는 한강이 흐르고, 심양에는 혼강이 흘렀다. 혼하(渾河)를 건너자 용골대 등 대청의 장수들이 소현을 맞이했다. 세자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신고식을 한다. 두 달 남짓 여정 끝에 성경(盛京)에 도착한 것이다.
시간이 누적되어 공간을 이룬다. 공간은 시간을 소환시킨다. 장소가 기억을 떠올린다. 심양은 심하, 혼강의 북쪽이라는 뜻이다. 1296년 몽골제국 때 처음 심양이라 불리었다. 당시 고려는 유라시아를 석권한 몽골세계제국에 깊숙이 편입되어 있었다. 응당 심양으로 이주한 고려인들 또한 적지 않았다. 고려 마을, ‘코리아 타운'(korea town)의 원조가 자리했다. 이곳에서 고려 유민들을 다스리며 ‘심양왕'(瀋陽王)으로 불리었던 이가 충선왕이다. 심양에서 개성으로 남하하여 반도를 다스린 것이다. 내친김에 고구려까지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소현이 소요하며 낚시를 즐겼던 혼하가 바로 주몽의 건국신화가 깃든 강이다.
후금에서 대청으로 진화하면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개수와 증축으로 중국식 도성 건축 방식이 적극 도입된다. 다분히 북경을 의식한 것이다. 북경을 능가하는 성경의 위엄을 갖추고자 했다. 장성 이북의 오두막에 장성 이남의 궁궐 양식을 접목시킨 것이다. 동북의 전통을 업그레이드하고 중원의 문명을 업데이트하였다. 만한전석(滿漢全席)으로 만찬을 즐기며 남/북을 아우르는 유일천자가 될 태비였다. 심양 고궁은 동북과 중원을 합작시키는 혼종과 융합의 실험장이었다. 그럼에도 정문 대청문(大淸門)은 여전히 심플하고 모던하다. 구질구질 잔 장식이 없다. 군더더기 없이 간소하고 정갈하다. 자존과 자부로 충만했기에 화려한 치장으로 꾸며낼 것이 없었다. 실용적이고 실질적이며 실무적이다. 실학이 실하다. 견실하고 신실한 기풍이다. 대청제국의 거대한 뿌리, 근원이며 근간이다.
소현은 그 심양고궁을 들락거리며 일상을 공유했다. 경복궁과는 전혀 다른 생활이었다. 문약(文弱)이라고는 없었다. 조선의 숭문(崇文)과는 판이한 상무(尙武)정신으로 충만했다. 전투가 없는 날이면 사냥이라도 나갔다. 말 타고 활 쏘는 일이 다반사였다. 초원 특유의 '유목 민주주의'도 가동되었다. 먹을거리를 직접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사냥의 포획물은 모두가 나누는 것이다. 상/하가 따로 있을 수가 없다. 황제도 마부를 거느리지 않고 직접 고삐를 잡는다. 칸이라고 뒷짐만 지다 고기만 뜯는 갑질 따위는 허용되지 않았다. 도리어 지배자들이 지도자로서 솔선수범 했다. 정주문명과 농경문화 특유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위계가 없던 것이다. 남/녀 마저 내/외로 유별하지 않았다. 만주와 몽골 여인들도 능숙하게 말을 탔다. 과부의 재가도 터부시 되지 않았다. 인구 증가 방편으로 도리어 장려되었다. 일부다처제도 빈번했으니, 열녀 관념 또한 극히 희박했다.
문약에다 병약까지 했던 소현은 애초 마지못했을 것이다. 북방의 삭풍에 골골거려 병을 달고 살았다. 말도 잘 못타고 활도 서툴렀다. 그러나 얼추 8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세월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졌다. 멧돼지와 노루, 양과 꿩을 사냥해서 구워먹고 삶아먹는 재미를 알아갔다. 홍타이지와 도르곤도 소현의 총명함을 각별히 아꼈다. 몽골문자 학습서를 처음 건넨 이가 태종이다. 만주어 회화도 익숙해졌을 것이다. 한문 이외의 다른 문명세계와 조우한 것이다. 말과 글만 달랐던 것이 아니다. 유교 일색의 조선과는 풍습 자체가 크게 달랐다. 동북의 불교와 극동의 무교(巫敎, 시베리아 샤머니즘)가 혼종 되었다. 조상만 모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섬기는 북방 특유의 제천행사가 열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하늘을 보았던 것이다. 다시 열리는 동쪽 하늘, 개벽(開闢)을 보았다.
2. 성경과 북경
심양 고궁은 북경 고궁의 1/10에 그친다. 그러나 승패를 가르는 것은 대/소가 아니라 기세이다. 동북의 기가 승하고 세가 올랐다. 파죽지세 산해관을 넘어 중원으로 진격한다. 만주와 몽골이 협공한 것이니 '탈환'이라는 감각이 승했을 법하다. 애당초 북경부터가 몽골세계제국의 소산이다. 유목민의 입장에서 북경(北京)이야말로 북방과 중원의 한 복판에 자리했다. 만주족들은 명을 치는 작전을 '서행'(西行)이라고 불렀다. 훗날 서장과 신장까지 포섭하는 '중국의 서진'(China Marches West)이 동북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대장정의 초엽에 조선의 차기주자도 대동시켰다. 명/청 교체, 천명이 바뀌는 순간을 현장에서 목도한 것이다. 성경의 신상태가 무르익어 북경의 신시대가 개창하는 천지개벽을 육안으로 관찰했다.
1644년 대청제국이 선다. 왕성한 잡식성 소화력을 자랑했다. 천주교와 서학에도 관용을 베풀었다. 천하문명에 천주문명을 포섭한다. 중화문명의 적통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서학에 유연했다. <1581년부터 1669년까지 중국에서 천주교를 포교하기 위해 활동한 예수회 신부들에 대한 보고>가 당시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1672년 독일의 라티스보나이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저자는 아담 샬(Adam v. Schall, 1592~1666)과 인토르체타(Intorcetta, 1626-1696)이다. 인토르체타는 시칠리아 출신, <중용>을 라틴어로 번역한 예수회 신부이다. 책은 청나라 복장을 하고 있는 아담의 초상화로 시작한다. 명에 마테오 리치가 있었다면, 청에는 아담 샬이 있었다. 3대 황제 순치제와 긴밀했다. 아담이 천문학에 기반 한 달력을 지어 바침으로써 마음을 얻었다. 그 대가로 북경에 성당 건축 허가를 받는다. 교황과 황제 사이, 천문학과 천주당 사이 빅딜이 성사된 것이다.
1689년 여름, 네르친스크의 풍경 또한 상징적이다. 서진하는 중국과 동진하는 러시아가 최초로 만났다. 서쪽에는 동방정교와 서방천주교를 합작시키려는 표토르 대제가 있었다. 동쪽에는 유교와 불교와 회교와 서교까지 아우르고자 했던 강희제가 자리했다. 유라시아의 양대 제국이국경 조약을 맺은 것이다. 대청제국에서 파견된 만 명의 사절단 가운데는 티베트 라마와 예수회 선교사도 있었다. 러시아 쪽 회담장에는 페르시아 카펫이 깔리고 터키(오스만)식 커피로 향긋했다.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와 몽골리아와 만추리아가 네르친스크에서 합류한 것이다. 조약문서는 한문과 키릴문자에 라틴문자로도 만들어졌다. 동반했던 예수회 선교사(Jean-Francois Gerbillon, Thomas Pereyra)들이 작성한 것이다. 다문명, 다문자세계가 공존했던 17~18세기 유라시아형 세계체제를 짐작케 한다.
동방의 천자 강희제는 라틴어를 배우고 서학을 학습했다. 반대 방향으로 유교 또한 유럽에 영향을 미친다. 아담 샬의 후계자로 마르티네스가 저명하다. <중국인 철학자 공자>를 출간한 바로 그 인물이다. 공맹 철학이 한글로도 유통되고 있지 않을 무렵,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구에 전파된 것이다. 그 소산으로 1789년 프랑스혁명, 유럽 최초의 역성혁명이 일어났음은 진즉에 살펴본 차이다. 대청제국 아래 전면화 되었던 한문과 라틴문자 간의 상호 번역이 '중국의 충격'을 가한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상호진화, 유라시아의 천하와 천주는 이미 깊이 연동하고 있었다. 북경은 남/북이 융합되고, 동/서가 회통하는 글로벌 코스모폴리탄 도시였다.
그 아담 샬이 만난 사람 가운데 'Corea Rex'도 있었다. Rex는 왕이라는 뜻이다. 고려의 왕일리 없다. 조선의 왕도 아닐 것이다. 소현을 만난 것이다. 소현이 보냈다는 편지를 <중국포교사>에도 라틴어로 수록하고 있다. 진위 여부는 불투명하다. 번역의 정확도를 따지기도 힘들다. 소현이 한문으로 썼을 친필 서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사이가 무척 좋았음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북경 남당(南堂)의 신부였던 황비묵도 <정교봉포>(正敎奉褒)에서 두 사람을 증언하고 있다. 소현 또한 아담을 통하여 서학에 입문했다. 세례까지 받았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중국 밖 딴 세상의 종교와 학문에 깊은 호기심을 느꼈다. 1644년 조선으로 환국하면서 유럽의 문물을 두루 챙겨 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3. 북벌과 북학
명은 1368년 굴기하여 1644년 패망했다. 276년 존속한 것이다. 조선은 1391년 개국하여 254년째를 지나고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국운이 크게 기울었다. 적폐를 청산해야 했다. 소현은 구시대의 막내가 될 수가 없었다. 신시대의 맏형이 되어야 했다. 신 천하에 부응하여 산하를 재조해야 했다. 신천지를 앞서 보고, 천주까지 먼저 익힌 바였다. 8년, 3000일 견문을 마치고 환국한다. 서른 넷, 팔팔한 나이였다. 포부가 남달랐을 것이다. 비장한 청사진을 품었을 것이다.
리셋 코리아(Reset Korea)의 반석은 '리틀(Little) 코리아'였다. 코리아 타운 심양관은 신하부터 노비까지 상주 인원이 500을 헤아렸다. 청과 상시적으로 접견하면서 정보를 구하고 동향을 파악하는 주심양 조선대사관이자 국가정보원 구실을 했다. 심양-단동-의주-한양 사이 정보 네트워크가 가동되었다. 조선인들 가운데 신흥 제국에 대한 가장 정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청의 핵심 요인들과 친분이 두터워지면서 소현의 재량권도 점차 커져갔다. 대명 의리, 명분이 아니라 정보에 기초한 실사구시 정책을 수립했다. 사실상의 분조(分朝)였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망명정부 혹은 임시정부에 못지않은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리셋 코리아의 반려 또한 든든했다. 소현의 짝 강빈 역시 청과 운명적인 사이였다. 두 사람이 가례를 올린 해가 1627년이다. 정묘호란을 수습하고 나서야 백년가약을 맺을 수 있었다. 강빈은 강골에 강단이었다. 천성이 여장부였다. 땅을 얻어 야판전(野坂田)을 가꾼다. 가축을 키우고 농산물을 길렀다. 식솔들의 살림을 해결하고 코리아 타운의 지역경제를 살렸다. 그래도 남는 물자는 장마당에 내다 팔았다. 마치 누르하치가 그러했던 것처럼 만추리아와 코리아와 몽골리아와 중원 사이 국제무역에 깊이 참여한 것이다. 성격도 활달하여 만주와 몽골 황실 여인들과도 친밀하게 사귀었다. 휴민트(Humint)가 풍부하고 꽌시(關係)가 튼튼했다. 요동 벌판에서 생고생만 하다 귀국한 것이 아니었다. 커녕 비단과 금화 등 재물을 쌓아 돌아왔다. 금의환향한 것이다.
그러나 아들만 못한 아비가 복병이었다. 인조는 졸렬한 인간이었다. 밴댕이 소갈딱지, 도량이 모자라고 함량이 미달했다. 한 마디로 잔 사람이었다. 마음이 자잘했다. 지질하고 쪼잔했다. 세조와 강빈의 환국도 마냥 달가워하지 않았다. 의심의 눈초리로 꼬아보았다. 불평하고 불만했으며, 크게 불안했다. 내외가 공히 청의 핵심 인사들과 친근했다. 노심초사, 아들을 통한 청의 왕권 교체(Regime Change)를 근심했다. 세자는 환국 두 달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온 몸에서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석연치 못한 점은 강빈마저 역모로 몰려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음모론, 공작의 관점에서 추정해볼 여지가 크다. 구체제와 구세력의 반란, 반정(反正)의 기운이 어른거린다. 신시대의 기운을 먼저 들이키고 온 새싹들을 싹둑 제거해 버린 것이다.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일군의 지식인들이 출현한다. 북학파이다. 잔 사람들에게 나라를 맡겨둘 수가 없었다. 깬 사람들이 떨쳐 일어서야 했다. 이념에 찌든 북벌론를 버리고, 경험에 터한 북학론으로 반전시키고자 했다. 소중화에 안주하는 후기조선에 대륙의 대중화를 접목시키고자 했다. 책상 맡에서 붓 대롱만 놀리지 않았다. 고전 문헌에만 파묻히지 않았다. 현지를 답사한다. 필드워크를 결합시킨다. 연행이라는 공식 시찰 기회를 적극 활용했다. 구석구석 관찰하고 기록했다. 석학부터 민초까지 직접 만나 인터뷰를 땄다. 형식 파괴, 새로운 문체도 실험한다. 실사구시와 이용후생, 실학을 탐구했다. 척화론의 대명사 김상헌의 후손 김창업마저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 청나라를 보노라니 "짱꼴라"라 무시할 수가 없었다. 혁신과 첨단의 요람이었다. 오랑캐일지언정 배울 것은 배우자고 했다. 1778년 박제가는 <북학의>를 쓴다. 1780년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쓴다. 1790년 유득공은 <발해고>를 쓴다. 북방으로, 대륙으로, 고려로. 발해를 꿈꾸며, 반도의 숨통을 틔우고 기혈을 뚫고자 했다.
열하에만 이르러도 중원 밖 별세계가 펼쳐진다. 몽골과 티베트와 위구르에 서구와 동구까지 아우른다. 중화세계의 외부, 동아시아 너머 유라시아에 접속한다. 대청제국의 대성공에는 다민족과 다문명을 아우르는 융화정책이 있었다. 만족과 몽족, 한족과 회족에 장족까지 포용했다. 유목문화와 유교문화, 불교문화와 이슬람에 기독교까지 공존했다. 오족융화, 다문명 융합을 달성한 것이다. 유연했기에 단단하고 탄탄할 수 있었다. 부드럽지 못하면 딱딱해진다. 뻣뻣해지고, 뻑뻑해진다. 후기조선이 딱 그 꼴이었다. 부러질 듯 경직되었다. 이웃나라라고 하기에 청과 조선은 너무나 달랐다. 청은 유라시아형 제국이었고, 조선은 유럽형 국민국가에 가까웠다. 북학에서 서구형 근대의 맹아를 찾는 지난 세기의 발상은 크게 헛짚은 것이다. 실상은 유라시아의 초기 근대에 참입하고자 했던 사상적, 정치적 운동이었다. 그러나 결국 국학으로까지 승격되지 못한다. 문체반정(反正)으로 철퇴를 맞는다. 반정에 반정을 거듭하는 반동의 세월이었다.
4. 개화와 개벽
동북 3성, 유라시아 견문을 마감하는 거점이 심양이었다. 어느새 인구 천만, 메가시티이다. 하얼빈과 장춘과 더불어 동북의 중추를 이룬다. 각자 개성이 뚜렷하다. 하얼빈은 러시아풍으로 화려하다. 장춘은 일본풍으로 웅장하다. 심양은 만주풍으로 고즈넉하다. 전통의 아취가 풍기는 옛 도시의 품격을 갖추었다. 그 정취의 고갱이가 심양 고궁일 것이다. 고궁에서 멀지 않은 쫑지에(中街)에 임시 거처를 구했다. 아침저녁으로 고궁 일대를 산책하며 생각을 궁글렸다. 대동문의 이름은 무근문(撫近門)이요, 대서문의 명칭은 회원문(懷遠門)이라. 가까운 것은 어루만지고, 먼 것은 품는다는 뜻이렸다. 대청제국 초기의 건강한 기풍이 묻어난다.
소현으로부터 400년이 흘렀다. 19세기 다산 정약용이 구현했던, 20세기 도마 안중근이 착근했던, 천하일가 동서회통의 들머리에 17세기 소현이 자리했다. 북방과 중원과 서역이, 서구와 동구와 아시아가 전면적으로 소통하는 유라시아 초기 근대의 여명을 가장 앞서 보았다. 조국을 향한 애끓는 애국심과 만국을 향한 들끓는 호기심이 어울릴 수 있었다. 조국과 만국의 상호진화, 천하위공의 세계화를 표방할 수 있었다. 동유라시아를 터전으로 삼는 진취적인 시공간 감각을 고양시킬 수 있었다. 토착적 세계주의의 원조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부질없는 공상이다. 역사에 가정일랑 없다. 소현이 국왕이 되고 북학이 국학이 되었더라면 20세기의 풍경 또한 달랐을 것인가. 식민지로 떨어지지 않고, 분단국으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인가. 역사야말로 천지인(天地人) 복합계의 소산인고로 쉬이 단정하기 힘들다. 냉엄하게 20세기 대청제국의 몰락을 복기하노라면, 대한제국의 운명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만큼 서세동점의 파고가 거칠고 험했다. 천하대란을 면치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질과 기풍만은 달랐을 것 같다. 제도는 수입할 수 있다. 체제도 빌려올 수 있다. 그러나 북벌론 이래 그 교조적인 사고관과 옹졸한 세계관과 편협한 태도는 변함이 없는 듯하다. 유연하지 못하고 딱딱하다. 탄력적이지 못하고 포용력이 떨어진다. 적폐 중의 적폐이다. 극단적이기는 19세기 개화파도 척사파도 매한가지였다. 대화와 타협과 연합과 통합과 연정이 안 되는 제 잘난 사람들이었다. 꼿꼿하고 뻣뻣하다 꺽여버리기 일쑤였다. 너 죽고 나 살자, 자승자박 제로섬에 능했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윈윈에 능숙하지 못했다. 시대를 근본적으로 탐구하는 깬 사람들보다는 시류에 편승하는 잔 사람들이 많았다. 북학의 점진적 적응 과정이 망실됨으로써, 가로 늦게 서학 맹신주의로 휩쓸리고 말았다. 근본 없는 개화파와 줏대 없는 소인천하로 빨리빨리 일백년을 질주해 온 것이다. 근본으로부터의 변혁, 뿌리로부터의 혁신, 천명을 받드는 혁명이 부재했던 것이다. 따라하기와 따라가기에만 능란했으니, 스스로 일어나는 자력과 저력이 모자라다. 저 대륙모양 회심의 '신시대'를 선포하는 배짱과 배포가 턱없이 부족하다.
아주 없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북학파의 좌초와 서학파의 득세 사이 다른 근대, 다른 20세기를 모색한 한 줄기 동학(東學)이 솟아났다. 무분별한 개화파와 무책임한 척사파 사이 개벽의 길을 열고자 했다. 천일을 돌고 돌아 귀의하고 있는 것 또한 동학의 첫마디, '다시 개벽'이다. 천하대란의 꼭두새벽, 유학과 서학을 융통하는 아래로부터의 변혁, 다른 하늘이 다시 열렸다. 1998년 풋내기 새내기 개화파로 출발했다. 2018년 꼬박 마흔, 개벽파로 귀의한다.
심양에서 서울로 가는 대한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고작 1시간 10분 거리, 이웃도시이다. 단동에서 의주, 평양과 개성으로 직통하지 못하고 서해로 빙 에둘러 인천으로 들어간다. 2011년 도미(渡美) 이후 7년 만에 고향에서 설을 쇠었다. 북조선이 참여한 평창 동계올림픽이 한창이었다. 경기장 밖에서는 재차 북벌과 북학이 충돌했다. 개벽 없는 개헌 논의도 무성하다. 혁명은 온데간데없이 세력교체, 반정(反正都)만 남루히 남았다. 개화파의 막내, 민주화 세대 명망가들의 민낯이 까발려지는 #미투 운동도 타오르고 있다. 정녕 사람다운 사람 없이, 나라다운 나라 없다.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 했던 일백 년 전 선각자의 성성한 외침을 거듭 되새긴다. 그 울림이 메아리치는 익산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정월대보름, 미륵산을 오르내리며 마지막 문장을 궁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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