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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 열광적이었던 왕가위 영화를 다시 들춰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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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 열광적이었던 왕가위 영화를 다시 들춰보며

[김윤태 칼럼] 도시 풍경과 현대성의 성찰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어느 책에선가 일본에 갈 때 영화 <란>(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1985)의 깃발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홍콩에 갈 때 영화 <중경삼림>(1994)의 거리 풍경을 보고 싶다. <중경삼림>은 왕가위(왕카이웨이)의 최고 영화는 아닐지 모르지만, 홍콩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기도 한다. 영화는 1994년에 만들어졌고 시대는 1960년대로 거슬러가지만,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1990년대 홍콩의 누벨 바그를 주도한 왕가위의 신화는 정말 평범한 이야기를 통해 최정상에 올라갔다.

영화의 플롯과 스토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실 어떤 면에서 왕가위 영화의 주제는 사실 평범하다 못해 진부하다. <화양연화>(2000)는 두 남녀의 혼외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이런 영화는 이미 영화사에서 수천 편이 넘는다. 왕가위가 말했듯이 이런 주제로 영화에서 성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왕가위는 1960년대의 도시 이미지를 감각적 스타일로 황홀하게 복원했다. 어떤 사람은 왕가위가 내용보다 스타일에 더 치중했다고 불평할 수 있다. 그래서 <화양연화>도 실제 모습보다 과장되게 묘사하고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 말은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다. 만약 다큐멘터리처럼 실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면 영화의 맛이 사라질 것이다. 영상을 통해 창조된 영화적 분위기가 중요하다. 히치콕 감독이 말했듯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토리나, 원작 소설의 플롯이나, 배우의 연기가 아니라 바로 순수한 '영화의 힘'이다.

▲ 영화 <화양연화> 스틸컷.

왕가위의 영화는 히치콕의 스케치 그림처럼 철저하게 공간의 수학적 배치가 이루어진다.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처럼 기하학적 분위기를 통해 현대적인 도시의 느낌을 살려낸다. 홍콩이공대학에서 공부한 왕가위의 전공은 미술 디자인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영상은 마치 한 편의 그림 또는 사진 작품과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촬영감독은 크리스토퍼 도일이 맡았지만 왕가위의 미술적 취향이 담겨 있다. 영화의 스틸 사진은 윙시아의 작품인데, 영화를 찍고 나서 별도로 촬영했다. 그의 사진은 약간 초점이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중심에서 벗어났으며, 뭔가 기술적 오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바로 왕가위의 연출이 담겨 있다. 왕가위는 윙시아에게 "어떤 남자가 사진 속으로 걸어오는 것을 상상해보라"고 주문했다. 그렇게 왕가위의 전설적인 스타일이 탄생했다.

왕가위와 히치콕의 다른 점은 서스펜스가 아니라 로맨스를 아름답게 그려낸다는 점이다. 마치 톰 포드의 <싱글 맨>(2009)처럼 (아쉽게도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환상적인 색상과 빛은 영상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카메라의 각도는 좁은 골목에 올라가는 장만옥(매기 청)을 따라 올라가고, 반대편으로 내려오는 양조위(토니 량)를 따라 내려간다. 그들의 만남은 언제나 관객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아련하게 만든다. 어쩌면 그의 로맨스는 서스펜스를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히치콕과 유사하다(히치콕이 말했듯이 서스펜스와 공포는 다르다). 히치콕과 마찬가지로 왕가위의 영화에는 그 만의 독특한 미학과 사회를 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속도와 시간

왕가위의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빠른 장면의 변화이다. <중경삼림>에서 경찰이 범인을 쫓는 장면은 빠른 화면의 변화로 관객의 시선을 압도한다. 레인코트를 입고 노란 가발과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임청하(브리짓 린)가 총을 쏘며 달리는 장면은 전광석화처럼 빠르다.

이런 빠른 화면은 <아비정전>(1990)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볼 수 있다. 홍콩 지하철을 보여주는 모습은 압권이다. 이렇게 쏜살같이 움직이는 이미지는 대도시 생활의 단면을 보여준다. 사실 뉴욕을 제외하고는 홍콩의 도시처럼 정신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도시는 거의 없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홍콩에 간다면 그곳 지하철의 에스컬레이터가 서울보다 훨씬 빠르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빠른 영상 이미지는 도시의 삶이 긴박하게 움직이는 현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전문가의 관점에서는 리얼리티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너무 빠른 장면은 분명 과장이고 의도적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이야말로 영화가 갖는 특수한 효과이다. 현실을 과장하여 영화가 의도하는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사실 이소룡(부르스 리)의 <용쟁호투>(1973) 등 무술 영화의 빠른 손동작은 같은 속도라 해도 영화 속에서 더욱 극적인 느낌을 준다.

빠른 영상의 이미지가 도시 생활의 속도를 과장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우리가 그것에 공감하는 이유는 바로 실제 도시 생활이 빠르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거리의 자동차는 빠르게 움직이고 사람들은 주위에 무심한 채 빠르게 거리 속으로 사라진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의 동작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간이다. 도시의 삶에서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아침에 출근하는데 1시간이 걸려도 우리는 느리게 지나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회사에 가만히 앉아서 8시간 근무해도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고 느낀다. 왜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느끼는 것일까? 여기에 현대 생활의 중요한 본질이 있다. 시간은 그대로인데 바로 우리의 느낌이 달라진 것이다.

시간 관리의 일상화는 현대 산업 문명의 중요한 요소이다. 농업 문명에서도 시간을 활용했지만 산업 문명은 더 철저히 시간을 통해 인간을 지배했다. 20세기 초 경영학을 창시한 윌리엄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는 '시간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노동운동은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면서 세계적 연대 운동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사라졌다. 오늘날 앨빈 토플러가 말한 '제3의 물결'이 오고 유연근무와 재택근무가 늘어나도 우리는 늘 시간에 쫓기며 살아간다. 동시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더 빨리 움직이기를 원한다. 거리가 막히며 자동차가 느리다고 원망한다. 택배 배달이 늦으면 빨리 오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심지어 카톡을 보내도 상대가 1시간 동안 응답이 없으면 기분 나빠한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없던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도시의 삶은 점점 빠르게 느껴진다. 왕가위 영화 속의 빠른 영상 이미지는 도시 풍경의 파편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우연과 필연

왕가위의 영화에서 중요한 특징은 서사의 개연성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현실성도 없을 뿐 아니라 어떤 캐릭터도 전형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일상생활에서 작은 에피소드를 우연한 계기를 통해 그대로 드러낸다. <중경삼림>에서 경찰관 양조위를 좋아해 집에 몰래 들어가 청소를 하는 왕페이의 모습은 작위적일 뿐 아니라 아예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장면에서 서스펜스를 느낀다. 왕페이가 양조위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면서 히치콕 영화와 같은 조마조마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이게 바로 영화가 가지는 힘이다. 영화는 단순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청중을 빨려들게 만들어야 한다. 청중의 감정이입이 없다면 영화는 실패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에서 인과관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영화에서 탐정소설이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심지어 범인이 분명한 범죄영화에서도 의외의 반전을 보여주는 플롯이 없다면 청중은 흥미를 잃는다. 왕가위는 이러한 관객의 심리를 꿰뚫고 아예 모든 사회적 관계의 인과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사람들의 관계는 우연성에 따라 표류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초현실적이다. <중경삼림>에서 경찰관 금성무(타케시 카네시로)와 마약 중개상 임청하가 만나는 장면은 아무런 인과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떤 만화에서도 이런 장면을 보여주지는 않을 것이다. 마치 카프카의 소설 <심판>이나 <성>에 나오는 어리둥절한 장면이 떠오를 정도이다.

영화 속의 사회적 관계에서 권력, 명예, 지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는 자본주의, 관료제, 익명의 감시 체제도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중경삼림>의 주인공들은 성공한 사람들이나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경찰관, 가게 주인, 비행기 승무원 등 평범한 이웃 사람들이다. 돼지고기 덮밥과 완탄, 국수 등 길거리 음식을 먹는 서민의 풍속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때로는 빈곤의 비참함도 보여준다. 그러나 어떠한 항의도 계급투쟁도 개혁을 위한 행동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고 허망하게 헤어지는 장면 속에서 청중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오늘날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는 우연적 에피소드의 연속처럼 느껴진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이민과 이주가 급증하고 우리는 가까운 이웃이 전혀 낯선 사람으로 가득 찬 현실을 목격한다. 뉴욕, 런던, 파리를 분석한 사회학자 사스키아 사센의 '글로벌 도시'는 홍콩의 도시 풍경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홍콩섬 센트럴의 증권거래소는 전 세계의 돈이 24시간 움직인다. 한편 구룡반도 침사추이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충킹 맨션'에는 '홍콩의 아프리카'로 불릴 정도로 하루 종일 다양한 이민자들이 북적인다. 인류학자 고든 매튜는 충킹 맨션을 '세계 중심의 게토'라고 불렀다. 인도와 동남아 뿐 아니라 아프리카 등 전 세계 각지의 무역상과 가난한 이주노동자들이 가득하다. 1층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커리 냄새가 진동하여 전혀 다른 나라에 온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거기에서 금성무와 임청하는 서로를 모른 채 스치듯 지나간다. 그러나 그런 우연한 만남이 단지 무의미나 권태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밀란 쿤데라가 말한 <무의미의 축제>(방미경 옮김, 민음사 펴냄)는 사실 도시 생활의 전부를 보여주진 않는다. 우리는 연속적인 우연성 속에서 어리둥절할 때도 많지만 오히려 권태를 느낄 여유도 없을 때가 많다. 홍콩 지하철을 가득 메운 통근자들이 모두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위챗 메시지를 보내고, 게임을 하고,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권태를 느낄 틈이 있겠는가? 프랑스어로 권태(아뉘)는 단순한 지루함이 아니라 삶의 무의미함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1990년대 학계에서 포스트모던 현상의 사례로 많은 관심을 끌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루함도 무의미함도 느낄 여유가 없다. 디즈니랜드의 롤러코스터처럼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고,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질주하는 세계는 너무 빠르게 움직이고 우리의 사고는 정지되었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서 계획된 것은 아니다. 누구도 목적지를 모른다. 그냥 누가 만들었는지조차 모르는 규칙들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왕가위의 영화는 우연성을 영리하게 서사 구조 속에 끼워 넣는다. <화양연화>에서 양조위와 장만옥이 서로 자신의 아내와 남편의 역할을 연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두 번의 다른 버전을 보여준다. 그들의 상상에 의한 것이든, 실제에 가까운 것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아내와 남편이 만나는 우연을 그렇게 두 가지 버전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마치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처럼 그 때 우리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다르게 살았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것조차 피한다. 심지어 장만옥이 남편(양조위 분)의 고백을 듣는 장면에서도 두 개의 버전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장만옥이 갑자기 양조위의 뺨을 때리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이 헤어지는 연습도 두 개의 버전이다. 영화적 상상력은 철저하게 우연성에 복종한다. 어디에도 필연적 인과성이 드러나지도, 작은 암시도 주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인간관계나 사회적 현실에 숨겨진 이유와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우연히 만나고, 함께 대화를 하고, 심지어 사랑에 빠지는 행위는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 아니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그 우연 이면에는 필연적 인과성이 존재한다. 단지 우리가 모를 뿐이다. 그러나 왕가위는 너무 복잡한 일에 무리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처럼 마지막 단계에서 진실을 드러내는 장면은 꿈도 꾸지 않는다. 숨겨진 인과성보다 표면에 드러나는 우연성을 아름답게 그려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왕가위의 영화는 나무의 잎보다 나무 위에 반짝이는 빛의 움직임을 그려내려는 파리의 인상파이다.

우연은 항상 뫼비우스의 띠처럼 비슷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우연이 반드시 극적이지는 않다. 왕가위는 <화양연화>에서 좁은 집과 길목에서도 일정한 프레임을 보여주면서 비슷한 장면을 계속적으로 반복한다. 마치 공장의 어셈블리 라인이 돌아가는 것처럼 인생의 장면이 교차되어 흘러간다. 만약 시게루 우메바야시의 '유메지의 테마'와 같은 탁월한 배경음악이 아니었다면 단조로울 수 있는 장면이지만, 왕가위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 장면을 훌륭하게 연출한다. 첼로 선율은 두 남녀의 모순적 상황의 우울한 분위기를 극적으로 표현한다. 냇 킹 콜의 음악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가 흐르는 분위기도 잊을 수 없다. 음악이 흐르고 있다는 점만 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상황과 비슷하다. 영화 <데몰리션>(장 마크 발레 감독, 2015)의 주인공 제이크 질렌할이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길에서 기괴한 춤을 추는 장면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갇혀있는 개인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길에서도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만의 음악을 들으며 자신만의 세계에 머무른다.

고독한 인간

왕가위는 스타일리스트이지만, 조 라이트의 <안나 카레니나>와 달리 스타일의 과잉이 콘텐트를 짓누르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중경삼림>에서 양조위가 모형 비행기를 가지고 비행기 승무원인 애인의 몸 위에서 희롱하는 장면은 3년 후(1997년) '홍콩 반환'의 불안한 모습을 보여준다. 양조위가 길에서 돼지고기 덮밥을 먹는 모습은 서민 생활의 단면을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한 '결정적 순간'처럼 순간을 포착하여 표현한다. 영화의 모든 장면은 직설적 메시지를 던지지 않지만 인간의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왕가위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본질은 인간의 고독이다. 사실 왕가위 자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지 상관없이 그의 모든 영화는 철저히 고독한 인간이 등장한다.

<아비정전>의 장국영(레슬리 청)은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자란 남자인데, 어떤 여자에게도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해피 투게더>(1997)에서는 동성애 남자 두 명이 서로 사랑하지만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관계를 보여준다. <중경삼림>의 주인공 금성무와 양조위는 여자친구에게 실연당한 남자들이다. <화양연화>의 주인공도 고독한 사람들이며 사랑을 이루지 못해 멀리 해외로 떠나고 만다. <2046>(2004)의 초우 선생(양조위 분)은 수많은 여자를 데리고 노는 냉소적 플레이보이지만 사실 고독한 존재이다. 영화 속에서 젊은 주인공들은 낭만적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지고지순한 사랑이나 해피엔딩은 없다. 이쯤 되면 <역마차>(존 포드 감독, 1939)에서 <어벤져스>(1, 2에 이어 2018년 '인피니티 워'까지 총 세 편이 제작됐다)스>에 이르기까지 계승된 헐리우드 영화 문법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기대를 저버려 위험하게 보이기조차 한다. 이러다가 영화 망하는 거 아닌가 걱정이 들 정도이다.

▲ 영화 <중경삼림>의 한 장면 ⓒ중경삼림 스틸컷

하지만 왕가위 영화가 출중하게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는 것은 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독을 느낀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애와 인생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중경삼림>의 영광은 바로 이 보편성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예술과 같은 수준에 가까워졌을 뿐 아니라 종교의 경지에 도달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은 위대한 영웅의 몰락을 보여주면서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원형극장은 오락이 아니라 일종의 종교 행사였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영화 속의 고통 받는 실패자를 보면서 자신을 되돌아본다. 심지어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항상 영웅은 고독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한다. <셰인>(조지 스티븐스 감독, 1953)의 보안관이나 <스타워즈>(1977년 조지 루카스 감독이 처음 선보인 이래 지금까지 시리즈가 이어지고 있다)의 주인공도 고독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고독한 인물을 통해 자신의 고독을 되돌아본다.

사실 왕가위는 부모가 상하이 출신이고, 어린 시절에 홍콩으로 이민을 왔기 때문에 광둥어를 잘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들을 잘 사귀지 못했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이러한 삶은 소년 왕가위의 자유의지와 무관한 우연의 결과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혼자 영화를 보는 시간이 많아지고 결국 그는 영화감독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왕가위의 영화는 자유의지의 박탈과 영화를 보는 선택의 우연적 만남에 의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왕가위가 저장성의 농촌에서 자랐다면 친구는 많았겠지만 영화감독이 될 기회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홍콩이라는 거대한 도시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졌다.

20세기 초 베를린에 살았던 게오르그 짐멜이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대도시의 물가가 비싸고, 생활도 힘들고, 너무 바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몰려드는 이유를 분석했다. 짐멜은 가장 중요한 이유로 익명성을 지적했다. 대도시 사람들은 농촌과 달리 너무 바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다. 길에서 몸이 부딪혀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가기 바쁘다. 대도시에서 익명성은 사람들에게 고독감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 개인에게 자유를 제공한다.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다'는 말은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권리를 표현하는 말이지만, 오늘날 뉴욕, 런던, 파리, 베를린에 괴짜가 많은 것은 단순히 부르주아 계급의 승리의 결과만은 아니다. 대도시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적기 때문에 괴짜에 대해서 관대하다. 만약 조치원의 시골 마을에 결혼 안 한 47세의 미모의 여자가 산다면 별의별 소문이 날 것이다. 그러나 서울 압구정동에서 그 여자가 살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고 새벽 1시 넘어서 집에 들어가도 누구도 뒷 담화를 하지 않는다. 옆 집 사람 이름도 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왕가위는 <화양연화>에서 1960년대 홍콩의 좁은 집에 여러 사람이 같이 살고, 사람에 대해 소문이 돌고, 사회적 규범이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는 시대상을 보여준다. 서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알고, 같이 어울려 마작을 하고, 심지어 주인 여자는 결혼한 성인인 장만옥에게 너무 늦게 다니지 말라며 훈계를 한다. 그러나 양조위가 수년 만에 싱가포르에서 돌아오자 모든 것이 변했다. 주인집 여자는 이민을 떠났고, 새로운 사람들은 서로 옆 집 사람의 이름도 모르고 살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전통적 이웃 공동체의 붕괴와 철저하게 개인화된 사회의 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남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거나 훈계를 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동시에 서로 돕는 모든 인간관계도 사라졌다. 이제 고독은 인간의 필연적인 실존적 특성이 되었다.

왕가위의 영화에서 인생은 혼자 왔다가 혼자 떠나는 것처럼 보인다. 왕가위 영화에서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나 형제와 자매의 관계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도시 속에는 낯선 사람들이 서로의 고독한 공간을 스쳐지나가면서 사실상 따로 따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고독에 빠진 사람들은 사랑을 찾지만 언제나 좌절로 끝난다. 직장의 동료는 숱한 이직 속에 휴대전화 번호로만 남아 있다. 1인가구가 늘어나며 핵가족조차 붕괴될 위기에 처해있다. 물론 홍콩 도심의 식당을 보면 아직도 가족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3대가 모여 식사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러나 그 가족은 또 다른 개인주의의 확대에 불과하다. 가족은 고립된 성과 같다. 중국의 전통 가옥(사합원)은 담에 둘러싸여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되어 있다. 오늘날도 가족을 넘어선 사회적 관계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홍콩에서 위챗과 페이스북에 그렇게 친구가 많아도 그들은 단지 고독한 개인으로 살아간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가족 이외에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잠재적 경쟁자이거나 또는 팔꿈치로 밀어낼 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고독한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현실을 느낀다. 사랑할 사람도 없고, 서로 믿지 못하고, 어려울 때 나를 도와줄 사람도 없다고 느끼면서 점점 불안감이 커진다. 우리가 왕가위 영화에 공감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치 우리도 왕가위가 창조한 인물인 것처럼 왕가위가 만든 사람들 속에 눈에 띄지 않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영화는 도시의 미학인 동시에 사회학적 상상력이 담긴 한 편의 시네에세이다.

사족: 이 글을 쓴 직후에 영화평론가 존 파워스가 왕가위와 인터뷰를 한 책이 한국어로 출간됐다. 그 책을 홍보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왕가위의 영화에 관심 있는 분들은 멋진 사진이 가득한 <왕가위: 영화에 매혹되는 순간>(왕가위·존 파워스 지음, 성문영 옮김, 씨네21북스 펴냄)의 즐거움을 맛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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