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Too) 운동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이른바 '좋은 뜻'으로 움직인다고 여겨지던 국제개발원조와 국제보건의료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연초 대표적 국제개발 NGO인 옥스팜(Oxfam)의 직원이 아이티 대지진 구호 업무 현장에서 현지 여성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저지른 사실이 폭로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국제개발·구호·의료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성폭력 실상이 터져나오며 "#AidToo" (원조 분야의 미투) 운동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한국에서도 SNS에서의 사례 폭로를 시작으로 국제개발협력 분야 미투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최근에는 공개적인 집회를 통해 문제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시도도 있었다. 교수가 연구원에게, 전문가가 실무자에게, NGO 대표가 봉사자에게 등 다양한 피해 사례들이 있지만, 대개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에게 상하 권력관계를 바탕으로 성폭력을 행사하는 형태는 전형적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좋은 뜻으로 움직이는 국제보건의료, 국제개발원조 조직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이러한 조직들은 당연히 성 평등도 보편 인권의 한 가치로 존중하고 있지 않을까? 이 분야에는 실무를 하는 여성들의 수가 많은데 왜 높은 자리들은 중년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을까?
최근 국제보건의료 분야의 성 평등을 지향하는 단체인 'Global Health 50/50'에서 내놓은 보고서는 이러한 의문에 일단의 답을 제공해 준다. 런던대학교(University College of London) 젠더와 국제보건 센터(Centre for Gender and Global Health) 연구진이 주축을 이루어 펴낸 이 보고서는, 국제보건의료 분야의 전 세계 140개 단체를 대상으로 조직 운영과 사업 활동에서 성 평등이 얼마나 실천되고 있는지 따져 보았다. (☞바로 가기 : )
결과는 국제보건의료 분야의 단체들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것으로, 성 평등을 뚜렷이 규정하거나 건강 문제와 결부시킨 단체는 3분의 1 밖에 되지 않았다. 절반이 넘는 단체가 사업 전략에서 젠더를 언급하지 않았고, 단체들의 3분의 2가 자료를 수집하고 알릴 때 남녀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조직 내부적으로도 성 평등 정책을 갖고 있는 단체는 소수로, 여성의 경력 지원 제도를 갖고 있는 단체는 절반 이하였다. 지배와 의사결정 구조에서는 여성이 더욱더 과소대표되고 있었다. 열 개 중 일곱 개 단체는 남성이 대표였고, 열 개 중 여덟 개 단체의 이사회는 남성 위주였다.
저자들은 선행 조사들에 비해 국제보건의료 분야의 성 평등이 나아지지 않은 실태를 우려하였다. 더불어 국제보건의료 단체들이 젠더가 건강과 웰빙에 미치는 영향을 지각하고, 성 평등 정책을 갖고 실천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조사를 해보면 어떨까? 각종 국제보건의료 관련 대학·연구기관, 공공기관과 NGO의 대표가 여성인 경우는 거의 찾기 어려워 보인다. 모성·생식보건 사업을 하는 단체들조차, 과연 성 평등 정책을 보유하고 실천하고 있을까 회의적이다.
한 가지 희망적인 변화는, 한국의 공적개발원조를 책임지는 공식 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 지난해 창립(1991년) 이래 처음으로 여성 수장이 취임했다는 것이다. 여성운동가이자 중진 정치인 출신인 이사장은 취임 후 여성 임원과 보직자 비율 50%를 5년 내로 달성한다는 혁신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향후 이 분야의 미래를 이끌 젊은 실무자와 연구자에 여성이 많으니 자연히 성 평등이 이뤄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업계와 기관 차원에서 성 평등에 대한 의지와 실천이 없는 한 여성들은 리더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탈락해 나갈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서,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이용한 성 폭력부터 없애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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