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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바꿔놓은 사회적 풍경, 그리고 '대전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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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바꿔놓은 사회적 풍경, 그리고 '대전환'의 시작 [기고]자본주의 재생산구조에 심대한 변화 올 것
작년 말 우한에서 확산되기 시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팬데믹 수준에 도달하는 데 불과 3달이면 충분했지만, 그것이 남겨놓은 상흔은 상당히 오래갈 듯하다. 아직 유동적이긴 하나 정부와 지자체의 적극적인 대처, 의료인의 헌신적인 노력, 국난극복의 유전자가 재가동된 시민들의 헌신적인 희생에 기반을 둔 연대로 국내에서 코로나-19의 확산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일정하게 통제되고 있는 듯하다. 혹자는 이를 ‘유럽식 오리엔탈리즘의 종언’으로까지 격상해서 바라보기도 했다. 질병의 제어에 정부의 노력과 시민의 연대가 기여한 성과에 상찬은커녕 흠집을 낼 이유는 전혀 없으나, 팬데믹을 일국적 현상으로 가두어 보기엔 그 위력이 만만치 않다. 문제는 팬데믹의 현상으로 명명된 만큼 바이러스의 창궐은 질병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전지구적 차원에서 사회경제, 정치, 문화,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심대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이다.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총성 없는 전쟁에 비유할 만큼 막강해서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의 숫자가 웬만한 전쟁에서 쓰러진 전사자 수를 넘어섰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이 팬데믹 현상의 발원은 아직까지 불투명하지만, 확산은 공공의료 대신 수익중심의 의료 민영화체계(의료 인력과 환자에 대한 병상배치)라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산물이며, 질병의 통제방식에서 드러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자발적)억압은 더 기이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질서를 재구성하는 사회화(Vergesellschaftung)에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이 질병이 초래한 다양한 국내외적 현상을 보자. 국제공동체의 질서보다 자국이익을 앞세우는 트럼프의 신현실주의적 노선은 이전부터 분명했지만 코로나-19가 확산되자 중국은 물론 트럼프를 비웃던 유럽조차 흡사 중세시대의 성곽도시국가처럼 자기면역적 국가 공동체를 앞 다투어 선언했다. 이점에서 한국은 그와는 다른 모범적 사례를 보여주었지만 향후 포스트-코로나 세계에서 국제질서의 안보와 공동의 이익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이러한 신현실주의적 행태의 선례가 국제무역, 자원외교 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코로나 19의 확산을 막는 과정에서 나라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국가가 하나의 병기창고로 전환되고, 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위생에 대한 수칙 강요를 넘어 각급학교와 공공장소의 폐쇄,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의 이름 아래 스마트폰 감청에 의한 개인 동선의 추적 등은 안전에 대한 기대속에 민주적 자유권을 포기하는데 별다른 저항을 불러오지 않았다. 파시즘이라는 이탈리아의 특수한 정치경험에 기반을 둔 아감벤의 ‘비상국가’ 해석(그가 인용한 기초적인 통계도 엉망진창이다!)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정부의 통치기술에서 유사한 상황의 징후는 발견되고 있다고 하겠다. 무엇보다 정치적 신체의 안보를 대가로 우리가 얼마나 빠르게 자유를 희생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러한 자유와 안보의 변증법은 포스트-코로나 이후의 세계에서 우려되는 대목이다. 이러한 행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놀랄 만큼 바이러스가 인간의 심리적 패닉상태를 합리적으로 정상화하는 방식이다. 곳곳에서 목격되는 코로나 사재기(생필품, 마스크), 자가격리와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안에 갇혀 지내면서 증가하는 스트레스와 가정폭력, 공장이 멈추고 대중교통 이용은 줄어드는 대신 자가용 이용은 늘어가는 합리화된 패닉행동은 역시 포스트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지불해야할 사회적 비용이다. 근대 이전의 주권자의 권력이 사람을 ‘죽게 하거나 살게 만드는 권력’이었다면 근대의 권력은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라는 푸코의 생명정치(bio-politics) 해석은 노동현장에서 자신의 신체를 규율하고 감시하는 규율권력 개념과 함께 이 현상을 설명하는 사례로 다시 빈번하게 소환되고 있다. 인종적 편견에 기초한 국경폐쇄와 신체에 대한 규율과 통제(자가격리 위반시 가혹한 처벌)라는 기제가 중국만이 아니라 서구에서도 목격된다는 점에서 일면 타당한 점이 있다. 그러나 푸코가 보지 못한 점은 배제와 내면화, 규율권력이 결합하여 사회 스스로가 패닉 행동을 합리화하는 일들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자가격리와 사회적 거리두기가 공공주거와 공공의료의 축소(최근 민영화 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디지털 기술에 의존한 사회적 소통의 단절(사람과의 접촉에 대한 불안감) 등도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사회적 격차의 확산에 적지 않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이후 감염병, 방역전문가들로 구축된 새로운 권력-지식-장치는 기존의 자본주의 질서의 민감한 부분(생산-유통-소비중단)에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일단 자본주의의 야만적 생산방식은 전문가들의 조언에 굴복하여 부분적이나마 세계의 공장을 중단시켰다. 물론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경제위기를 빌미로 거대한 구조조정과 고용유연화, 해고는 불을 보듯 뻔한 수순일 테고, 이는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코로나-19의 위기는 대단히 구조적이고 심층적인 자본주의의 위기와 중첩해서 새로운 ‘대전환’을 예고한다. 이미 현재의 자본주의는 2008년 ‘대침체’ 이후 지속적인 위기국면이 지속되고 있는 중이며, 코로나-19 발발 이전에도 국제적 규모의 이주민 이동은 노동시장의 필요 때문에 선택적으로 허용되었고 비인권적 탄압과 통제는 점점 더 강화되고 있었다. 나아가서 산업자본의 미래로 개조된 ‘그린뉴딜’의 시대를 합리적 자본가들이 받아들일 만큼 기후환경의 문제도 심각하다. 팬데믹으로 인해 발생한 패닉행동의 합리화와 이를 극복하려는 다양한 전략은 이 모든 비규범적 선행 위기와 중첩하여 자본주의 재생산구조에 심대한 변화를 초대할 것이다. 물론 독일의 ‘Schwarze Null’(Black Zero)정책의 폐기처럼 경제적 측면에서 신자유주의의 재정균형의 신화가 깨지는 바람직한 일도 발생하지만, 생산의 측면에서는 더욱 가혹한 일들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케인즈주의적 수요정책에 기댄 재난(기본소득)정책이 자본주의의 톱니바퀴인 생산과 소비/분배의 문제를 대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생산방식이 구축되는 과정에서 방관자가 되지 말고, 기존의 생산관계를 너머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물질대사를 보존하고 새로운 사회안전망을 민주적으로 구축하는 실험을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점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볼프강 슈트렉이 ‘사회기반시설의 공산주의’(Infrastrukturkommunismus)를 주장할 만큼 포스트 코로나 이후 시민이 감내해야할 고통의 수준은 심각해 보인다. 국가의 방역전략과 그로부터 감내한 사회적 패닉 행동의 합리화가 일시적으로 올바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미래의 보편적 행동이 되려면 주류경제학자들이 약방의 감초처럼 써먹는 ‘모든 조건이 동일하면’(ceteris paribus) 이라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어려운 상황에서 방역에 힘쓴 전문가와 민주정부의 결단, 이를 묵묵히 감내한 민주시민의 희생이 대단하고 칭찬할 일이나 전지구적 차원에서 우리 앞에 놓여있는 가시밭길을 피할 도리는 없어 보인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대전환의 서막은 이제 막 시작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글은 4월13일 <대학지성 In&Out>에도 실렸습니다. 필자와 <대학지성 In&Out>의 동의를 얻어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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