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북아일랜드는 우리와 비슷한 분단, 분쟁, 평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48년에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남북이 갈라졌고, 1990년대까지 이어진 독립을 요구하는 아일랜드계 주민들과 영국 잔류를 지지하는 세력 간 유혈분쟁으로 사망자는 3500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곳은 평화체제 정착에 있어서는 한반도보다 한 발 앞서 나가고 있다. 1998년에 '벨파스트/성 금요일 협정(Belfast/Good Friday Agreement)'을 체결한 이후 북아일랜드는 '유럽의 골칫거리'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평화구축의 모델로 자리잡았다. 한반도 평화가 아직 깨지기 쉬운 꿈으로 남아있는 우리에게 북아일랜드는 어떤 교훈을 줄 수 있는가? 필자는 북아일랜드에서 진행 중인 갈등관계를 넘어선 환경협력을 예시로 환경, 평화, 안보를 통합적으로 아우르며 '녹색 평화'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정치개혁, 안보개혁, 경제재건 등 여러 면에서 북아일랜드는 다른 분쟁 후 사회(post-conflict societies)에 비해 훨씬 안정적으로 평화체제를 구축했고,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행기 정의 및 과거사 문제, 사회적 트라우마, 공동체 간 분열, 평화체제에 반대하는 지하 무장조직 등 여러 사회문제들이 잔존하고 있으며, 환경문제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갈등이 자연환경과 자원갈등이 원인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평화과정에서 큰 관심을 받지 못했고, 평화협정 체결 이후 사회재건 과정에서는 경제개발을 이유로 환경문제 해결은 외면받았다. 북아일랜드 지구의 벗(Friends of the Earth Northern Ireland) 대표 제임스 오어(James Orr)는 '북아일랜드 자연환경은 북아일랜드 평화과정의 잊혀진 희생자'라고 평했을 정도로 이곳의 환경오염은 영국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심각하다. 대표적인 환경오염 사례로 북아일랜드 제2의 도시 데리(Derry, 공식 명칭은 런던데리Londonderry)에서 발견된 약 150만 톤에 달하는 폐기물이 매립된 모부오이(Mobuoy) 지역 사건이 있다. 연루자들이 아직 재판 중에 있는 이 사건은 2012년에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지금까지도 북아일랜드 정부는 정화비용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있으며 매립지는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북아일랜드 전체 인구는 180만 명 정도로 이 매립지 한 곳에서만 국민 1인당 약 1톤의 정화비용을 책임져야하는 상황임을 생각하면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셈이다. 2013년 이 사태의 원인을 조사한 보고서(Mills Report)는 이와 같은 불법 폐기물 범죄가 북아일랜드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미약한 환경규제와 법집행기관의 직무유기 때문이라고 정리하였다. '환경오염은 국경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하듯이 모부오이 지역에 매립된 폐기물은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 사이 국경에 걸쳐있는 지역 식수원을 위협하며 데리 지역 주민들은 물론 아일랜드 주민들의 건강도 위협하고 있는 처지이다. 이후 걷잡을 수 없는 규모의 사태를 해결하고자 북아일랜드 환경청을 중심으로 민관협의체(Mobuoy Waste Stakeholders Group)가 발족했는데, 이 기구는 정부와 시민들, 그리고 서로 이질적인 공동체에 속한 주민들 간 환경협력을 통해 평화와 안보를 증진할 수 있는 방식으로 꾸려졌다. 사실 데리는 20세기 북아일랜드 유혈분쟁 역사의 중심에 서있는 도시로, 북아일랜드 내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근거지였으며, 1972년 아일랜드 주민들이 영국군에게 피살당한 '피의 일요일 (Bloody Sunday)'이 벌어진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은 1998년 평화협정 체결 이후 지금까지도 아일랜드계 주민들과 영국계 주민들의 거주지역이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는 곳이다. 이런 갈등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생명을 위협하는 불법 폐기물 매립지를 해결하기 위해서 환경청과 지역 환경단체는 물론 서로 대립관계에 놓여있던 아일랜드계 주민들, 영국계 주민들, 그리고 경찰 등 법집행기관들이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민관협의체를 통해 정기적으로 대화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또한 이 협의체에서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일랜드 지역 주민단체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처럼 환경문제는 유혈충돌 등 갈등관계에 놓여있는 집단 사이에 협력과 이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환경협력에 기반한 평화구축(environmental peacebuilding)'이라는 이름으로 관련 프로젝트들이 진행 중이다. 이러한 평화구축 방식은 지역의 상황에 따라서 평화체제 구축 또는 유지 둘 다를 위해 채택할 수 있으며, 북아일랜드의 경우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앞서 모부오이 민관협의체의 사례로 볼 수 있듯이 환경협력에는 환경단체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평화로운 관계를 도모하고, 지역사회와 국가의 안보에 기여하는 사법기 등 여러 당사자들이 참여해야 더 포괄적으로 의제를 다룰 수 있으며 지속가능한 평화구축 활동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을 환경-평화-안보 넥서스(environment, peace and security nexus)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 넥서스 접근이 자연환경을 보호하고 평화 및 안보를 증진하는데 무조건적으로 낭만적이고 완벽한 해법은 아니다. 넥서스 접근은 참여주체들 간 문제 해결 목적과 방식의 차이를 피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직면할 수도 있다. 모부오이 폐기물 사태의 경우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즉 브렉시트(Brexit)라는 커다란 외부 충격에 직면한 상태이다. 아일랜드 섬 남북을 가로지르는 이 '아일랜드 국경(the Irish border)'은 아일랜드 식민역사, 북아일랜드 분쟁의 상징인 동시에 남북협력과 평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2020년 2월 1일 영국은 유럽연합을 떠났지만 여전히 아일랜드 국경은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며, 이는 성 금요일 평화협정에도 명시된 사안이어서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 유럽연합은 현 상태 유지를 주장하는 반면 영국은 '노딜 브렉시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국경통제를 주장하면서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환경협력과 평화관계 유지를 위해서는 국경은 지금처럼 계속해서 개방된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국가의 '안보'를 이유로 아일랜드 국경은 닫힐 위기에 놓여있다. 다만 자유로운 국경 이동이 가능한 지금 상황에서 모부오이 폐기물 매립지 사례처럼 국경을 넘나드는 범죄조직의 활동도 그만큼 용이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러한 딜레마는 넥서스 관점을 채택하는 순간부터 이미 내재되어 있으며, 완전히 해소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순진하게 들릴 수 있지만 딜레마를 해결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환경, 평화, 안보 넥서스의 어느 한 부분이 완전히 희생당하지 않도록 딜레마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접근할 때 환경보호와 평화구축, 안보증진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을 가능성이 높다. 딜레마를 푸는 하나의 방식으로는 권리 기반 접근(rights-based approach)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문제 해결에 있어서 누구의 어떤 권리를 어떻게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답을 찾는 과정에서 특정 소수자 또는 주변화된 집단이 배제되지 않도록 하며, 권리담지자들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구조적 조건들을 고려할 수 있도록 고려한다. 모부오이 민관협의체의 경우 불법으로 매립된 폐기물로 인해 실질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주민들의 요구와 자연생태계의 보전, 그리고 협력의 공간으로서 아일랜드 국경이 브렉시트라는 국경통제 계기로 인해 완전히 희생당하지 않도록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인간이 아닌 '자연의 권리'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환경-평화-안보 넥서스 관점을 적용해서 만들어진 한반도 평화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에게도 아일랜드 국경처럼 남북을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와 바다 수역이 있다. 이 공간은 지난 70년 동안 분단을 상징하는 국지적인 무력충돌이 발생해온 안보의 최전선이자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아 자연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전되고 있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그러나 38선에 걸쳐있는 한반도의 자연유산도 전 세계적인 기후재앙으로 인한 악영향을 피해갈 수 없으며, 따라서 이곳을 보호하기 위한 남북협력이 절실하다. 특히 비무장지대 북쪽은 화전농업 인한 산림파괴가 심각하며, 대규모 자연재난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산림보전 협력이 우선순위로 손꼽힌다. 자연환경 보전협력은 북핵문제가 상징하는 남북 분단을 둘러싼 갈등과 다소 거리를 두고 진행될 여지가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북 당사자간 접촉이 늘어나고, 상호 이해를 도모하는 '그린 데탕트'의 가능성도 내다볼 수도 있다. 즉, '휴전선 남북한 환경협력'은 환경과 평화가 만나는 지점인 것이다. 다만 안보를 둘러싼 딜레마도 존재한다. 비무장지대와 해상 수역을 따라서 남북 양측의 군대가 배치되어 있으며, 비군사적인 이동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환경협력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대로 적극적인 환경협력을 꾀하는 과정에서 국경지대 공동경비 방안 등 안보 문제가 수면위로 올라온다. 결국 최적의 결과는 넥서스의 관점에서 환경단체, 정부, 군 등을 아우르는 환경협력 관련 당사자들이 모두 모여 휴전선 일대의 안보를 함께 유지하는 한편 공동 산림보전 등 환경협력을 추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철망으로 둘러싸인 비무장지대에 비해서 표시가 뚜렷하지 않은 남북한 해상경계의 상황은 좀 더 복잡하다. 특히 서해안의 경우 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싼 갈등이 언제라도 무력충돌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2018년에 남북한 정부는 북방한계선(NLL) 갈등의 해법으로 '서해안 평화수역'을 선언했지만, 국경의 지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남북한 평화관계가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하면서 평화수역 선언이 환경협력 촉진 등 실질적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협력을 필요로 하는 환경의제들도 상당하다. 예를 들어 북한 해역을 통해 내려오는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 공동 대응 문제도 있고, 해상 생태축을 잇는 활동도 필요하다. 후자의 경우 시민사회가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영역인데, 예를 들어 인천녹색연합 황해물범시민사업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점박이물범 보호사업이 그러하다. 인천시 주민참여예산으로 지원을 받은 이 활동은 현재 백령도 점박이물범 보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멸종위기종인 이 물범들은 겨울 번식기에는 북한을 거쳐 러시아와 중국까지 올라갔다가 봄이 되면 남한까지 내려오는 습성을 보인다. 서해안 자연생태계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인 이들의 멸종은 해양생태계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점박이물범을 온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시민사회 활동을 지원하여 북한과는 물론 한반도를 넘어서 중국과 러시아를 망라하는 점박이물범 연구 및 생태계 보전협력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환경협력을 위해서는 비무장지대와 마찬가지로 경계를 평화로운 협력공간으로 전환하기 위한 정치적인 합의와 안보에 대한 남북한 군대의 합의가 앞서 매듭지어져야 한다. 또한 한반도 백두대간 생태축 잇기 등 온전한 한반도 자연환경 보호를 위해서는 남북한 평화관계가 함께 구축되어야 한다. 안보 측면에서 비무장지대 및 평화수역에서 무장충돌은 물론 군사안보 문제가 국경지대 협력을 위협하지 않도록 남북한 공동의 노력과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참여도 필요하다. 남북 정부는 정부의 결정에 의해서만 협력의 여지가 열릴 수밖에 없는 현 상황이 지속적이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남북협력을 위한 정부 간 합의는 분명 남북협력의 물꼬를 트는 중대한 계기이다. 한발 더 나아가 한반도에 녹색 평화의 씨앗을 심는 '아래로부터 협력관계'가 튼튼하게 다져질 때 '위로부터 남북관계'가 어려운 시기에도 갈등을 버틸 수 있는 완충지대가 만들어질 수 있다. 우리는 환경협력을 통한 평화관계 및 안보 구축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더 급진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백두대간의 권리, 서해안 멸종위기 동식물들의 권리 등 자연의 권리를 환경-평화-안보 넥서스에 결합하기 위하여 많은 토론과 실험적인 시도들이 필요하다. 한반도 협력에 있어 환경-평화-안보에 대한 통합적인 넥서스 접근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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