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참사 일주일만에 시작된 ‘유족 혐오’에 대한 기사가 지난 5월 6일 경향신문에 실렸습니다. 세월호, 백남기가족 등 참사때마다 무참한 혐오가 하나의 패턴처럼 반복되고 있습니다.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유아, 부모, 난민, 장애인 등 약자와 소수자에 대해서도 혐오표현이 만들어지고 유통됩니다. 물론 이런 혐오는 전체가 아니라 ‘25.9%의 정체성 집단-천관률기자와 정한울박사의 저서 <20대 남자>에서 언급’에 한정된 문제일 수 있으나, 그 자극성에 기대어 이슈가 되고 이슈가 일상으로 확장될 가능성에서 혐오의 생성과 유통에 대한 사유는 필요합니다. 혐오표현을 범죄로 보고 대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으나 처벌보다는 예방이 우선이고 예방은 교육, 특히 입시로부터 자유로운 대학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으나 취업 중심으로 재편된 한국 대학에서는 타자 혐오를 비롯한 사회적 책무에 대한 논의가 소멸되어 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혐오사회 양산에 대학은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 대학에 대한 사회적 책무 요구는 정당한 당위를 갖는가에 대한 논의는 상투적이나 멈출 수 없는 논제입니다. 대학은 중세 기독교 엘리트 양성을 목적으로 최초 설립된 이후 오랜 시간 특권층 자녀로 구성되었고, 대학교육은 특권을 재양산하며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을 시작으로 형성된 근대국가는 국민으로서 최소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자질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대학을 변화시켰고 이에 따라 설립과 운영에 대한 국가 책무는 확장되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이후 베이비붐과 경제호황은 노동자 등 다양한 계급의 대학진학을 촉발하며 68혁명 등 사회혁명을 주도하는 청년집단을 양산했습니다. 교육을 대표적인 공적 활동으로 규정하고 고등교육을 포함한 제반 교육비를 공적 재원으로 충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유럽의 전통은 대학이 곧 국가의 근본이란 배경을 전제합니다. “교육이 가져다주는 지식이나 기능은 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본시 공동체가 젊은이들한테 일방적으로 주는 무상의 증여이다.” 교육을 통해 좋은 시민을 양성하고, 좋은 시민은 국가의 안녕을 이루는 근간이므로 교육은 무상으로 증여되는 선물이어야 한다는 일본의 교육자 우치다 타츠루의 관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반면, 1997년 영국에서 유럽 최초로 도입된 등록금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소득면에서 더 큰 혜택을 얻는다는 연구의 산물이었는데, 고등교육의 궁극적 수혜는 공동체가 아닌 학생, 개인이라는 점을 강조한 결과입니다. 유럽에서의 대학이 공공의 영역에서 각 개인의 역량 강화로 좌표를 변경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접근은 80년대 이후 도입된 신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기 위해 정부개입을 최소화하며 교육의 영역을 개인화하고 대학을 시장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배경과 맞물려 진행됐습니다. 시장에서 개인의 자유란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자유, 더 많은 욕망을 충족시킬 자유를 의미하며 이러한 자유는 경쟁을 촉발하고 공공에 대한 책무보다는 개인의 욕망과 성취에 집중하게 됩니다. 대학도 그런 경쟁의 장, 이윤을 추구하는 시장의 장으로 들어서게 된 셈입니다. 국내에서도 대학을 바라보는 관점은 정확히 서구유럽의 변화대로 진행됐습니다. 국민국가의 토대를 다지기 위한 근본으로서의 대학은 70, 80년대 대학생의 사회참여를 통해 변화를 주도하는 주요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대학생이 참여한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대학졸업생이 포진한 중산층 진보주의자들이 오랜 군사독재를 무너뜨린 것이 1980년대였습니다. 그러나 1997-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1997년 국내의 IMF를 시작으로 한국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각축장이 됐습니다. 신문사의 경제위기 타계를 위해 시작된 1994년 중앙일보와 2009년 조선일보의 대학평가도입은 대학의 경쟁력 촉진을 추구하며 대학의 서열화와 기업화를 가속화했습니다. 이후로는 우리가 아는 대학의 모습입니다. 신문사 뿐 아니라 교육부 평가에서도 주요지표가 되는 취업률은 시민교육의 근간이 되는 인문학을 통폐합하며 사장시켰고 대학은 경쟁력 강화를 위한 명목으로 기업에 매각되며 거대한 기업이 되었습니다. 서열화된 대학과 경쟁을 통해 각자도생을 도모하는 공간에서의 대학생은 사회학자 오찬호 박사가 출간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능력에 따른 차별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는 능력주의가 한국에서의 교육체제를 통해 강화되고, 발생하는 비참과 비애는 모두 개인의 능력에 따른 문제로 환원됩니다. 세월호, 백남기 농부, 이천참사뿐 아니라 노동자의 산재, 실업, 장애, 난민, 탈북, 여성혐오, 심지어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등 공적 담론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 개인의 능력문제로, 경쟁에서 도태된 실패자에 대한 혐오문제로 되돌아옵니다. 반값등록금이나 원격강의로 인한 등록금 환불 또한 시장논리 안에서만 사고됩니다. 학생은 교육상품의 구매자 혹은 교육서비스의 수익자로 간주되고, 취업률도 담보하지 못하는 교육상품과 서비스에 대해 지나치게 높게 책정된 가격 할인에 대한 요구가 반값등록금으로 이어졌습니다. 2012년 서울시립대학교의 반값등록금은 이후 강좌 수 대폭 축소, 100명 이상의 대집단 강좌 증가, 전임교원 및 시간강사 수 감소, 학교기숙사 식당폐점 등 교육의 질 저하를 동반했습니다. 대학입장에서는 수입이 줄었으니 지출을 감소시키는 기업전략인 셈입니다. 이러한 토대에서 반값등록금은 교육의 질 저하를 담보하지 않고선 성립하기 어려운 구조가 됩니다. 대학에 바라는 욕망에 대한 고찰은 상투적이지만 지속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대학이 어떠해야 한다는 지향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타적 경쟁에서 살아남아 안정적 직장에 취업하고 자산을 축적하는 도구로써의 대학은 불가피하게 능력주의를 통해 차별과 혐오를 증폭하는 도구가 됩니다. 공동체의 지반으로 기능하는 공적 공간으로써 대학을 상정한다면 대학은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시민교육의 장으로도 기능하고, 반값등록금은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한 무상교육의 과정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젊은이들한테 일방적으로 주는 무상의 증여”란 당위가 대학의 미래에 대한 고민의 저변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대학에 대한 상투적 논쟁은 이 두 지향 사이의 논쟁인 셈입니다. 혐오와 차별의 시대인 오늘은 신자유주의의 압도적인 승입니다. 이 판을 어떻게 균형잡힌 논쟁의 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가 우리 앞의 과제 아닐까 싶습니다. 혐오, 반값등록금, 대학의 미래가 어떻게 연결되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포럼 대학의 미래’ 집담회가 매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진행됩니다. 함께 고민하는 동료와 시민이 더 많아지면 변화를 위한 한걸음에 더 가까워질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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