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드는 복지국가'가 6월 7일에 낸 "불안정 취업자 소득안전망으로 '고용보험+실업부조' 전면 시행하자!"는 제안은 "기본소득보다 전국민고용보험이 먼저다"(☞바로가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제목과 달리 이 제안의 주된 비판 대상은 정부이다.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고용보험의 단계적 확대가 너무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전국민고용보험제 이름에 걸맞게 일하는 사람 모두를 위한 전면 전환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초래한 고용위기"로 인해 "임시, 일용직 노동자, 하청, 파견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부터 소득을 잃"었고, 이들 "불안정 취업자들은 사회안전망에서도 사각지대"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을 위한 사회보장제도인 '고용보험'과 고용보험에도 들어가지 못한 사람을 위한 '실업부조'로 구성된" 전국민고용보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일하는 혹은 일하고자 하는 사람 모두를 보호하는 소득안전망"이라고 말한다. 사실 전국민고용보험을 추진하자고만 주장하면 될 일에 기본소득을 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담은 것은 현재 "기본소득을 도입하자는 주장이 정치권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이 왜 안 된다는 것일까? 이 제안은 이렇게 말한다. "현실적으로 기본소득의 급여 수준이 현재의 실업부조보다 높지 못하면서, 소요재정 규모는 지금까지 어떤 복지 프로그램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기 때문이다.기본소득이 돈은 많이 드는 데 비해 그 효과는 떨어진다는 식의 비판은 이제 차고 넘치지만 대표적인 것은 기본소득에 대한 양심적 거부자인 연세대 양재진 교수의 주장이다. 양재진 교수는 가장 최근에 쓴 글인 "기본소득, 막연한 기대감 뒤에 감춰진 것들"(☞바로가기)에서 기본소득이 "급여가 너무 낮아 소득보장의 의미가 없다"라고 단언한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재원의 예로 드는 것이 2019년 실업급여 지출액인 9조 3355억 원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돈을 5200만 명에게 나누면 그가 잘 계산한 대로 월 1만 4900원밖에 되지 않는다. 열 배인 15만 원씩 주려 해도 93조 원이 넘게 든다. 이렇게 양재진 교수가 기본소득을 반대할 때 드는 가장 큰 논거는 '예산 제약'이라는 철의 법칙이다.
예산 제약은 양재진 교수가 내세우는 복지급여가 사회적 위험이나 욕구(필요)에 따라 지급된다는 원리와 짝을 이룬다. 이에 반해 기본소득은 모두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급된다. 그런데 양재진 교수를 비롯해서 기존의 복지 체제의 원리에 기초하여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무엇에 기초하여 기본소득을 정당화하는지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정말로 기본소득을 뿌리에서부터 반대하고 비판하고자 한다면 기본소득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게 필요한 일로 보인다. 기본소득이 소득 보장을 통해 모든 개인에게 경제적 보장을 해준다는 목표가 있긴 하지만 이는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말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소득 보장을 위한 다른 수단이 적절하고 정당하다면 기본소득의 필요성이 사라질 수도 있다. 기본소득의 정당성은 모두의 것인 자연적, 사회적 공유부에 대해 각자가 가진 몫을 '분배'하는 것이다. 이런 분배의 조건은 오로지 그 사회에서,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밖에 없다. 이는 근대 사회의 운영 원리로 자리 잡은 소유-노동의 문제틀을 깨거나 수정하는 일이다. 불로소득이라는 말을 여전히 쓰고, (비난의 대상이 되긴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재산)는 자기 노동의 산물로 여겨진다. 물론 죽은 노동인 자본이 산 노동을 착취하는 것, 즉 잉여 가치의 수취에 초점을 맞추는 자본주의에 대한 기존 좌파의 비판으로 인해 소유가 정당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어느 쪽 입장을 취하든 소유가 노동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에 반해 공유부라는 문제틀은 개개인의 노력(노동)과 상관없이 주어진 자연과 환경이 노동과 소유의 토대이자 원천이라고 본다. 비유하자면 "지구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당연히 누구의 것도 아니라고 대답하거나, 모두의 것(혹은 인간을 포함해서 존재하는 모두)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소유를 절대시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이를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소유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를 미미한 부분이라고 볼 뿐이다. 또한 공유부의 문제틀은 누군가가 쌓은 부가 그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효과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는 로빈슨 크루소의 무인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개인이 노력한 성과이고 어디까지가 공유부인가라는 점이다. 이는 사회적 합의, 다시 말해 사회가 어떤 원리 위에서 작동해야 하는가에 대해 새로운 합의를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참고삼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먼은 부의 90%가 공유부이고 단지 10%만이 개인의 노력의 결과물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반대로 노동가치론에 기초한 소유권론을 확립한 존 로크는 90%가 개인의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이런 기본소득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하려면 이런 공유부의 존재나 의미를 부정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부가 노동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고, 그것도 개별적으로 측정 가능한 방식으로만 만들어진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노동, 정확하게는 고용 노동을 중심에 놓을 때 사회보험에 기초한 복지국가의 원리가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고, 아마 더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럴 경우에만 현대 자본주의와 복지국가가 지불되지 않은 다양한 노동과 자원에 기대고 있다는 점도 드러날 것이다. 유럽 등지에서 벌어진 기존의 기본소득 논쟁은 기본소득의 정당성과 부당성, 노동과 호혜성과 연대성 등의 토픽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물론 이는 기본소득의 긴급한 필요성이 여전히 크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지금 한국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재난 기본소득, 재난 긴급 지원금 그리고 여당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치 세력에게 이른바 '혁신'을 요구하는 총선 결과 때문에 기본소득이 갑자기 소용돌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고, 곧 기본소득이 도입될 수 있다는 착각을 낳고 있다. 좁은 지역에서 수백 대의 탱크가 엉켜서 싸운 1943년 여름의 쿠르스크 전투가 생각나는 국면이다. 탱크가 적의 탱크에 포를 쏘는 게 아니라 들이받거나 고장난 자기 탱크에서 나와 적의 탱크에 수류탄을 던지는 장면이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 기본소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내용이라는 면에서 보면 1939년 9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서부 전선에서 벌어졌던 '가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이때는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긴 했지만 전면전을 우려해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시기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가짜 전쟁이라고 불렀고, 또 누군가는 우스꽝스런 전쟁이라고 불렀다. 기본소득을 전국민고용보험과 대립시키는 주장이 그렇다. 전국민고용보험은 그 제안자들이 말하듯이 '완전고용' 시대와 달리 고용이 불안전하고 불안정해진 시기에 "일하는 혹은 일하고자 하는 사람 모두를 보호하는 소득안전망"이다. 다시 말해 기존 복지 체제의 연장선에 있다. 이에 반해 기본소득은 그 효과가 비슷하게 나올지는 몰라도 앞서 말한 것처럼 공유부에 대해 모두가 가지고 있는 몫을 분배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비교할 일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단기간에 '고용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전국민고용보험을 도입하는 것에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굳이 반대할 일도 아니다. 도리어 전국민고용보험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현대 사회에서 노동의 의미와 상태가 제대로 드러나기를 바란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새롭다는 것의 범위와 규모는 사람마다 다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는 '객관적인 사태'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저마다 가지고 있는 가치까지 포함될 것이다. 따라서 논쟁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사회 상태에 대한 인식부터 지향까지를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며, 이런 점에서 우리는 기존 사회에 기본소득이라는 정책을 끼워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전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며, 또 그래야 할 것이다. 추기이 글을 쓰는 시점에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이상이 공동대표가 쓴 "좌파 기본소득, 우파 기본소득을 모두 반박한다"(☞바로가기)라는 글을 읽었다. 이상이 대표가 말하듯 기본소득이라는 유령이 여기저기서 출몰하고 있는 덕분에 기본소득에 다양한 판본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고, 더 이상 기본소득을 비판할 때 다른 판본을 사용하는 식의 혼동은 없을 것 같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제 기본소득 논쟁을 더 큰 사회 변화를 둘러싼 논의에 자리 잡게 하는 게 필요하기 때문에 이제 막 읽은 이상이 대표의 글을 하나하나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자리에서는 두 가지만 말하는 것으로 족할 것 같다. 하나는 좌파 기본소득을 1848년 조제프 샤를리에의 토지 배당금에서 시작된 것으로 말하는데, 샤를리에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말하지 있지 않다는 점이다. 샤를리에는 원형적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제출했던 토머스 페인, 토머스 스펜스와 마찬가지로 현행 소유 제도는 토지 소유자가 자연을 찬탈한 것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았다. 샤를리에는 이 잃어버린 자연권에서 기본소득을 끌어내고 있다. 다른 하나는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예산의 제약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어쨌든 증세라는 게 어려운 일인데, 조금이라도 세금이 늘면 복지국가를 위해 더 긴급한 데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궁금한 것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등이 말하는 역동적 복지국가의 예산은 어느 정도인가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조세부담률 혹은 국민부담률이 어느 정도 되어야 이상이 대표가 지향한다고 말하는 역동적 복지국가가 되는지 궁금하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밝혀둘 것은 이재명 경기도 지사가 말하는, "증세나 재정건전성 훼손 없는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만약 이것이 전술적, 정치적 판단에 기초한 언명이 아니라면 기본소득 지지자로서 그렇게 설득력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이는 이상이 대표처럼 기본소득을 잘 이해하는 기본소득 반대론자들도 줄기차게 제기하고 있고, 기본소득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논의가 진행 중인 충분성에 관한 태도와 관련이 있다. 물론 기본소득이 목표로 하는 것이 개인들에 대한 경제적 보장이라면 어느 정도의 충분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잠정적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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