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도시들이 입은 공습피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 도시가 공습으로 입은 피해보다 더 심각했다. 미 공군은 한국전쟁 3년 동안 평양 등 북한의 주요 도시 대부분을 철저히 파괴했다. (☞) 미 공군의 B-29 폭격기 등은 1950~1953년 사이 북한 전역의 도시를 폭격해 모든 건물의 85%를 파괴했고 주요 댐도 파괴해 주민들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미 극동공군(FEAF) 소속 폭격기들은 한국전쟁 개전 초 전쟁 수행에 긴요한 산업 시설이나 철도와 같은 교통 통신 수단 등에 한해 정밀폭격을 실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의 무차별적인 폭격이 이뤄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유럽에서는 융단폭격이라는 야만적 폭격이 광범위하게 실시됐다. 그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의 민간인 살상이 비도덕적이고 비생산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미 공군은 공격 원칙으로 정밀폭격을 채택했다. 한국전쟁 당시 이 원칙은 중공군 참전 이전까지 유효했다. 중공군 참전 이후에는 이 원칙이 실질적으로 폐기되었다. 1950년 11월 맥아더 사령관은 강계, 신의주와 수 개의 작은 도회지를 화염 공격하는 방안에 동의했다. 그 당시 미 공군은 북한의 모든 도시와 마을, 공장, 건물, 통신 시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하달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에 따라 같은 해 11월 5일 22대의 B-29가 강계에 출동해 이 도시의 75%를 파괴했고 그 후에도 여러 도시를 공격했다. 1951년 8월 한 종군기자는 ‘압록강과 평양 사이는 철저히 파괴되어 도회지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살았던 곳은 철저히 파괴되고 굴뚝만 남아 마치 달나라를 여행하는 것 같다’라고 썼다. 종전 당시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의 60~95% 정도가 파괴된 것으로 미 공군은 평가했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참전하자 중국과 북한의 접경인 만주 부근에 34개의 핵폭탄을 투하해 최소 60년 동안 북한의 남침이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미 정부에 요구하다가 경질되었다. 1953년 5월 미군 폭격기들은 정전협정에서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북한 지역에 있는 수력발전 시설이나 관개용 댐을 집중 공격했다. 특히 독산댐, 자산댐, 구원가댐, 남시댐 등이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이 공격으로 수백만 명의 북한 주민이 굶주리게 됐다. 화염 폭격을 멈출 즈음에는 미군 폭격기들이 목표물을 찾기 어려워 개천에 놓인 작은 다리를 폭격하거나 바다에 폭탄을 버리기도 했다. 미 공군은 한국전쟁에서 3만2557톤의 네이팜탄을 포함해 모두 63만500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 106만 톤을, 태평양전쟁 때 일본에 본토 16만 톤을 포함해 총 50만 톤을 투하한 것과 비교된다. 참고로 미국이 참전해 폭탄을 가장 많이 투하했던 국가는 캄보디아 50만 톤, 라오스 200만 톤, 남부 베트남 400만 톤이다. 한국전쟁 중 남한 민간인 피해는 모두 99만968명이며, 이 가운데 37.7%인 37만3599명이 사망했다. 북한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150만 명인데, 북한 당국은 사망자를 별도로 밝힌 바가 없다. 다만 미 국방부 등이 추정한 북한군 사망자는 21만~31만 명이다. (Bethany Lacina and Nils Petter Gleditsch, 2005. ―Monitoring Trends in Global Combat: A New Dataset of Battle Deaths.‖ European Journal of Population: 21(2–3): 145–166. Korean data available at "The PRIO Battle Deaths Dataset, 1946-2008, Version 3.0," pp. 359–362.)전문가들의 추정치에 따르면, 미국이 한국전쟁 때 실시한 북한 지역 화염공습으로 인한 북한 민간인 사망자는 약 99만5000명(64만5000~150만 명)에 달한다. 이는 세계 전사에서 가장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로 추정된다. (☞)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화염공습으로 인한 독일 민간인 사망자 수는 40만~60만 명으로 알려졌다. 태평양전쟁 당시 화염공습과 핵무기 투하로 인해 사망한 일본 민간인 희생자 수는 33만~90만 명으로 추정된다. 또한 인도차이나에서 1964~1973년 사이 실시된 여러 작전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는 12만1000~36만1000명으로 추정된다. 절대 규모뿐만 아니라, 상대적 민간인 피해 규모도 크다. 비극 발생 당시 전체 인구와 비교한 민간인 사망자 규모를 보면 북한의 경우가 가장 심각했다. 1950년 당시 북한 전체 인구는 970만 명이다. 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독일 전체 인구는 6500만 명, 일본은 7200만 명이었다. 미 공군이 북한 지역에 실시한 화염공습은 2차 대전 당시 유럽과 일본에서 자행된 방식이다. 미 공군은 단 20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행한 공습으로 전체 도시가 약 1500–2000°C의 고온에 불타는 화재폭풍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강력한 폭약으로 건물을 파괴하고, 네이팜탄과 소이탄으로 거대한 화염을 일으켜 소방관들이 불길을 진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 같은 사태를 미국은 단 한 번도 책임지지 않았다. 미국은 2차 대전 종전 후 대 독일 화염공습에 대해 1000명에 달하는 조사단을 현지 파견해 정밀 조사했다. 아울러 독일 현지 공장 피해 등 일부 피해를 배상했다. 그러나 일본과 북한에 실시한 동일한 공습에 대해서는 어떤 조사도 실시하지 않았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을 두고 “미국이 타 민족에게 가한 가장 극단적인 폭력"이었으나 "미국인들이 그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폭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미군은 1958~1990년 사이 남한에 수백 개의 핵폭탄을 배치하고 북한의 침공 초기에 사용한다는 계획을 세워두었다. 북한이 한국전쟁에서 겪은 공습에 대한 피해와 공포는 결국 북한이 핵보유를 시도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미국은 지금도 북한 선제공격을 거론한다. 한반도의 특성 상 남북한 주민들이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고려할 때 대단히 부적절하다. 남한 주민 5000만 명, 북한 2500만 명이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상정한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한미동맹 관계가 엄존한다 해도 한국 정부가 그런 발언이 나오지 않도록 안전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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