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기는 범죄용의자가 검찰의 도움을 받아가며 도피생활을 했다는 충격적인 폭로가 나왔다. 이른바 라임 자산운용사태와 관련해 감옥에 가 있는 김봉현씨가 언론에 보낸 ‘옥중서신’을 통해 “내가 붙잡히기 전에 그렇게 도망다녔노라”고 주장한 내용이다. 김씨는 서신을 통해 검거되기 전 자신의 범죄를 무마시키기 위해 룸살롱에서 검찰 쪽 사람들과 1000만원짜리 술판을 벌이기도 했고, 검찰과 줄이 닿는 야권 정치인에게 큰돈을 건네기도 했다고 썼다. 체포된 뒤 조사과정에서 그런 비리를 진술했는데도 검찰은 묵살하고 수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당 쪽 정치인들을 겨냥해 없는 죄 만들어내는 조작 수사에 협조하도록 회유했다고 털어 놓았다. 물론 일부의 주장대로 ‘사기꾼 한사람의 실없는 이야기’(검찰총장도 국회 국정감사에서 그런 투로 말했다)로 치부해 버리면 그냥 그뿐일 수 있으나, 만에 하나라도 사실이라면 사안은 심각해진다. 더구나 김씨가 말한 ‘술좌석에 있던 검찰사람들’이 법무부 감찰과정에서 특정되는 등 김씨의 폭로가 하나씩 사실로 밝혀져 가는 상황이라 더욱 그렇다. 문제는 그게 검찰 일부의 일탈일 뿐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김봉현씨의 옥중서신 가운데 필자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 대목, 수배중인 죄인이 다른 쪽도 아닌 검찰의 보호를 받으며 활개치고 다녔다는 내용이다. 더러 적발되는 정치공작이나 죄 없는 사람 죄인 만드는 것도 용서받지 못할 범죄이지만, 검찰의 수배범죄인 감춰주기는 특히 대담하게 진화한 신종 검찰범죄라는 점에서 참으로 경악스러운 일이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월급 줘가며 도둑 잡으라고 내보냈더니, 오히려 도둑을 끼고 돌면서 감싸고 숨겨줬다는 이야기가 된다.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거다. 검찰은 뭐하는 곳인가. 범죄수사를 통한 형벌권을 행사하고, 법원의 판단에 의해 구체화된 형벌의 내용 실현을 지휘 감독하는 곳이다. 따라서 형벌권 행사와 관련된 검찰의 잣대는 추호도 흔들림 없는 올곧은 공정성과 당당한 투명성이 절대로 보장되어야 한다. 옳고 그름이 분명하되 과하지 않게 절제된 권한을 행사해야 맞다.
이명박 정권 때 어떤 검찰총장이 다툼이 예상되거나 견해를 달리할 수 있는 결재서류를 들고 부하가 사무실에 오면, 내용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어느 쪽이 우리 편이냐”고 먼저 묻곤 했다는 이야기가 보도된 적이 있다. 유명한 이야기다. 그분에게는 옳고 그름이나 타당함 여부가 사안 판단의 기준이 아니라, 아군이냐 적군이냐가 중요한 잣대였던 셈이다. 엊그제 검찰 국정감사에서 서슴지 않고 정치 냄새를 뿜어댄 윤석열 검찰총장은 그런 이명박 정권 때가 정치적 중립이 잘 보장된 시기라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일시적 착각일수 있으나 그런 윤씨의 잣대를 놓고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건 그의 체질 아니냐며 잣대가 망가져 있음이 분명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퍽도 많았다. 근래 들어 검찰 주변에서 이런저런 잡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검찰조직의 잣대에 이상이 생겼거나 고장이 났다는 신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그 잣대가 단순 고장이 아니라 망가지거나 뒤틀려 있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권력이 견제 받지 않고 무소불위의 경지에 도달하면 잣대는 반드시 망가지거나 뒤틀리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다 알다시피 잣대는 사물을 판단해 가름하는 기준이다. 그래서 잣대는 적용받거나 관계되는 사람 모두가 공동으로 수긍할 수 있도록 공정·타당해야하고, 때문에 그 기준도 움직일 수 없도록 분명·정확해야 할뿐 아니라 관계당사자 모르게 조작 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의 잣대가 얼마나 엄격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정교하기 그지없는 절차를 거치면서 털끝만큼의 오차나 빈틈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하나 같이 적용받는 기준으로 도량형(度길이 量부피 衡무게)이 있다. 원래는 동서양이나 나라마다 달랐던 기준이었다. 그중 길이를 재는 기준인 지금의 미터가 실제로 얼마나 철저한 연구와 검토를 거쳐 정해졌는지 들여다보자. 1793년 프랑스 국민 공회가 공식적으로 사용한 1m의 길이는 북극점에서 적도까지 자오선 길이의 1천만분의 1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재보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지구 표면이 울퉁불퉁해서 길이에 오차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 되었다. 여러 차례의 논의와 수정이 이어졌다. 드디어 1983년 제17차 국제도량형 총회에서 지금의 1m 길이가 확정되었다. 진공에서 빛이 2억 9979만 2458분의 1초 동안 ‘달려간’ 거리를 1m로 정의하였다! 그만큼 엄하고 모질기까지 한 과정을 거쳐 기준이 나왔다. 그리고 존중받고 있다. 꼭 도량형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무수한 분야에 무수한 잣대와 기준이 만들어져 있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중요한 건 애당초 도량형의 기준 결정과정 같은 치열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을지라도 모두가 동의해 만든 하자 없는 잣대와 기준이라면, 장삼이사(張三李四) 할 것 없이 철두철미하게 존중하고 따라줘야 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한 나라에서 정해진 가장 큰 잣대와 기준으로, 모든 국민이 하나 같이 지켜야 할 헌법을 놓고서는 두말 할 나위가 있을 수 없다. 헌법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나라 헌법은 잘 정해져 있는 잣대와 기준이 무수히 학대 받고 훼손되며 유린되어 왔다. 헌법의 잣대가 백안시당하며 망가지고, 기준이 뒤틀림 당하며 패대기쳐진 그게 바로 이 나라 현대사다. 하여 OECD 국가 중 대한민국만큼 구속된 대통령이 많은 나라는 없다. 면면과 상황을 떠올려 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 사람 모두 헌법 무시하다가 험한 꼴 당했다. 헌법 가운데서도 으뜸 잣대요 으뜸 기준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제 1조를 우습게보고 짓밟은 게 화근이었다. 힘센 기득권층이 박수부대가 되어 맞장구치며 국민 하찮게 보고 충동질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런 암울한 시대에서 ‘최후의 인권 보루’라는 사법부의 ‘우두머리 잣대’가 바른 길 외면하고 곁길 걷다가 쇠고랑을 차는 모습도 우리는 보았다. 휘두르는 권력 견제 받기 싫어하는 검찰의 뒤틀린 잣대를 염려하는 사람들도 최근 부쩍 늘었다. 이 울적한 시대에 사회전반을 제대로 감시하면서 건강한 풍토로 이끌 것을 기대하며 사람들은 ‘이른바 언론’에 희망을 걸고 있는 듯하다. 허나 부질없는 생각처럼 보인다. 기자들은 더러 자신들이 무얼 잘못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있으나 우선 당장 사주들의 주파수에 자신들의 시각을 맞추는데 열과 성을 다해 매달리고 있다. 취재 경험도 물론 없고 기사 한건 써 본적도 물론 없는 사주들은 부모를 잘 만난 이유로 언론 사주가 되어 기자들을 부리며, 세상을 멋대로 쥐락펴락 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사명감 있는 언론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지 않는 것 같다. 사안의 옳고 그름 보다는 유불리를 철저히 계산한다. 이 한건의 기사가 어느 진영에 더 이익이 되고 그게 내게 이익인지 손해인지를 먼저 따진다. 진영에 따라 ‘미워하거나 예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중무장까지 완료되어있는 상태다. 그건 이미 언론이 아니다. 필자가 이 시대의 언론을 ‘이른바 언론’이라 부르는 건 그 때문이다. 사주들은 기자들이 갖고 있어야 할 언론 자유와 사명감을 일찌감치 압류해 자기들 안 호주머니에 넣어 둔 상태로 기자들을 부린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케이블 체널들도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값싼 해설자들과의 대담프로로 시간을 메우느라 바쁘고, 덩달아 ‘질 낮은 해설’들이 판을 치고 있다. 안타깝다. 언론들의 잣대도 그래서 망가지고 뒤틀린지 오래다. 바야흐로 망가지고 뒤틀린 잣대들의 전성시대다. 모두들 잣대와 기준들을 되살려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한다. 검찰도 사법부도 이른바 언론도 정치판도 지금은 그게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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