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은 일자리 축소에 대한 대응인가?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 일자리를 축소할 것인가, 더 나아가 인간 노동에 대한 필요를 제거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의에 앞서 과연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기본소득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왜냐하면 보고서가 기본소득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전혀 아님에도 기본소득을 스파링 상대처럼 세워놓고 글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많이 알려져 있음에도 기본소득 운동의 중심 기관인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와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기본소득을 어떻게 정의하는지에서 출발하는 것을 양해해 주었으면 한다. 보고서 필자들에게는 잘 들리지 않거나 잘 보이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지구네트워크는 기본소득을 "자산조사나 근로조사 없이 모든 사람에게 개인 단위로 무조건적으로 지급되는 주기적 현금"이라고 말한다. 이 정의는 기본소득의 특성과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지만, 기본소득의 정당성과 원천은 보여주고 있지 않다. 이를 보완하는 것이 한국네트워크의 정의이다. 기본소득은 "공유부에 대한 모든 사회구성원의 권리에 기초한 몫으로,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개별적으로, 정기적으로, 현금으로 지급되는 소득"이다. 토지와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을 포함한 자연적 부 그리고 역사적이고 사회적으로 형성된 인공적 부는 인류 (그리고 더 나아가면 지구에 있는 모든 존재)에 속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녀의 재능과 노력으로 더 많은 부의 창출에 기여할 수는 있지만, 그 원천이 자연과 사회에 속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은 모두에게, 무조건적인 것이다. 또한 이런 기본소득이 개별적으로 동등하게 지급되어야 하는 것은 그런 자연적 부는 말할 것도 없고 인공적 부도 누가 얼마만큼 기여했는지 따질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사람의 상호관계와 결합 속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금민, 2020). 이런 이유로 우리는 기본소득을 모두의 권리라고 말한다. 물론 현실에서 권리는 정치공동체, 즉 국가에 의해 보장되고 있기 때문에 시민의 권리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바탕에 인간의 권리가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인류가 천명한 바 있다. 보고서 필자들은 기본소득을 "국가를 통한 사후적 재분배"라고 말하는데, 기본소득을 공유부에 대해 모두가 가지고 있는 몫에 대한 권리라고 하면 정반대의 이야기가 된다. 기본소득은 시간적으로는 사후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사전적 분배이다. 그리고 이때 국가는 모두가 가지고 있는 권리를 보증하고 뒷받침하는 통로일 뿐이다. 보고서 필자들은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일자리 소멸 및 이로 인한 소득 상실에 대한 대응물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기본소득이 겨냥하는 목표는 그보다 훨씬 더 포지티브하다. 우선 모든 시민에게 물질적 토대를 보장함으로써 민주공화국이 제자리에서 서게 할 수 있다. 민주공화국은 동등한 시민으로 구성되며, 그 구성원 누구도 다른 구성원에게 사적으로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경제적 독립성이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대다수가 타인, 즉 자본에 종속된 노동을 수행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체제이며, 이 속에서 인격적 지배를 시작으로 경제 권력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까지 민주공화국의 토대를 흔드는 여러 사태가 발생한다. 기본소득은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제가 될 수 있다(라벤토스, 2016; 조승래, 2018; 카사사스, 2020). 두 번째로 기본소득을 통한 물질적 보장은 개인들에게 실질적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김종인 대표가 빵집 앞에 선 사람의 비유를 통해 원초적인 수준의 실질적 자유를 말한 적이 있지만, 실질적 자유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대립을 넘어서서 개인이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와 무엇을 할 자유를 포괄하는 것이다.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 개인은 자율적 존재로서의 조건을 갖추게 된다(판 파레이스, 판데르보흐트, 2018). 끝으로 기본소득은 생태적 전환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의 연원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현재와 같은 생산-유통-소비를 근원적인 차원에서 바꾸어야 한다는 경고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위기의 원인은 보고서 필자들도 투항하고 있는 시장자본주의의 성공 그 자체에 있다. 시장자본주의는 인류의 일부, 즉 선진자본주의 나라의 대중에게 어느 정도의 물질적 풍요를 제공하고 새로운 욕구를 자극하는 것을 통해 성공할 수 있었다. 이는 이윤 추구를 위한 끊임없는 생산의 확대를 위해서도 더 나아가 "4천 년 동안이나 지배적이었던 규범에서 크게 일탈" 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애플비, 2012). 그리고 이제 우리는 대안은 없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시장자본주의를 공기처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이 속에서 '성장과 경제적 보장'의 불경한 연계'가 만들어졌다. 물질적 풍요와 소비를 위한 경제적 보장을 위해 끊임없이 물질적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강박 말이다. 고용노동과 무관한 기본소득은 이러한 연계를 끊어냄으로써 생태적 전환을 가능케 할 수 있다(Andersson, 2009). 기본소득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일자리 축소와 소멸에 대한 소극적, 방어적 대응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삶과 기본소득을 격하시키는 일이며, 불순한 의도에서 왜곡하는 일이다. 물론 4차 산업혁명은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부상하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이상은 언제나 현실과의 만남 속에서 떠오르고 벼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4차 산업혁명이 왜 문제인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4차 산업혁명이 왜 문제인가?
인공지능(AI)과 로봇으로 상징되는 현대의 새로운 기술은 한때 기계에 의한 인간의 말살과 지배라는 기술 디스토피아의 주제였다. 민감한 예술가들은 1980년대부터 가깝지만 음울한 미래를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냈다. 하지만 냉전의 종식과 자유주의의 승리라는 '역사의 종말[목적]' 속에서 인류는 전면적 대결과 파국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세기 전환기의 불안을 넘어서서 디지털 기술은 새로운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자 인간의 새로운 욕구를 자극하는 또 다른 신대륙이 되었고, 지구촌 곳곳을 연결하는 새로운 항로가 되었다. 이 속에서 다시금 기술은 인간의 사이보그화에 한 차원을 더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기하급수적 발전과 결합 발전은 지금까지 인간의 삶에서 기술이 차지하던 위치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보인다. 그것은 기술에 의한 인간의 대체이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불안의 출발점이다. 특히 인공지능의 발전, 더 나아가 범용인공지능의 발전은 기술의 발전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의 고유한 특성 혹은 인간됨 그 자체라고 생각했던 지적 영역의 활동까지 기계가 대신하게 됨으로써 혹은 대신할 것이라고 전망됨으로써 오래된 근원적 질문을 새로운 차원에서 던지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미국의 기술사가인 멜빈 크란츠버그가 말하듯이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동일한 기술일지라도 다른 맥락이나 다른 환경에 도입될 때 아주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Kranzberg, 1995).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이 일자리 소멸과 상실이라는 공포로 다가오는 것은 대다수가 고용노동에서 오는 소득 이외에는 생계수단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근거 없는 공포가 아니다. 경제학의 기초에 해당하는 이야기이지만 동일한 양을 생산하는 데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성이 올라가면 투입되는 노동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물론 이와 반대되는 이야기가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 장 바티스트 세가 내세운 ‘세의 법칙’이다. “공급은 그 자체의 수요를 창출한다.” 실제 인간의 역사는 세가 옳았던 것처럼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공급 이외에 강제와 헤게모니가 동원되었지만 말이다. 보고서에서 1-3차 산업혁명을 검토하는 부분에도 나와 있듯이 (물론 필자들이 보고 싶은 방식으로만 서술하고 있긴 하지만) 시장자본주의 자체의 확대, 새로운 부문의 등장, 새로운 수요의 자극이 있었다. 이것이 보통 말하는 경제성장이다. 보고서는 이 과정은 매우 단선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 산업혁명으로 인해 결국 일자리가 창출되고 좀 불평등하긴 하지만 결국 시장 분배와 국가의 재분배를 통해 소비여력의 증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끝이 좋으니 만사가 다 좋다는 식이다. 하지만 시장자본주의의 확대는 영국 역사가 도널드 서순이 말하듯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 전혀 아니었고, '불안한 승리'였다. 이것이 불안한 이유는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내재적 속성, 즉 이른바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다른 제도와 힘의 도움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후자에는 민족공동체의 구성과 식민주의가 포함된다(서순, 2020). 보고서 필자들에게는 인클로저로 공유지를 빼앗긴 사람들이 당한 고통, 초기 산업화 시절 노동자가 당한 고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쇠사슬에 묶여 대서양을 건넌 흑인 노예들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로 인해 피억압 민족이 당한 고통이 보이지 않는다. 대공황 시절 일자리를 잃고 전국을 떠돌거나 식량 배급줄에 서 있던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지역에서 억압적인 조건 하에서 일하는 수많은 아동과 여성의 모습은 오간 데 없다. 이 지면이 필자들의 도덕적 무감각에 대해 비판하는 자리는 아니기 때문에 이런 고발을 계속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들도 보고서 곳곳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태가 단선적으로 결정되지도 진행되지도 않는다는 점을 환기하고 싶을 뿐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난관을 극복한 '가차 없는 혁명'인 자본주의의 역사는 지난 세기 말 이른바 신자유주의 혁명 속에서 다시 한 번 그 팽창력과 흡수력을 과시했다. 중국을 시작으로 엄청난 인구가 세계 노동시장으로 편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비주의적 민족주의'(왕후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을 새로운 욕망의 주체로 구성했다. 이런 흐름이 보고서 필자들이 말하는 4차 산업혁명이 "전 세계에 걸쳐 고용의 양을 축소시킬 것이라는 주장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는 근거이다. 그리고 역시 보고서 필자들이 말하듯이 제조업의 경우 계속해서 인건비가 싼 신흥국으로 옮겨감으로써 그곳의 일자리를 창출하게 될 것이다. 이런 지역의 노동자들이 어떤 조건에서 일하고 있는지는 일단 여기서 따지지 말자. 다만 2012년 4월 방글라데시의 다카에 있는 의류 공장 건물이 붕괴되어 천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으며, 아이폰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제조업체인 폭스콘이 '자살 공장'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는 점만 말해두자. 게다가 이런 생산기지의 이전(누군가는 '자본의 도피'라고 말한다)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알 수 없다. 신흥국의 상황을 말한 다음 보고서 필자들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일자리 축소의 전망이 선진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눈을 이쪽으로 돌린다. 우선 이들은 유명한 프레이와 오스번의 <고용의 미래>(2013) 및 브린올프슨과 맥아피의 <제2의 기계시대>(2014)를 가지고 4차 산업혁명으로 일자리의 양이 줄어들고 질이 악화된다는 주장을 검토한다. 하지만 2000-2017년까지 G7 나라의 고용 통계를 가지고 모든 나라에서 총고용이 증가했다고 말함으로써 일자리 감소 주장이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이전과 마찬가지로 생산성 증대로 기존 산업이 크게 성장하고, 기존 산업에서의 다각화를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 혹은 신산업의 창출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 예로 드는 대표적인 기업이 미국의 아마존과 한국의 쿠팡이다. 총고용의 증가로 일자리 축소와 소멸에 대해 반박하는 것은 약간의 눈속임이 있다. 필자들이 제시하는 통계에 따르면 2000년 미국의 총고용은 1억 3,769만 명이며, 2017년에는 1억 5,212만 명으로 1,452만 명이 늘었다(10.5퍼센트 증가). 같은 시기에 미국 인구는 2억 8,220만 명에서 3억 2,510만 명으로 4,290만 명이 늘어났다(15.2퍼센트 증가). 같은 기간에 인구가 별로 늘지 않은 독일의 경우 고용이 400만 명 늘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11.2퍼센트 증가). 하지만 이는 2003년에 있었던 노동시장 개혁의 하나로 생겨난 미니잡(mini job) 혹은 450유로 일자리가 많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2016년 통계에 따르면 독일에는 미니잡을 가진 사람이 대략 760만 명이며, 이 가운데 490만 명이 미니잡을 주업으로 삼고 있다(Duell, 2018). 보고서 필자들이 제시하는 통계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제조업 일자리의 감소와 서비스업 일자리의 증대이다. 물론 통계를 볼 것도 없이 모두가 아는 사실이긴 하다. 같은 시기에 영국, 미국, 프랑스는 제조업 고용이 각각 34, 28, 26퍼센트 떨어졌다. 반면에 서비스업은 21, 17, 13퍼센트가 증가했다. 앞서 예로 든 아마존과 쿠팡 같은 경우가 고용 증가를 가져왔을 것이며, 이외에 돌봄을 포함해서 다양한 서비스업에서 고용 증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서비스업은 자동화, 기계화하기 어렵고, 따라서 생산성 증가도 그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령화 추세 속에서 돌봄처럼 서비스업 내의 특정 부문을 고용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며, 그래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런데 이런 일자리의 질은 낮다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어 보인다. 한국에서는 택배노동자의 과로사를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겠다. 보고서 필자들이 제시하는 통계와 장밋빛 전망은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기술 발전의 추세와 들어맞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이미 기술 변화 및 산업 변화를 겪으면서 이른바 선진국에서조차 형편없는 일자리가 많아졌다는 점을 언급하면서도 "향후 시장에서의 분배 및 국가의 재분배 기제가 어떻게 설계되는냐에 따라" 나아질 수 있다고 다시 한 번 장밋빛 전망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앞으로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 했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물론 일자리의 질의 악화는 생산성 향상 속에서 기존의 일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생겨난 현상이며, 이는 다시 기계화와 자동화를 늦추게 된다. 이런 이유로 보고서 필자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전에 없는 규모로 일자리를 대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와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및 기술 발달로 인해 이전보다 더 많은 고용이 창출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애써서 왜 이런 보고서를 썼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뒤로 미루고 일자리 전망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현재의 기술 변화가 격변을 일으킬 것이라는 전망하는 근거는 과거의 증기기관과 마찬가지로 컴퓨터가 "환상적으로 강력한 범용 기술"이기 때문이다. 컴퓨팅은 자율주행차, 로봇이 생산하는 공장, 기사 작성, 통번역 등 범용 기술의 역할을 하면서 진군해 왔고, 인공지능의 시대를 열었으며, 범용인공지능의 도래를 약속하고 있다. 물론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시작되고 나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세계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는 놀라운 발명이라도 사회가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학습하기 전까지는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아벤트, 2018). 정확하게 언제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제 우리는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자마자 잠재되어 있는 문제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경제학에서 기술적 실업이라고 말하는 사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다시 말해 "일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일하기에는 일거리가 부족한 세상"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런데 우리가 겪고 있고, 앞으로 더 심해지리라 예상되는 "일거리가 부족한 세상"이 사실은 풍요로운 세상이라는 데 우리의 곤란함이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풍요롭지만 매우 불평등한 사회라는 데 큰 문제가 있다. 보고서 필자들이 강조하듯이 불안하지만 시장자본주의가 승리하고 성공한 데는 인류의 일부이긴 하지만 산업혁명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기술 진보의 물결이 노동자에게 해를 끼치기보다 폭넓게 도움이" 되었다는 데 있다. 이런 이유로 이 시기를 '노동의 시대'라 부르기도 한다(서스킨드, 2020). 하지만 오늘날 기술 진보는 일부 고숙련 노동자를 제외하고는 소득과 지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기술 진보 속에서 저숙련 노동자의 고용은 늘어나긴 했지만 말 그대로 저임금에 노동조건도 형편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속에서 기술 진보, 기술적 실업, 불평등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으며, 우리가 문제삼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보고서 제목을 이렇게 바꿀 필요가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노동력이 풍부해진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보고서 필자들의 심층에 있는 (무)의식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코로나19로 인한 방역 위기와 경제 위기가 여전한 이 시점에 집권여당의 정책연구소에서 나온 보고서라면 한가하게 4차 산업혁명이 고용을 늘리는지 줄이는지에 관심을 가질 게 아니라 이미 우리가 겪고 있고, 목격하고 있는 사태를 문제로 포착하고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는 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아직까지는 여러 요인에 의해 방역을 상당히 잘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속에서 우리 사회가 가진 여러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공공의료 서비스의 취약함을 시작으로 해서 현실과 변화에 눈을 감은 집권여당과 경제관료의 완고함까지 다기한 문제가 드러났다. 만약 시민의 참여, 연대, 협조가 없었거나 정말로 운이 나빠 확진자와 사망자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늘어났어도 우리의 의료시스템은 붕괴하거나 의료진과 병원 종사자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간신히 버텼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은 경제위기 속에서 이미 무너지고 있는데, 재정건전성이라는 자기 최면에 빠져 있는 이들 때문에 코로나19로 인한 방역 위기가 성공적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피로스의 승리에 불과할 것이다. 아니 더 처참한 현실을 목도할지 모른다. 코로나19 위기 이전에 우리 사회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불평등이다. 2018년 여름에 나온 연구에 따르면 2016년 기준 한국의 노동소득분배율은 56.24퍼센트로 OECD 주요 나라 가운데 아래에서 세 번째였다. 조사 기간 출발점인 IMF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의 66.12퍼센트에서 무려 9.88퍼센트 포인트가 떨어진 것으로 분석대상국 가운데 하락폭이 가장 컸다(주상영, 2018). 다음으로 노동소득 내의 불평등도 심하다. 임금불평등을 나타내는 '하위 10퍼센트 대비 상위 10퍼센트 비율'이 2013년 4.7로 미국, 이스라엘, 터키 다음으로 높다. 이마저도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자료로 계산하면 5.1이 되어 가장 높은 수준의 임금불평등을 보인다(유종일, 2019). 끝으로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제시해서 유명해진, 한 사회 안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중요도를 측정하는 '피케티 지수'도 심각한 수준이다. 2020년 10월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실이 한국은행의 국민계정 데이터를 활용해 피케티 지수를 발표했다. 가계와 정부의 순자산을 합한 국부를 기준으로 2019년 피케티 지수는 8.8이었다. 이는 거의 세계 최고 수준으로 자산을 가진 일부가 노동소득이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의 막대한 부를 누리고 세습한다는 것이다. 이런 무심한 숫자들에 또 다른 무심한 숫자들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자살률, 노인빈곤률, 노동시간,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 등등. 하지만 무심한 숫자는 사실 인간의 삶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자본의 이윤을 위해 매일 같이 3명이 죽는 현실을 말하면 조금 실감날까?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 위기가 닥쳤고, 앞서 말했듯이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가 고스란히 아니 증폭되어 드러났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재난기본소득과 재난지원금이 등장했고, 그 덕분에 기본소득이 관심과 지지를 끌게 되었다. 기본소득 지지자로서 기본소득이 관심과 지지를 끌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계기는 전혀 바라지 않던 것이다. 아무리 재난이 뜻밖의 선물이 오는 통로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재난은 재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비웃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라, 다만 이해"하려고 했다. 이 상황이 무엇인지, 해결책은 과연 있는지 등등. 그래서 소득 단절과 감소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전국민고용보험(+실업부조)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공감을 보내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세력과 정책가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운 상항과 위험에 맞서는 방책을 내놓기 위해 애쓰고 있다. 여기에 반해 이 보고서는 현실을 애써 이해하려 하고 거기서부터 대안을 내놓으려 하기보다는 기본소득을 반대하기 위해 4차 산업혁명이 고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아닌지라는 토픽을 끌고 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보고서의 제목도 솔직하게 붙였어야 한다. '기본소득에 반대한다.' 보고서 필자들이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이유로 명시적으로 내놓은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본소득이 "시장에서의 자본의 독점 이익 및 이에 따른 불평등의 심화를 사실상 용인하는 보수적 결과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기본소득에 막대한 재원이 드는데 "재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실현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라고 한다. 첫 번째 반대 이유는 기본소득이 임금보조금 역할을 하거나 로마 시대 황제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주었던 '빵과 서커스' 같은 것으로 보는 발상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앞에서 기본소득이 공유부에 대해 모두가 가지고 있는 몫에 대한 권리라고 답한 바 있다. 공유부나 공유지가 먼 옛날 황금 시대의 이야기이거나 먼 미래의 유토피아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부의 창출에서 개인의 노력이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라이언 아벤트 같은 사람도 "부는 언제나 사회적이었다...어떤 개인도 이러한 시스템에 대한 공로를 독차지할 수 없다. 사회가 구축하고 유지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게다가 디지털 혁명 속에서 한편으로 새로운 기술은 사회의 잠재적 생산성과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지식을 생성해 이익을 얻고 안녕을 강화하는 활동으로 전환하는 소규모 경제적 과정들은 본질상 갈수록 개인적 성격이 아닌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된다(아벤트, 2018). 물론 현재 이런 공유부 혹은 사회적 부가 제대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이 속에서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자체가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회적 부를 낳는 사회 시스템과 사회적 합의 자체가 깨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 협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거기에 공유부와 사회적 부가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가야 한다. 두 번째 반대 이유는 서로 겹쳐져 있긴 하지만 둘로 나누어진다. 재정적으로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과 비용을 부담하는 부자들의 정치적 저항이 클 것이라는 점이다. 먼저 재원에 대해 말해보면 한국의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이와 관련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있다. 한국의 국민부담률이 낮다는 것이다. 2019년 한국의 국민부담률은 27.3퍼센트로 OECD 회원국 평균보다 7.3퍼센트 포인트 가량 낮다. 유럽연합 회원국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더 큰데, 2017년 유럽연합 회원국 평균 국민부담률은 40,2퍼센트였다. 가장 높은 나라는 프랑스로 48.4퍼센트이고,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복지국가인 덴마크와 스웨덴은 각각 46.5퍼센트와 44.9퍼센트이다. 이런 비교를 하는 것은 현재 수준에서도 매달 30-60만 원 정도의 기본소득을 지급할 재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정치이다. 정치적 실현 불가능성에 대해 말하자면 보고서 필자들처럼 집권여당의 정책브레인들이 할 수 없다고 하면 할 수 없는 일이 된다. 하지만 복지국가의 수준(보편성과 관대성)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비례대표제를 시행하는 나라 그리고 복지 제도가 더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경우에 정치적 다수를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밝혀두어야겠다(Iversn and Soskice, 2006; Korpi and Palme, 1998). 그래도 한 가지 덧붙여야 할 것은 선거제도를 개혁하겠다고 하고는 지금처럼 엉망으로 만든 게 집권여당이라는 점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까 처음에 들었던 의문에 대한 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것은 보고서 필자들도 현실의 문제를 알고는 있는데, 지금까지의 방식 이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시장이라는 말로 대신하는 기업 그리고 시장자본주의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그러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국가가 나서서 될 일은 아니다. (물론 이것도 오해에 근거한다는 점은 앞에서 밝혔다.) 그래도 남는 문제는 "기존의 노동, 복지제도의 허점을 개선"하는 것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좋다. 그런데 왜 기본소득을 스파링 상대로 세웠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건 보고서의 맨 마지막에 넣어두었다. "기본소득 역시 진보의 관점에서는 시장의 분배를 약화시키는 역사적 퇴행을 초래할 위험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대안은 없는데 여전히 진보라는 타이틀은 갖고 싶은 모양이다. 이런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을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가 이미 해두었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면,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전체댓글 0